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nowned Genius At My Arts High School RAW novel - Chapter (90)
90화. 수확의 계절
“언제는 선생님만 믿으라면서요!”
데자뷔인가.
게다가 똑같은 자리.
중앙예고 미술과 강성실 과장의 방에서 김민준이 억울한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얼마 전, 강성실이 은사 황 화백과 통화를 하며 소리를 질렀던 그 밤의 광경이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전국대회 3차 심사위원단이 새로 구성되었다는 깜짝 발표가 이날 낮, 참가자 전원에게 전달됐다.
그걸 듣자마자 김민준이 사색이 돼 강성실에게 달려왔고, 틀림도 반전도 없는 사실이란 걸 확인하자 사나운 본성을 드러냈다.
“하아…….”
답답했으나, 강성실도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황 화백은 자신의 연락을 피하고 있었다.
정리되면 연락을 준다더니, 꽁무니를 빼고 어디론가 숨은 게 분명했다.
잘린 거겠지.
뒤가 구린 인간이었으니, 무슨 사달이 나 허둥지둥 내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용히 아무 항의도 없이 물러날 리가.
그나마 다행인 건, 반대편 세력도 같이 잘렸다는 정도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던 강성실이 김민준을 응시하며 상황을 짚었다.
어쨌거나 해외에서 심사위원을 불러왔다니, 어느 쪽의 라인도 닿기 힘들어진 형태다. 그건 자신뿐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한 조건.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진짜 실력이고 진검승부가 필요할 때였다.
“너, 제대로 완성은 한 거지?”
윽박지르듯 밀고 들어오는 강성실.
“……네?”
“너는 봤을 거 아니야. 네 그림도, 다른 애들 작품도.”
신경 쓸 이유 없다던 다른 참가자의 기량을 캐묻는 말에 김민준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게 분명해졌다. 더는 뒷배가 없다는 것이.
“왜? 자신 없어? 네가 그렇게 신경 쓰던 한수현이라는 아이. 그 애는 어떻게 그렸어? 현장 반응이라는 게 있었을 거 아냐. 분위기가 어땠는데?”
김민준의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게 보였으나 강성실은 다급했다.
결선에 오른 세 명 중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인 김민준.
이 애가 제대로 된 실적을 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망신이었다.
‘중앙예고 교장부터 여기저기 떠벌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하, 미리 긁은 카드도 있잖아. 아니지. 침착하자. 설마, 이 욕심 많은 애가, 아무리 심사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한들 시험을 대충 치렀겠어?’
김민준의 입에서 행여 실망스러운 말이 나올까 긴장하는 강성실.
그러나 김민준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왜? 왜 그러는데, 민준아. 네 말론 그 애가 중간에 열흘쯤은 시험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고 했잖아. 막판에 달려봐야, 꾸준히 했던 애들과의 격차를 줄이기 쉬웠겠어? 열흘이면 시간이 얼만데. 어?”
그리고 낮은 소리로 김민준이 웅얼거렸다.
“……렸어요.”
“어?”
“틀렸다구요.”
“뭐가? 뭐가 틀려?”
“못 이겨요. 걔는 그냥 레벨이 달라요, 선생님!”
와르르.
김민준의 고백에 강성실의 기대가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어르고 달래가며 한참 만에 시험장에서 본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낸 강성실.
“하아.”
강성실이 자기 책상 서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학교고, 학생 앞이고,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민준아.”
마침내 강성실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 차라리 기권하면 어떨까.”
“……네?”
“내가 볼 때 네가 2등은 할 수 있을 거야. 네 실력이 가짜도 아니고, 어느 정도 레벨은 갖추었다는 걸 이 선생님이 알고 있고, 보는 눈이 있다면 심사위원들도 낮은 점수를 줄 리가 없으니까.”
“…….”
“하지만 2등을 받는다면, 넌 만족할 수 있겠니?”
강성실의 질문에 김민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대로, 오직 대상을 목표로 달려온 대회였다. 실력에도 자신 있었고, 제법 든든한 동아줄을 잡았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썩은 동아줄은 힘없이 끊어졌고,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어느 쪽으로든 가망이 없었다.
