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44
044
영원의 성화가 꺼졌다.
그로부터 ······이 지났다.
이 땅에 희망은 없다.
“아빠스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노인, 대수도원장이 눈을 떴다. 젊은 수도사가 공손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자네였군.”
“동부 변경주에서 불길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수도원장은 옆에 걸어둔 쇠지팡이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켰다.
“거룩한 예배당에서 할 얘기는 아닐 테지. 밖으로 가세.”
조심스레 바닥을 두들긴 노인은 회랑으로 그를 이끌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 회색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화단에 피어난 꽃의 향기를 맡았던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미소지었다.
“주의 은혜는 만물에 머물러있지··· 이 얼마나 자애로운 분이실꼬. 그분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이리도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하거늘.”
노인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도사를 응시했다.
“이 조화를 깨트리는 부정한 것들이 있어서 문제란 말이야. 그렇지 않나?”
수도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꽃이 피어나면, 마땅히 벌레들이 꼬이기 마련이죠.”
그 말에 비로소 노인은 빙긋 웃으며 양손을 맞잡고 읊조렸다.
“그 또한 주께서 안배하신 뜻이겠지. 그런 부조화를 정화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니.”
대앵-.
종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누군가의 비명이 희미하게 흩어진다.
“그래, 늙은이의 사족이 길었구만. 어서 이야기해보게.”
헛기침한 수도사는 재차 주변을 확인했다. 수녀들은 먼 곳에 있었고, 지나가는 방문객들도 없었다.
“···최근 제국 동부 변경주에서 제후들 간의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쾨흘링 주와 뵐케 주의 계승권을 두고 켄젤슐리텐 변경백과 그라워볼프 공작이 국지적 교전을 벌였다고 하더군요.”
얼굴을 찡그린 노인은 탐탁지 않은 듯,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탐욕스러운 것들. 애꿎은 유력자들의 싸움에 백성들만 고통받는 법이지. 그 거만한 놈들은 제 잘난 맛에 취해 거드럭대지만, 그놈들이 당장 지나가는 밭의 농노들보다 잘난 것이라고는, 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과 동전뿐이야.”
어깨를 으쓱인 수도사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영토를 두고 제후들이 분쟁을 벌이는 일이야 흔해빠졌지요. 기어코 켄젤슐리텐 변경백이 그라워볼프 공작의 본거지까지 밀고 들어가, 그를 죽이고, 그라워볼프 가문의 권역령을 모조리 몰수했다고 합니다.”
귀를 후비적거린 노인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다지 흥미 있는 내용은 아니구먼.”
한층 목소리를 죽인 수도사는 작지만, 분명하게 속삭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사령술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대앵-.
노인의 흐릿한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사령술사?”
“송장들이 걸어 다니는 걸 목격했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죽은 자들의 군세가 일어나 공작의 성을 뒤덮었다는 소문도 돌더군요.”
마치 무언가를 헤아리듯,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기던 수도원장이 중얼거렸다.
“실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다. 그 간악한 오르부스의 추종자들은 분명 바돌로매의 축일 날, 모조리 목을 매달렸다네. 당장 내 기억에 사령술사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고문헌이 3세기 전의 것이거늘···.”
침음을 흘리던 노인은 재차 바닥을 두들겼다.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입을 꽉 다물고 끙끙거리던 수도원장은 돌연 감탄을 흘리더니 수도사를 향해 빠른 어조로 물어왔다.
“휘하에 부리던 하인이 몇이라던가? 그 종류는? 혹여 검은 기사도 데리고 있다던가?”
수도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송구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지라, 일단 소문의 진위도 확실치 않은 상황입니다.”
“동부 지역은 뭐가 나타났다고 지껄여도, 이상하지 않을 동네긴 하지. 그러나 사령술사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쉬이 재단할 수 없네.”
노인이 힘을 주어 속삭였다.
“설사 그자가 사령술사를 자처하는 광인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사술을 행하는 자들을 교회마저 묵인해서는 아니 되네!”
가만히 수도원을 돌아보던 노인이 나직이 물었다.
“휘하에 남은 형제들의 동향은 어떠한가.”
