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168
168
수렵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이제 남은 도전자는 알레시아와 파르지발뿐.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던 마법의 숲은 도전자들 앞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끼에 맺힌 이슬이 햇빛을 받아 초록색으로 싱글대고, 호랑가시나무 특유의 뾰족한 이파리가 바스락댄다.
태고부터 숲은 생명력으로 가득한 요람인 동시에 나약한 피식자를 집어삼키는 무덤이었다.
대공이 말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대들과 함께하기를.”
파르지발은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이며 숲으로 향했다. 반면 입을 다문 토드 일행을 향해선 가신들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진다.
의사라고 주장하지만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떠돌이, 항시 두꺼운 망토로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기사, 기껏해야 용병 행세나 하고 다녔을 북부 놈.
그토록 쟁쟁하던 도전자들을 온데간데없고, 파르지발과 수렵제에서 맞붙는 이가 저깟 놈들이라니. 그들로선 이 현실이 믿기 어려웠다.
알레시아는 일그러진 친척들의 표정이 우스웠는지, 입가를 이죽댔다.
“···마지막까지 잘하고 와. 하워드. 헤젤슈마흐 대공령의 후계자로서,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꼼지락대는 손에서 그녀의 초조함을 알 수 있었다.
토드가 말꼬리를 흘리며 되물었다.
“오호, 원하는 건 뭐든지요···?”
불길해 보이는 미소에 영애가 한발 물러섰다.
“호,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나한테 청혼할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
아주 질색하는 표정에 토드는 눈썹을 올리며 대꾸했다.
“허어, 애석하군요. 저는 기껏 아가씨를 위해 요 며칠간 고군분투했는데, 구혼자로선 부족하단 겁니까?”
특유의 과장된 말투를 눈치챈 이스라 역시 거들고 나섰다.
【아무래도 자네는 영애에 비하면 출신이 비천하지 않은가! 우리 같은 떠돌이들에게선 후계자 자리나 넘겨받고 더 잘난 신랑을 찾아 나서겠다는 뜻일 터!】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아둔하게도 소인이 아가씨의 뜻을 눈치채지 못했군요. 역시 지체 높은 분다운 식견이십니다. 천한 놈이 감히 분수를 모르고···”
“야! 누굴 쓰레기로 만드네? 난 그렇게까지 출신을 따지는 사람이 아냐! 난 비실대는 사내라면 질색이라고!”
토드를 어림해본 영애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늙지도 않았고, 얼굴은 희었다.
서부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각진 미남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추남은 아니다.
저 호리호리한 체형 위로 근육을 덧씌워본다고 가정했을 때,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굽은 어깨와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조금 거슬리긴 해도, 신체를 단련한다면 자연히 해결될 일.
알레시아가 턱을 세웠다.
“정 네가 진심으로 구혼할 생각이라면, 대공령에 지내면서 몸을 단련해보던가. 우리 가문의 호위기사단 본부엔 모든 게 갖춰져 있으니까.”
반쯤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에 토드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아쉽지만, 몸에 근육이 잘 붙는 체질은 아니라서요.”
그러자 알레시아는 불퉁한 표정으로 콧바람을 뀌었다.
“그래? 그럼 청혼하는 건 단념해야겠는걸.”
어깨를 들썩인 토드가 찡긋 눈짓했다.
“분명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운명의 상대는 후계자 자리를 얻은 뒤에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당장 제 농담 덕에 긴장은 풀리시지 않으셨습니까.”
“뭐? 농담?”
알레시아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이미 사령술사와 그 패거리는 숲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남겨진 영애는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하, 하! 하. 순진한 구석이 다분한 아가씨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톡톡 튀는 느낌이라 반응이 활어 같더군요.”
낄낄거린 파멸의 기사가 맞장구쳤다.
【저 소녀에게도 좋은 교훈이 되었을걸세! 스스로 짝을 찾고자 한다면.】
잔가지를 해치며 나아가던 쇠렌은 의문이 들었는지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장의사 양반. 정말 대공녀한테 청혼하는 것도 나쁘진 않잖소. 아마 데릴사위 비슷하게 들어가겠지만, 대공령의 군주라면 그쪽도 손해 볼 일은 없는 거 아뇨?”
그러자 넘실거리던 이스라의 안광이 싸늘해졌다. 토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개인적으로 혼인에 관심이 없어서요.”
“흠··· 그럼 혹시···?”
토드가 단호하게 일축했다.
