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82)
82화. 비하인드(1)
“하아.”
미술과 실기동을 걷는 김민준의 얼굴이 복잡했다.
“거지 같네.”
생각 같아선 그대로 멈춰서 괴성이라도 맘껏 지르고 싶었다.
그래야 답답한 속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하, 내가 최고점이라고?”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믿을 수도 없었고.
“짜증 나는 인간들.”
김민준이 경멸을 담은 눈빛을 복도 끝, 강성실의 방으로 보냈다.
강성실이 좀 전 해준 말들 하나하나가 역겹고 역겨웠다.
“납득이 안 되잖아, 납득이.”
김민준은 그날 봤던 수현의 그림을 다시 떠올렸다.
“눈깔들이 썩었나. 죄다 동태눈깔인가?”
그런 그림을 두고 자기 그림이 최고점을 받았다니, 오히려 약이 올랐다.
차라리 2차전에서 자신이 2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는 편이 나았을 거다. 그럼 독기를 품고 3차전을 준비했을 텐데.
눈 가리고 아웅도 아니고, 네가 1등이다. 계속 그렇게만 하라니.
빈정이 상하고 심사가 뒤틀렸다.
“의욕이 안 생기네.”
한숨을 내쉰 김민준이 실기동 창가에 기대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와! 민준 선배야!”
“꺄아- 민준 오빠다!”
“김민준이네! 여기 좀 봐!”
“오, 잘 생겼다. 오늘도 빛난다.”
김민준이 창가에 모습을 드러내자 운동장에 나와 있던 애들이 열렬하게 반응했다.
“흐응.”
모른 척 환호를 즐긴 김민준이 냉랭한 얼굴로 다시 복도를 향했다.
“열받아. 그냥 확 조퇴해버릴까.”
아무래도 쉬이 풀릴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배도 살살 아프고 몸이 으스스해지는 것이 신경을 너무 많이 쓴 것 같기도 했고.
“하…… 배 아파.”
김민준이 몸을 잔뜩 웅크리며 4층 보건실로 걸음을 옮겼다.
***
그날 오후 일선 화랑 접객실.
강유진 관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얼마 전, 강유진이 문전 박대하다시피 내보냈던 남성남 화백 무리였다.
“허허. 일선화랑은 언제 와도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그러니까요.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작품 수준도 높은 게 품격이 느껴진달까요. 이 차도 향이 참 좋습니다.”
“신인 작가들한테 이렇게 투자하고, 또 원석을 발굴하는 데 앞장서는 갤러리도 드물지요.”
“맞습니다. 격이 달라요. 국내에는 비할 곳이 없고, 런던이나 뉴욕, 파리 쪽의 화랑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파리 유학파 아닙니까.”
강유진 관장의 눈치를 살피며 일선화랑 칭찬부터 들어놓는 화백들.
강유진이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는 무리의 대표인 남성남을 바라보았다.
“요즘 한창 바쁘실 때죠?”
“나요? 하하. 뭐, 개인전이야 아직 시기적으로 여유가 있고, 작품도 거의 마무리 단계라 슬슬 마실도 다니고, 회동도 하고 그렇습니다.”
“네.”
“바쁘긴 우리 강 관장이 제일 바쁘지 않겠습니까? 듣기론 벌써 내년 전시까지 일정이 꽉 찼다던데……. 아, 입주 작가 선발도 거의 마무리 단계 아닌가요?”
자기 살림 들여다보듯 일선화랑의 연간계획이며 소식들을 꿰고 있는 남성남. 강유진이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하. 우리 강유진 관장이야 보는 눈이 워낙에 좋으니, 이번에도 깜짝 놀랄 신인들이 나오겠지요. 안 그래도 놀랐던 것이…….”
그리고 슬슬 본론을 꺼낼 시동을 거는 남성남.
“그 아이도 일선화랑 후원을 받고 있다죠?”
“그 아이요?”
강유진이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하며 차를 홀짝였다.
“세현예고 학생이라고요. 이번 전국대회에도 나왔고.”
“아, 네. 수현이 말씀이시군요.”
강유진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력이 벌써 화려하더군요.”
남성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작년에 세현예고 미술전시회에서 첫 그랑프리를 받은 애라던데, 상으로 영국까지 다녀왔다고요.”
“맞습니다.”
“흠. 교내대회라 별거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현예고 미술전시회 수준은 꽤 높은 편이죠. 매년 그랑프리 없는 전시를 열다가 첫 그랑프리가 탄생했단 말에 어떤 녀석인가 궁금해지긴 하더군요.”
남성남이 껄껄 웃었다.
“그 아이, 아직 제대로 된 스승이 없지요?”
그리고 본격적인 야욕을 드러내는 남성남.
“세현예고가 외부 레슨을 지양하고 교내에서 이뤄지는 수업으로만 승부를 보겠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습니까. 입시 때가 되면 학생들이 알음알음, 좋은 스승을 찾으러 다닌다는 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세현예고는 자체 수업만으로도 입시 대비에 충분하다는 입장이라 학교 밖에서의 레슨을 금하는 분위기였으나, 돈이 넘치고 인맥이 화려한 학부모들이 그걸 수긍할 리 없었다.
주말과 방학을 통해 모 대학 교수며 입시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귀한 정보를 얻거나 눈도장을 찍으며 애들을 들이밀기 일쑤였고.
그러니 남성남의 이 말은 자신이 수현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겠고, 입시까지 무탈하게 치르게 해주겠단 약속이었다. 대신에 자기 라인에 올라타라며 손을 내미는 것이었고.
수현을 여타 고등학생들처럼 대학 입시에 목을 매는 학생으로 보며 던진 말.
‘이분들 정보가 영 느리네.’
