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08
108
가느다란 단검으로 슈테판의 손끝을 가르자, 붉은 핏방울이 맺힌다. 혈액 위로 광륜표를 훑어봤음에도 아무런 징조가 없었다.
“이걸로 되었나? 난 아직 병자란 말일세.”
슈테판의 성화에 주교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증은 마쳤네. 이것으로 누구도 자네의 자격을 의심하진 않을 걸세.”
트집 잡을 만한 구석이 없다.
성수에 거부 반응은커녕 오히려 혈색만 좋아졌고, 죽은 자들처럼 썩은 혈액이 나오지도 않았다.
“코지마, 이만 자네는 나가보게.”
“예. 각하.”
예의 주치의란 작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응접실 밖으로 물러났다.
주교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지켜봤으나, 마력이나 기타 권능의 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이름이 조금 독특한 것 외에 별달리 수상쩍은 여지가 없다.
“그럼 상속자 지정은···”
슈테판은 단호히 선언했다.
“내 아들인 크뤼거가 켄젤슐리텐 일가의 이름과 권리를 물려받을 걸세.”
‘쯧···.’
주교후는 애써 뒤틀린 속내를 감추는 데 급급했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웠는데, 어째서인지 자신이 누군가의 의도대로 따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 그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마땅한 수는 없었다.
“자네가 바라는 대로.”
금실로 짠 양피지에 각각 변경백의 인장과 주교후의 반지가 찍혔다.
응접실을 나선 주교후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특히 두 딸은 죽은 줄만 알았던 변경백이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아연실색했다.
주교후가 새로 작성된 유언장의 내용을 낭독하자, 크뤼거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에 따라 켄젤슐리텐 변경백이 보유한 봉토의 권리는 크뤼거 폰 켄젤슐리텐에게 이양될 것이며, 이에 대한 공증인은 에덴트라흐 주교후 카셀미어임을 밝히노라.”
주교후는 양피지를 접었다.
“구주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증언은 거룩한 언약에 따라 지켜질 것이나니.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즉각 방백 부인이 주교후 옆에 선 변경백을 향해 항의했다.
“아버지!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서자 녀석에게 가문의 봉토를 모두 물려준다고요?”
슈테판이 냉소를 흘렸다.
“오, 마가렛트. 내 어여쁜 맏딸. 아비가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병문안을 찾아오진 못할망정, 유언장을 작성하니 이제야 온 게냐?”
빈정거리는 말에 마가렛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급히 이세벨이 제지에 나섰다.
“아버지는 지금 갓 병상에서 일어나셔서 온전한 상태가 아니세요. 좀 더 회복한 뒤에, 차분한 상태에서 유언장을 상속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사려 깊은 둘째 딸아. 네 배려는 퍽이나 고맙지만, 난 지금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하단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유언장을 작성하는데 망설일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코웃음 친 슈테판은 제국백과 방백을 쏘아보며 일갈했다.
“아직도 이리공의 침탈로 인한 여파가 남아있는데, 자네들은 내 봉토를 침범했네. 정작 이리공이 쳐들어왔을 땐 눈치만 살피다가, 내가 쓰러지니 병사를 이끌고 오다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들이 다 있나!”
“장인어른! 오해입니다. 제가 충분히 설명을···”
“듣기 싫네!”
방백의 다급한 변명을 묵살한 슈테판은 선을 그어버렸다.
“자네들의 선친부터 이어진 인연을 고려하여 배상금을 요구하진 않겠네. 허나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말게! 더불어 너희들도 즉각 이곳을 떠나라! 어찌 너희들이 자라난 영지에 외부의 병사들을 끌어들인단 말이야!”
이세벨과 마가렛트가 끈질기게 애원했음에도, 슈테판의 태도는 굳건했다.
침묵하던 제국백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각하. 남은 봉토를 크뤼거 경에게 상속하겠다는 각하의 의지는 알겠습니다. 허나 대제후 칙령에 따르면 각하께서 보유한 봉토가 하나 초과하는데, 이는 법적으로 금지된 일입니다.”
슈테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걱정 마시게. 사위. 그렇지 않아도 남은 봉토 중 하나는, 내 신하 중 혁혁한 공을 세운 자에게 나누어줄 생각이었으니 말이야.”
“신하라면, 누구를···”
“멜다비어 주를 3개로 분할하여 서남부를 요코프에게, 동남부를 빈센트에게.”
주교후가 눈을 감았다. 그의 행동에 제국백이 불안감을 느낀 찰나, 슈테판의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그리고 북부를 토드 하워드에게 하사하며, 그에게 남작위에 해당하는 작위를 봉작할 것이니, 일대를 셰우드 남작령으로 명명하겠다.”
