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81)
81화. 멘탈
시간은 성큼성큼 흘러 어느덧 6월 중순이 되었다.
4월 초, 전국대회 1차 시험이 열렸고, 5월 초엔 1차 합격자가 발표됐다.
다시 5월 셋째 주 2차 시험이 열린 후, 한 달에 걸친 심사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굵직한 행사에 매달리다 보니 어느새 96년도 절반이 지난 거다.
“와, 나이 들면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벌써 여름이야.”
박선화가 교실 벽에 달린 선풍기 바람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헉헉거렸다.
“그래. 나이가 들긴 했지. 이제 성장기도 슬슬 지나갈 때니까.”
차윤희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박선화의 말을 받아주는 듯하더니 다시 짓궂은 표정을 했다.
“근데, 우리 선화는 언제 어른 되나?”
“어?”
“아주 정신 사나워 죽겠다. 선풍기 풍향을 고정하든가, 좀 가만히 좀 있든가 해. 안 그래도 더운데 너 보니까 더 더워!”
“아, 왜! 내가 고정시키면 다른 애들은 바람 못 쐬잖아.”
“어차피 니가 얼굴로 다 막고 있어서 다른 애들한텐 바람이 가지도 않을걸? 어우, 하여간 유난이야.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도 안 됐는데.”
“아, 맞다.”
그러나 박선화는 차윤희의 구박엔 이골이 났는지 타격감 하나 없는 얼굴로 냉큼 화제를 돌렸다.
“곧 여름방학이잖아. 이제 기말시험만 보면.”
“그렇지.”
“우리 뭐하지?”
“어?”
“아, 물론 너희는 2차 시험도 당연히 통과할 거고, 그럼 3차 시험을 준비해야겠지만…… 그래도 3차는 9월 초니까 텀이 좀 길잖아. 조금은 놀아도 되지 않나? 하루 정도라도?”
어쩐지 간절한 눈빛.
차윤희의 눈동자도 따라서 흔들렸다.
“진짜 6개월이 엄청 길긴 하네. 이제야 겨우 절반이 지난 거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차윤희.
아직 2차 시험 결과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붙어도 걱정, 떨어져도 걱정인 얼굴이었다.
떨어지면 서운할 테고, 붙으면 3개월의 여정을 더 가야 하니 압박에 시달릴 테지.
“하루 정도야 뭐. 매일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릴 것도 아니고. 인풋도 필요하니까.”
“정말?”
“그렇지?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그리고 수현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박선화와 차윤희가 더할 수 없이 밝은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그럼, 내가 계획을 짜볼게. 아, 워터파크는 어때? 작년 용인에 엄청 큰 거 개장했잖아. 너희 가봤어?”
“오, 나 작년엔 가족들이랑 보내느라 못 갔지. 방학에 친구들이랑 논 건 너희랑 남대문 간 거밖에 없어.”
“나도야! 거기 개장할 땐 사람도 엄청 많고 사고 날 수도 있다고 엄마가 못 가게 했거든. 잘 됐다. 우리 거기 가자, 거기.”
엄청나게 들뜬 박선화와 차윤희를 보니 수현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수영은 별로긴 한데…….’
수영은 고사하고 마땅한 수영복도 없다는 게 떠올랐지만, 이 시기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것도 보람찬 일이겠다 싶긴 했다.
“그래. 가자. 거기든 어디든.”
결국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박선화와 차윤희가 신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계획을 신나게 세우던 그 날 오후,
“발표 났대!”
쾅.
교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소식통으로 유명한 촉새 같은 애 하나가 튀어 들어왔다.
“발표?”
“전국대회 2차 합격자! 지금 쌤들이 확인하고 있어!”
쿵쿵.
그 말에 수현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
“경사다. 최종 결선인 3차에 세현예고 학생이 7명이나 올랐어.”
잠시 후, 교내 방송 안내에 따라 전국대회 준비반으로 향한 수현은 미술과장 조재환 선생을 통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3차 결선에 오른 건 총 30명이다. 세현예고 7명을 포함 20명이 예고 출신이고, 그중 중앙예고가 3명, 나머지 예고들에서 2명, 혹은 한 명씩 오른 것 같아. 그리고 예고생이 아닌 친구들이 10명인데, 사실 출신은 특별히 신경 쓸 필욘 없고.”