“지난달 커스버트 경이 전사했고, 이튿날 종자인 렝엄과 길리먼도 명을 달리했습니다.”
수도원장은 탄식하며 성호를 그었다.
“아버지께서 그들의 영혼을 굽어살피길···.”
“마귀들의 공세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 교묘한 자도 이때를 노려 준동한 것일 테죠.”
시기가 좋지 않다.
가뜩이나 교회는 요즘 들어 심심찮게 나타나는 부마자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국 도처에서 나타나는 악마들의 강림을 진압하고, 소식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변방까지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다.
노인은 자신의 오른쪽 검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힘겹게 빼더니, 수도사의 손바닥 위에 그걸 올려놓았다. 반지에는 검을 치켜든 사사의 흉상이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마르커스 심판관을 파견하게. 특별히 그에게 2급 성유물인 ’달렌티아의 거룩한 분노’를 하사하노니, 소문의 발원지를 쫓고, 제국 동부에 사령술사가 나타났는지를 확인하고 돌아오라 전하게.”
달렌티아의 거룩한 분노는 과거 교회의 황금기에 장엄구마의 달인, 성 비안네의 손가락뼈로 제작된 성유물이었다.
영원의 성화가 꺼진 현시대에 교회가 죽은 자들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였다.
수도원장의 의지를 확인한 수도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지팡이를 두들기며 나아가는 노인의 등에다 대고 수도사가 물었다.
“진정 사령술사의 존재가 확인된다면,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뚝 멈춰 선 노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빨을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주께서 가로되 내 아들아, 네게 새로이 열린 땅으로 들어가, 거기 기거하는 자들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따라 하지 말라 명하셨나니.”
그의 자식들을 불꽃 너머로 걸어가도록 중용하는 자, 요사스러운 언어로 미혹하는 자, 죽은 조상과 이웃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혀로 뱉는 자, 세상의 규율을 비틀어 이적을 행하는 자들이라. 그들을 쫓아내고 용납하지 말라 하셨도다.
인자한 목소리로 경전의 내용을 읊던 수도원장은 이내 미소를 뚝 그치고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께선 불경자들을 가증스레 여기신다. 완전히 멸하도록 하라.”
반지를 천으로 감싼 수도사가 고개 숙였다.
이단 심문관은 제 소임을 다할 때까지 놈을 쫓을 것이다.
수도원장은 회랑을 나서는 수도사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발걸음을 돌렸다.
예배당으로 돌아온 그는 고해소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벽 한편에 걸린 천사의 성화.
그 앞에서 수도원장이 나직이 속삭였다.
“아버지, 저를 악으로부터 구하소서.”
속삭임이 멎었다.
킥, 킥······.
벽 너머로부터 희미한 조소가 들려왔다.
나팔을 치켜든 천사의 눈동자로부터 피눈물이 샘솟더니, 그림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을 굽힌 수도원장은 그걸 손으로 훔쳐 눈 위에 바르곤 고개를 숙였다.
성화가 옆으로 젖혀지니 그 뒤로 나선계단이 이어졌다.
수도원장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벽면을 짚으며 나아갔다.
지하로 향하고 있음에도, 벽이 점점 따뜻해진다. 노인의 얼굴이 차츰 일그러졌다.
놈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명백히 좋은 징후는 아니었다.
계단은 심연의 바닥까지 닿을 것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수도원장은 성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벽을 더듬으며 내려갔다.
누군가 왼쪽 귀에 대고 속삭인다.
노인네, 이제 계단 오르내리기엔 너무 늙지 않았어?
그는 단호하게 지팡이로 자신의 발을 내리쳤다. 고통으로 정신적 방벽을 더한다.
그렇게 바닥에 도달한 뒤에 수도원장의 발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상의 광구조차 빛이 닿지 않는 심연.
그럼에도 주변은 수천 개의 횃불을 켜놓은 것처럼 밝았다.
사람을 미혹시키는 기이한 광채는 중앙에 무릎 꿇은 사내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십 개의 송곳이 그의 전신을 꿰뚫고 있는 가운데, 이를 옭아매는 사슬마다 수호성인들의 이름과 경전의 구결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의 몸은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수도원장은 바닥에 놓인 양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절로 불이 옮겨붙고, 쇠사슬들이 흔들렸다.
