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첫 과제(2)
“미쳤어. 이게 다 뭐야?”
수현이 거실을 둘러보며 이마를 짚었다.
“왜? 우리 작업에 필요한 거잖아.”
오유나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필요하긴 하지. 근데, 이게 다 얼마야.”
오유나는 애니메이션 과제에 필요한 일체의 장비를 통 크게 구입해 거실 한쪽 면 책상에 줄지어 세워놨다.
최신형 파워 매킨토시 두 대와 스캐너 두 대, 프린터 두 대, 사양이 살짝 떨어지는 그래픽 전용 컴퓨터가 또 두 대. 그리고 중형 타블렛까지.
대략 천만 원 정도는 들었겠다 싶은 어마어마한 장비였다.
“와, 피씨방 같다.”
서지훈이 감탄하며 컴퓨터를 살펴보다 게임을 할 수 없는 작업용 컴퓨터란 걸 알고 다시 실망한 얼굴이 됐다.
“컴퓨터 쓸 줄 아시죠? 지훈 선배랑 경민 선배는 저기 창가 쪽, 스캐너 붙어 있는 자리로 앉으세요.”
그걸 짓궂게 바라보던 오유나가 다시 당당하게 지시를 내렸다.
“자, 선배들은 우리가 그린 원화들을 차례로 스캔받아 파일로 저장해주시면 돼요. 원화 그려진 종이에 넘버링 해놨으니까 파일명도 종이에 맞게 해주세요. 그래야 나중에 연결할 수 있어요.”
“여기 반반씩 나눴으니까 한묶음씩 가져가세요.”
“타프는 스캐너에 테이프로 고정해놨는데, 틀어지지 않게 조심해주세요. 스캔받을 때 종이 각도도 잘 좀 맞춰주시고요. 안 그러면 나중에 일일이 각도를 다시 맞춰야 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 스캔 말고 좀 일다운 일을 주면 안 될까?”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단순한 작업을 지시하는 오유나에게 서지훈이 울상을 지어 보였으나 오유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과제잖아요. 작은 도움 정도면 모를까, 그림을 그리거나 직접적인 관여를 하는 건 반칙이죠. 그리고 스캔이 뭐가 어때서요? 우리로서는 시간을 확 단축해줄 작업인데? 자, 멍하니 보지 말고 움직여요, 움직여!”
어디서 속성 과외라도 받고 온 건지, 애니메이션의 전반적인 과정을 빠삭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유나.
그래선지 일을 지시하는 폼은 제법 당당하고 자신감 넘쳤다.
장비와 장소 제공, 기술적인 지원을 해준 덕분에 작업 속도를 올릴 수 있게 됐으나 수현은 자꾸 안타깝고, 한편 속이 쓰렸다.
암만 생각해도 오유나의 이번 투자는 과했고, 돈이 너무 아까웠던 거다.
‘최신형 컴퓨터라 해도 이 시기 컴퓨터는 메모리며 하드가 보잘것없는 수준인데, 게다가 1년만 지나면 성능 좋은 후속 모델이 개발될 거야. 그걸 생돈을 들여 다 사다니, 너무 아깝다.’
그러나 오유나에게 다가올 미래를 예언하듯 말해줄 수도 없고, 말한다고 들을 오유나도 아닌지라 결국 수현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촤르르륵-.
몇 주간 매달려 완성된 원화 묶음의 상단을 한 손으로 단단히 잡고 다른 손으로 빠르게 넘기자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릴 때 했던 놀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쉬는 시간, 수첩에 그림을 여러 장 그려 빠르게 넘겨보면 그림들이 생명을 얻은 듯 힘차게 움직이며 동작을 만들어냈다.
애들과 몇 번이나 돌려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이젠 그 놀이를 제법 형식을 갖춰 정해진 규격으로 만들어보는 거다.
이왕이면 멋지고 재밌게.
그렇게 생각하자 고된 과제도 얼른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선물 상자처럼 느껴졌다.