조재환이 기특하단 얼굴로 준비반 애들을 둘러보았다.
“조소에 하나, 한국화에 둘, 도예 하나, 디자인 둘, 서양화 하나. 분야별로 골고루 출전하게 된 것도 고무적인 일이야. 잘만 하면 우리 세현예고에서 각 분야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거다. 그러니 다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분야에 따라 유리한 쪽도, 치열한 쪽도 있겠으나, 여러 데이터를 비교해볼 때 세현예고의 입상은 확실하다고 믿는 얼굴.
김윤수와 김여진 선생도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수현과 차윤희를 향했다.
다른 분야에 비해 인기가 많은, 따라서 경쟁이 치열한 분야가 서양화와 조소였다.
역대 전국대회 대상은 항상 서양화와 조소 분야에서 나왔고.
그 두 분야에서 수현과 차윤희만 3차 시험 응시 자격을 얻었다는 건 아쉬운 부분.
그러나 어디 내놔도 밀리지 않을 최고의 학생들이란 점에선 기대가 커지는 게 사실이었다.
날고 긴다는 영재들이 전국 각지에서 쏟아져나오는 대회라지만, 입시와는 성격이 다른 평가 기준을 내세운다지만, 그래도 세현인데.
그래도 한수현과 차윤희인데.
……어쩌면 이 둘이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얘들은 그저 입상 정도가 아닌 이왕이면 대상을 받아오면 좋겠다, 이건 욕심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예측이라는 사심이 잔뜩 담긴 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부담을 주는 말을 직접 내뱉진 않았지만, 이런 의미의 전달은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나 토할 것 같아.”
차윤희가 수현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왜?”
수현도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이거 착각 아니지? 쌤들이 자꾸 우리 쪽 쳐다보는 것 같아서.”
“어. 착각 아니야. 나도 표정 관리 안 돼서 죽겠어.”
질린다는 차윤희의 얼굴을 보며 수현이 작게 웃었다.
순진한 선생들의 기대대로 차윤희와 자신이 대상을 두고 겨루는 구도가 돼도 재밌겠다고 생각했지만, 수현은 알고 있었다.
이 대회는 이제 김민준과 자신의 이파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
같은 시각 중앙예고.
강성실 미술과장이 전국대회 2차전에 통과한 세 명의 학생을 따로 불러 격려했다.
“핵심 전력들이 남았다는 점에선 아주 희망적인 상황이다. 서양화에 민준이, 윤주, 조소에 강현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훌륭하게 잘 해냈어!”
호탕하게 웃는 강성실.
한결 편안한 얼굴이었다.
2차전에 고작 10명을 올려놓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가슴 졸이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성적이 좋았던 거다.
세현예고와의 격차도 꽤 많이 줄었다.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했고, 조금 뒤처진 정도야 최종 결과로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었다.
어차피 사람들의 기억엔 1등만이 남는 법이니까.
‘석 달 뒤가 기대되는군.’
강성실의 입이 헤 벌어졌다.
공들인 대로 일이 흘러가 김민준이 대상을 타주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꽃길이 열릴 터.
당장 중앙예고에서의 입지는 물론, 은사인 황정식 화백의 총애, 그리고 교수직까지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이었다. 부수적으로 따라올 이익들도 꽤 짭짤할 테고.
그렇게 되면 차를 바꿀까, 집 평수를 좀 늘려볼까.
아, 어디서 찌그러졌는지 소식도 없는 최형욱이를 찾아 위로주부터 사야겠구나.
그놈을 시작으로 그간 나를 우습게 여기고 깔봤던 놈들을 하나하나 만나 아래로 봐줘야겠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망상을 이어갔다.
“자, 1주일 정도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음 주에 3차 시험 주제가 발표된다니, 그때 다시 모여서 또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를 해보자. 이만 들어들 가봐!”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강성실이 부릅뜬 눈으로 고삐를 조였다. 세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민준이는 잠깐 나 좀 보고 가라.”
