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07
107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고 즉시 크뤼거 군은 철수했다. 제국백 측의 군막에 주요 수뇌부가 모인 가운데, 타들어 가는 양초의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마가렛트가 팔꿈치로 방백을 찔렀다. 좌중의 눈치를 살피던 방백은 헛기침 끝에 입을 열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어찌 저들을 이대로 보내준단 말입니까?”
카셀미어 주교후가 쉰 목소리로 답했다.
“이미 협상은 끝났네.”
“굳이 찬탈자의 무리와 협상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보유한 병력은 저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교후가 그를 호통쳤다.
“단순히 머릿수에서 우위에 있다 하여 반드시 승리할 거란 보장이라도 있나! 그랬다면 자네는 왜 여기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나?”
백발이 무성한 것치곤 주교후의 기력이 팔팔했다. 여타 고위 성직자들이 어지간하면 봉토에서 걸어 나올 기력조차 없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기세에 눌린 방백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서자 놈의 전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사령술사의 개입만 아니었다면 이미 진작에 에베르호펜으로 진군했을 테고요.”
혀를 찬 주교후는 방백을 쏘아봤다.
“자네의 속단이 대계를 그르친 걸세. 나와 제국백을 기다렸다면 온전한 전력으로 상대했을 것을.”
괜히 말을 꺼냈다가 면박만 얻어먹자 방백의 얼굴이 수치로 일그러졌다. 입을 다문 그를 대신해 마가렛트가 대꾸했다.
“예하, 저는 독실한 신자로서 사령술사 같은 불경자와 협상을 논했다는 것이 불쾌해요. 어찌 교회의 법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자를 엄벌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이에 주교후는 한숨을 흘렸다.
“이중에서 누구보다도 놈의 골통을 부수고 싶은 건 나라네. 방백 부인. 허나 중앙 교구로부터 내게 직접 서신이 내려왔어.”
마가렛트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중앙 교구요? 여태껏 수년간 침묵하던 곳이 왜 이제 와서야 예하께···.”
이마를 짓누른 주교후가 답했다.
“교단 내부의 사정을 실토할 수 없는 건 양해해주게나. 어쨌거나 서신은 토드 하워드를 지목했고, 나는 그에 따를 수밖에 없어.”
마가렛트는 이를 갈았다.
“예하, 제가 여태껏 에덴트라흐 교구의 발전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자네의 독실함이야 누구보다도 완고하지.”
“제가 크뤼거 그 측실의 자식 놈에게 빼앗긴 권리를 돌려주시겠다고, 예하께서 직접 약속하신 건요.”
“···비록 사령술사와 서자 일당을 여기서 보내주긴 했어도, 아직 내가 그 약속을 저버린 건 아니네. 안심하게나.”
제국백이 넌지시 물었다.
“예하 앞에서 말씀드리긴 조금 불온한 내용이긴 하나, 황실과 마찬가지로 중앙 교구의 영향력도 유명무실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이대로 지시를 수용하되, 사령술사만 생포하고 크뤼거는 처단하실 생각이십니까?”
주교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상자가 발생해서는 안 되네. 애당초 내가 자네들에게 이 분쟁을 용인한 까닭에는 전력 손실 없이 에베르호펜을 점령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는 좌중을 돌아보며 설명했다.
“황실 내부의 불온한 소식이 극에 달했네! 언제 카이저께서 붕어하실지도 모르는 상황이거늘. 기껏 사령술사와의 일전으로 병력을 소모하면서 에베르호펜을 점령해봤자, 그걸 관리할 여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제국백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활한 콘라트가 가만히 있지 않겠죠.”
황소대공 콘라트. 그는 일찍이 황실에 대해 공공연히 불만스러운 뜻을 내비쳐왔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전원 오래전부터 황소대공과 척을 진 사이였다.
“놈은 오랫동안 동부의 공백을 노려왔네. 여기선 자네들을 비롯해 성전 기사단의 전력을 최대한 보전하는 게 우선이야. 그래야 놈도 섣불리 이쪽 방면으로 진군하진 못할 테니.”
제국백이 되물었다.
“예하께선 협상을 거쳐 에베르호펜을 가져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허나 장인어른께선 이리공과의 일전 이후로 중태에 빠지신 지 오래라 들었습니다.”
그는 다소 조심스러운 어투로 덧붙였다.
“게다가 크뤼거 곁에는 사령술사가 있고요. 차마 입에 담기도 불경스럽습니다만, 그자가 모종의 수작질을 부렸다면요? 분쟁의 명분도 이를 의심한 게 아니었습니까.”
