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227
227
절그럭.
절그럭.
걸음발마다 골육에 부딪힌 찰갑이 들썩인다. 뼈다귀 망자는 피와 기름으로 뒤덮인 층계를 올랐다. 격전을 방증하듯,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찌꺼기들을 짓뭉개며 등반한 하수인은 기어코 보루의 첨단에 깃대를 단단히 세웠다.
네크로폴리스를 상징하는 거미 깃발이 당당히 나부낀다.
【하, 하! 하. 실로 가슴팍이 웅장해지는 광경이로다!】
아무래도 무저갱의 관문 꼭대기에 꽂힌 거미기가 파멸의 기사에겐 상무적 감흥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이걸로 마귀 놈들도 똑똑히 알 테지.】
어째 투구 속 안광이 잉걸불보다 세찬 것 같다. 이스라는 허리춤에 양팔을 올린 채 거들먹댔다.
【지옥은 망했다! 이제부터 여긴 우리 네크로폴리스의 영토다!】
오만한 선언에 죽음의 기사들이 턱뼈를 달그락거리며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찬물을 끼얹으려니 겸연쩍었지만, 자칫 그녀가 휘하에 통솔하는 하수인들까지 열성에 휘둘릴 수 있어 정정에 나섰다.
“음··· 여길 점거한 건 맞지만, 다스리진 않을 겁니다. 엄연히 우린 점령군으로 온 게 아니니까요.”
지옥의 요새를 함락시켰다는 위업에 잠시 경도되었던 이스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겸연쩍게 헛기침을 흘렸다.
【하긴, 여기가 통치하기에 적합한 풍토는 아닐세.】
여전히 기사들은 눈치 없이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이스라가 안광을 흘기니 능청스레 무기를 정비하거나 오염된 판갑을 닦는 척했다.
흑위대 녀석들, 처음엔 로봇처럼 다소 딱딱하게 움직이더니 이젠 딴청 피우는 것도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아마 기사단장의 강렬한 자아가 영향을 미친 탓이겠지.
나쁠 일은 아니다. 적정선에서의 자율성 증대는 하수인의 기능 능률에 도움이 되는 편이다.
이스라는 괜히 발치에 굴러다니는 소악마 사체를 걷어차며 중얼댔다.
【이리 척박해서야 구더기도 안 꼬이겠군. 이럼 송장은 누가 분해하느냐, 이 말이야!】
“더군다나 극도로 건조해서 용암이 범람하는 게 아니고서야 유해가 꽤 오래 보존되겠죠.”
【쯧쯧, 안타까운 일이네. 완전한 죽음마저 허락되지 않은 땅이라니! 어찌 이런 끔찍한 곳에 기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악마들이나 우글거리는 거겠죠.”
【흠! 알만도 하군.】
고개를 끄덕이던 이스라는 문득 깃대를 가리켰다.
【그나저나 여긴 수시로 불똥 섞인 열풍이 불어닥치는데, 깃발이 온전하겠나?】
“그렇지 않아도 살갗이 질긴 놈의 등가죽을 발라냈어요.”
원체 유황내가 심해서 개털보다도 못 써먹을게 악마 가죽이나, 무저갱의 열기만큼은 잘 견딘다는 점에서 휘장 소재론 안성맞춤이었다. 거기에 잿물을 먹여 검게 물들이고, 뼛가루를 녹여 거미 문양을 아로새겼다.
“산드로가 수고 좀 해줬죠.”
【얼마 전에 리치가 된 녀석이었던가. 유난히 손재주가 좋다던.】
원정에 앞서 검증을 해봤지만, 산 채로 무저갱에 입성했다간 아무리 방비를 씌워줘도 정신이 녹아버린다. 토드를 따라 원정에 동참한 제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필멸의 육신을 벗어던졌다.
이스라가 낮게 속삭였다.
【···기사도 전집에 따르면 뒷골이 도드라진 놈들은 배반을 도모할 기질이 농후하네.】
“감안하고 들인 제자입니다. 지금까진 쓸모를 다하고 있잖습니까.”
그녀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자네가 네크로폴리스의 수장을 겸하고 있는 동안이야 모르지. 추후엔 얼마든지 음험한 속내를 드러낼 수도 있네.】
이에 대꾸하려다 토드가 휘청였다. 안광을 부릅뜬 파멸의 기사는 급히 그를 붙잡았다.
“아, 괜찮습니다. 잠깐 현기증이···”
이스라는 냅다 투구까지 벗어 던졌는데, 이어지는 행동은 토드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마를 맞댄 채 지근거리에서 진녹색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주변이 온통 벌게서 그런지 유달리 창백한 낯만큼은 도드라진다. 워낙 악력이 억세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스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괜찮기는. 몸이 온통 불구덩이다! 제길, 이러다 사람 잡겠군! 당장 원정을 철회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녀답지 않게 거친 언사까지. 토드는 손을 내저으며 하수인의 유난을 만류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무저갱의 열기를 쬈나 봐요. 조금 쉬면 나아지겠죠.”
【가뜩이나 쇠약한 몸뚱이로 무리하지 말게. 토드. 과업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나, 스스로의 보신이 우선이니.】
진심 어린 충고에 토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가요?”