“제 사역은 흑색 학파의 재건입니다. 이를 위해선 어느 쪽에도 관심 없습니다.”
입맛을 다신 쇠렌이 손도끼로 무성한 덤불을 베었다.
“아쉽구만.”
투구 속 안광이 다시 이글거린다.
【그나저나 마지막 날이니, 변화가 있지 않겠나. 기사도 문학에선 꼭 이런 마지막 시련에서 강대한 적이 주인공을 가로막기 마련이네.】
쇠렌이 인상을 쓰며 답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쇼. 기사 양반. 여태껏 나온 놈들만 해도 충분히 성가셨다고. 당장 어제 나타난 말 대가리 짐승만 하더라도 1시간 동안 싸웠는데.”
파멸의 기사는 안광을 선명하게 번뜩이며 두리번거렸다.
【어떤 놈이 나오더라도, 본인에겐 당해낼 수 없지! 본인은 무적이니 말이다! 이 넘치는 힘을 시험할 상대가 필요하지 않겠나.】
코웃음 친 쇠렌은 낫질하듯 도끼를 휘둘러댔다.
“어련하시겠소. 근데 씨부럴, 왜 이리 덤불이 우거진 거야? 이래서야 앞을 보기도 힘들어 죽겠─”
한 발 더 앞으로 내디딘 순간, 토드 일행은 수풀 너머의 공간에 들어섰다.
눈앞의 광경을 보곤 쇠렌이 주춤거렸다.
“뭐, 뭐여. 이건.”
새하얀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마법의 숲이 자라난 곳은 원래 헤젤슈마흐 가문의 영산이라고 했던가.
곳곳에 사자 머리를 새긴 석비가 서 있었다.
어느새 그토록 무성하던 숲은 온데간데없고, 묘역의 고즈넉한 공기가 토드 일행을 압도했다.
자세를 굽힌 채 토양을 더듬던 토드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여긴 거룩한 대지다. 나나 이스라에겐 호의적이지 않은 공간이야.’
대체 이곳에 어떤 권능이 미쳤는진 몰라도, 토드 일행은 일종의 의식계에 해당하는 공간에 들어섰다.
토드가 식은땀을 흘렸다.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니. 더군다나 이 기묘한 기운은······.’
홀연히 따사로운 미풍이 분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온기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아마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침 땅에 자라난 잔디도 부드럽고, 몸을 쓸어내리는 온기가 포근한 이불과 같다.
어디선가 간드러지듯 들려오는 희미한 노래는 덧없이 평온한 음정이었다.
토드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자신의 볼을 후려갈겼다. 비틀거리던 몸을 겨우 가눈 사령술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스라!”
파멸의 기사는 어느 비석 앞에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투구 속 안광은 꺼졌다.
‘레흐만 백령의 고귀한 숙녀, 율리아나 폰 헤젤슈마흐 부인을 기억하며.’
비석 앞엔 비교적 최근에 놓인 꽃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스라는 품속에 시들어 말라붙은 꽃을 끌어안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여긴 사령술조차 봉쇄된 금역이다. 토드가 입술을 곱씹는 가운데,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싸움에 임하는 기사는 동시에 둘을 상대한다.
신록의 기사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적, 그리고 자신.
유유히 고삐를 몬 신록의 기사는 이스라를 내려다봤다.
─적에게 패배한다면 운 좋게 목숨을 건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죽지. 허나 이는 전사의 숙명이라. 죽음 앞에 떳떳했다면 명예로운 결말이다.
마력을 가늠해보니 분명 하수인과의 계약은 유지되고 있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수면이 없는 망자가.
─그러나 자신에게 패배한 자는 괴물이 된다. 명예도, 마음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리지.
“······저희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토드의 물음에 신록의 기사가 훌쩍 하마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는 자네를 안다. 양례교단의 신관이여.
즉각 토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제를 살피던 사령술사가 낮게 속삭였다.
“의외군요. 이 시대의 피조물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인데.”
─태양교단은 탄생한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고, 양례교단은 사망한 노인의 평온을 기원했었지. 그것도 내 기준에선 오래전의 일이지만.
대제에게서 적대적인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토드는 미약하게 경계를 유지했다. 대제가 손을 들어 잠든 이스라를 가리켰다.
─저 아이가 찬 갑주는, 한때 짐이 가장 총애하던 기사들에게 하사한 물건이다. 그로부터 비롯된 사념이 짐을 일으켰지.
