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85)
85화. 모티브
3주 후, 세현예고.
“자유의 여신상은 어떨까.”
차윤희가 넋이 나간 얼굴로 넋이 나갈 말을 했다.
“대체 자유가 뭐야. 자유라니. 자유시간? 아, 초코바 땡겨.”
차윤희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지적하진 않았다.
다들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솔직히 어릴 때 미술학원 다닐 때 말이야. 원장 선생님이 금요일마다 주제를 따로 안 내주고 자유화를 그리라고 하셨거든? 근데, 난 그날이 제일 싫었다?”
“뭔지 알지. 맘대로 그리라 그러면 오히려 멈칫하게 되는 거.”
“맞아. 하던 짓도 방석 깔아주면 못 한다는 옛말도 있잖아. 그니까 조상 때부터 그런 수줍음이 있었던 거고 그게 우리 DNA에 각인된 거 아닐까?”
“방석이 아니라 멍석이야. 어쨌든 어릴 때부터 암기에 주입식 교육만 주구장창 시켜놓고 이제와서 자, 오늘은 자유를 줄 테니 너희 맘대로 해보렴. 이러면? 그럼 막 이날만 기다렸어요, 하면서 자유의지가 솟구치나? 하, 난 아니라고 본다.”
“옷장 열면 맨날 입을 옷이 없는 거랑 똑같은 이치지. 그릴 건 있는데 막상 그릴 게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전국대회 3차 시험을 치르게 된 세현예고 일곱 명의 아이들이 모인 교실.
수현을 뺀 여섯 명의 아이들이 침을 튀겨가며 ‘자유’라는 주제에 불만을 토로했다.
“차라리 나무와 낫이 나을 판이야.”
“아, 그건 좀.”
“그런가?”
그러나 불평을 늘어놓는다고 해결될 건 없었다. 넉넉하다 생각했던 대회가 어느새 일주일 후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하아. 머리가 돌이 됐나 봐. 이거다 싶은 게 안 떠올라.”
“왜, 그래도 지난번에 말한 열쇠는 되게 괜찮던데.”
“맞아. 자물쇠와 열쇠하면, 느낌 빡 오잖아. 열쇠는 뭔가를 풀어주는 이미지고, 그게 자유랑 연결되긴 하니까.”
“진짜? 그거 괜찮았어?”
“안 하면 내가 해?”
“에헤이, 그건 아니지.”
그래도 그간 논 건 아니라 이런저런 아이디어 스케치와 구상은 제법 해놓은 상태였다. 그중에 확실한 심상이 없는 게 안타까운 정도였고.
“됐다. 우리가 대작가도 아니고, 엄청난 게 떠올라도, 지금 실력으론 소화하지 못할 가능성이 클 거야.”
“맞아.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먼 옛날 소크라테스 아저씨가 말했지.”
“꼭 친한 것처럼 말한다?”
“어쨌든, 지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주제를 선택하는 것도 좋은 전략 아니겠어?”
“그래도 네가 지난주에 말한 독립운동 소재는 좀 아닌 듯. 그걸 어떻게 표현하려고?”
“어, 안 그래도 얼마 안 가 막히더라. 그래서 날개나 비행 같은 걸로 틀어서 다시 생각해보는 중이야.”
결국 적당 선에서의 타협이 필요하단 결론에 도달했는데, 사실 이건 대략 2주 전부터 돌림노래처럼 계속되는 얘기였다.
초조하니 그렇겠지, 이렇게라도 불안을 털어내야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수현은 그래도 열심히 대회를 준비하는 애들을 기특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수현. 너는 정했어?”
그리고 이번엔 수현을 향해 쏠리는 시선.
“어. 대충.”
호기심 가득한 눈을 끔뻑이는 애들을 보며 수현이 싱긋 웃었다.
마침 어제 어떤 그림이 좋을지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린 참이었다.
수현이 소재로 삼으려는 건 과거 수현이 그린 그림책, ‘우리는 자유야’의 한 페이지.