광륜표를 어루만진 주교후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그러니 직접 검증하러 가는 게 아니겠나. 놈이 부정한 술수를 썼다면, 빛 앞에 모든 속임수가 탄로날 걸세.”
불길한 상상에 비위가 상했는지, 이세벨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자가 아버지를 다시 일으켰다면···.”
“변경백은 주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상속 과정 자체가 부당했음이 증명되는 셈이니 자연히 자네들에게 권리가 주어진다네. 서자는 처벌받고, 사령술사는 우리가 구금하여 중앙 교구로 이송하면 그만이지 않겠나.”
방백이나 제국백은 야전에서 사령술사의 간악함을 몸소 체험했기에 가급적이면 전투 없이 봉토를 양도받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더군다나 주교후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되살아난 시체들처럼 어둠에서 비롯된 피조물들은 빛에 약하지 않던가.
슈테판 변경백은 이미 한참 전에 불혹을 넘긴 고령이었고, 하물며 낙마한 정도가 아니라 괴물에게 당했다면 회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장인은 과음을 즐기던 편이었지.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던 때마저 희미하지만, 그때도 안색은 썩···.’
제국백은 틀림없이 그가 죽었으리라 예상했다.
다만 마지막 변수까지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장인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사령술사가 관여한 흔적이 없다면요.”
“변경백 직위는 반드시 해당 교구의 성직 제후 앞에서 상속에 대한 증언이 필요하네. 일단 슈테판 변경백의 사망을 정식으로 공표한 뒤, 에베르호펜의 작위를 분할하여 자네 아들과 방백의 아들에게 각각 명목상으로 상속시키고, 크뤼거에겐 쾨흘링을 내어주면 되겠지.”
일찍이 주교후 앞에서 변경백이 공언한 후계자는 하인리히였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쾨흘링 분쟁 도중에 죽었고, 변경백은 따로 상속자를 지정하지 못한 채로 중태에 빠진 것이다.
주교후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장담했다.
“변경백이 정말 되살아나는 게 아닌 이상, 이 상속 건은 반드시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질 거라네.”
하지만 주교후는 미처 몰랐다.
절대라는 건,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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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에베르호펜의 주도, 겔더부르크에 두 제후와 주교후의 행렬이 입성했다.
비록 분쟁까지 일으킨 이웃 제후였지만, 한편으론 변경백의 사위들이라 주민들의 시선이 복잡했다.
그들은 곧바로 변경백의 성채로 안내되었고, 시중들이 문 앞에 기립했다.
“에덴트라흐의 주교후, 요한 카셀미어 폰 리히트네커 각하께서 드십니다!”
진분홍색의 화려한 수단을 차려입은 주교후는 꿋꿋한 걸음걸이로 접견실에 들어섰다.
그런 자신감이 무색하게, 탁자에 앉아있는 이의 얼굴을 보곤 주교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어서 오시오. 요한.”
슈테판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옆구리를 짓누른 채 말했다.
“늑대 놈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도 쓰라려서, 술로 통증을 다스리고 있소. 양해 바라겠소.”
비록 몸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지만, 중년의 사내는 완연히 살아있는 사람처럼 주교후를 맞이했다.
침음을 흘린 주교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변경백을 살폈다.
“슈테판, 자네···. 침상에서 일어나기도 힘겹다 들었는데.”
코웃음을 흘린 슈테판은 의자를 다잡곤 힘겹게 주저앉았다.
“누가 그리 떠들던가. 내 빌어먹을 사위들 곁에 있는 협잡꾼들이? 아니면 자네가?”
삐딱한 말버릇으로 보아 익히 자신이 알고 있는 슈테판이 맞았다.
탄식한 주교후가 다시금 그를 훑어내렸다.
“나는 자네가 죽은 줄만 알았네.”
술잔을 집어 든 슈테판은 어김없이 입을 헹구며 내용물을 비웠다. 목젖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명백히 보인다. 행동 가지에서 위화감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었지.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집안의 꼴이 아주 가관이더군.”
슈테판 앞에 마주 앉은 주교후는 지독한 알코올 냄새에 얼굴을 찡그렸다. 슈테판은 하인의 손길조차 마다하고 술병을 기울였다.
“사위란 놈들이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내 딸들의 대부를 자처하던 자네는 뭘 하고 있던 건가? 그 망할 놈의 것들을 말려도 모자랄 판에!”
슈테판의 불호령에 주교후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해해주게. 요 몇 달간 동부의 상황이 혼란스럽지 않았나. 더욱이 자네가 곁에 둔 불경한 마법사의 존재도 그렇고.”
