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소동(3)
다음 날 정오.
“……?”
4교시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서던 수현이 멈칫하고 걸음을 멈췄다.
뒷문에서 누가 봐도 어색한 포즈로 서 있는 이경민과 선배들, 그리고 서지훈을 발견한 거다.
얘기는 어제 다 끝난 게 아니었나?
아니지, 나를 기다리는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애써 예감을 떨치려 했으나,
“하하, 수현이 안녕.”
“생일파티는 잘했어?”
“점심 먹으러 가니?”
역시 수현을 기다리는 게 틀림이 없었는지, 선배들은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우르르 수현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깍듯하게 인사하자 선배들이 이번엔 동시에 와하하 웃더니 수현을 둘러싸고 자연스럽게 몰아갔다.
“마침 잘 나왔어. 지금 학관에 핫도그 나올 시간이거든? 10분만 지나도 다 팔린다? 먹으러 가자.”
“그래. 간 김에 밥도 먹자. 밥 먹고 후식으로 핫도그 어때? 괜찮지?”
“학관 메뉴 내가 오는 길에 슬쩍 보고 왔는데 오늘 2,000원짜리 밥 진짜 잘 나오더라. 내가 쏜다. 다들 가자!”
선배들은 얼렁뚱땅 수현을 학생회관 식당으로 끌고 왔다.
분위기가 묘했다. 한 선배는 식권을 끊어주고, 한 선배는 식판을 대신 받아주고, 한 선배는 자리를 잡아주고.
이건 뭐, 후배 대접이 아니라 거의 교수 대접하다시피 쩔쩔매는 느낌.
“뭔데요?”
결국 식판을 받아든 수현이 새초롬한 눈으로 선배들에게 물었다.
“뭐가?”
“무슨 얘긴데요? 뭐 때문에 이렇게 잘해주시나 싶어서요.”
“하하! 잘해주기는! 선배가 후배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우리 수현 후배님한테 밥 한번 사주고 싶다고 했잖아. 마침 얼굴 본 김에 오자고 한 거야.”
“물론 다른 이유도 있긴 해.”
어색하게 답하는 선배의 말허리를 이경민이 싹둑 잘라먹더니 어깨를 으쓱 올리며 용건을 이어갔다.
“5교시에 또 수업 있니?”
“아뇨. 월, 화, 수가 좀 빡빡하고 목, 금은 널널한 편이라. 오늘은 이걸로 끝이에요.”
“그럼 밥 먹고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이경민만의 부탁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제 수현의 집에 함께 찾아온 두 선배와 인간 줄자 서지훈까지 간절한 똥강아지 눈빛으로 수현을 바라보았고, 수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있어서 길게는 어려워요. 30분 정도면 괜찮을까요?”
“어? 30분? 충분하지! 충분해!”
“그래. 그럼 우리 밥부터 먹자. 와, 오늘 제육볶음 죽인다. 콩나물국도 얼큰하고. 먹자, 먹어.”
후다닥 점심을 먹어 치우고는 핫도그를 하나씩 들고 미대 실기동 앞 벤치로 향했다.
“커피 한 잔씩 하자.”
이번에도 선배들이 우르르 나서더니 자판기 앞에서 밀크커피와 우유를 차례로 뽑아 반반 섞은 걸 수현에게 건네주었다.
“마셔봐. 이렇게 커피랑 우유랑 반씩 섞어 먹으면 진짜 고소하고 맛있다?”
“맞아. 이거 혼자일 때는 못 먹는 거잖아. 마침 우리가 인원이 딱 다섯 명이라…… 야, 서지훈. 너는 그냥 커피 마셔라. 짝이 안 맞네.”
“그래. 너는 죄인이니까. 그냥 맛 없는 거 먹어.”
“네, 알겠습니다.”
“……?”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장난처럼 보이는데 장난 같지 않은 분위기.
선배들이 은근히 서지훈을 먹이고 있었고, 서지훈은 대역 죄인이라도 된 양, 순순히 구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미안하다, 한수현.”
서지훈이 수현의 맞은편에 앉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뭐가요?”
앞뒤 잘라먹은 사과의 의미를 되묻자 서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 때문에 네가 안 좋은 소문에 시달렸다며. 난 일이 그렇게 될 줄 모르고 한 말인데. 하, 어쨌든 미안해. 내 잘못이야.”
대충 짐작해보자니, 최근 과에서 번진 소문을 가리키는 모양.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서지훈이 소문을 낸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수현에게 사과할 일이 있는 걸까?
“혹시, 그 소문, 선배가 내셨던 거예요?”
“어?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야.”
수현이 확인하자 서지훈이 손을 내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그게 일이 좀 꼬인 것 같아.”
그리고 그쯤에서 정리왕 오지라퍼 회장, 이경민이 나섰다.
“지훈이가 지난주에 회화과 98학번 애들 몇을 데리고 가서 밥을 사줬대. 그게 마침 백현대 지하철역 쪽 식당이었고.”
사정은 이랬다.
