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5)
5화. 한 장만(1)
삐이익-.
기억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던 일이 마주하는 순간 어제 일처럼 선명해지기도 하니.
세현예고 기숙사.
당시 몇 호실에서 생활했는지 숫자로 떠올리긴 가물가물했는데, 복도를 돌아서자 문 하나가 익숙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기가 내 방이었지.
수현이 문고리를 잡고 열어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후욱-.
익숙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철제 침대와 나무로 된 책상, 교과서와 문제집, 화구들에서 나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그리운 추억의 냄새가.
세현예고 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
이층침대 두 개와 두 개의 책상, 두 개의 사물함이 들어가고 작은 상을 놓고 둘러앉을 정도의 공간이 남았다.
그러니 지금처럼 더워지는 계절엔 좁은 방에 앉아있기보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도서관이나 실기실을 배회하다가 느지막이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없네.”
예상대로 빈방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바쁘게 옷을 갈아입고 갔는지 룸메이트의 교복만 허물처럼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박선화.
엄청나게 활발하고 독특한 성격을 가졌던 친구. 예술학과로 진학했다가 프랑스에 갔다고 했었나.
실기 능력이 부족해 세현예고 시절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아이였다. 오히려 졸업 후에 유명해졌지.
누가 알았을까. 그 덜렁대던 박선화가 일선화랑 강유진 대표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는 걸. 그리고 갤러리 수아의 대표가 될 거라는 걸.
‘지나고 보니 여기가 금맥이 여기저기 묻힌 산이었네.’
수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현예고는 명문 예고다 보니 있는 집 자식들이 길가에 돌멩이처럼 흔했다. 예술이라는 게 보통 없는 집에서 조기교육으로 시키긴 어려운 일이기도 했으니까.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오너 일가, 예술가 집안,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자녀도 있었다. 그런 애들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부티가 흘렀고.
수현은 괜히 주눅이 들어 그런 애들을 피해 혼자 처박히는 일이 많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악의 없는 접근을 그렇게 피할 이유는 또 뭐였나 싶었다. 개중엔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괜한 자격지심이었던 거야.’
나는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세현예고에 다니지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담을 쌓고 거리를 뒀던 거지.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과거 수현은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박선화와도 어색한 1년을 보냈다.
박선화는 실기 1등인 수현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며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수현 쪽에서 늘 철벽을 쳤던 거다. 물론 거리를 둔 데는 박선화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한몫하긴 했었다.
“한 장만. 나 그림 한 장만 주라.”
도시락 한입만도 아니고, 박선화는 애들한테 한 번씩 그림을 달라고 조르곤 했다. 입시와 상관없는 그림들에 보이는 관심이라 별생각 없이 ‘옜다’ 하며 건네는 애들도 있었지만.
“됐어. 뭔데.”
“뭐야, 남의 그림을 왜 달래.”
경계하며 이상한 애 취급하는 일도 많았다. 그리고 수현은-.
“그림 좀 보여주면 안 돼?”
“별로 보여줄 그림은 아니라서.”
스케치북을 꽁꽁 닫아두고 아예 보여주기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엔 얼마든지 보여줘야지. 달라는 대로 주기도 하고.’
달칵. 수현이 잠긴 사물함을 열어 아끼던 스케치북을 꺼냈다.
‘많이도 그렸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만큼 그림은 양도 실력도 늘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고 쉬는 시간이고 쉬지 않고 그려댔으니 종이를 대는 것도 일이었지.’
수현은 일찌감치 입시 외에 자기만의 주제를 찾아 그렸다. 그땐 그걸 드러내기 조심스러웠는데,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많이 보여주고 내 것이라 알렸어야 했어. 그리고 박선화 같은 애의 눈에 띄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박선화는 훗날 세현예고 시절 친구들에게 얻은 그림을 자신의 화랑 ‘갤러리 수아’에 걸었다.
예고 시절뿐 아니라 이후 수집한 그림들도 함께였는데, 뛰어난 안목 덕분에 전시는 크게 성공했다. 더불어 전시에 깜짝 등장한 신인 작가들을 향한 관심이 증폭됐고.
‘임현호, 박건영, 서진희 같은 애들이 박선화의 도움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했던가.’
나중에 알고 놀란 기억이 있었다. 박선화는 다른 금수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출신을 내세우지 않아 소질이 부족한 괴짜 정도로 여겨졌으니까.
‘이상하게 굴긴 했지만 남의 그림을 빼돌리거나 이용할 친구는 아니었어. 오히려 도움을 주면 줬지. 그러니 이번엔 마음을 열고 박선화랑 잘 지내보자. 그 뛰어난 안목으로 내 그림을 어떻게 평가할지도 궁금하고, 그게 뜻밖의 기회를 가져다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상념에 빠지던 순간.
삐익-.
기숙사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박선화가 들어왔다.
“오, 수현. 있었네. 밥은 먹었어?”
“어. 대충.”
“헐.”
수현의 대답에 박선화가 놀란 듯 걸음을 멈췄다.
“왜?”
“웬일이야? 내 질문에 대답을 바로바로 해주고?”
“어?”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을 아예 안 섞고 살았나? 자세한 기억이 없어 어버버했는데 살짝 감격한 박선화의 얼굴을 보니 죄책감 비슷한 게 가슴을 조여왔다.
“내가, 그랬나?”
“아냐. 네가 화가 날 만도 했지. 내가 억지로 네 그림을 보려고 했으니까.”
박선화가 성큼 다가와 수현의 손을 부여잡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게 자기 잘못이었다고 용서를 구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 그날 내가 너무 들이댔지?”
