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66
066
어둠 속에서 불길이 요사스럽게 번진다.
화염은 눈을 어지럽히고, 황 특유의 유독한 내음이 짙어 숨을 쉬기 곤란했다. 발치에는 녹아내린 핏물과 용암이 뒤엉켜 찐득거리고, 혀뿌리 밑엔 비린내 가득한 피 맛이.
귓가에는 악마의 조소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악연이었어.”
드레토모스는 검날에 묻은 피를 핥으며 입가를 이죽댔다.
눈앞의 필멸자는 그토록 자신의 과업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놈이었다. 처음 마주했을 땐 지옥의 투사라는 자부심조차 내던지고 도망가야 할 정도였다.
“······.”
거구의 곰으로 변신한 오드람은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를 상대한 악마 역시 곳곳에 상흔을 입었으나, 그리 깊진 않았다.
수년간 북부에서 은밀히 추종자를 늘리며 제물들을 섭식해온 악마와 달리, 스스로를 장작 삼아 불태워온 사내.
이제 둘의 격차는 현격했다.
“오랜 세월 동안, 네게 입은 굴욕을 네 피로 씻겠다. 영혼은 지하에 있는 내 영지로 끌고 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문해주마.”
드레토모스는 톱날처럼 갈라진 검날을 겨눴다.
“그만하면 충분한 보상이 되겠지.”
“···아직, 난 죽지 않았다!”
고함을 터뜨린 주술사가 손을 뻗어 사술을 행했다. 악마가 대검을 휘둘러 저주를 깨트렸으나, 곰의 발톱이 안면에 꽂혔다.
돌처럼 단단한 피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강력한 일격. 악마가 비틀대는 사이 오드람의 손에 푸른빛이 맺혔다.
“벽력의 보주-!”
코앞에서 극도로 응집된 전격의 구가 폭발했다.
꽈릉!!
악마의 목이 그을렸다. 그러나 드레토모스 역시 검으로 오드람의 옆구리를 헤집어놨다.
호흡할 때마다 덜렁이는 내장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오드람이 얼굴을 찡그렸다.
‘저번에 입은 부상이 끝내 발목을 잡는구나.’
회복력이 가장 빠른 곰의 형상을 취하고 있음에도 악마에게 입은 상처는 열기가 감돌았다.
반면 드레토모스는 금세 상처를 수복했다. 지상에 있는 제단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이 구덩이로 내려온 건 실수였다. 오드람. 이곳 전체가 내게 번제를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제단이거늘. 어찌 나를 여기서 상대하겠나.”
오드람은 약화된 상태에서도 자신과 호각을 이룰 정도로 만만찮은 상대. 하지만 소모전 형국으로 이어진다면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핏빛 기류가 악마의 육신에 스며든다. 제물로 바쳐진 인간들은 최대한 고통 속에서 허덕이다가 죽도록 안배되었다.
그래야 더 강한 효력을 발휘하므로.
필멸자들의 절규를 만끽한 악마가 오드람을 향해 물었다.
“이 비명들이 들리나? 오드람. 네가 그토록 아끼는 스칼바냐르 무지렁뱅이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번개 맺힌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자국이 메꿔진다. 오드람이 눈을 번뜩였다.
“네놈이 간교한 혓바닥을 놀리는 것도 여기서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무슨 수로?”
주술사는 힘주어 각각 힘과 기력을 끌어올리는 토템을 배치했다.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낄낄거린 드레토모스는 대검을 휘어잡으며 그를 비웃었다.
“드디어 노망이라도 났나? 오드람. 이젠 그깟 비루한 몸뚱이쯤이야 바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듯―”
돌연 악마에게 스며들던 기류가 끊겼다.
와락 표정을 구긴 드레토모스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벌레만도 못한 놈들이. 대체 위에서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토드가 제단을 파괴하고 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오드람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버프를 시전했다.
“내게 고목과도 같은 강건함이 깃들고. 조상신들이 내게 영험함을 불어넣노라.”
발을 구른 악마가 으르렁거렸다.
“어찌 요령 좋게 수작을 벌여놨더라도, 그 나약한 몸뚱이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보나!”
“아무렴.”
어느새 오드람의 형상은 황금색 멧돼지로 변해 있었다.
“내가 한창때는 너희 족속들을 틈틈이 잡아 족쳤는데, 이 꼴이 되어서도 네깟 놈을 못 데려갈까!”
악마가 거머쥔 검에 화염이 맺혔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궤적에 잿가루가 휘날렸는데, 허공에서 번뜩인 분진이 폭발했다.
그럼에도 화마를 뚫고 달려든 오드람은 엄니를 들이받았다.
“캬-아악!!”