드물지만 유물에 잔존 사념이 남아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허면 저희의 여정을 줄곧 지켜보신 겁니까?”
대제가 부정했다.
─그건 아니다. 짐은 어디까지나 자네들을 인도하기 위해 안배된 메아리일 뿐. 단지 행적만 어렴풋이 알고 있노라.
토드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간의 행각을 속속 관찰할 정도로 사념이 뚜렷하진 않았다는 건가.
대제가 신록의 기사로 나타난 게 이스라의 갑주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녀가 고유 서사의 조건을 충족한 게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저희를 인도하신다면··· 지금 상황도 대제께서 내린 시련이군요.”
대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마땅히 짐의 시련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기사거나, 적어도 전사여야 하는 법.
토드를 응시하던 신록의 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무기를 부러뜨리고 전사의 의무를 저버린 자, 다른 신을 모시는 사제는 구태여 사명을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자네들에겐 자네들의 사명이 있으니.
대제의 말에 토드가 실소했다.
“새삼 느끼지만, 제가 아는 분과 말버릇이 비슷하시군요.”
그를 마주 보던 대제 역시 폭소했다.
─와, 하! 하!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의 후예이니 말이다!
슬쩍 이스라를 돌아본 로다빙이 씨익 웃었다.
─흐흐, 그보단 짐의 일대기를 기록한 위인전을 감명 깊게 읽고, 그걸 흉내 내는 걸 테지만.
저 기묘한 웃음소리와 말투에 원작자가 따로 있었을 줄이야. 하필 흉내 내도 저런 걸? 개성이 강하긴 하지만···
문득 대제가 미간을 구겼다.
─크흠, 갑자기 귀가 간지럽군. 웬 놈이 짐의 험담을 하고 있나? 이상하군. 짐을 대적하던 놈들은 이제 백골조차 남지 않았거늘···
역시 수 세기 묵은 노괴라 그런가, 쓸데없이 감만 좋다.
토드가 황급히 물었다.
“제 기사가 어떤 상황에 처한 겁니까? 본래 망자는 잠을 청하는 존재가 아닌데, 부름조차 닿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불의에 맞서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무릇 용기가 있으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 법.
대제가 나직이 읊조렸다.
─허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타인 앞에선 정직한 인간조차 때론 자신을 속이기 마련이니.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스라가 미약하게 신음했다. 드물게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탓에, 토드의 심장이 철렁였다.
─고로 도전자들은 자신이 외면해온 내면의 두려움과 대적할 것이다. 어느 짐승보다도 강대하고, 가혹한 역경이나니.
면면에 미소를 그린 대제가 말을 마쳤다.
─이게 짐이 내리는 마지막 시련이다. 도전자들은 진정한 용기를 시험받으리라.
내면의 두려움. 아마 무의식적인 공포나 과거의 트라우마 따위를 일컫는 거겠지.
악마와 사투를 벌여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던 이스라가 아이처럼 끙끙거리며 허덕이고 있었다.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제가 단호히 답했다.
─저들에겐 계속해서 잔영이 되풀이될 것이다. 허나 거듭 패배하여 의지마저 꺾인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하겠지.
투구 속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으으···. 어, 어머니.】
인상을 구긴 토드는 벌벌 떨리는 이스라의 손을 꼭 잡아줬다.
“여태껏 누구도 죽지 않도록 자비를 베푸시더니, 왜 마지막에 와선 이리 가혹한 시련을 내리시는 겁니까?”
그가 냉소했다.
─명예는 목숨을 걸어야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짐의 계시로 개최된 수렵제가 젊은 전사들을 공양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니 아량을 보인 것일 뿐.
그나마 자신의 기척을 느낀 걸까. 떨림은 줄어들었어도, 이스라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자, 잘. 잘못. 했어요···. 잘못.】
대체 얼마나 거지 같은 꿈을 꾸고 있길래. 그토록 강맹하던 기사가 이 꼴까지 된 걸까. 악몽의 강도가 심상치 않다. 시련이라기보단 고문이 아닌가?
─자네도 알다시피, 그 아이는 사내가 아니다. 육신에 짊어진 갑주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수나 있겠더냐?
토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드시 극복할 겁니다. 우린 이보다 더한 적들을 숱하게 상대해왔어요. 제 기사는 여느 사내들보다 강합니다.”
그러자 대제가 히죽 웃었다.
