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86)
86화. 결선(1)
일주일 후, 8월 16일 금요일 오전.
전국대회 3차전이 시작되었다.
첫날엔 30명의 참가자 중 24명이 시험장에 나타났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기보다 시험장의 구조와 환경, 시스템 등을 익히고 재료와 도구들을 옮겨놓으려는 목적이 주라 한두 시간 내로 돌아가는 이들이 많았고.
하기는 총 200시간이라는 넉넉한 시험 시간이 주어졌으니 이렇게 한두 시간 정도를 분위기 익히기에 할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와, 무겁네.”
수현 역시 낑낑대며 그림에 필요한 도구들을 배정받은 자리로 옮겼다.
먼저 100호 크기의 커다란 합판.
거기에 오브제로 붙일 크기가 다른 나무, 천, 알루미늄 조각들과 물감, 그리고 붓, 접착제와 각종 오일들, 오일 통, 붓 세척액, 팔레트, 나이프와 수건, 앞치마와 토시, 페인트 트레이, 붓 비누, 젯소…….
큰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온 재료들과 합판을 차에서 시험장 복도까지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옮기고, 그걸 다시 시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는데, 모두 정리하고 나니 팔이 저릿저릿하고 숨이 찰 정도였다.
“후우…….”
수현이 자리와 맞닿은 창틀에 기대앉아 한 달 동안 쓰게 될 자신의 작업 공간을 눈여겨보았다.
수현 받은 시험장 자리 번호는 15번.
1-15번은 창가, 16-30번은 복도 쪽 자리라 수현은 창가 쪽이었다.
햇빛의 간섭이 신경 쓰긴 했지만, 밖을 한 번씩 내다볼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끝자리라 벽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공간은 넉넉했고 작업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다른 참가자의 자리와도 적당한 간격이 있었고, 허리 높이 정도의 파티션이 놓여있어 집중하며 그리기도 좋겠다 싶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수현이 팔을 걷어붙이고 합판을 벽 쪽으로 붙여 세웠다.
오늘의 할 일은 이 100호짜리 합판에 나무와 알루미늄 조각들을 덧대어 담장 역할을 할 레이어를 만드는 작업.
합판에 그것들이 단단히 고정되면 미리 구상한 스케치를 하고 본격적인 채색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수도 없이 많이 구상한 그림.
수현은 망설임 없이 합판 위에 조각들을 덧대어 나갔다.
거침없는 움직임은 언뜻 즉흥적으로 보였지만,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행동이었다.
‘등장인물들이 이쯤 그려질 거면, 손의 방향은 여기쯤. 그럼 그들이 그린 것처럼 보일 낙서는 이 부근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게 될 거야. 이쪽은 나무를 대는 게 낫겠고. 아, 여긴 금속 질감을 살짝 표현하는 게 좋겠어.’
가장 기본이 될 밑 작업.
간단해 보여도 마지막 완성까지 영향을 미칠 기초가 되는 작업이니 수현은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나자, 어느 정도 틀이 잡혔고, 수현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제는 붙기를 기다리면 돼.’
적당한 크기로 마음에 드는 위치에 모든 레이어가 배치됐다.
수현은 그것들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작업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어느새인가 수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갔다.
***
다시 열흘이 지난 8월 26일.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도 30명의 참가자는 성실하게 대회에 임하고 있었다.
바짝 날이 서, 긴장한 얼굴로 나타나던 이들도 차츰 시험장에 익숙해지는지 자연스럽게 작업에 몰두했고,
쿵쿵. 탕탕탕.
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소음들에도 점점 친근해졌다.
“안녕.”
“어, 안녕.”
오가며 익은 얼굴들끼리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시험장 안에선 따로 잡담하거나 긴 대화를 나누는 게 금지돼 있어 다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하다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큰소리가 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하, 어이없네.”
팔짱을 끼고 선 한 참가자가 다른 참가자의 뒤통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씩씩거렸다.
“짜증 나, 진짜. 양심도 없는 거 아니야?”
욕을 먹고 있는 참가자는 누군가 자신을 향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양,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다.
“뭐야?”
“왜 저래?”
다른 참가자들이 하나둘 파티션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란의 원인이 뭔지 눈치를 살폈다.
시선이 모이는 걸 느꼈는지 화를 내던 참가자는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였고.