책의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주어가 다양하게 바뀔 뿐 ‘00는 자유야’가 반복되는 본문.
이를테면 ‘나는 자유야’, ‘오리는 자유야’, ‘구름은 자유야’, ‘나무는 자유야’ 같은 짤막한 문장이 한 줄 적힌 페이지에 어울리는 그림을 보여주는 식이었으니까.
텍스트에 별 제약이 없으니 수현은 각각의 상황을 재미있게 상상할 수 있었다.
표현에도 거침이 없었고. 그중 구름과 하늘, 나무, 바다에 관한 건 단독으로 끌어와 완성해도 꽤 그럴듯한 것이었다.
마음껏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 하늘 곳곳에 숨은 생명체의 즐거운 한때, 이상한 과실들이 열린 나무들, 신나게 밀려가는 파도와 춤추는 물고기들…….
흥겨우면서도 신비로운 순간들을 담은 책은 비록 애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유치하지 않고 빛이 났다.
그러나 수현이 고심 끝에 이번 대회에 그리기로 마음먹은 건 책의 본문에 담긴 그림이 아닌, 표지에 쓴 그림이었다.
수현은 ‘우리는 자유야’의 표지에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신나게 그림을 그리는 소녀를 그렸다.
책 속에 담긴 모든 내용이 실은 한 아이의 기발한 상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그림이었는데, 이 아이디어를 활용해 전국대회 3차전에 그릴 그림을 떠올렸던 거다.
‘캔버스를 거대한 담벼락이라고 상상하는 거야. 그리고 여러 사람이 거기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그리는 거지. 아이는 아이답게, 아마추어는 아마추어답게, 잘 그리는 사람도 있을 거고, 못 그리는 사람도 있을 거야.
누군가는 즐거울 거고, 누군가는 화가 나 있을 수도 있어. 어쨌거나 속 시원하게 그 담벼락에 자신의 것들을 풀어내는 상황. 그 광경을 그려보자.’
거대한 캔버스를 쓸 생각이었다.
먼저 담벼락에 선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리고, 그 뒤로 그들이 그린 걸로 유추되는 그림을 다양한 기법으로 그릴 계획이었고.
사람에 따라 쓰는 재료도 다를 테니, 그 재료를 풍성하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어차피 이번 주제는 ‘자유’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었으니까. 캔버스 안에 다양한 표현기법을 느낄 수 있게 그리면 주제에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다.
‘생각할수록 딱이야.’
수현이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많은 사람이 담벼락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그려낸 그림을 자유라 표현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림이 곧 자유란 뜻이니까.
수현은 항상 그림을 그릴 때 자유로워지는 걸 느꼈고 그림이야말로 수현에게 ‘자유’였으니 이보다 더 자유에 적합한 주제는 없었다.
‘100호 정도는 돼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거야. 캔버스가 나을지 합판이 나을지도 고민해봐야겠어. 다양한 재료의 특징을 살리려면, 그리고 담벼락의 질감을 살리려면 합판이 나을 수도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는 수현을 묘하게 바라보던 애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긴, 한수현은 걱정 없겠지. 우리가 걱정하는 게 오히려 웃긴 일이야.”
“그래, 우린 너만 믿는다. 세현의 명예를 지켜줘!”
“어쨌든 다들 잘해보자. 아으, 떨린다.”
이후로도 대회 준비와 재료에 대한 견해, 대회 요강에 맞는 작전 같은 걸 좀 더 떠들던 애들은 수업종 소리에 맞춰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같은 시각 중앙예고.
미술과 실기동 전공실에서 이런저런 스케치를 하던 김민준이 인상을 구기며 스케치북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하아. 이 정도론 안 돼.”
뭘 그려도 성에 차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이 너무 높아진 것 같았다. 그날 본 수현의 그림이 뇌리에 생생해 뭘 떠올려도 덮어지질 않았던 거다.
“안 되겠어.”
김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 안쪽에 들어있던 명화집을 꺼냈다.
“눈을 좀 정화시키자.”
세기의 천재들이라 불린 작가들의 작품집.