악마는 붉은 혈액 대신에 발갛게 타오르는 용암을 흘렸다. 놈의 회복이 눈에 띄게 더뎌졌다.
그러나 드레토모스는 투사답게 싸움에 노련했다. 꼬리를 휘둘러 오드람의 발목을 후려치곤, 등판을 검으로 내리쳤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쏟아낸 오드람은 다시 전격을 터뜨렸다.
토템이 솟구치고, 쉴 새 없이 불길이 오간다.
치열한 공방 끝에 기어코 드레토모스의 검이 오드람의 오른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크으!”
외마디 비명을 쏟아낸 오드람이 급히 뒤로 물러섰다. 형상 변신조차 해제될 정도로 치명상이었다.
유유히 검을 치켜든 악마는 피를 털어내며 낮게 속삭였다.
“마침내 화신의 몸뚱이가 내 손에 떨어지는구나. 길고도 길었다.”
이를 악문 오드람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땅에서 바윗덩어리 정령들이 들고일어나 달려들었지만, 드레토모스가 고개를 비틀자 지면이 갈라지면서 끈적한 화염이 그들을 덮쳤다.
화염을 덮어쓴 정령들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제아무리 제단의 보조가 없더라도 역부족이었다.
드레토모스가 고개를 비틀었다.
“이해할 수 없어. 대체 무엇을 위함이었나? 주술사.”
그가 보기에 오드람은 이제 더 불태울 육신마저 남지 않은 재나 다름없었다.
“그러게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랬는가. 어차피 너희는 이 세상에 운명이 묶이지 않은 외지인이면서.”
왈칵 피를 뱉은 오드람은 나직이 답했다.
“운명이 묶이지 않았다고? 나는 여기서 산 세월이 더 오래되었다. 이 빌어먹을 놈아.”
늙은 주술사의 눈동자는 여전히 악마를 향한 적의로 가득했다.
“오, 애향심이 넘치시는군. 그래 봤자 일방적인 구애. 참으로 애잔하구나.”
악마의 비아냥에 오드람이 중얼거렸다.
“항상 느끼는 건데, 네놈 족속들은 말이 너무 많아.”
킬킬거린 드레토모스는 칼끝으로 오드람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나를 그토록 고생시킨 숙적인데, 단칼에 보내기엔 너무 아쉽지 않나. 걱정 말라고. 여기서 죽인 뒤에도 지옥에서 계속 떠들 테니.”
고개를 치켜든 악마가 정면을 응시했다.
“···마침 손님이 또 들어오시는군. 과연 저 녀석은 어떨까.”
드레토모스는 오드람이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칼자루를 비틀었다.
곧 무수한 무리들과 더불어 사령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갑다. 사령술사. 나는 열화의 투사, 드레토모스라고 한다.”
악마의 인사를 받은 토드가 화답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지옥의 투사여. 생각했던 것보다 신사적인 분이시군요.”
킬킬거린 드레토모스가 부여잡은 칼자루에 힘을 더했다.
“적어도 야만스러운 스칼바냐르 족속들보단 예절이나 교양에 대해 잘 알지.”
그러나 구덩이의 밑바닥은 교양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온통 척추뼈를 도려낸 희생 제물들이 내걸려 있었고, 그을린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는 너희가 외부 세계로부터 끌려온 영혼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 우리와 협력하라.”
악마의 통보에 토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협력하라고요.”
“그래. 우리는 쾨흘링에서부터 네 힘을 눈여겨봤다. 네 권능은 흉내만 내는 애송이들과는 궤가 다르지. 우리는 네가 진정 오르부스의 신관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요즘 따라 유독 스카우트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 기분인데. 토드는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네가 승낙한다면, 휘하에 있는 수족들로부터 모든 흑색 학파의 유물을 거두고, 너에게 넘겨주겠다. 뿐만 아니라 놈들을 운용할 수 있는 재량까지 약속하지.”
아까 흑마법사들도 그러더니, 악마까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게 생소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허허,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조건이군요.”
토드의 반응에 드레토모스의 어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만큼 우리는 그대의 잠재력을 높이 사고 있다. 또한 그대가 오래도록 솔마르의 사냥개들에게 박해받은 사실도 잘 알고 있지. 분명 우리는 공동의 적을 상대한다는 점에서 좋은 동맹이 될 것이다.”
“허면, 여러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토드의 질문에 드레토모스가 턱을 쓰다듬었다.
“목적이라.”
“예. 협력하라 하심은. 무언가 의도한 대계가 있기에, 거기에 더불어 편승하라는 의미가 아니십니까. 투사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인지 궁금하군요.”
그러자 악마가 히죽 웃었다.
“온 세상을 불태워버리는 것.”
“예?”
