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6)
6화. 한 장만(2)
금요일 저녁은 머릿속에 담겨있던 소재들을 쏟아내는 데 전부 투자했다.
“어우, 뻐근해.”
수월한 몸풀기였지만 오후에 4시간짜리 소묘 시험을 치른 데다가 늦은 밤까지 그림을 그려댔더니 어깨와 목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스윽스윽.
커터칼로 뭉툭해진 4B 연필을 깎아내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수현은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려낸 그림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아. 다행이다”
아까 기숙사에서 확인한 스케치북 안에 담긴 그림보다 확실히 안정적인 결과물이 나왔다.
경험도 경험이고, 소재와 표현기법을 두고 고민한 시간이 길었으니, 과거 고1일 때에 비해 완성도 있는 결과를 얻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숙련도는 전성기만 못했다.
아무래도 돌아온 시기가 고 1 무렵이니 기술만큼은 당시의 수준으로 돌아온 모양.
하지만 문제없었다.
이미 한 번 가봤던 길이니까.
수현은 목적지를 향한 지름길을 알고 있었고, 훈련을 통해 곧 전성기 실력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생각만 해도 벅차네.
수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화방에서 산 10장의 종이 중 8장을 하룻저녁에 썼다.
그럴 만도 한 게 시선을 다룬 그림은 보통 2장이 한 세트를 이루는 식이었던 거다.
‘하나의 소재를 두 가지 시선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두 장에 나누어 그린 건데, 덕분에 시간도 재료도 두 배로 들었지.
……이렇게 대칭 구도로 보여주는 게 직관적이긴 하지만, 앞으론 하나의 캔버스에 나누어 그리는 방식도 고민해봐야겠어.‘
수현이 다음 작업 순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대충 감은 잡았고, 이제 이 중에 하나를 골라 완성해봐야겠네.”
스케치를 끝낸 종이는 8장.
주제는 네 가지.
마음 같아선 다 그려보고 싶었지만 주말 안에 끝내려면 한 가지 주제를 선택해 집중해야 했다.
게다가 내심 끌리는 주제가 있었다.
수현이 8장의 종이를 바닥에 펼쳐두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첫 번째 주제는 계단.
시점의 차이를 이용해 한 장은 올라가는 느낌을, 한 장은 내려가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구도로 재미를 줄 수 있지만 뭘 나타내려는 건지 의미를 파악하긴 어려워.’
수현이 고개를 저으며 다음 그림으로 넘어갔다.
두 번째 주제는 첫인상.
이게 수현이 가장 끌리는 주제였다.
팝아트 형식으로 그린 그림의 배경은 교실.
그 안에 꽉 찬 아이들의 얼굴은 긍정적인 시선에선 해맑고 장난스럽게 보였고, 부정적인 시선에선 어두운 감정들을 드러냈다.
대상의 양면성을 표현하면서 보는 이가 어떤 프레임을 씌우느냐에 따라 상대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암시하는 그림이었다.
직관적이고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재.
그리고 남은 두 개의 그림은 빛과 행복을 표현한 추상화.
‘한군데 모아놓고 보니 오히려 확실해지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첫인상이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보는 사람도 재미있을 거 같아. 이해하기도 쉽고.”
무엇보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마음이 가니 제일 잘 그려질 것 같았고.
“첫인상으로 가보자.”
첫날 작업은 거기까지.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 수현은 이른 아침부터 다시 혼자만의 강행군을 이어 나갔다.
힘이 들긴 해도 주말을 그렇게 보내기로 한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기숙사는 편했지만 주말이나 방학, 텅 빈 학교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쓸쓸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림에 몰입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훌쩍 지났던 거다.
“다시.”
첫인상을 그리기로 하고 수현은 스케치 과정만 몇 번을 반복했다.
“한 장 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예전이었다면 충분히 만족하고 채색에 들어갔을 정도는 그려졌으니까.
“하. 한 번만 더.”
다만 똑같은 과정을 반복한 건 그림을 그릴수록 조금 더 나은 방법들이 툭툭 떠올랐던 데 있었다.
‘힘이 들어도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가보자. 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다시 그려보는 거야.’
그렇게 토요일은 마음에 들 때까지 스케치를 반복했고, 일요일에야 겨우 채색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찰랑찰랑.
푸른빛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와 붓을 적신 후, 적당히 굳은 수채화 물감을 슬쩍 비벼 팔레트에 풀어냈다.
먼저 밝은 색, 그리고 연한 색부터.
수채화는 유화와 달리 밝은 색부터 채색에 들어간다.
물의 농도에 따라 연하고 짙은 색을 표현할 수 있는데 수현은 적당히 물을 머금어 종이의 질감이 드러나는 정도를 좋아했다.
붓이 지날 때마다 물감이 중첩되는 느낌. 종이에서 떼는 순간 살짝 맺히는 물방울의 흔적을 오롯이 느끼며 먼저 큰 붓으로 시원하게 배경을 그려내고 다시 작은 붓을 들어 강조할 주제에 파고들었다.
재깍재깍.
벽시계의 초침 소리와.
스스슥. 탕탕.
붓을 움직이고 털어내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하얀 종이 위에 수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그림이 차츰 형태를 드러냈다. 그림이 뚜렷해질수록 수현의 얼굴에 생동감이 넘쳐났다.
“하아.”
얼마나 몰입했을까. 뻣뻣하게 굳어진 목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들었을 땐 빛이 달라져 있었다.
“벌써 6시네.”
실기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신문지만 한 햇볕은 교실 뒷문에서 차츰차츰 앞문 쪽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흐려지고 없었다.