어느새 사내가 눈을 뜨고 있었다.
퀭한 눈동자에서 진물이 떨어지고, 황금색 광채가 일렁였다.
“오랜만이구나.”
사내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울렸다.
여전히 수도원장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산트 안토니오, 놋그릇수도회의 창설자이시자, 신앙 교리성의···”
키득거린 사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장하구나. 단어도 못 외우던 네가 그토록 어려운 말도 이리 잘 읊게 될 줄은.”
그가 속삭였다.
“그렇다고 여기서까지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단다. 부디, 네게 익숙한 이름으로 불러다오.”
수도원장은 바닥에 놓인 대접을 훔쳤다. 눈가에 마른 핏자국을 덧칠하고, 재차 답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
사내가 미소 지었다.
///
마드로가 일행에 합류한 지 어언 5일째.
그는 별다른 돌발 행동 없이 무난하게 일행들과 어울렸다. 특히 길을 거닐다가도 쓸만한 풀이 보이면 어김없이 멈춰서곤 했다.
“아, 노루오줌풀이오! 스튜에 넣으면 잡내를 잡아주겠군.”
피에트가 반문했다.
“그건 독초가 아닌가?”
“이 꽃받침만 따로 떼어내서, 동물 기름에 달여먹으면 문제없지. 내가 차마 말은 못 하겠다마는, 이게 남자들한테 좋다오.”
대번에 쇠렌이 반색했다.
“더 따갑시다!”
마드로는 온갖 잡초에 박학다식했는데, 나름 약초에 해박한 토드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였다.
가만히 그의 행동 가지를 지켜보던 산시아가 속삭였다.
“스승님, 저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저 남자. 어째서인지 이상할 정도로 스승님과 닮은 것 같아요.”
“착각입니다.”
“혹시 잃어버린 친척이라든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토드는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산시아는 여전히 의심 어린 눈초리였다.
마드로가 짐꾼을 자처한 덕에 나머지 일행들은 짐이 가벼웠다. 궂은일도 마다치 않고, 지금까지 딱히 모난 구석도 보이질 않아서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여진 느낌이었다.
선두에서 걷던 이스라가 낮게 속삭였다.
【마을일세. 헌데 좀 기이하군.】
“무슨 일입니까?”
죽음의 기사는 안광을 번뜩이며 두리번댔다.
【목책에 핏자국이 가득하네.】
“일단 가봅시다.”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작은 움막 여러 채를 목책이 감싸고 있는 형태였는데, 목책 곳곳에 뾰족하게 깎은 말뚝이 돋보였다.
짐승 따위를 막기 위한 구조물이라기엔 지나치지 않나 싶었지만, 말뚝에는 여전히 핏물과 살점이 걸려 있었다.
‘무슨 악마 숭배자들의 마을인가?’
하지만 육안으로 보기에 마을에서 느껴지는 피의 업은 거의 없었다.
토드 일행이 입구까지 다다르자, 웬 남자아이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곧장 토드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비명을 흘렸다.
“으악! 이, 이 시간에 왜 시체들이?”
“저는 시체가 아닙니다. 지나가는 여행자입니다.”
창백한 얼굴을 살피던 아이는 눈동자를 굴려댔다.
“이상하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그렇다고 말은 하고.”
토드는 어딘가 불완전해 보이는 아이의 눈동자를 읽었다.
영매 체질이로군. 겉으로 보기엔 바보처럼 보여도, 저 녀석이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다.
아마 목책 주변에 두른 목책도 저 녀석이 깎아놓은 거겠지.
가방을 뒤적인 토드가 육포 조각을 하나 던졌다. 잽싸게 낚아챈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냄새를 맡고는, 슬며시 핥아봤다.
아이는 허겁지겁 육포를 먹어치웠다.
“마을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시체는 더더욱 아니고요. 혹시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아이는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입구가 열린 마을 안에는 온통 노인과 병자들뿐이었다.
“빠, 빨리 들어오는 게 나을걸. 곧 해가 져.”
영매의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깜빡인다.
“해가 지면, 시체들이 몰려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