밥을 먹으러 가던 길에 서지훈과 후배들이 문제의 전광판을 보게 됐고, 거기 나온 그림을 두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는 것.
그런데 그중 누군가 그림의 주인공이 백현대 회화과 1학년이란 소문을 들었단 말을 했다는 거다.
“근데 내가 볼 땐 그게 회화과 1학년 학생이 그려낼 수준이 절대 아니었거든. 그래서 가볍게 말했어. 나 정도 되는 인물이 그렸다면 모를까, 1학년이 그렸다는 게 말이 되냐고. 진짜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서지훈이 후회막심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이상한 소문으로 번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 다음 날인가부터 그 그림을 내가 그린 거란 얘기가 학교에 돌기 시작하더라고.”
“흐음.”
수현이 팔짱을 끼며 가만히 얘길 들었다.
듣고 보니 이해가 안 될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 말이야, 없는 자리에서 누구든 가볍게 할 수 있을 만한 정도였으니까.
다만 걸리는 건 그 소문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번진 건지, 그리고 소문이 날 때 서지훈이 어떻게 대처했는지였다. 그 궁금증을 알아차렸는지 서지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나중에 알고 당황했는데, 아니라고 말해도 그뿐이더라고. 소문은 이미 나고 싶은 대로 나버려서 걷잡을 수가 없더라. 근데 황당하게 그다음엔 네 얘기가 들리는 거야.”
그 뒤부터는 수현도 아는 얘기였다.
안 그래도 뜨거운 감자에 수현과 친구들이 나눈 얘기가 더해져 폭발력을 일으켰던 것.
“어쨌거나 내가 처음 입을 잘못 놀린 건 사실이야. 너한테 정말 백번 사과하고 싶어.”
“아니에요. 저랑 친구들이 조심성 없게 얘기한 부분도 있는 거라.”
악의가 있는 일이 아니었고, 본인도 뉘우치고 사과를 하니 됐다고 생각하며 수현이 그만 자리를 정리하려 할 때였다.
“그런데, 진짜 너야?”
서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요?”
“전광판 그림. 쇼케이스. 그거 진짜 네가 그린 거냐고.”
“네?”
질문과 동시에 수현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벤치에 앉아있던 애들은 벌써 수업에 들어갔고, 길에도 귀가하는 학생들이 지나다닐 뿐, 다른 듣는 귀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수현의 반응으로 확신이 섰는지 회장 이경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어제 주환이가 너희 집에서 화장실 쓸 때 말이야. 구조를 잘 몰라서 실수로 다른 방의 문을 열었대.”
“맞아.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너무 급해서 벌컥 열었는데, 그림들을 보관한 방이더라.”
“아.”
그 말에 수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조금 걸리던 부분이긴 했다. 집으로 돌아가던 선배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해서 작업방을 열어본 건가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쳤던 거다.
“맞아요. 전시를 하게 됐는데, 거기 관련된 그림이에요. 그런데 아직은 공개할 타이밍이 아니라서…… 지금은 선배님들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수현이 싱긋 웃었다.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했다.
‘소문이 안 났으면 모를까. 이렇게 시끄러워졌는데 가만히 입 다물고 있기도 껄끄럽긴 했지. 연말 전시회에야 그림을 그린 작가가 나란 게 밝혀지면 선배들, 동기들이랑 얼굴 보기가 난처했을 거야. 오히려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거고.’
학생회의 중심, 그리고 소문의 당사자가 알게 된 것도 잘된 일이었다. 소문을 진화하는 데에 확실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선배님들이 과에 번진 소문들 좀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 당분간 제가 주인공이란 건 숨기고요.”
“그럼, 가능하지! 처음부터 지훈이 말이 와전돼서 생긴 소문이니까.”
“그래그래. 네 얘긴 절대 함구할게!”
“와. 미쳤다. 근데 진짜 너라고?”
“너 전국대회 일등했단 소문은 들었어. 세현예고 시절에도 날렸다고 하고. 그래도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하. 자괴감 느껴지네. 대체 어떻게 그렇게 그릴 수 있는 거야? 전시회는 또 뭐고?”
선배들은 흥분한 얼굴로 질문을 쏟아내다 수현을 칭찬했다. 그리고,
“근데, 우리는 믿어주는 거야?”
어제 작업방 문을 잘못 연 선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요?”
“실수라고 해도 지훈이는 말을 잘못 흘렸고, 나는 네 그림을 미리 본 건데.”
“뭐, 그걸로 선배들이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수현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계약된 그림이고, 제가 작가라는 건 관계자 모두가 알고 있어요. 대중에 공개하는 시기만 늦춘 건데, 허위사실이 유포되거나 다른 엉뚱한 사건이 터지면 오히려 그 당사자가 무척 곤란하게 될 거예요.”
그건 이번 일을 상의한 김영인 부장이 해준 말이기도 했다.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여기저기서 터질 거란 예상은 했다면서. 그리고, JK그룹이 뒤에 있으니 아무 걱정할 게 없단 든든한 말도 건네주었고,
어쨌거나 묵직한 말에 선배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근데 우리가 입을 다물어도 네가 그린 그림이라는 게 알려질 수도 있어.”