그리고 문으로 향하는 김민준을 강성실이 불러세웠다.
“너 무슨 일 있니?”
다른 애들이 물러간 후, 강성실이 냉장고에서 망고주스를 꺼내 김민준에게 건네주었다.
“네? 아뇨.”
짤막하게 답하며 고개를 젓는 김민준. 강성실이 눈매를 좁히며 그런 김민준의 표정을 살폈다.
“근데, 얼굴이 왜 죽상이야? 준비한 대로 시험도 잘 봤고, 2차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한껏 여유로운 얼굴로 당연한 결과라는 듯 받아들일 녀석인데, 아까부터 표정이 어두웠다. 그리고,
“좋은 성적이요?”
좋은 결과란 말에 눈까지 동그랗게 뜨기까지 했다.
사실 놀랄 구석이 있긴 했다. 전국대회 2차 시험까진 참가자들의 합격과 불합격 결과만 알려질 뿐, 심사평이나 점수 같은 건 공개되지 않는다. 그런데 강성실이 뭔가 구체적인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흘렸으니까.
“그래. 인마.”
강성실은 별로 숨길 생각도 없단 얼굴로 슬쩍 결정적인 말을 보탰다.
“네가 최고점이야. 2차 시험, 민준이 네가 최고점으로 통과했다.”
“네?”
김민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다 듣고 왔는데.”
“확실한 거예요? 정말요?”
다급하게 몇 번이나 확인하는 김민준. 강성실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인마, 내가 너한테 출처까지 말할 순 없지만 믿을 만한 정보니까 그런가 보다 하면 돼. 그리고, 네가 최고점을 받은 게 이상할 일이야?”
버럭, 언성을 높이던 강성실이 돌연 볼륨을 줄이며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주제도 미리 다 준비했고, 최선을 다했잖아. 시험장에서도 실수 없이 그렸는데 뭐가 문제야? 출발선이 다른데, 다른 놈들한테 역전이라도 당할 거라 생각했어?”
생각보다 정신력이 약한 녀석인가, 하여간 예술가 기질이 있는 애들은 멘탈이 허약한 게 문제란 생각을 하며 강성실이 혀를 찼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리고 한층 더 어두워진 김민준의 얼굴. 강성실이 김민준 쪽으로 의자를 가까이하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컨디션 관리 잘하고, 3차도 하던 대로만 하면 돼. 하던 대로만. 알겠지?”
“네…….”
김민준이 어쩐지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하…….’
그런 김민준을 보던 강성실이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제, 자정이 다 되어가던 시각. 강성실은 은사인 황정식 화백의 전화를 받았다.
중앙예고 애들 몇이 심사에 통과했다는 사실과 김민준이 최고점을 얻었다는 얘길 그때 들었고.
황정식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김민준이 심사위원단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자신이 힘을 썼노라 생색을 냈다.
여론을 조성하고 투표 판을 흔들고, 예측한 주제를 미리 준비하고, 승기를 잡기 위해 별별 재주를 부린 건 자신이었으나, 강성실은 그저 굽신거리며 황정식의 노고에 감사했다.
솔직히 그깟 걸로 인정받을 필요도 없었다.
고생해 판을 깔긴 했으나 김민준이 1등을 할 수 있게 점수를 몬 건 황정식이 분명했고,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납작 엎드려야 약속한 콩고물들이 지체 없이 떨어질 테니 입에 발린 소리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3차 시험이었다.
“흠흠. 룰이 좀 바뀔 거야. 여기도 말들이 많아져서.”
황정식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래서 강성실에게도 미리 일러주었던 3차 시험 방식이 바뀔 거란 언질을 비쳤다.
아무래도 심사위원단 안에서 알력 다툼이 세지며 기존의 방식을 보완하기로 한 모양인데, 누가 낸 의견인지 이번엔 외부에서 개입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이젠 당사자, 그러니까 김민준 혼자서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끌어모아 최고의 기량을 펼쳐야 하는 시기였는데,
‘이 자식 상태가 왜 이러지?’
평소와 달리 병든 닭처럼 골골하며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