실력으로도, 라인으로도 이젠 1등을 거머쥘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나도 분위기를 좀 알아보마. 그동안 너도 생각을 해봐. 만약 정면승부에서 진다면, 중앙예고의 명성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네 이력에도 타격이 있을 거야. 그러니 2등이라는 꼬리표를 받는 것보단 차라리 이번엔 한 걸음 물러나고, 다음번에 다시 준비해서 제대로 된 승부를 겨루는 게 낫겠단 생각인데…… 하아.”
스스로도 말의 앞뒤가 맞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강성실은 중간중간 짤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당장 자신의 체면을 복구할 방법도 저질러놓은 문제들을 감당할 자신도 묘안도 없었다.
그러니 적당한 핑계를 대며 비를 피하자는 설득이었는데 이게 맞는지, 맞는 방법이라도 김민준이 설득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강성실의 말이 앞뒤가 맞고 안 맞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강성실의 말은 김민준의 귀에 하나도 제대로 꽂히지 않고 있었으니까.
***
3주 후, 10월 첫째 주 금요일.
“와, 오늘은 춥더라?”
“맞아. 이제 가을이야, 가을.”
“응. 다음 주 중간고사.”
“응. 꺼져주시고요.”
세현예고 미술과는 여느 때처럼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6개월이란 대여정, 전국대회를 모두 마친 애들은 특히나 더 평온한 일상을 즐기고 있었고, 그건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와, 3학년 선배들은 곧 수능이네.”
“엄청 헷갈릴 것 같아. 갑자기 200점 만점에서 400점 만점으로 바뀐 거잖아.”
“그러니까. 몇 점을 받아야 어느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커트라인도 아직 정확하지 않다며.”
“뭐, 죽어라 하는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린 다행이야. 내년엔 올해 선배들 기준으로 작전을 짤 수 있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중간고사 끝나도 또 모의고사 봐야 하네. 학과 시험에 실기 시험에, 청춘이 이렇게 가는구나. 서글프다 진짜.”
우울한 입시 얘기마저 즐겁고 평범한 일상으로 느껴졌다.
돌이켜보니 작년 미술 전시회부터 올해 전국대회까지 수현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고교 시절을 보내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전국대회 발표는 언제쯤 난대?”
수다를 떨던 친구 중 하나가 문득 수현과 차윤희에게 전국대회 소식을 물었고,
“몰라. 심사위원단이 교체되면서 원래 예정보다 좀 늦어질 거라고만 했거든. 그래도 이달 안엔 발표 나지 않을까?”
차윤희가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을 해줄 때였다.
-교내에 2학년 1반 한수현, 차윤희 학생은 지금 바로 교무실로 와주길 바랍니다. 다시 알립니다. 교내에 2학년 1반 한수현, 차윤희 학생은…….
교내 스피커를 통해 수현과 차윤희를 찾는 방송이 울렸다.
동시에 시선을 맞춘 애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야!”
“맞지?”
“어떡해! 발표 났나 봐! 났나 봐!”
“으아아아! 얘들 왜 부르는 거야? 붙은 거야? 진짜?”
“꺄아아! 축하해! 축하해, 한수현, 차윤희!”
비명을 내지르는 아이들.
그냥 설레발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특별한 사정 없이 교내 방송까지 하며 학생을 찾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게다가 2차 시험 결과가 발표되던 날도 똑같이 전국대회 응시자들을 모으는 방송이 나오기도 했었다.
무슨 일이, 그것도 큰일이 있긴 하다는 신호였다.
“갈까?”
차윤희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수현을 돌아보았고,
“그래. 가자.”
수현이 싱긋 웃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
15회 전국 청소년 미술대전
대상 한수현.
조소 부문 최우수 차윤희.
도예 부문 입선 박경호.
경사였다.
교무실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교무실 칠판엔 커다란 글씨로 전국대회 수상자 이름이 적혀있었다.
“축하한다!”
“고생들 했어!”
“정말 장하다!”
선생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경호도 됐구나. 와, 축하해. 경호야.”
