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necromancer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9
009
인간이 모닥불처럼 타오른다.
겹겹이 쌓인 주검은 횃대처럼 솟아있고, 생전에 삶을 향유하던 터전은 화로가 되어 남겨진 편린을 살라먹는다.
쇠렌이 걸쭉한 침을 뱉고는, 중얼거렸다.
“지독하군.”
일전에 방문했던 마을과 비교하면 이곳은 나름 번성하던 곳이었다.
근처에 나루터가 있어 오가는 인구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였다.
누가 저지른 짓인지 숨기지 않겠다는 듯, 마을 입구에 창대가 위풍당당하게 꽂혀 있었다.
늑대 깃발이 휘날린다.
카리나가 손을 휘두르자, 무형의 기운에 창대가 꺾여 바닥에 흐트러졌다.
“······.”
생존자는 없다.
아직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아 마을 내부로 진입하는게 여의치않았지만, 토드는 멀리서 보이는 시신의 윤곽을 살폈다.
“학살이 자행된 지 꽤 시간이 지났군요. 구더기의 크기로 보아 닷새는 넘었습니다.”
“여기도 비가 내렸을 텐데,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건···”
“권능으로 일으킨 불이야. 앞으로 이틀은 더 타오르겠지.”
“그, 마법사 양. 불길을 꺼트릴 순 없겠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내가 섣불리 손대기엔 이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어. 불을 피우는 것보다 거둬들이는 게 더 많은 마력을 필요로 하고.”
본격적으로 전장이 가까워지고 있다.
여기서 정신력을 소모하기엔 힘을 적절히 안배할 필요가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피에트는 기도에 여념이 없었다. 슬쩍 토드를 살피던 쇠렌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 양반. 대충 뭔 생각을 하는진 알겠는데, 우리도 갈 길이 바쁘잖아. 응? 저 사람들한텐 유감이다만.”
토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마차에 오르시지요. 간략하게 넋만 달래주고 가겠습니다.”
수통을 연 사령술사가 원을 그렸다.
향로의 바닥에 물을 조금 채워놓고, 부싯돌로 불을 붙인다.
왼손엔 방울, 오른손엔 향로를 쥔 채로 천천히 흔든다.
애도하거나 비통한 말을 건네진 않는다. 그저 나직이 휘파람을 불며 부른다.
향로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번지다가 흐릿한 필름처럼 환상을 투사했다.
전조없이 들이닥친 군병들. 이리 깃발을 든 기수. 불안에 찬 아이들의 눈빛. 다른 마을에서 끌고 온 것으로 보이는 포로들.
어느 쪽에 충성하겠냐는 물음도 없었다.
곡물 자루와 돈이 될 만한 것들을 거둬들인 뒤에, 잡초를 베듯 나머지는 모두 치운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들의 아우성이 잦아들고 고요에 잠긴다.
그걸로 환상은 잦아들었다.
이윽고 사령술사가 입을 떼었다.
“여기 가엾은 자들이 당신의 품에 귀의합니다. 우리는 본디 땅에서 비롯되었나니, 마땅히 한 줌의 티끌로 돌아갑니다. 어머니의 하해와 같은 품속에서 저들이 아이처럼 편히 잠들도록―”
홀연히 바람이 분다.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눈물의 업을 30%는 채울 정도였다.
이만한 수의 영가를 달래줬다면 오늘 밤은 편안히 잘 수 있겠지.
향로를 거둔 토드가 뒤를 돌아보니, 정작 마차에 오른 이는 없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일행중에 유독 피에트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드, 자네는··· 누구인가?”
향로와 방울을 갈무리한 토드가 답했다.
“장의사입니다.”
작게 신음을 흘린 피에트가 힘겹게 되묻는다.
“자네는 아버지 솔마르와 그분의 권위를 믿나?”
“글쎄요.”
피식 웃은 토드는 문득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지닌 지엄한 지위를 무시하진 않습니다. 다만 때때로 아버지께서 미처 보살피지 못하는 자들에겐 어머니의 자애로운 보살핌이 필요한 법이지요.”
이 땅의 피조물들이 섬기는 아버지는 질서의 신, 솔마르다.
그렇다면 불경한 사령술사가 모시는 어머니는 누구란 말인가.
지금만큼 피에트는 식견이 짧음을 후회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토드와 신학적 논쟁을 벌일 만큼 유식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미처 꺼내지 못한 언어가 목구멍에서 맴돌다 흩어진다.
“이만 갑시다.”