“와, 나는 내가 그린 그림인줄 알았어.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그림이 나올 수 있지? 하, 공개된 장소에서 그리니까 진짜 별일이 다 생기네. 근데 멍청한 거 아냐? 이런 식으로 그리면 누가 누구 그림을 베낀 건지 다 알게 될 텐데?”
동양화 쪽 참가자들이었다.
화내는 말로 짐작해보자면, 한 참가자가 다른 참가자의 그림을 베꼈다는 얘기.
흥미가 동한 다른 참가자들이 슬쩍슬쩍 자기 자리에서 나와 두 그림을 비교하려 고개를 길게 뺐다.
“흠. 화날 만은 하겠네.”
“와…… 근데, 진짜 베낀 거야?”
“난 좀 아리까리한데…….”
수현은 이 소동에 휘말리지 않고, 여전히 오늘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으나 대강의 내용은 알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지나면서 보긴 했지. 아슬아슬하더니, 기어이 터지는구나.’
한 명은 땅 위에 덩그러니 남은 누군가의 족쇄를 그렸고, 다른 한 명은 발에 걸린 족쇄를 부수는 사람을 그렸다.
화를 낸 참가자는 황량한 공간에 누가 차고 버렸는지 모를 족쇄가 놓인 모습을 그린 쪽.
그는 자신이 소재로 삼은 ‘족쇄’를 며칠 후, 다른 참가자가 가져다 활용하고, 자기보다 역동적인 그림을 그려내자 분을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애매한 상황이기도 했다.
같은 소재를 썼으나 결과물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한 명은 족쇄를 푼 당사자가 화면에서 빠져나간 후의 모습을 그려, 그 장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는 이가 상상하게끔 유도했고,
또 다른 한 명은 족쇄를 푸는 현장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 자유를 갈망하는 인물이 폭주하는 느낌을 생생하게 살렸다.
같은 소재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연작의 느낌이 들 순 있겠으나 거기까지.
‘족쇄’란 소재가 따로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게 아니니 뒤에 그린 참가자가 우연히 자신도 같은 소재를 떠올린 거라 주장하면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처음 그림을 그린 참가자가 아무리 억울하다 한들 심사는 아무 페널티 없이 진행될 테고.
‘그걸 알고 있으니, 지금도 저 후발 주자는 누가 화를 내건 말건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자기 그림에만 몰두하는 거겠지.’
수현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갈등은 창작의 과정에서 밥 먹듯 일어나, 질리게 봐왔다.
학교에서, 화단에서, 대회에서, 이런 사건이 말썽이 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나.
양심보다는 욕심.
잠깐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주어질 영예에 슬쩍 양심을 치워버리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는 거라며,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가 찬란하면 되는 게 아니냐는 식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중재할 사람은 없을 거고, 누구 하나 물러나지도 않을 테니, 결국 저 둘은 같은 소재로 누가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느냐를 가지고 남은 시간을 피 터지게 싸울 게 분명했다.
그러니 멘탈을 단단히 붙잡고 실력을 키우며 완성을 향해 달리는 것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고.
“…….”
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솔직하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소재를 잡을 때 이런 가능성을 고려해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할 수 있는 그림을 떠올리는 편이 낫다.
그게 어려웠다면 최소한 자신의 킥이 될만한 포인트를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공개하는 조심성이라도 보여야 했고.
어차피 경험이 쌓이면 알게 될 일.
그래서 수현은 이 불꽃 튀는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현의 그림은 순조롭게 그려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 따로 있었던 거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수현이 시험장 안쪽으로 고개를 돌려 빈자리를 응시했다.
3차 시험이 시작된 후, 희한하게도 한 번을 마주치지 않는 김민준.
그러나 수현은 어느 순간부터 김민준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현이 진도를 뺄 때마다, 김민준의 그림에 파격적인 수정이 더해지는 게 눈에 띄었던 거다.
그 수정의 방향은 다분히 수현을 의식한 것으로 보였고.
개방형 공간.
허리 높이의 파티션을 설치하긴 했으나, 시험장은 전체적으로 탁 트인 구조였다.
대회 참가자들은 보통 작품을 작업대나 이젤 위에 올려놓으니, 쓱- 중앙 통로를 한 번 걷는 것만으로도 누가 어떤 작품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고.
그러니 8번.