급기야 마가렛트는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황급히 방백이 그녀를 부축하는 가운데, 슈테판이 읊조렸다.
“나는 너희를 신의라곤 모르는 짐승으로 키우지 않았다. 물려줄 땅이나 권리는 없다. 이만 돌아가거라.”
이세벨은 급히 주교후를 향해 물었다.
“주교후님. 검증 절차는요? 정말 저게 아버지가 맞는 건가요?!”
주교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광륜표를 어루만졌다.
“변경백에게서 아무런 흑마법의 징후가 발현되지 않았네.”
제국백 또한 탄식을 흘렸다.
곧장 몸을 돌린 슈테판은 응접실로 돌아가곤, 문을 잠가 버렸다.
명백한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지 한참이나 응접실 앞에서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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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백과 제국백 일행이 쫓겨나듯 마차에 올라타는 걸 보곤 토드가 조소했다.
“꼴들이 보기 좋군요.”
낄낄거리는 토드와 달리, 크뤼거는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말 조마조마했네. 마지막까지 들키는 건 아니었는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망자와 생자를 구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상실했다고요.”
크뤼거는 한숨을 흘리며 식탁 앞에 앉아있는 슈테판을 응시했다.
“···정말로, 아버지가 되살아나신 건가?”
토드는 딱 잘라 말했다.
“아뇨. 저건 이 땅에 남겨진 잔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하의 영혼은 이미 여길 떠나가셨지요.”
손에 걸리는 것이라곤 닥치는 대로 집어먹던 슈테판은 눈을 깜빡이더니, 탁자를 내리쳤다.
【배고파! 밥 줘!】
“···마치 아이가 돼버린 것 같군.”
“원초적인 욕구만 남아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망자는 죽음의 반동으로 인해 생전의 기억을 상실합니다.”
극소수의 시종만이 음식을 날랐다. 그는 걸신들린 것처럼 물어뜯고, 삼켰다. 수염과 옷자락에 온통 양념과 국물이 얼룩졌다.
일단 사고의 여파로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둘러대어 무마해놨다.
변경백이 생전에 고령이었고, 술을 즐겨 마셨던 점을 감안하면 그럴싸한 사유였다.
“그런 것치곤 주교후 앞에선 비교적 정상적으로 말하고, 움직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저러시는 건가.”
“그야 제가 직접 조종했으니까요. 지금은 제 통제가 미치지 않으니, 본연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지요.”
부친의 시체를 꼭두각시처럼 부렸다는 걸 태연히 지껄이는 뻔뻔함.
하지만 자신에게도 그를 나무랄 자격은 없었다. 엄밀히 그 또한 공범이었으니. 크뤼거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한탄했다.
“···제기랄. 정녕 이 죄는 어떻게 속죄해야 한단 말인가.”
어깨를 들썩인 토드는 나직이 답했다.
“그래도 각하께선 피가 아닌, 눈물의 업으로 일어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제가 강제로 일으킨 게 아닌, 자의로 사자소생에 응답했다는 뜻이지요. 어쩌면 고인에게 남은 마지막 염원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짐승처럼 음식을 탐하던 슈테판은 목이 말랐던지, 포도주를 머금었다가 얼굴을 와락 구기곤 그대로 뱉어버렸다.
슈테판을 바라보던 크뤼거는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일평생 아버지는 내게 영지를 물려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네. 실질적으로 난 없는 자식이었고, 다들 숙부가 대를 이을 거라 생각했었지.”
사령술사가 미소를 흘렸다.
“그래서 당신이 부탁한 대로, 하인리히를 없애버리지 않았습니까.”
크뤼거의 눈동자에 음울한 빛이 어렸다.
“그래. 숙부는 크리슈토프의 도움으로 말끔히 처리했지.”
그들의 주변에 홀연히 유령의 형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아버지가 정말 살아계셨다면, 차라리 이세벨의 자식들에게 작위를 물려주셨을지도 모르지. 아버지는 이세벨을 유독 아꼈으니.”
고개를 기울인 토드가 속삭였다.
“흐음, 당신이 너무 삐딱하게만 생각하는 게 아닙니까? 저는 육신을 움직이면서 고인에게 남은 상념의 파편을 엿봤습니다.”
크뤼거가 피식 웃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온전한 기억이 아닌, 파편이 아닌가. 게다가 더는 스스로 판단조차 못 하는 존재의 감상을 들어봤자 의미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네.”
“지당하신 말씀.”
그 사이 음식을 비운 슈테판이 마구 탁자를 내리쳤다.