쓰윽-.
수현이 손을 들어 펜을 잡았다.
위이이잉- 드르륵.
위이이잉- 드르륵.
스스슥. 삭삭. 스스스슥.
잠깐 인사를 나눌 때 몇 마디를 떠들었을 뿐, 애들도 수현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작업에 몰두했다.
30초짜리 광고 영상의 콘티는 장면 전환에 따라 몇 개의 덩어리로 나뉘었는데, 난이도와 길이를 고려해 각자에게 적당히 배분됐다.
먼저 수현이 전체 영상의 키가 되는 주요 프레임들을 잡았고, 애들이 그걸 받아 연결되는 그림을 그리는 식이었다.
그릴 게 많은 도시의 부감과 선수들의 풀샷은 손이 빠른 차윤희가, 사이클 선수들의 얼굴이 강조되는 클로즈업 장면은 인물에 강한 박준영이, 친구들에 비해 드로잉 실력이 달리는 오유나와 박선화는 자전거의 바퀴와 결승선에서 휘날리는 테이프, 응원하는 군중 등을 도맡아 그렸다.
그걸 취합해 전체적인 스타일의 톤을 맞추고 수정하는 건 다시 수현의 몫이었다.
분업이 잘 되었고, 다들 성실하게 임해준 덕분에 작업 속도는 계획보다 빨랐다.
선화 테스트 역시 1주일 정도 시간을 앞당긴 셈이라 수현이 채색을 테스트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게 됐다.
탓.
마지막 키 프레임 작업을 마친 수현은 라이트박스를 몸 앞으로 바짝 당겨 켰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한 장 올린 후, 새 종이를 그 위에 겹치게 올렸다.
라이트박스는 말 그대로 조명이 들어있는 상자. 보통 조명을 아크릴판으로 둘러싸는 식으로 만들어진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스위치를 올려 조명을 켜고 상자 윗면에 그림을 올린 다음, 다시 새 종이를 올리는 것.
그러면 밑에 깔린 그림이 그대로 비쳐 위에 올린 종이에 따라 그리기가 쉽다.
한마디로 애니메이션의 작업 속도를 올려주는 데 꼭 필요한 장비인 셈.
초당 15장의 그림을 채워 넣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할 때, 15장의 그림은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움직이며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라이트박스를 이용하면 이전의 그림을 참고해 다음 장의 그림을 어떻게 그릴지 판단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수현은 완성된 그림을 올리고 그걸 새 종이에 따라 그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45장, 즉 3초짜리 영상이 만들어질 분량을 먼저 그린 후, 원화는 따로 보관하고 새로 그린 종이에 색을 올리기 시작했다.
“떨리네.”
수현이 중얼거렸다.
수업 시간에 본 영상들은 확실히 수현을 자극할만한 퀄리티의 것들이었다.
이태훈 교수의 말대로 세계 광고제에서 수상할 정도니 막 애니메이션에 입문한 학생이 무작정 덤벼들긴 어려운 수준.
그러나 수현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그런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스타일을 적용하면 좋을지.
그게 과욕이 아니란 걸 증명하려면, 빠듯한 시간 안에 끈질기게 테스트하며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슥슥.
유화 느낌을 내겠다고 했으나, 유화로 작업하는 건 불가능한 일. 그래서 대체재로 찾은 게 오일파스텔이었다.
같은 조 친구들에게도 익숙한 재료. 다만 각기 드로잉 스타일이 다르니 수현이 먼저 아트웍을 잡고 애들이 그걸 비슷하게 따라 그리기로 의견이 모인 상황이었다.
수현은 먼저 밝은색을 들어 배경부터 시원하게 칠해나갔다.
쓰윽-.
다음으론 코스를 짐작할 수 있는 구불구불한 강변을 푸른색으로 채워 넣었고.
사삭. 쓱쓱.