인간 줄자 서지훈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내가 98학번 후배들 밥 사주다가 쇼케이스 그림의 주인공이 백현대 회화과 1학년이란 소문을 들었다고. 그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니까.”
그러고 보니, 잠깐 의문이 들긴 했다. 그 소문은 또 어디서 시작된 걸까.
“혹시, 누가 했던 말인지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금발로 탈색한 애 있잖아. 단발머리, 곱상하게 생긴 남자애. 이름이 뭐였더라. 아, 김민준!”
“하아.”
저도 모르게 수현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전부터 내 그림을 유심히 봐왔던 애니, 쇼케이스 그림을 보고 내 그림이 아닐까 의심했을 수도 있겠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전국대회 시상식 때 던진 조용한 경고 덕분이었는지, 백현대 회화과에 들어와서는 수현에게 먼저 접근하거나 아는 척하지 않던 김민준이었다.
그런데 수현의 그림인 걸 짐작하고 뒤에서 슬쩍 소문을 흘렸다니, 참 질리는 일이었다.
‘제발 관심 좀 꺼줄 순 없나.’
수현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지자 이경민과 서지훈이 앞다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마!”
“그래. 김민준이고 누구고 앞으론 쇼케이스 관련해서 어떤 허튼소리도 하지 못하게 우리가 관리할 테니까.”
“사실 소문이라는 게 원체 자극적인 방향으로 퍼지기 마련이라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겠거니 하고 안일하게 생각한 부분이 있었어.”
“맞아. 하지만 이렇게 두고 볼 일이 아니네. 우리가 그 헛소문 완전히 뿌리를 뽑아버릴게.”
“그래. 어디서 들은 얘긴지 출처를 파악해서 소문의 원흉들을 아주 아작 내버리겠어.”
“근데 수현 후배. 그러려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다시 서지훈과 이경민이 수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뭔데요?”
“소문이 잠잠해질 동안만이라도 우리랑 같이 다니면 어때?”
“보니까 같은 수업 듣는 날도 제법 되는 것 같더라. 이번에 개설된 공통수업 때도, 널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말 나온 김에 시간표 좀 꺼내봐봐. 겹치는 과목도 보고, 동선 좀 연구해보자.”
“꼭 그래야 해요?”
“과에 번진 소문을 가라앉히려면 이게 최고야. 소문에선 대척점에 있던 주인공들이 친하게 다니는 모습을 보이면 저절로 시들해질 거라.”
“그래. 그리고 우리랑 다니면 수현 후배도 엄청 편할걸? 그림이야, 워낙 잘 그리니까 도와줄 게 없겠지만 교양수업이라든가, 지뢰 과목들. 시험에 관한 정보, 이런 건 우리가 아주 빠삭하고 말이야.”
“그래.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서지훈 이 자식은 막 굴려도 돼.”
“네?”
“들어보니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너한테 고약하게 굴었다며? 세현예고 출신이란 걸 트집 잡아 시답잖은 조언도 하고.”
“아, 그거요.”
수현이 없는 자리에서 별별 얘기가 다 나왔던 모양이었다. 수현이 피식 웃자 서지훈이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내가 정말 부끄럽고 할 말이 없다. 내가 그날 오티 분위기에 취해 가지고 이런저런 말을 한 건데, 네가 그런 실력자인 줄 알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하, 먼저 봤던 세현 애들이 너무 별로였거든. 아니다, 또 말실수할라. 어우, 아주 내가 내 입을 꿰매고 싶어. 정말.”
94학번 서지훈.
그리고 93학번 이경민과 친구들.
스물넷, 다섯으로 대학 안에선 한참 선배인, 1학년 입장에선 하늘 같은 학번이었지만 수현이 보기엔 이들도 어리고 애였다.
그러니 이렇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수습하려는 게 어떤 면에선 기특했다.
“뭐, 세현예고에 대한 선입견은 저도 억울한 부분이 있지만, 그건 차차 새로운 경험으로 덮어질 일이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찾아와서 힘든 얘길 해주셔서 저도 감사해요.”
“당연하지. 개인 작업도 중요하지만. 과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엉뚱한 소문으로 분위기를 흐리게 할 순 없으니까.”
이경민이 입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천상 학생회장 타입이었다.
어쨌거나 그날의 짧고 굵은 면담은 그것으로 끝났고,
선배들이 호언장담한 대로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과를 요란하게 했던 소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었다.
정보 수집에 능한 박선화의 말에 따르면 악의적인 소문의 최초 유포자들은 결국 회장 이경민에게 덜미를 잡혀 눈물, 콧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고 했다.
찝찝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다소 요란한 느낌은 있었으나 수현에게 나쁠 일이 아니었다.
거추장스러운 일이 잠잠해졌으니 다시 대학 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됐고, 언제든 쓸 수 있는 용병 같은 노예 선배도 생기게 된 거다.
그건 퍽 든든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