토드도 마차에 오르려는데, 웬 까마귀 하나가 전소한 물푸레나무 가지에 올라앉았다.
까악-.
큰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들이 괜히 죽음의 전령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놈들은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영리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을 미리 찾아온다지. 그래야 신선한 만찬을 만끽할 수 있을 테니.
고개를 갸웃대며 토드를 돌아보던 까마귀는 이내 자리를 박차고 힘껏 날아올랐다.
녀석이 향하던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토드가 외쳤다.
“쇠렌 씨. 앞에 날아가는 까마귀, 보입니까?”
“설마 저걸 따라가라고?”
“예. 그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대로 쭉 가도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헤어질 때가 온 것 같으니, 품삯도 거기서 나눕시다.”
장물아비가 다소 불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거, 장의사 양반. 내 입은 자물쇠처럼 묵직하기로 유명했다는 거만 알아두고! 이 쇠렌하면, 의리 하나로 먹고 살아온···”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쇠렌을 잠재운건 피에트였다.
“자네는 입 다물고 말이나 몰게! 아직도 토드 군이 그럴 위인으로 보이나?”
“아니, 확실하게 해두는게 낫잖어. 영감!”
옥신각신하던 마차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움직인다. 카리나는 여전히 피곤한 듯, 짐에 기댄 채로 졸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력으로 미리 방어 주문을 둘러놓은 건 칭찬해줄 만한 준비성이다.
토드 역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피범벅이 되어 꿈틀대는 사람들의 최후가 눈에 선하다.
그러나 별다른 감상을 느끼진 않는다.
무수한 형태의 죽음을 목격했고, 매장은 일상적인 의례나 다름없다.
의례를 행함에 있어 토드의 부동심에는 변화가 없다.
한때 죽음을 두려워하고, 인명이 파리만도 못한 세상의 부당함에 분노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사령술의 길을 걸으면서 남긴 족적 너머, 묻힌 것은 직접 수습한 시신들 뿐만이 아니었다.
무수한 고뇌와 불꽃처럼 타올라 이내 거품처럼 휘발되고 마는 상념마저 토드는 손수 매장했다.
단순히 송장을 많이 본다고 죽음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는 구조기에, 끊임없이 덜어내고, 깎아내서, 묻어버린다.
사령술사 토드는 그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문명 세계의 이방인이 야만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받아야만 하는 세례였다.
“······.”
문득 까마득히 먼 과거, 낡은 기억의 서랍 속에 잊혀있던 한마디가 떠오른다.
‘니도 공부 안 하면 애비처럼 이런 일이나 하는 기라.’
암요. 아부지.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요.
항상 자신이 업으로 삼은 일을 부끄럽게 여기셨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 집안 내력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리라곤.
지난 일이다.
토드는 웃고 말았다.
들끓던 잡념이 가라앉고, 오롯이 무상함만 남는다.
///
그 뒤로 이틀이 지났다.
마차가 숲길을 거닐고 있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진다.
차창 너머 고개를 내밀어보니 빗줄기에 전나무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양분될 자, 이리 오라는 듯 손짓하는 것만 같다.
눈을 가늘게 떠보니 우거진 가지 밑에 까마귀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새카만 유리알 같은 동공이 깜빡, 깜빡, 토드를 응시했다.
저렇게 숫자가 많은데, 울음 소리를 내는 놈이 하나 없다.
놈들은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성대한 만찬을 앞두고 지키는 나름의 예절인 셈인가.
토드는 마부석과 짐칸을 가로막는 판자를 두들겼다.
“쇠렌 씨. 이만 여기서 마차를 세웁시다.”
“엉? 영감이 다음 마을까지 이틀은 더 가야 한다는데?”
“이 앞에서 곧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누구도 토드의 말에 딴지를 걸진 않았다. 그들도 은연중에 이 일대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공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일행들을 돌아보던 토드가 빙긋 웃었다.
“그럼, 이쯤에서 정산을 해볼까요?”
“잠깐. 코앞에 전장이 있다면, 전투의 향방을 보고 결정하는 게 어떻겠나?”
피에트의 제안에 카리나가 반발했다.
“뭐? 지금 얌체같이 한발 물러서서 관망만 하다가, 싸움이 다 끝나고 나서야 슬금슬금 기어들겠다고?”
“나는 마법사 양이나 토드 군과 달리, 일개 장사꾼일세. 신비로운 힘이나 명석한 지혜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 한낱 필부가 이토록 오래 산 건 동아줄을 고르는 눈치 덕분이었네.”
