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부스터
“우린 그 수업 듣거든. 첨엔 회화과랑 가장 밀접해 보여서 눈에 들어왔는데 기대 이상이더라고.”
이경민과 서지훈이 권한 수업은 일러스트 수업에서 파생된 전집 수업이었다.
애니메이션 광고와 마찬가지로 전공 공통 과목에 신설된 것이었는데, 수현은 과거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어 별로 끌리지 않던 수업이었다.
그런데.
“이게 전집이라고 홍보가 돼서 오히려 좋아하는 애들이랑 안 좋아하는 애들이 있더라고.”
“맞아. 나는 후자였어. 처음엔 애들 보는 그림책을 만드는 수업인 줄 알았거든. 시시할 줄 알았지.”
수현이 넘겨짚었던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경민과 서지훈이 책 수업에 대한 오해를 술술 풀어주었다.
“애들 그림책이 아니라고요? 보통 전집이면 아동이나 청소년 대상이 아닌가요?”
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어. 애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말리진 않을 것 같은데, 기본적으론 성인을 대상으로 한 그림책이야.”
“전집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더라고. 수업을 듣는 애들 모두가 한 권씩 책을 내게 하고, 그걸 기수별로 전집처럼 묶겠다는 의미로 쓴 거래.”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집이랑은 완전히 다른 거더라고. 스타일을 맞출 필요도 없고.”
“대상도 자유고, 스타일에 제한이 없는 거면, 자유도가 굉장히 높겠네요?”
“물론이지. 글도 써도 돼.”
“글을요?”
“텍스트가 필요한 책이라면 직접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려도 되더라고. 어쨌든 자기만의 이야기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거, 그게 핵심이야.”
서지훈과 이경민은 전공 공통 수업 중 책 수업이 가장 만족도가 높다면서 수현과 친구들의 성향으로 보아 그 수업 역시 잘 맞을 거라며 강력하게 추천했다.
“광고 수업은 1등 조의 작업물이 실제 TV에 방영된다고 했지?”
“네, 제작비도 나오고요.”
“책 수업도 특전이 있어. 성적이 좋은 책 몇 권은 출판사와 연결해서 출간되게 한다고 하더라고.”
“정말요? 그럼 실제로 서점에 팔린다는 거예요?”
“어. 그것도 대형서점에. 대단하지 않아? 대학생이 책을 낸다는 건 진짜 드문 일이잖아.”
책의 권위가 아직 높은 시절이었다.
동네 책방과 1인 출판사가 활성화되고, 해외 도서들을 만날 기회가 많아지고, 권종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면서 아이러니하게 책과 멀어지는 시대는 아직 오기 전.
콘텐츠가 부족하고, 작가로 데뷔하기 어려운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한 학기 수업의 과제로 서점에 유통될 책을 출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니.
그것도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난, 작가 고유의 개성을 살린 책을 제작하게 하다니, 선배들의 말대로 이것 역시 도전해 볼 만한 수업이었다.
“어쨌거나 다음 학기나 내년엔 꼭 한 번 들어봐.”
“그래. 얻는 게 많을 거야. 회화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을 거고.”
“네, 일단은 이 고비를 넘기고요.”
수현이 싱긋 웃으며 쌓아놓은 그림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렇지.”
“맞네. 우리도 아직 할 일이 있었지.”
두 노예 선배가 하하 웃다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다시 스캐너 앞에 자리를 잡고 새로 쌓인 그림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
어느새 벚꽃이 졌다.
따사로운 햇살에 꾸벅꾸벅 졸기 좋은 날씨.
그러나 정신줄을 꽉 붙잡아야 하는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휴학하고 싶다.”
“그냥 군대 갈까.”
“대학 오면 힘든 건 다 끝나는 거 아니었어? 왜 이러는 거지? 교수님,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떨어지는 꽃들을 대신해 여기저기서 애처로운 비명이 터졌다.
과제와 시험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비명이었다.
“와.”
수현 역시 무리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후, 잠시 화장실에 들렀는데 뜨거운 게 주르륵 코를 타고 흘렀다. 코피였다.
“고3 때도 안 흘린 코피를 다 흘리네.”