시대별로 다른 소재와 기법, 주제들을 살피며 김민준이 그림들을 씹어 삼킬 듯 노려보았다.
“이건 형태에 맞게 색감을 집어넣은 게 아니라, 윤곽선을 무시하고 두툼하게 색의 덩어리를 만들었구나. 음, 캔버스 밖으로 오브제가 튀어나오게 그린 것도 자유로운 표현이라 볼 수 있겠고.”
휙휙. 작품집을 넘겨 가는 김민준.
“혁명을 소재로 한 그림들도 꽤 많아.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그린 거니, 이것도 자유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
수현의 그림이 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이 첫째,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자유’라는 주제에 힌트를 얻으려는 게 둘째였다. 김민준은 점점 집중하며 대가들의 그림을 분석해갔다.
“이건 자유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모습에 집중한 그림이야. 연민과 비극을 느껴지게 하려고 이런 색감을 쓴 건데, 쯧…… 너무 올드한 느낌이네.”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그림을 넘기던 김민준이 라울뒤피의 그림에서 동작을 멈췄다.
“색감은 이게 괜찮겠는데?”
간략하고 명확한 색, 시원시원하고 활기찬 느낌을 주는 요트 경기 그림.
“요트라는 소재를 끌어오는 것도 좋겠어. 요트라면 여행이 떠오르고 여행은 또 자유를 상징하니까.”
활짝. 커다란 웃음이 김민준의 얼굴에 번졌다.
어쩌면 이거라면, 3차 시험에선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한수현이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화가에 비할 순 없을 거다. 그러니 자신이 라울뒤피의 기법을 제대로 익혀낸다면, 거기에 조금만 오리지널리티를 가미해 작품을 만들어낸다면 3차 시험에선 그때 느꼈던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아니,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김민준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점차 확신으로 이어질 즈음. 김민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준비할 건 확실해졌고, 결과를 완벽하게 내기 위해선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김민준이 강성실 미술과장의 방으로 향했다.
***
“대체 그 애를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자초지종을 들은 강성실이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선생님이 말했지. 전국대회 2차에서 민준이 네가 최고점이었다고. 한수현이라는 그 애, 하.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아쉽게도 2등, 이런 정도의 점수도 아니야. 그냥 평균적인 점수였다. 평균적인 점수. 그런 애를 왜 신경 쓰는 거니?”
“그래도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래요.”
김민준은 3차 시험을 치르는 동안 수현이 언제 시험장을 드나드는지 동선을 파악할 방법을 강성실에게 물은 참이었다.
강성실은 한수현이란 아이를 그렇게까지 의식하는 김민준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심사 성적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날 시험장 분위기는 한수현 그 애가 압승이었어요.”
“응시생들 분위기 말이냐?”
“감독관 선생님들도 그랬고요.”
김민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수현이 그림을 제출했을 때 감탄하며 몰려들던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경탄의 빛은 만들어진 것도 연기도 아니었다. 진심 어린 진짜 반응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흠. 그래. 자만하지 않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거. 그것도 승리를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긴 하지.”
잔뜩 굳은 김민준의 얼굴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다행히 강성실은 김민준을 채근하지 않고 한발 물러났다.
“응시생들 출입 기록을 관리하는 부서가 따로 있을 거야. 전산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아보고 연락해주마. 아니면 관리하는 직원한테 부탁해서 따로 전화를 넣어달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네. 꼭 부탁드려요, 선생님.”
“그런데, 민준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말에 금세 환한 얼굴이 된 김민준을 보며 강성실이 확인하듯 물었다.
“너, 한수현이란 애가 시험장에 올 때 맞춰 들어갈 생각인 거냐? 매번 정면승부라도 하려고?”
“네?”
고개를 갸웃하던 김민준이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성실은 자신을 승부욕에 불타는 사춘기 소년쯤으로 보는 모양이지만, 김민준이 생각한 작전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뇨. 마주칠 생각은 없어요. 다만, 그 애를 자주 확인하고 넘어가야 제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아서요.”
김민준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강성실을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