마법사가 낮게 으르렁거린다.
“이리공이 저지른 패악질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그런 말이 나와?”
이에 쇠렌이 피에트를 두둔하고 나섰다.
“죽은 사람들은 안타깝지. 근데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지, 어쩌겠나. 누가 옳고 그름을 논하는 건 우리 일이 아냐. 영감 말마따나, 우린 더 많은 동전을 나눠줄 나으리 꽁무니나 쫓을 수밖에 없어. 그런 걸 일일이 신경쓰면서 각박한 요즘 시대에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도의라곤 모르는 이 비열한 장사치들! 신발 밑창에 붙어먹는 바퀴벌레 같은 족속들 같으니!”
눈썹을 사납게 치켜든 카리나가 그들을 거칠게 매도했다. 그나마 피에트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듯한 눈치였지만, 쇠렌은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
“날 뭐라 불러도 좋아. 마법사. 근데 거창한 사명감이나 양심이 배를 채워주나? 다 부질없는 짓이야. 설령 나중에 불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난 기꺼이 피 묻은 동전 몇 푼 받고 살아있을 때 최대한 누리다 갈 거라고.”
싸움 구경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없지.
평생토록 상아탑에서 이상을 좇아온 자와 현실의 관습에 순응하며 연명하는 이들의 대립이다.
아직 불꽃처럼 열정적인 순수함을 간직한, 어린 마법사에겐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불꽃이라는게 으레 그렇듯 드세게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잦아드는 법이지.
과연 저 몽상가가 이 여정의 끝에서도 정열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과정이다.
허나 여기서 언성을 높이며 논쟁을 벌이는건 무의미했다.
곧 격전이 임박했나니.
“에스터리츠 양. 당신의 고결한 성품으로는 용납하기 어렵다는걸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난입하는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입니다.”
즉각 화염 마법사의 드센 눈길이 이쪽으로 향한다.
“왜, 사령술사? 하긴 네 목적도 이들과 다를 바 없겠지. 어차피 교전이 끝난 뒤에 전사자들의 사기(邪氣)만 수거해가면 그만이니까.”
“전투에 돌입하면 피아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에스터리츠 양도 보셨겠지만, 이리공 측에도 마법사가 있습니다. 당신이 변경백 군을 위해 개입한다한들, 섣불리 나섰다간 자칫 전열이 흐트러질 우려가 있습니다.”
토드는 타이르듯, 침착하게 설명해줬다.
“종군마법사가 전장에서 사용하는 주문은 사전에 철저히 약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지휘관들이 그걸 고려해 병력을 운용하고, 효과적으로 적을 타격하는 겁니다. 적색 마탑에선 이런 전술 운용에 대해서 사전에 고지받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이런 내용도 가르칠텐데, 카리나의 사고가 일련의 사건에 매몰된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그녀에게 당황한 기색이 엿보인다.
그가 성큼 다가서자, 카리나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한데, 느닷없이 소속도 모르는 마법사가 옆구리에서 불난리를 일으키며 끼어든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무리 주문을 이리공 쪽으로 난사한다고 해도, 변경백의 병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과연 그들이 에스터리츠 양을 보고 환호하거나 전의를 불태울까요?”
가라앉은 검녹색 눈동자가 깊다.
고인 늪지의 이끼를 연상시키는 탁한 시선.
“제가 지휘관이었다면 즉시 병사를 물렸을 겁니다.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으니까요. 약속되지 않는 변수에 도박을 걸만큼 전장의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에스터리츠 양은 선의로 개입한거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전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진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럼 나더러 변경백의 병사들이 다 죽도록, 내버려두라고?”
“한 번의 교전으로 전력이 몰살당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물며 유력 제후들의 싸움이라면요. 여기서 변경백이 패퇴하더라도, 전세를 뒤집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수세에 몰린 변경백이 곤경에 처하긴 하겠지만, 토드가 바라는 건 보다 극적인 등장이다.
“요컨대 적절한 시기를 노리자는 겁니다. 지금은 결코 아닙니다. 머리를 식히고, 냉정하게 통찰해보시지요.”
입술을 깨문 카리나가 괴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당장은 판단을 유보하겠어.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실히 할 거야.”
그녀의 손끝이 토드를 향한다.
“그런데 똑똑히 알아둬. 내가 끝까지 방관하지만은 않겠다는 걸.”
절도 있게 고개 숙인 사령술사가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럼 가실까요.”
무수한 영혼이 연소될 무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