휴지를 착착 접어 코를 막은 수현이 어쩐지 허탈해져 허허 웃었다.
교양과목 시험에, 레포트에, 실기 과제에, 전시회 준비까지. 미리미리 준비했는데도 매일 쫓기듯 시간이 빠듯했다.
욕심이 있으니 무엇 하나 대충 넘길 수 없었고, 고민하고, 반복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자신을 몰아가다 보니 체력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안일했다. 컨디션 관리도 중요한데.”
코피가 멎기를 기다리며 수현이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다행히 중간고사 평가는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오후에 있을 광고 수업 과제 발표만 무사히 끝내면 기말까지는 좀 여유가 있었다.
마지막 피티를 하얗게 불태우고 나면 저녁엔 푹 쉬어야겠다고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광고 수업 강의실에 학생이 가득 찼다.
대학 수업이 재밌는 이유 중 하나는 수업마다 구성원이 달라진다는 데 있었다.
수업의 분위기 역시 그때그때 달랐는데, 광고 수업은 갈수록 애들이 좀비화된다는 점에서 참 짠한 감정을 일으켰다.
막판에야 가까스로 콘티가 통과된 조는 작업 시간이 부족해 날밤을 새웠는지 아예 엎어져 자고 있었고, 외장하드에 파일을 옮겨지지 않아 조원 하나만 먼저 수업에 파발로 보낸 애들이 있는가 하면, 분열이 일어나 조가 폭파돼 억울함을 호소하는 애들도 있었다.
드물게 작업에 자신감을 보이는 애들도 간혹 있었는데, 수현의 조는 그 경지를 넘어 평안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괜찮겠지?”
“당연하지. 이거 못 알아보면 저 교수는.”
오유나가 뒷말을 맺기 전에 차윤희가 입을 막았고, 잠시 후. 이태훈 교수가 들어오면서 수업이 시작됐다.
“와하하!”
“크크크.”
“아, 웃겨.”
긴장한 분위기는 잠시.
조별로 발표가 시작되며 준비한 영상이 상영되자 분위기는 금세 흥겨워졌다.
역량의 차이는 있었으나, 이래봬도 백현대 미대 학생들이었고 통통 튀는 20대의 감각과 남다른 센스로 제법 재밌는 광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취향에 따라 의견은 갈렸다.
“와, 토끼와 거북이를 모티브로 한 거구나.”
“괜찮다. 낮잠 실컷 자고 경기 종료 직전에 일어났지만, 부스터 음료 원샷한 다음에 거북이 이겨버린다는 거잖아?”
“근데, 저러면 거북이 너무 불쌍하지 않냐?”
“그러니까. 동심 박살이네.”
누구나 아는 동화를 소재로 삼아 반전을 준 광고는 가볍게 보자면 가볍게 넘길 수 있었으나, 의미를 짚자면 불편한 구석이 있었고.
“댄스 너무 웃긴다.”
“음악에 중독될 것 같아.”
“직접 부른 건가?”
“아, 묘하게 동작이랑 어울려서 열받아. 보기 싫은데 보고 있어.”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중독성 있는 BGM을 입힌 조는 그림은 허접했으나 음악과 묘하게 어울려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연출이나 캐릭터가 허술하단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고, 결국 모두의 호평을 받은 건 두 편의 광고였다.
“와. 상큼하네.”
“그러게. 되게 풋풋하다.”
“저런 경험 있잖아. 다들.”
“있긴 뭐가 있어. 드라마의 한 장면이지. 어쨌든 좋네. 간질간질하고.”
먼저 체육 시간, 수돗가에서 세수하는 남자아이에게 부스터 음료를 내밀며 수줍게 미소 짓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그린 3조의 광고와,
“와! 박진감!”
“세련됐다. 엄청.”
“저걸 어떻게 그린 거야? 드로잉 실력이 장난 아닌데?”
“속도감도 좋아. 실사보다 더 실감 난다.”
한강과 도심을 지나는 사이클 선수들의 열정적인 경기 장면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 수현의 8조 광고 영상이었다.
탄탄한 기본기에 상업광고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완성도.
그것으로만 평가한다면 두 조가 박빙이었으나,
‘저긴 많이 봐온 스타일이야.’