매사 열정적이다 못해 다소 과열되다시피 한 그녀의 신념관 다소 대치되는 발언으로 느껴졌다.
“당신이라면 ‘명예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선 목숨쯤은 얼마든지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토드가 억양까지 흉내 내며 눈웃음을 자아내자 이스라는 숨을 들이켰다. 그제서야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파멸의 기사는 다급하게 둘러댔다.
【기사인 본인과 처지가 다르지 않나! 자네는 집단을 통솔하는 수장이고, 본인은 일개 권속에 지나지 않으니!】
어깨를 들썩인 토드는 벽에 등을 기댔다.
“나름 합당한 사유긴 하네요.”
【크흠.】
놀림당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스라는 연신 입술을 오므린 채 눈썹을 삐죽거렸다.
‘역시 산 자의 몸뚱이론 무리였나.’
필멸의 육신을 버린다면 무저갱의 열기뿐만 아니라, 내내 발목을 잡았던 허약함도 문제 되지 않을 거다.
게다가 품에 있는 신체(神體) 역시 여러모로 한낱 필멸자가 감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전능자의 파편은 쥐고 있는 것만으로 야금야금 빈약한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
‘그래도 리치화는 용납 못 하지.’
어떤 상황에서도 [종족값: 인간]은 고집한다.
설령 결점투성이에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 방식 같아도 필멸의 몸뚱이를 지고 두 발로 이 땅을 거니는 것.
토드가 자신에게 내건 일종의 제약이자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이를 위반하면 머릿속에만 있는 인정 협회가 치트성 플레이라며 길길이 날뛸 게 뻔하다. 오로지 최고 난이도&철인만 인가해줄 정도로 깐깐한 곳이다.
‘하나둘씩 타협하기 시작하면, 나중 가선 여태껏 내가 지켜온 것들이 무너질 거야.’
이미 규칙을 저버려가며 플레이한 선례를 여럿 보지 않았던가. 여긴 으레 초인에게 따라붙을 법한 정신 보정 따위 없다. 압도적인 권능과 개인의 의지력은 별개였다.
이 가혹한 땅에 빌붙으려면 마음에 방벽을 단단히 두르고 살아가야만 한다. 비단 용이나 마법이 맥동하는 세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늘에 있으니 열기가 가시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을 늘어뜨린 채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돌연 파멸의 기사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건틀렛까지 풀어헤치는 모습에 멱살잡이라도 하려나 침을 삼켰다.
【여전히 뜨겁군.】
백지장만큼 하얀 손바닥이 이마를 덮는다. 맞닿은 살결 너머 사늘거리는 감촉이 미열을 진정시켰다.
동그랗게 뜨인 사령술사의 눈동자에 파멸의 기사가 비로소 씨익 웃었다.
【한결 낫나?】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반발심의 말로인가. 하수인의 반격은 유효했다. 토드는 헛웃음을 삼키다가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좀 낫네요.”
그리고 적막.
토드와 이스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그리 무겁진 않았다. 어색함이 끼어들 여지 역시 없었다. 상호 간에 가타부타 부언을 늘어놓는 것보다 주인과 하수인은 표정과 손짓에 함축된 의미로 서로를 이해했다.
이스라는 자상하게 이마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너무 차갑진 않은가?】
“예전만큼 시릴 정돈 아니네요. 물수건 정도의 적당한 온도라고 해두죠.”
이스라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툴툴거렸다.
【그런 쓸데없는 사족은 덧붙일 필요 없네. 본인의 손을 물수건쯤으로 취급하다니!】
손길을 거두려고 하니 손등 위로 파멸의 기사 못지않게 창백한 손이 겹쳐졌다.
“···아직. 온열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요.”
까만 눈썹이 호선을 그린다.
“손 계속 대고 있으세요. 주인으로서 명령입니다.”
【······.】
오늘따라 유독 이스라의 안면에 생기가 감도는 것처럼 보이는 건 피와 용암으로 얼룩진 주변 풍광 때문이겠지.
입꼬리를 달싹이던 파멸의 기사가 속삭였다.
【본인은 계약에 얽매인 망자이니, 사특한 사령술사가 강제한 명령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겠군.】
차라리 눈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살풍경은 자체적으로 필터링하고, 오롯이 계약으로 연결된 하수인만 읽어낼 수 있으니까.
악의와 분노로 가득 찬 삭막한 마경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작은 위안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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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걸이 환히 밝힌 대전. 세 쌍의 노란 동공이 꿈틀거렸다.
《키사르가 볼모로 잡혔다라.》
만신전들이 추락한 이래 가장 황당무계한 소식이다. 권좌 주변에 모인 악마들이 술렁였다.
-그럼 카’이엔가르가 무너진 건가?
-지상이면 모를까, 본신으로 하루살이한테 당할 리 없는데.
어느 대악마가 입가를 비틀었다.
-왜. 여기 한 놈 계시지 않나. 처소에서 하루살이에게 쓰러지신 장본인이.
그의 조소에 악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대전의 구석에 쏠린다.