당황한 토드가 맥빠진 소리를 흘렸다.
“이 세상에 기거하는 필멸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는 신들의 파멸이다. 거창하지만 간단하지.”
“이 세상을 파괴하시겠다고요. 어째서요?”
토드의 물음에 악마가 되물었다.
“왜 의문을 품는가. 가끔 누군가 공들여 만들어놓은 걸 보면, 허물어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그건 대부분 유년기가 지나면 자연히 졸업하는 마음이라 생각했었는데요.”
“하지만 그 대상이 세상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지!”
악마의 눈빛엔 파괴를 향한 열의가 진심으로 묻어났다.
거창한 이유가 있거나, 자신들을 무저갱에 처박은 신들에 대한 분노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드레토모스가 악마 중에 특이한 개체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악마들도 저런 발상인 건진 아직 표본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저 순수한 열망으로부터 토드는 비틀린 광기를 느꼈다.
“그 대의에 제가 합류하실 거라 생각하신 저의가 있으십니까?”
“그대 역시 화신이 아닌가.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면, 그대도 자연히 종점에 도달한다.”
엔딩을 말하는 건가. 악마들이 세상을 파괴한다면, 엄연히 플레이어 입장에선 배드 엔딩이겠지만, 그건 악마 진영에서 합류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클래스 중에 악마 추종자는 악마와 협력하여 세상에 혼돈을 초래하는 게 엔딩 조건 중 하나였다.
이걸 타 클래스임에도 악마가 회유하는 선택지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거기 도달하면, 그대는 무엇이든지 소망하는 바를 이루게 된다.”
“소원이 주어지는 겁니까.”
이미 토드의 눈동자는 식었지만, 드레토모스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떠들어댔다.
“그래. 화신으로서 새로운 신격으로 승천하거나, 원한다면 힘을 가지고 그대가 원래 머물렀던 세계로 돌아가거나. 필멸자의 범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보상들이지.”
귀환? 토드는 비릿하게 웃었다.
“흠. 설령 저는 돌아간다고 치더라도. 정말 이 세상이 끝장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텐데. 그럼 당신들에겐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자 드레토모스가 태연히 대꾸했다.
“그게 문제 될 게 뭐가 있나. 그대의 존재가 다른 세상의 실존을 증명하지 않나. 부술 세계는 얼마든지 더 있겠지. 우리는 그곳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다.”
아하, 악마들은 메뚜기 떼나 다를 바 없는 녀석들이구나.
그저 피와 파괴에 미쳐버린.
“걱정 마라. 특별히 그대의 세상은 침입하지 않겠네. 대신 이곳은 철저히 말소될 것이다. 어차피 그대 또한 피차 자의와 무관하게 여기 끌려오지 않았나.”
드레토모스는 발치에 깔린 오드람을 가리켰다.
“어리석게도 이놈은 여기 있는 피조물들에게 지나친 애착을 느끼는 모양이지만···. 그대는 아닐 거라 보네. 그리 오랜 세월을 머무르지도 않았고, 그동안의 여정은 박해와 고행으로 얼룩지지 않았나.”
토드의 입가가 삐뚤어졌다.
악마는 그것만 보곤 승낙하는 것이라 여겼는지, 검을 잡았다.
“그럼 이만 주술사를 죽여, 우리의 서약을 위한 제물로 삼는 게···”
“아니요.”
토드의 대답에 악마가 반문했다.
“뭐?”
“아무래도 저는 당신들과 함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드레토모스가 헛웃음을 삼켰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사령술사.”
이빨을 드러낸 악마가 으르렁거렸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걸. 우리와 교회를 동시에 대적하면서, 네가 종점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마라.”
빙긋 웃은 사령술사가 대꾸했다.
“여러분이 세상을 불태워버리면, 20년 넘게 닦은 적 없이 졸인 스튜도 먹지 못하겠죠?”
악마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주점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사람들도. 시장 바닥에서 흥정하는 아낙들. 흙탕물에서 돼지와 더불어 뒹굴고, 담벼락에서 오줌이나 싸 갈기는 취객들도 없어질 테고요.”
악마는 토드에 대해 크게 오판했다.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친놈이었고, 누구보다도 중세 랜드를 사랑하는 인간이었다.
“목책으로 쌓아 올린 마을과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들, 광장에 모여든 인부, 구두장이, 탐욕스런 장사치, 동전 한 푼 없는 냉혈한, 장검 찬 용병들까지. 이런 것들이 전부 사라질 거 아닙니까.”
이 세상은 모난 구석이 있긴 해도, 제법 마음에 든다. 이전 세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드레토모스를 마주한 토드의 눈동자가 서늘했다.
“···그건 좀 마음에 안 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