─허나 꿈속에선 그 아이를 지켜줄 갑옷도, 자네의 알량한 주문도 없다. 지극히 평범하고, 나약한. 여인에 불과하지.
향로를 거머쥔 토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해봤자다. 가짜는 영영 진짜가 될 수 없다.
“······!!”
기사 행세를 하는 여인.
사령술사 행세를 하는 누군가.
대제의 비아냥이 이스라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꿰뚫어 보는 듯하여, 토드의 눈이 뒤집혔다.
향로를 떨어뜨린 사령술사는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다리뼈를 내던졌다.
날카롭게 깎아둔 여분의 뼈가 창으로 변모하여 날아간다.
쏜살같이 날아간 뼈창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 어느새 대제의 신형은 온데간데없었다.
황급히 주변을 살핀 토드가 이를 갈았다.
“이 개 같은 꼰대가···.”
안 되겠다. 나중에 뼛조각 하나만큼은 기필코 챙겨야겠다고 다짐하던 차였다.
돌연 이스라가 더욱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 아. 아··· 버지.】
달달 떨리는 건틀렛이 불쾌한 소음을 일으켰다. 리벳을 풀어버린 토드는 건틀렛을 빼내곤, 이스라의 맨손을 부여잡았다.
창백한 손은 변함없이 싸늘했다.
살갗 너머의 온기가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이스라의 떨림이 줄어들었다.
여태껏 부모를 부르짖던 이스라의 입에서 다른 이름이 새어 나왔다.
【···토, ···드.】
사령술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와, 줘요···.】
속삭임은 그쳤다. 여전히 투구 속엔 어둠이 짙었다.
하수인의 부름에 사령술사가 응답했다.
“그대의 부름을 들었노라.”
품에서 넋의 거울을 꺼낸 사령술사는 이스라의 손끝을 얕게 긋곤, 핏방울을 핥았다.
경지가 상승할 때와 사뭇 비슷한 감각이다.
의식의 침강.
세계가 가라앉는다.
표층이 아닌, 물결 아래의 저편으로.
이 정도 깊이면 영혼의 대해가 아니라, 호수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꽤 깊은 곳이다.
더욱이 자신의 의식이 아닌 만큼, 심해에 도사린 무수한 것들이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아가리를 들이밀지 모를 일.
토드는 기꺼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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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들이 하염없이 숲을 지켜보던 도중, 이변이 생겼다. 수풀이 열리더니 일련의 무리가 튀어나왔다.
“뭐여, 씨부럴.”
【······.】
쇠렌과 엘프 망자들을 비롯하여 파르지발이 대동했던 기사들도 덩달아 숲 밖으로 걸어 나왔다.
가신들이 놀라 수군댔다.
“대관절 저게 무슨 일···”
모두가 이변에 놀란 와중, 리케르트는 순간적으로 젖혀진 수풀 너머를 응시했다.
다른 이들이 일으키는 소란 속에서, 그의 예민한 오감이 희미한 음성을 추려냈다.
대공이 중얼거렸다.
“일라리스···?”
벌떡 몸을 일으킨 리케르트는 망설임 없이 숲을 향해 달려나갔다.
“전하!”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수행원들이 말리지도 못했다. 도나투스가 황급히 기사들을 이끌고 대공을 뒤따랐으나, 빽빽하게 자라난 수풀이 삽시간에 그들을 방해했다.
“이 가지들을 모조리 베어라!”
일련의 거듭된 소동에 주변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더군다나 대공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하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이를 지켜보던 알데릭 제국백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리터에게 전하게. 절호의 기회라고.”
고개를 끄덕인 기사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예의주시하던 알레시아가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호위 기사는 끊임없이 자라나는 가지를 향해 육중한 할버드를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수색 인원을 증원토록 요청하고, 반드시 경로를 확보해라! 전하께선 저 너머로 향하셨다! 헤젤슈마흐 가문의 녹을 먹는 자로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 빌어먹을 숲을 어떻게든 돌파···!!”
“도나투스 경.”
알레시아의 목소리에 도나투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지금은 상황이 시급합니다! 용무가 있으시다면 다른 하인을···”
바짝 그를 잡아당긴 알레시아가 험악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제 용무도 시급하니 잘 들어요. 지금 대공령 내부에 역모를 모의하는 일당이 있어요.”
“예, 예?”
당황하는 기사를 향해 알레시아가 힘주어 말했다.
“대공령 근위기사단을 소집하세요. 이쪽이 아닌, 본궁 쪽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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