“오, 그렇고 말고. 내가 이해해야지. 그거 아나? 난 이리 놈에게 쫓겨, 조그마한 옛 성채에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주교후가 침을 삼켰다.
“자네는 분쟁 기간에 내 서신을 줄곧 무시해왔네. 내가 궁지에 처했을 때, 자네는 어디 있었나?”
“세속 제후들 간의 분쟁에 성직자가 사사로이 개입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 않나.”
“그럼 지금은, 빌어먹을. 세속 제후들 간의 다툼이 아닌가? 자꾸만 구차한 핑계 대지 마시게. 요한. 자네도 내가 분쟁에서 패배할 거라 생각했으니, 날 버린 게 아닌가.”
슈테판의 혹독한 면박에 도리어 주교후가 난처해졌다. 인상을 쓰고 있던 슈테판은 잔을 홀짝이고는, 돌연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흐흐, 그래도 이리 지상에서 다시 본 게 어딘가. 뭐, 이 또한 어버이 솔마르님의 뜻이 아니겠나!”
술이 들어갈 때마다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것도 익히 주교후가 잘 아는 슈테판의 습성이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렇고 말고. 다 구주께서 안배하신 일이라네.”
“아무렴. 다 뜻이 있으시겠지. 우리 모두의 안녕을 위해 건배하세나.”
앞에 놓인 잔을 채워준 슈테판이 은근히 부추기자, 별수 없이 주교후 또한 잔을 비웠다.
주교후령에서 수급하는 포도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한 맛이었다.
하마터면 뱉을 뻔했지만, 미간을 찡그린 주교후는 겨우 목 너머로 넘겼다.
‘제기랄, 이깟 것도 진상품이라고 식탁에 올려놓다니.’
아니면 싸구려 포도주를 대접한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변경백은 애주가로, 누구보다도 술을 즐기는 인간이었다. 이토록 떫은 포도주라면 오히려 변경백이 먼저 하인들을 가만두지 않았으리라.
주교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슈테판은 오래도록 변경백 직위를 유지해왔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련한 제후. 정치가들은 때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완고하게 뜻을 표현하는 수사나 방식을 활용한다.
어쩌면 저게 자신을 향해 보내는 무언의 시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은 말없이 포도주 한 병을 거덜 냈다.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린 슈테판이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높으신 성직자 나리까지 앉혀놓고 술만 마실 수는 없지.”
“허허, 나는 아직 더 마실 수 있는 참이네만.”
입맛을 다신 변경백이 자신의 옆구리를 두들겨 보였다.
“마음 같아선 나도 그러고 싶은데, 너무 마셨다간 상처도 덧날 수 있다고 하더군. 자, 지난날의 거지 같은 소회는 술잔에 털어냈으니. 본론이나 말해보게.”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인 주교후가 입을 열었다.
“자네의 상속자와 관련된 건이라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슈테판이 어깨를 으쓱였다.
“놀랄 것도 없지. 사실상 그것 말곤 자네가 여기까지 찾아올 일도 없지 않나. 이젠 다 늙은 주정뱅이 놈의 면상이 보고 싶어서 오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야.”
헛웃음을 흘린 주교후가 술잔을 가리켰다.
“이젠 여기도 잠잠해졌으니, 때때로 한가하면 와서 대작이나 합세. 예전에 대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변경백이 씨익 웃었다.
“묄렌푸르트에서 소문난 주당이라면 나와 자네였지. 젊을 때가 그립군, 그래! 한때 제단사들의 거리 골목에서 잔뜩 취해 제국의 이상을 놓고 떠들어대던 두 놈은 어디 가고, 이젠 상속자 지정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나 떠드는 노인들만 있으니 말이야!”
주교후는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내는 복잡했다. 자신들 간에 공유하는 기억으로 슬쩍 떠보려 했는데, 대학이 있던 지역과 자주 가던 장소까지 명확히 알고 있다.
“···어쨌거나 하인리히가 죽은 뒤로, 자네는 내 앞에서 상속자에 대한 지정을 남기지 않았네. 기존에 작성된 유언장도 고칠 필요가 있고.”
“크흠, 그랬었지.”
변경백이 탁자의 종을 흔들자, 시종인들이 양피지와 밀랍을 들고 왔다.
주교후의 곁에 있던 사제들이 직접 새 금실을 꺼내 양피지에 엮고, 새로운 유언장을 작성했다.
“나는 크뤼거에게 내 봉토를 물려주겠네.”
주교후는 가까스로 일그러지려던 표정을 수습했다.
“그 서자 녀석에게 말인가?”