지금도 비어있는 저 김민준의 자리는 15번인 수현의 자리로 가려면 늘상 통과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 수현은 좋든 싫든 김민준의 그림을 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의도적인 것이었을까.’
첫날 30호와 50호짜리 캔버스를 가져다 놓았던 김민준은 3일쯤 지나자 캔버스를 치우고 수현과 똑같이 100호짜리 합판을 가져다 세워놓았다.
수현이 나무, 천, 알루미늄 조각들을 이어붙여 합판 위에 레이어를 만든 걸 유심히 봤는지, 자신 역시 다양한 종류의 나무에 천 조각 같은 걸 구해다가 합판에 붙여놓았고.
다시 며칠 후, 수현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담벼락의 낙서 느낌을 표현하자, 이번엔 오일과 페인트, 펜 같은 재료들을 추가해 색다른 표현기법을 보이려는 시도를 했다.
뭔가 이상하단 걸 눈치챈 수현은 평소와 다른 시간에 시험장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김민준은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수현이 시험장을 빠져나가면 뒤늦게 들어와 다시 수현이 그린 것들을 분석하며 베껴냈고.
그렇게 열흘.
김민준은 숨바꼭질하듯 수현을 견제하며 수현보다 뛰어난 걸 그려내려는 욕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전처럼 교묘하게 베끼네. 일부러 알아보라는 것처럼 성질을 살살 긁는 것도 딱 원래대로의 스타일이고.’
그러나 김민준은 아직 수현이 뭘 그리려는 건지 확실히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현은 아직 담벼락과 거기 그려진 낙서들 일부만 묘사하고 있었으니까.
모든 게 경험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수현은 일부러 주제를 숨긴 채, 천천히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림이 도용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그림의 진짜 의미를 철저히 감추면서.
즉,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게 할 담벼락에 선 사람들은 가장 마지막에 그려 넣을 계획으로 주변부의 작은 것부터 그리고 있었던 거다.
아마도 한동안은 누구도 수현이 완성할 그림이 뭔지 알아채기 힘들 거다.
“후…….”
초벌을 마친 수현이 기지개를 켜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전체적인 톤을 살폈다.
그냥 볼 땐 아리송할 수 있겠지만, 수현의 머릿속엔 확실한 완성본이 있었고, 그 목적지를 향해 착실히 달려가는 중이었다.
김민준은 그걸 알 리 없으니 수현이 쓰는 도구와 재료를 따라 한다 해도 큰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예전에 이런 일을 당했다면 크게 영향을 받았겠지만, 지금은 상대를 너무 잘 아니 그럴 일이 없을뿐더러, 다음 행동과 패턴이 예측돼 시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대로 김민준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착각하게 둘 순 없지. 적당한 시기에 역으로 똥줄이 타게 해줘 볼까.’
마침 초벌 단계가 마무리돼, 물감이 마르기까지 적당한 시간이 필요한 상황.
수현은 작전을 바꿔 김민준을 좀 당황하게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
다시 열흘이 지난 9월 5일 목요일.
똑똑똑.
김민준이 중앙예고 미술과 강성실 과장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대답과 동시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는 김민준. 얼굴엔 초조함이 역력했다.
“어, 민준아. 무슨 일인데?”
“선생님. 오늘도 안 왔대요?”
“어?”
“한수현이요. 벌써 열흘이나 작업을 멈추고 있어서요.”
“아, 그거?”
심드렁한 표정의 강성실이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오늘도 별 얘기 없었어. 안 나온 모양인데?”
“하, 그럴 리가 없는데.”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김민준.
“왜?”
“지금 걔가 그리는 그림이 그렇게 여유를 두고 그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하루하루 쌓아가면서 그려야 제대로 완성할 수 있을 건데, 열흘이나 진도를 안 빼는 게 너무 이상하잖아요. 이제 대회 마무리까지 열흘 정도 남은 건데, 하…….”
“민준아.”
강성실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김민준을 불렀다.
“너 자꾸 그런 애한테 휘둘리면 안 돼. 네가 2차에서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상대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거 아니니? 그리고,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 그림이야. 너, 그 애 신경 쓰느라 영향받고 흔들리면 안 돼. 그러면 진짜 큰일이다?”
강성실의 말에 오히려 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는 김민준.
그가 입을 열어 뭔가 반항적인 말을 뱉으려는 순간,
띠리링-.
강성실의 자리에 놓인 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