“어, 근데 너희 어디에 있었어? 난 교실에 있다가 바로 불려갔는데, 너흰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쌤들이 방송하신 거야.”
“아, 우린 잠깐 매점. 간식 먹느라.”
“그랬구나.”
오히려 침착한 건 수상자인 수현과 차윤희, 박경호였다.
이변이 없다면 세현예고에서 두세 명 정도는 수상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내가 진짜 대상을 타버릴 줄이야.’
서양화, 동양화, 조소, 디자인, 도예, 모든 분야를 통틀어 한 명에게 주는 상.
과거엔 김민준이 차지한 영예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는 걸 보자니 수현은 기분이 묘해졌다.
이걸로 잘못됐던 일들을 조금은 바로잡게 된 걸까.
짤막하게 감회에 젖기도 했다.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타인을 밟고 올라선 자들의 손을 잡고, 똑같이 정상에 올랐을 김민준의 기회를 한번 꺾어놓은 것도 의미 있는 일일 테니.
어쨌거나 고교 시절부터 이름을 떨친 김민준의 이력이 이로써 한 줄 지워진 셈이었다.
수현이 작게 웃었다.
이제 자신도 과거를 떨치고 전에 가보지 못한 세계로 나아갈 때였다.
순수한 열망이 깃든 결심과 소망.
그건 수현에겐 당연했으나, 전국대회의 진가는 겨우 그 정도에 그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대회의 진정한 포상은 주말이 지난 월요일 아침, 터지기 시작했다.
10월 9일 월요일 아침.
한글날이 법정공휴일에서 제외된 시기라 학생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바쁘게 등교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었는데, 교문이 무척이나 북적거린다는 점이었다.
“여기 한수현 학생이 누구지?”
“미술과 한수현 학생이 세현예고 다니죠?”
“학생, 한수현 학생 알아? 친해?”
카메라를 목에 건 기자들이 세현예고 정문 앞을 이른 아침부터 서성였다.
“한수현, 미술과 맞아요. 근데 걘 여기 없을 건데.”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수현 선배, 기숙사 생활해요. 여기서 암만 찾으셔도 못 만날걸요?”
“하아, 기숙사라고?”
“아니, 기숙사면 어떻게 만나지?”
“혹시 기숙사 학생들은 따로 밖에 나올 때가 있나?”
“보통 금요일 저녁에 나와서 일요일 저녁에 들어가거나 월요일 아침 일찍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럼 오늘 올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수현이는 항상 일찍 들어가요. 그치? 아예 주말에 안 나올 때도 있고요.”
“맞아. 다시 나와도 금요일일걸요?”
“하아. 그럼 안 되는데.”
“차라리 학교에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걸 안 물어봤겠습니까? 이번 주에 하필 중간고사 시작이라고 면학 분위기 흐린다고 나중에 오라는데.”
“에이, 지금 그깟 중간고사가 문젠가.”
“답답해 죽겠네.”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신통치 않은 답이 나오자 기자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난주 금요일, 전국대회 수상자가 발표됐다.
6개월에 걸친 쟁쟁한 대회란 점에서 수상자를 향한 관심이 쏠리기도 했으나, 그래봐야 일개 고등학생의 스토리.
기자들이 주말 내내 뺑뺑이를 돌다 월요일 새벽부터 학교에 나타나 대상 수상자인 한수현을 찾는 데는 그보다 크고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JK에서 유례없는 투자를 한다는 거잖아?”
“일등복권이나 마찬가지라잖아요. 세계적인 작가로 키우기 위해 전폭적인 지지를 한다는데.”
“하, 이거 뭔가 있는 거지? 아무래도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한수현이라는 애는 뭔가를 더 자세히 들었을 거잖아. JK가 얼마를 쏟아붓겠다는 거야? 대체 왜?”
“어휴, 어쨌든 여기선 답 없겠어요. 일단은 철수하시죠.”
등교 시간이 지나 교문은 어느새 굳게 닫혔다.
기자들이 입맛을 다시며 잠시 발길을 돌렸고,
1교시 수업이 끝날 무렵.
한눈에도 수억을 호가하겠다 싶은 고급 대형 세단이 세현예고 정문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