【더 줘!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칭얼대는 슈테판을 보곤 크뤼거가 이마를 어루만졌다.
“저건 언제까지 움직이나?”
“아직 상속자 지정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금방 죽어버리면 의심을 살 겁니다. 방부 처리를 철저히 해뒀으니, 적어도 2주는 부패하지 않을 겁니다.”
묶인 옆구리가 답답했는지, 슈테판은 붕대를 풀어헤쳤다. 이리공에게 물어뜯긴 내장이 훤히 드러난다.
“도저히 저 꼴을 오래 보진 못하겠네.”
“엿새로 하시죠. 밤중에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면 적당할 겁니다.”
대개 급사해도 의심받지 않는 명소는 계단, 변소, 욕조 따위가 있다.
“사자의 위신을 고려하여 밖을 돌아다닐 땐 제가 통제할 테니, 저런 모습이 널리 알려지진 않을 겁니다.”
“사자의 위신은 무슨. 자네는 이미 내 아버지의 위엄을 바닥까지 떨어트려 놨네.”
토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숨을 흘린 크뤼거가 손을 내저었다.
“···계단에서 너무 험하게 굴리진 말게. 어차피 입관한 모습을 또 배웅해야 할 텐데, 그나마 온전한 형태로 마주해야 심신이 편안할 것 같으니.”
사령술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명하신 대로. 각하.”
얼마 지나지 않아 겔더부르크에는 슈테판 변경백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가 사경으로부터 살아 돌아온 뒤로, 영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외부 시찰을 할 땐 비교적 멀쩡해 보이지만, 성채에서 벌이는 기행 탓에 그가 노망난 것이 틀림없다는 증언이 뒤따랐다.
6일 뒤, 밤중에 변경백이 계단에서 실족하였다. 후계자로 지정된 크뤼거가 책임을 물어 일부 수행원들을 처벌했고, 그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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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백의 장례 미사를 치른 뒤, 주교후는 텅 빈 예배당에 홀로 남아있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기도에 전념하던 중, 낡은 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예배당을 울리는 발걸음에 주교후가 눈을 떴다. 단상 아래에 선 이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예하. 초면은 아니시죠?”
사내를 돌아보던 주교후가 속삭였다.
“내가 네놈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변경백의 주치의, 코지마?”
사내의 입가가 움찔거린다. 저렇게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니까 참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니면 새로이 켄젤슐리텐 변경백의 가신으로 봉작을 받은 프라이헤어 셰우드인가.”
셰우드 남작. 적어도 하워드 남작보단 자연스러운 울림이다. 다만 아직 낯설어서, 입에 잘 붙진 않았다.
“사령술사 토드로 족합니다. 예하.”
“···여긴 구주의 집이다. 그 불경한 단어는 입에 꺼내지 말라.”
태연히 의자에 앉은 토드는 주교후를 향해 조소했다.
“뭐, 저를 어떻게 부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당장 면전에서 욕이나 불태워버리겠다는 협박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사적이지. 암.
“그나저나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중앙 교구로 가려면 육로 상으로 적어도 두 달은 넘게 걸릴 텐데요.”
단상에서 내려온 주교후는 아마포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뭡니까?”
“중앙 교구로 향하기에 앞서, 진정 네가 계시가 가리키는 자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주교가 사령술사에게 건네는 물건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썩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 같았지만, 마지못해 넘겨받았다.
토드의 팔뚝이 휘청였다.
‘뭔데 이리 무거워?’
아마포를 풀어보니 아주 작은, 깨진 칼날의 조각이 들어 있었다. 무심코 표면을 쓸어내렸는데 기이하게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돌연 아릿한 감각이 인다.
“윽.”
어찌나 날카로운지 손끝이 베였다. 토드가 급히 손을 빼내던 중, 핏방울이 조각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파문을 일으키듯 환한 빛이 일더니, 사방에 따뜻하다 못해 강렬한 열기가 몰아쳤다.
일순간 퍼져나간 섬광은 예배당의 색유리를 환히 비추고 사라졌다.
주교후는 광륜표를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기요. 예하. 이게 무슨 뜻인지요.”
다시 조각을 아마포에 싼 주교후가 답했다.
“그건 한때 성 안토니오가 지녔던 보검의 일부다. 네놈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잘게 쪼개졌지.”
안톤.
자신이 이 게임에서 처음으로 플레이했던, 성전사 캐릭터.
토드가 낮게 물었다.
“···안토니오께선, 아직 살아계십니까?”
그러자 주교후는 아리송한 미소를 흘렸다.
“어리석긴. 산 자에게 시성식은 행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