“그래. 크뤼거는 분쟁에서 내내 나를 보좌해왔네.”
“서자가 아닌, 자네의 여식들도 있지 않나.”
인상을 구긴 변경백이 대꾸했다.
“내 딸들은 이미 모이텐슈하임 방백가와 베벨부르크 제국백가로 출가했네. 어찌 대를 이을 후계가 있는데, 켄젤슐리텐 일가의 정당한 봉토를 외부의 가문에 상속시켜준단 말인가.”
강경한 태도에 고심하던 주교후가 탁자에 유리병을 올려놓았다.
“···슈테판. 우선 상속자 지정에 앞서, 자네가 휘하에 거둔 사령술사를 문제 삼는 이들이 많았네.”
“사령술사?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난 늑대 놈의 개새끼 먹이가 되었을 걸세. 비록 녀석의 마법이 논란의 여지는 있어도, 틀림없는 내 목숨의 은인이야!”
여전히 긴가민가하다. 정말 슈테판이 살아있는 인간인지, 아니면 사령술사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인지는. 여태껏 주교후가 보아온 모습으론 의심하기 어려웠다.
“자네는 몇 달간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내가 직접 와서야 겨우 응접을 하지 않았나. 이미 자네의 사위들은 사령술사가 부리는 힘을 목격했다네. 자연히 그런 자를 곁에 두고 있으니, 여러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돌지 않겠나.”
슈테판의 얼굴에 점점 노기가 서렸다.
“그럼 자네는,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주교후는 금색 유리병을 가리켰다.
“그건 안다흐에서 축성한 성수일세. 그걸 손등과 귓불에 바르면 완연히 기력도 되찾고, 자네의 결백함도 입증되네.”
“무엇으로부터 내가 결백하다는 건가? 나는 하늘에 우러러 한 치의 결점도 없다고 자부하네.”
광륜표를 꺼내든 주교후가 나직이 속삭였다.
“진정 흑마법에 능통한 자들이 무서운 점은 주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교묘하게 꾸민다는 거라네. 어쩌면 그자의 마술이 이미 자네를 잠식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무슨! 토드는 내게 어떠한 짓도 하지 않았네.”
“그렇다면 성수를 마다할 이유가 있나? 어찌 보면 육신에 활력을 복돋아주는 회복약인데.”
주교후를 노려보던 슈테판은 마개를 열었다. 약병을 빤히 응시하던 그가 물었다.
“귀찮게 발라댈 필요 없이, 그냥 마셔도 되나?”
“뭐, 그렇다면야 더 확실하겠지만···.”
주교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슈테판은 성수를 들이켰다. 주교후는 눈을 부릅뜨고 이 광경을 응시했지만, 주변에서 어떠한 마력이나 속임수는 느껴지지 않았다.
변경백은 성수를 깔끔하게 비웠다.
그의 몸 어딘가가 타들어 가거나, 괴로워 사지를 비트는 따위의 행동은 없었다.
“꺼억.”
그저 지독한 술 냄새만 올라올 뿐.
주교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탄식을 삼켰다.
‘이게 아닌데.’
“이제 됐나? 요한.”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어쩌면 성수의 반응이 늦게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성수만으론 아직 검증이 부족하네. 한 번 채혈을 해봄세. 자네의 피가 붉은색이라면 이보다 명백한 증거는 없을 테지.”
“귀찮기는. 피를 뽑아야 한다고? 내 주치의와 상담을 해봐야겠는데.”
변경백이 손뼉을 치자, 검은색 가운을 걸친 사내가 들어섰다.
“이자는 내 주치의인 코지마라네.”
“부르셨습니까? 각하.”
제국에는 의사 행세를 하는 돌팔이들이 많았다. 주교후가 보기엔 변경백의 주치의란 놈도 비슷한 부류 같았다. 더욱이 입가에 걸린 유들유들한 미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한이 나더러 피를 뽑아야 한다더군.”
그러자 주치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채혈이요? 어제 피를 꽤 뽑으셨지만, 오늘 포도주를 넉넉하게 드셨으니 아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포도주는 신의 피라 하셨으니, 충분히 오늘치의 혈액도 충당될···”
나름 주교후는 과거 뫼를렌푸르트 대학까지 진학한 교양인으로서 의학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도 다분했다. 그가 보기에 주치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떠들고 있었다. 이런 변방 영지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역시. 헛소리나 늘어놓는 게 영락없는 돌팔이로군.’
그렇게 주교후는 판단하고 슈테판의 주치의에 대한 신경을 꺼버렸다.
정작 주치의의 검녹색 눈동자가 슈테판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