강유진은 조금 황당한 기분으로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침묵을 망설임으로 오해했는지, 이번엔 남성남의 측근이 나섰다.
“관장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남 화백님이 이런 호의를 먼저 보이는 경우가 없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이번 전국대회 2차 심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측근. 그가 적당히 식은 차를 벌컥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황정식 화백 쪽에서 노골적으로 미는 애가 있어요.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황정식 화백님 쪽에서요?”
강유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JK가 뛰어들면서 이번 전국대회의 심사와 판정은 지나치게 불투명하고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뭐, 제법 그리긴 하더군요. 그 아이도 고등학생이라고 보기엔 실력이 뛰어나요. 그러니 황 화백 눈에도 든 거겠지만. 문제는…….”
측근이 남성남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수현 학생이 견제당하고 있어요.”
“네? 우리 수현이가요?”
“낭중지추. 워낙 뛰어나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야기를 다시 이어간 건 남성남이었다.
“과연 강유진 관장이구나 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발굴하다니. 그 김민준이란 아이가 고등학생들 중 뛰어나다면, 한수현이란 아이는 어지간한 신인들 사이에 둬도 밀리지 않겠더군요. 일선처럼 격이 다른 그림이었어요.”
“…….”
“그러니 심사위원들도 감탄을 했죠. 사실 우린 처음엔 그게 누구 그림인지도 몰랐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수준의 그림이 튀어나와 다들 입을 떡 벌렸거든요.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시선이 쏠리니 황 화백 쪽에서 엄청난 견제를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심사에 참여했던 원로들이 입을 모아 그날 있던 일을 말해주었다.
황 화백이 수현의 그림을 깎아내리려 했던 일, 부정행위를 의심했던 일, 그리고 실제로 황 화백 무리가 수현의 그림에 말도 안 되는 점수를 줬던 일까지.
“낯짝도 두껍지, 그렇게 훌륭한 그림에 5점을 준 양반도 있더라니까요? 10점 만점에 5점이요.”
예상보다도 저열하고 유치한 일들이 있었던 모양. 그 바람에 자칫 수현의 그림이 탈락할 뻔하기도 했다며 남 화백 무리가 생색을 냈다.
“물론 우리 쪽에선 후한 점수를 줬기에 최종 점수만으로도 그럭저럭 커트라인을 넘기긴 했습니다. 그리고, 합격과 불합격을 가를 때, 몇몇 논란이 되는 작품들은 긴 토의를 거쳐 당락을 결정하게 되거든요. 끝까지 몰아갔으면 우리 쪽에서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었고요.”
말을 하다 보니 그날의 감정이 올라오는지 남 화백 무리의 얼굴이 저마다 벌게졌다.
“감사한 일이네요.”
그리고 마침내 강유진 관장의 입에서 떨어진 호의적인 대답.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정한 심사를 위해 노력해주셨으면 해요. 그래야 전국대회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빛이 날 테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니, 강 관장. 그렇게 벽창호처럼 굴 일이 아니라.”
답답하단 얼굴로 고개를 젓는 화백들. 그들을 향해 강유진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 수현이에겐 이미 스승이 있습니다.”
“뭐요?”
“허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화백들에게 강유진이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제임스 리. 수현이가 제임스 리의 첫 번째 제자예요.”
“하하.”
“그 제임스 리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화백들. 그래도 사정에 좀 밝은 이가 아는 척을 하며 나섰다.
“작년 미술전시회 그랑프리 특전으로 잠깐 영국에 갔다더니, 그 일을 부풀려 얘기하는 겁니까?”
“네?”
“하하. 방학 때 잠깐 레슨을 받은 걸로 제자니 뭐니 말할 순 없죠. 해외 유명 작가들이 캠프를 열어 몇 마디 해주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 얄팍한 연으로 뭘 할 수 있다고.”
드르륵.
강유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자기 책상으로 걸어가더니 파일을 하나 꺼내 돌아왔다.
“보세요.”
강유진이 파일을 펼치자 고이 스크랩된 영자신문이 나타났다.
“지난겨울, 영국에서 발간된 잡지와 신문들을 모아둔 거예요. 전부 제임스 리와 수현이에 관한 이야기고요. 국내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에선 꽤 유명했죠.”
그러니 그만 질척거리고 자리를 비켜주라는 강유진의 품격있는 축객령이었다.
***
서울 그랜드 호텔 2층 이탈리안 레스토랑, 로마.
8인 정도가 넉넉히 식사할 수 있는 룸에 JK식품 노영국 사장과 세인예술대 권인호 교수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현지 맛을 살리려고 실력 있는 셰프를 모셔 왔는데, 아직 손님들에게는 선보이기 전입니다.”
“아, 이거 귀한 대접을 받게 됐네요. 그런데 전 미국 유학파라, 이탈리아 정통 음식에 대해선 크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하.”
“하하. 그러시군요. 그래도 전문 분야에서만큼은 날카로우신 분이니 그걸로 된 거죠. 이번에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네.”
테이블에는 2인이 먹을 양이라 할 수 없이 넉넉한 음식들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권인호는 별로 입맛이 없는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다부진 체격의 노영국과는 다르게 왜소한 몸집. 옷깃에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에 가려있었으나 몸을 흔들 때마다 드러나는 가는 목덜미는 보는 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며 올곧은 자세, 굳게 다문 입, 말을 아끼는 태도는 그가 이리저리 휘둘릴 유약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
노영국 사장이 새삼 권인호 교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교수님. 그래서, 3차 시험 심사 방식이 갑자기 바뀐 진짜 이유가 뭡니까?”
20명의 심사위원 중 가장 정확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대답을 내놓을 사람. 노영국이 오늘 권인호와 따로 식사 자리를 만든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