꼬르륵.
배에서 신호가 울렸다.
그제야 아침도, 점심도 거르고 그림을 그렸다는 게 생각났다.
이제 조금 있으면 매점도 문을 닫을 시간.
“그만 가볼까.”
수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완벽하진 않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그림이 손끝에서 탄생했다.
‘이 정도면 첫 그림으론 충분해.
내일 박선화에게 이걸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금은 기대하며 수현이 완성된 그림을 챙겨 들었다.
***
“야! 한수현!”
학교 매점이 문을 닫아 근처 분식집이라도 가야 하나, 교문을 나설 때였다.
마침 기숙사로 복귀하던 룸메이트 박선화와 수현이 딱 마주쳤다.
“아, 안녕.”
반갑고 요란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에 피식. 수현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림 그리다 나온 거야?”
“어.”
대충 닦아내긴 했지만 얼굴과 손에 흐릿한 물감 자국이 남아 누가 봐도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나온 모양새였다.
“잘 돼가?”
수현에게 바짝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던 박선화가 얼른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잠깐. 나 지금 또 부담 준 거지.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보게 될 건데 쓸데없이 압박한 거지?”
“됐어. 그 정돈 아냐.”
“하아. 그럼 다행이고.”
박선화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웃었다.
“근데 왜 벌써 왔어?”
박선화는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갔다가 월요일 등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일요일 오후, 다른 때보다 한참 이른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온 거다.
“헤헷. 괜히 들떠서.”
“뭐가?”
생각 없이 물어보던 수현이 설마 하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내 그림 때문에?”
“어. 너무 궁금하더라. 아, 근데 수현이 너. 내가 삐삐 몇 번이나 쳤는데 몰랐어?”
“삐삐?”
새삼 과거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나는 말이었다. 삐삐라니. 그래, 이 시절엔 스마트폰은커녕 핸드폰도 귀할 때였지. 벽돌폰이라 불리던 무식하게 큰 핸드폰이 100만 원을 호가하던 시절. 학생 신분엔 삐삐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수현 역시 입학 선물로 받은 투박한 검은색 삐삐를 들고 다녔었고.
“어. 몰랐네. 그림 그리느라 확인을 안 했나 봐.”
“어휴. 그럴 줄 알았지. 너, 아직 저녁 먹기 전이지?”
박선화가 싱긋 웃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번쩍 들어 올렸다.
“엄마가 도시락 챙겨주셨어. 같이 먹을래?”
“어머니가?”
“어. 내가 빨리 가겠다고 졸랐더니 도시락을 챙겨주시더라고. 룸메이트랑 먹으라고 넉넉하게 싸주셨어. 같이 먹자.”
“아, 나야 좋지.”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그럼 밥 먹고 실기실로 가볼래?”
“어?”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박선화가 커다란 눈을 끔뻑였다.
“그림 좀 전에 완성했거든. 보여줄게.”
“허, 진짜?”
박선화가 눈을 반짝 빛내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일찍 오길 잘했다!”
결과적으로 도시락은 뒷전이 되었다. 어쩐지 마음이 약해진 수현이 박선화를 실기실로 먼저 끌고 왔던 거다. 그리고-.
수현의 그림을 본 박선화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동안 이런 걸 그렸구나.”
수현의 그림을 감상하던 박선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른 것도 더 있어? 있다면 보여줄 수 있을까?”
“어려울 건 없지.”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케치 단계인 그림들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열어 넘겨주었다.
“하나의 주제를 다른 시선으로 그린 거네.”
“맞아. 시선의 차이를 보여주고 싶었거든.”
과연, 별다른 설명 없이도 박선화는 그림의 주제를 곧장 꿰뚫어 봤다. 그러나 그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무슨 생각에 빠진 건지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뚫어져라 그림을 바라보는 박선화.
‘얘가 이렇게 차분한 애가 아니었는데?’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수현의 기억에 박선화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흥분을 잘하는 호들갑스러운 아이였다. 애들한테 그림을 달라고 조를 때도 늘 적극적으로 들이댔었고.
‘그런데 지금은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이지? 한 장만 달라는 소리도 없고. ……혹시, 내 그림이 별로인 건가?’
“하아.”
초조한 수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선화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더니 수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현아,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잠시 후.
텅 빈 실기실에 남은 수현은 가만히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이게 아닌데, 내가 예상한 전개랑 너무 다르잖아. 내가 박선화를 너무 과대평가했나? 아니면 이 그림이 박선화의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 걸까?’
수현이 입술을 조심스럽게 깨물었다.
박선화의 콜렉션에 들어가면 나중 그 애가 자기 화랑을 열고 전시를 기획할 때 자기 그림도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반응은 그 기대가 부끄러워질 만큼 굉장히 민망한 것이었다.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이라도 한 건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한 거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래 예술엔 절대적인 기준이란 게 없다. 시대에 따라 그림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하고 취향이란 것도 있으니까.
‘2020년 김민준이 내 그림을 토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1995년에 그대로 통하리란 법은 없지. 급할 건 없어. 조금 여유를 두고 차근차근해보자. 그래도 내 그림은 가능성이 있으니까.’
수현이 자신을 위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직 새로운 현실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그리고 자신감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수현의 기우일 뿐이었다.
“헉! 헉!”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둘러댄 박선화가 계단을 쏟아질 듯 내려가 그대로 1층 중앙복도를 향해 달려갔다.
“미친. 진짜 미쳤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목소리.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끼이익-.
코너를 돈 박선화가 숨을 몰아쉬더니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급하게 10자리 번호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