머리 양쪽에 뿔이 돋아난 다른 동족들과 달리, 외뿔만 길게 자란 개체가 투레질치듯 불씨를 흘렸다.
―처소가 아니라 저상으로 올라가던 통로 어귀에서였다. 그리고 놈은 일개 하루살이가 아니라, 황성(黃星)의 대전사다.
여타 대악마들이 초열병기고에서 주조된 갑주로 완전무장한 것과 달리, 외뿔 악마는 맨몸으로 시뻘겋게 달군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었다.
필멸자들에게 패배하여 처소로 퇴출당한 자들에게 찍히는 낙인이다. 지옥의 강물로 달군 고랑은 착용자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새겨넣는다.
강렬한 정서는 사념으로부터 비롯된 악마에게 힘의 원천이지만, 타자가 아닌 자신에게서 우러난 정서를 섭식했다간 말라 죽는다.
-아, 그러셨겠지. 듣기론 그놈도 얼마 전에 죽었다던데. 그래 봐야 고작 별수 없는 하루살이가 아닌가. 꽁무니에서 빛도 나오니 반딧불이 정돈되겠군.
안톤과 더불어 그를 상대했던 외뿔까지 깎아내리는 발언에 다른 악마들이 일제히 낄낄거린다.
이죽대는 대악마를 빤히 노려보던 외뿔이 낮게 읊조렸다.
―내가 비록 이 꼴이어도, 네 사지를 찢어 그룸다즈가 기르던 사냥개들에게 던져주기엔 충분하다.
외뿔의 엄포에 짐짓 그를 비웃던 대악마가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벌레 따위한테 패배한 등신이···!
허공에서 고룡 갈빗대를 구부린 몽둥이가 튀어나온다. 머리뼈를 부술 작정으로 힘껏 내리쳤다.
쩌억!!
외뿔은 사슬을 두른 팔목으로 몽둥이를 받아냈다. 제법 충격이 육중했지만, 그만큼 상대의 움직임도 크다. 곧바로 다리를 걸어 놈을 넘어트렸다. 사슬을 풀어낸 외뿔은 즉각 대악마의 목에 걸친 채로 잡아당겼다.
-캬악, 크에엑! 키야악!!
다른 놈들은 묵묵히 발버둥 치는 동료를 응시했다. 대악마도 유황불을 쏘아내는 등 거세게 발악했지만, 외뿔이 그를 단단히 옭아맸다.
이윽고 용암 끓는 소리를 흘리며 축 늘어지자 외뿔은 거침없이 놈의 머리를 뽑아 버렸다.
권좌 앞까지 머리가 굴러갔음에도 세 쌍의 눈동자는 부동이었다. 다른 곳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설욕하겠습니다.
비로소 군주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무지렁이 놈이 처소까지 찾아왔으니, 놈의 머리를 뽑아 내 이름을 되찾겠습니다.
군주가 턱을 매만졌다.
《앙갈라툼, 네가 토벌대장으로 나서겠다고.》
137년 전, 무저갱의 악명을 실추시킨 대가로 종언이라는 이름을 상실하고 ‘경멸스러운 앙갈라툼’이라 멸시받는 외뿔.
한때 용암못에서 제일가는 챔피언이라 칭송받았던 대악마가 답했다.
―다섯 별빛 중, 세 개가 꺼졌으니 남은 하나마저 꺼트린다면 외계의 찬탈자들도 위대한 대국에서 실각할 겁니다.
앙갈라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곳까지 직접 죽으러 왔으니. 여기서 놈을 쳐 죽이고, 지상으로 올라가 마저 남은 놈도 찢어발기겠습니다.
벌써 그놈한테 죽은 동족만 몇이고, 붙잡힌 머저리 새끼들은 얼마더라.
머릿속으로 골똘히 손가락을 헤아려본 군주는 한숨을 참았다.
세상만사가 그리 녹록했다면 숨 쉬는 것만으로 열불 터지는 구덩이에 별들의 운행기 가량 머무르진 않았을 거다.
간교하게도 외세는 전면에 나서는 대신, 별이 점지한 대리자들을 내세운다. 하필 사념체들관 상성이 영 좋지 않아서, 놈들로 하여금 전력도 안배하고, 지상에서 영향력도 늘려주는 성가신 것들이다.
결국 직접 만나볼 수밖에 없나.
혀를 찬 군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토-드 셔-우-드.》
어느새 대전을 밝히던 횃불들이 사그라졌다.
석조기둥 아래를 가득 채우던 대악마들도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자그마한 인간 하나.
엄지로 찍어눌러 죽일만한 크기의 미물이 위대한 군주의 어전에 놓였도다.
불현듯 벌어진 상황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벌레를 향해 그분께서 말씀하시었다.
《여기다.》
정열과 충동의 영토를 다스리는 절대자.
잉걸불 의회의 대의원들이자 폭력으로 군림하는 무저갱에서 공경받으며 지배하는 악마들.
군주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실례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티끌이 말했다.
“그 웅웅 울리는 목청 좀, 부디 낮춰주실 수 있으신지요. 저는 귀하에 비하면 아득한 필멸자인지라 두개골이 깨질 것 같습니다.”
요놈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