사이클을 탄 선수들의 옷을 화려하게 칠했다. 다시 사이클, 특히 바퀴의 색감을 진하게 표현하며 배경과 확실히 구분되게 했다.
기본이 되는 색감을 입힌 다음엔 같은 계열의 색으로 잔잔한 터치를 더해 유화의 질감을 흉내 냈다.
작업량을 생각하면 너무 과하게 할 수 없었다. 또 1/15초로 순식간에 지나갈 그림이니 한 장 한 장을 완성도 있게 그릴 필요도 없었다.
적당한 선에서 수현이 손을 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균형이 맞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톡톡.
몇 군데 수정을 한 다음 샘플을 완성했다.
“이제 이 색감대로 반복해 그려보면 되나.”
수현이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몇 년만 있으면 진짜 캔버스에 그린 것 같은 느낌을 살릴 수 있는 그래픽 프로그램이 개발된다.
즉시 컴퓨터로 그리는 그림이 유행하고, 수작업과 컴퓨터 작업을 병행하는 일도 많아지고.
하지만 아직은 포토샵 4.0 시대.
제한된 몇 가지 기능만 컴퓨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작업 대부분을 손수 해내야 한다는 얘기다.
“뭐,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까.”
수현이 심호흡하고는 다시 집중해 그리기에 들어갔다.
쓱쓱-.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그리고, 또 그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와아!”
“오오오!”
수현은 갑작스러운 환호에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야?”
“수현, 너도 와서 봐봐!”
“와, 신기하다, 이거.”
애들이 스캐너 지옥에 빠져있던 이경민과 서지훈의 자리에 몰려 있었다.
“스캔 다 받은 거야?”
“어, 좀 전에 다 끝났고. 먼저 확인해보자고 해서 프리미어로 간단히 영상을 만들어봤거든?”
“진짜?”
낱장 그림들을 모두 스캔받아 파일로 따로 저장했고,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를 구동해 타임라인 위에 올린 후 그걸 영상으로 출력해봤단 소리였다.
“다시 해봐요!”
“한 번 더 플레이요!”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완성된 ‘test1’이라는 이름의 동영상 파일 하나가 바탕화면 위에 놓여 있었다.
애들은 그게 플레이되는 걸 보고 감탄을 터트렸던 거다.
달칵.
폭발적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지훈과 이경민도 씨익 미소를 짓더니 다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탁 트인 도시 전경이 화면에 펼쳐지더니 카메라가 속도감 있게 움직이며 자전거가 달리는 도로로 달려들 듯 내려왔다.
동시에 화면 안으로 몇 대의 자전거가 숨 가쁘게 달려들었다.
힘차게 페달을 밟는 선수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긴박하게 펼쳐지는 경기.
샘플 애니메이션은 선화만으로도 콘티의 느낌을 십분 살리며 완성작에 대한 기대치를 올려놓았다.
“와!”
수현의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대 이상이다.”
“어. 움직임이 되게 좋아.”
“연결도 부드럽고.”
“교수님이 주신 조언도 도움이 됐다, 그치?”
“그러게. 화면 전환 기법 같은 건 상당히 도움이 됐어.”
고생이 진했던 만큼, 결과가 실망스러우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만들어진 30초짜리 영상은 박진감이 넘치는 스포츠의 한 장면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몇 군데가 살짝 아쉽긴 하다.”
세 번쯤 더 화면을 돌려보던 수현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가?”
“왜?”
억울한 표정으로 수현을 돌아보는 친구들. 그러자 수현이 화면을 가리키며 부연했다.
“부감에서 카메라가 도로로 내려오고, 곧바로 화면 안으로 선수들이 탄 자전거가 들어오잖아? 그 타이밍이 살짝 아쉬워.”
“타이밍이?”
“왜?”
“조금 더 빠르게 들어오면 좋겠다 싶어서. 지금은 스무스하게 들어와서 속도감이 부족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아.”
“그런가?”
수현의 지적에 애들이 웅성웅성 의견을 나누었다.