“아냐. 그림 보여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예민했지.”
수현이 대충 이 시기의 일을 짐작하며 답하자 박선화가 한층 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야?”
“어?”
“나 정말 보여줄 거야? 네 그림?”
“어, 그. 그래.”
“하아. 다행이다.”
박선화가 잡았던 손을 풀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 엄청 걱정했어. 제대로 미움받겠구나 싶어서.”
“아이. 뭘 그렇게까지.”
“너, 진짜로 무섭게 화냈잖아. 내가 좀 짓궂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까지 화낼 줄은 몰랐어.”
박선화가 이번엔 눈물을 살짝 글썽였다. 생각 없이 덤볐다가 수현의 날카로운 반응에 저도 내상을 입었던 모양이었다.
“근데 그림말이야. 지금 말고 다음 주에 보여줘도 될까?”
수현이 그런 박선화를 웃으며 바라보다 말했다.
“다음 주에?”
“어, 사실 네 감상을 듣고 싶은 그림이 있는데 완성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헐. 그럼 너 나한테 처음 보여주려고?”
“아…… 딱히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보여주진 않을 것 같긴 하니까.”
“으아아! 너무 좋아아!”
박선화가 활짝 웃으며 수현의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양에도 까르르 웃을 나이라지만, 이건 감정 기복이 좀 심한 거 아닌가.
수현이 잠깐 멍청하게 박선화를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 언제?”
“월요일 어때? 주말 정도면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이미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이 많으니 그걸 보여줘도 됐지만, 굳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까운 미래, 갤러리 수아의 대표가 될 박선화의 안목에 어울릴 그림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돌아온 자신이 어디까지 그려낼 수 있을지 현재의 능력치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거다.
“좋아,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에 보자.”
박선화가 콧노래를 부르며 다이어리를 꺼내더니 다음 주 월요일 칸에 별표를 잔뜩 그렸다.
수현은 들뜬 박선화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화구통을 챙겨 슬슬 실기실로 향했다.
***
“3절지 10장이랑 지우개 하나요.”
기숙사를 나와 학과동을 지난 수현이 미술과 실기동 지하에 있는 화방에 들어섰다.
교내 화방은 보통 수업 시간에 맞춰 문을 여닫았는데, 오늘은 조금 늦은 시각까지 열려있었다.
“오, 수현이 오랜만이네.”
화방 아주머니가 반갑게 수현을 맞으며 종이와 지우개를 내주었다.
“일반으로 10장 맞지? 이번에 종이 질이 좀 좋아졌어. 한 번 쓰고 얘기해줘.”
“네. 그럴게요.”
바스락.
까끌거리는 종이의 질감이 수현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어쩐지 좋은 그림이 그려질 것만 같았다.
까르르.
실기동 복도를 지나자 애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2학년들인가? 아님 3학년?
학과동은 고요했는데 실기동은 북적거렸다.
1학년은 소묘 시험을 마치고 일찌감치 귀가했으니 선배들이 남아 그림을 그리나 보네.
그렇다면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지.
수현이 조심조심 걸으며 빈 실기실이 없는지 살폈다.
세현예고엔 군기를 잡는답시고 똥폼을 잡는 선배들이 많았다. 그런 애들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엮여서 좋을 게 없으니 피하는 게 상책.
다행히 작은 소묘실 하나가 비어 있었다.
드르륵.
슬며시 문을 열고 들어선 수현이 달칵. 형광등을 켰다.
한쪽 구석에 화판과 이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고, 낯익은 석고상들이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아늑한 공간.
스윽- 수현이 이젤을 꺼내 자리를 잡았다.
화판에 종이를 고정하고 빈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선.
이번엔 어떤 시선을 그려볼까.
주제를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거 수현의 모든 그림은 시선에서 출발했다. 두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시선을 포착해 그 차이를 표현해냈던 거다.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이게 빨강이라고?”
“그럼 이게 노랑이라고?”
색깔 이름을 두고 길에서 싸우던 어린아이들. 우연히 그 모습을 보게 된 수현은 애들이 참 귀엽다고 느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은 평생 이렇게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다투겠구나, 깨달음을 얻었고.
‘같은 풍경, 같은 사람, 같은 상황과 물건을 두고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걸 느낀다.’
그 차이는 어떨 땐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지만 어떨 땐 도무지 극복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간극을 보였다.
수현은 그런 차이를 찾아 드러내고 비교하는 게 재밌었다.
나무를 주제로는 풍성한 여름과 삭막한 겨울을 그렸고, 사과를 주제로는 탐스럽게 맺힌 모습과 멍이 든 채 땅에 구르는 모습을 그렸다.
누군가는 아름답게 여기는 것의 추한 모습을 발견했고, 버려진 것의 쓸모를 담아내는 과정.
감정과 상대에 따라 나이와 연륜에 따라 하나의 소재는 전혀 다른 형태와 색으로 표현됐다.
그렇게 주제에 침잠하면서 수현은 자신만의 기법과 화풍을 개발했다. [조우>, [운명>, [발아>, [꿈> 같은 몽환적인 그림들은 그렇게 구상한 것들이었다. 물론 첫 전시를 앞두고 잠수해버린 바람에 세상에 알려질 기회를 잃고 이후에 김민준이 가로채 모든 영광을 가져갔지만.
‘이번엔 내가 그 그림의 진짜 주인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려줄 거야. 시기도 한층 앞당겨 발표할 거고.’
스윽-.
수현이 무거운 시선을 깔다가 어깨를 들어 선을 채워 나갔다.
내내 머리를 가득 채웠던 자신만의 그림을 새 종이에 옮겨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