3학년 선배들이 주축이 된 3조의 광고는 표현에서 한계가 있었다.
흔하게 봐온 셀 애니메이션의 기법을 그대로 가져와 개성이 없던 거다.
“흐음.”
자리에 앉아 평가하는 이태훈 교수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일반적인 수업에서의 과제였다면 그 역시 고민을 깊이 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이 과목의 최종 결과물이 TV CF로 방영된다는 점.
어느 정도 화제를 모으며, 칭찬받는 결과물을 내야 할 텐데, 3조의 풋풋한 영상은 개성 없이 밋밋한 것이었고, 8조의 영상은 과연 퀄리티를 지키며 완성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의문이었다.
‘반반 섞은 게 나왔으면 딱 좋았을 텐데.’
이태훈이 한숨을 내쉬며 일단 두 조에 가장 높은 점수를 매겨두었다.
***
일주일 후.
광고대행사 썬더 기획 회의실.
썬더 기획의 얼굴격인 박재형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잔뜩 굳은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되겠어? 아이디어가 고작 이 정도야?”
“하지만 이온 음료 광고라는 게 한계가 있는 거 아닐까요?”
“맞아요. 제작비도 예년에 비해 확 낮아졌고.”
“제작비가 낮아졌으니 광고 효과도 줄어드는 게 당연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이런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인 거 모르나?”
큰소리를 내는 박재형 CD. 팀원들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박재형의 심기가 어지러울 만도 했다. 처음 부스터 음료의 광고 건을 따올 때만 해도 가뭄에 단비가 내린 듯 대행사는 들뜬 분위기였다.
무려 K제과의 신제품이었으니, 이 광고만 성공하면 다른 과자, 음료의 광고도 노려볼 만하겠다는 계산이 섰던 거다.
그러나,
“마음에 안 듭니다.”
“별로예요.”
“이게 답니까?”
K제과 광고주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여태 경험한 최악의 광고주들과 비교해봤을 때 더하면 더했지 물러남이 없는 꼴통 같은 인물이었던 것.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분명한 말도 없이 계속해 별로란 말만 내뱉었다.
다시, 다시, 다시. 새로운 시안을 가져다 바친 지도 벌써 두 달이었다.
“사실 광고도 중요하지만, 제품 퀄리티가 받쳐줘야 하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부스터 음료가 색상이랑 맛에 변화를 줬다고는 하지만, 너무 뒤늦은 변화였어요. 시장 반응이 벌써 뜨뜻미지근한데, 광고 한 편으로 판세를 뒤집게 해달라니 너무 과한 요구 아닙니까?”
슬그머니 1팀, 2팀 팀장이 광고주의 기대치와 방향에 무리가 있다는 지적을 했으나,
“무조건 만들어. 어? 이대로는 내 자존심이 용납을 못 한다.”
박재형 CD는 지난 PT 때의 수모가 잊히지 않는지 어금니를 악물었다.
마지막 PT 당시, 박재형은 마진을 포기하면서까지 20대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배우와 가수들을 섭외 목록에 올려 들이밀었다.
더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 어디 이래도 거절하나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광고주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고개를 저었다.
“좀 실망이네요. 썬더 기획에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날 이후 몇 번이나 박재형은 자다가도 부아가 치밀어 벌떡 일어나졌다.
어떻게서든 그가 흡족한 얼굴로, 아니 매달리는 얼굴로 제발 이 광고를 만들어달란 말을 하는 걸 봐야겠단 마음이 용암처럼 들끓었다.
오랜만에 승부욕이 생기는 광고주를 만난 박재형은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팀을 달달 볶으며 소리를 질렀던 거다.
그러나 한편으론 과연 좋은 광고가 뚝 떨어질지 불안한 마음이 크기도 했다.
그런데,
“CD님. 그럼 이거 한번 봐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3팀 팀장이 쓰윽- 외장하드를 내밀었다.
“뭔데?”
박재형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 혹시나 해서 대학생들한테 던졌던 프로젝트 있잖습니까.”
“대학생?”
“백현대요.”
“거기가 왜?”
“중간 과정을 보내왔는데, CD님이 꼭 확인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박재형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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