처음엔 그저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단 흥분에 모든 걸 좋게만 봤는데, 수현의 지적을 듣고 다시 확인해보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게. 속도 조절이 됐으면 하는 장면들이 있네. 자전거는 좀 더 빠르게 보였으면 좋겠고, 음료수를 보여주는 장면은 살짝 길어져도 좋을 것 같아.”
“그치. 어쨌든 음료 광고니까. 제품이 보일 시간이 충분해야 할 거야.”
부족함을 인정하긴 하지만 선뜻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애들.
당연했다.
여기서 수정을 하자는 말은, 지난 몇 주간을 바친 작업을 한 번 더 하잔 얘기와도 같았으니까.
그 부담감을 읽은 수현이 싱긋 웃었다.
“구도를 바꾸는 거라면 모를까, 속도만 조절하는 정도면 선화를 다시 처음부터 그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정말?”
“진짜? 어떻게?”
애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수현에게 물었다.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으로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을 거거든. 동영상 파일을 흐름에 맞게 잘라내서 각 부분의 속도를 조절하는 거지. 경주 부분은 조금 빠르게, 결승선에 들어와서 음료를 마시는 장면엔 조금 슬로우를 걸고.”
“와, 그게 가능해?”
“아냐. 듣고 보니 가능하겠어. 테이프를 빨기 감기 하거나, 느리게 듣기로 바꾸는 것처럼 조절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맞아.”
수현이 활짝 웃으며 애들을 안심시켰다. 애들만큼은 아니지만 수현 역시 다행이라 생각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로 리얼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 전인 게 못내 아쉬웠는데,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쓸 수 있다니 함박 웃음이 지어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어려운 작업도 아니었다. 미래를 살다 온 수현은 그 정도 편집은 스마트폰으로도 흔하게 했었으니까.
“해보자.”
수현의 말을 재빨리 이해한 박준영이 컴퓨터 자리를 넘겨받아 동영상을 섬세하게 편집하기 시작했고,
“이거다!”
“어, 훨씬 좋다!”
“와. 이젠 흠 잡을 데가 없다.”
수정을 반복해 최종적으로 완성된 결과물에 모두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니야.”
하지만 수현은 그런 애들을 한 번 더 진정시켰다.
“왜? 뭐가?”
“아직 채색이 남았잖아.”
“어?”
“맞다. 채색이 남았지.”
“일단 내가 샘플로 3초 정도 분량은 색을 입혀봤어. 이걸 파일로 만들어보고 의견 나누자. 수정 방향까지 정한 다음에 헤어지자고.”
“어으. 졸린데.”
“벌써 11시가 넘었어.”
“아냐. 수현이 말대로 하자. 필 받았을 때 달리는 게 맞아.”
“그래. 그러자. 내일 또 모이는 것보단 이게 나아.”
한 번 더 고삐를 움켜쥐는 수현의 말에 애들은 잠깐 저항했으나, 곧 동조하며 2차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너네 진짜 무섭구나.”
“그러게. 한수현. 내가 한 번 더 사과한다.”
잠시 병풍처럼 서 있던 이경민과 서지훈이 질린단 얼굴로 수현을 바라보았다.
“뭐가요?”
“세현예고 애들, 내가 제대로 본 게 아니었네. 너희 진짜 괴물 같아. 안 힘들어?”
타고난 금수저에 배경만 믿고 건방을 떠는 애들이라 편견을 가졌던 과거가 새삼 부끄럽다며 서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이 정도 근성에 실력이 되니까 세현예고에 들어가고, 다시 백현대에 올 수 있었겠지. 대단하다. 다들. ……근데 말이야.”
그리고 서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드로잉 실력을 가만 보니까 진짜 수준급인데, 왜 그 수업은 신청 안 한 거야?”
“내 생각도 그래. 너무 아쉬운데?”
서지훈과 이경민이 참으로 오랜만에 선배 티를 내면서 조언을 건넬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