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spectable male god RAW novel - Chapter (206)
#206. 백산 예술대상
>블레싱>의 촬영 현장에는 명물 아닌 명물이 있었다. 사실 명물이라기 부르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고마워요, 재인 선배.”
“뭘요. 어깨 외에 더 불편한 곳은 없죠?”
“흐응. 없어요.”
“없대. 재인아 그만 일어나. 가자.”
어깨가 불편하다면서 재인에게 봐 달라고 부탁한 박세영과 그를 저지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김수혁이었다. 재인을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이 촬영장의 명물이었다.
“어깨 아프다더니 남의 팔뚝만 잘 잡네.”
“으음.”
“하여간 쟤는 지치지도 않아. 생긴 거랑 다르게 질기다니까.”
“……수혁 형.”
김수혁의 재촉에 자리에서 일어난 재인이 속으로 혀를 찼다. 두 사람 다 주변은 일절 상관하지 않고 실랑이하는 게 참 난감했다.
‘이러다가 수혁 형이랑 세영 씨랑 정들겠다.’
김수혁은 자신이 한 말을 잘 지켰다. 박세영이 재인을 은근슬쩍 건드리거나 몸을 기대면 번개처럼 나타나 제지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지켜 주겠다는 말을 충실하게 지켰다.
“촬영 몇 회차 안 남았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촬영 끝나면 종방연에나 볼 텐데.”
“친해 보이면 안 돼. 한 무리로 묶여서 홍보 예능에 같이 나갈 수 있어.”
“아!”
재인은 진심으로 배역에 과하게 몰입하는 게 위험하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성실하고 진중하다던 김수혁의 입에서 잔머리 굴리는 멘트가 나온 게 사실인가 의심스러웠다.
김수혁은 얼마나 친구 역할에 심취한 건지 본인 성격과 전혀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데 위화감이 하나도 없었다. 성격과 달리 막무가내로 박세영을 밀어내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이대로 계속 촬영해도 괜찮을지 걱정됐다.
“영화 잘 나왔더라.”
“보셨어요? 극장 갈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
“심야 시간대에 가서 봤어. 괜찮더라. 민선영 감독님은 어떤 스타일이야?”
“관찰력이 좋으세요. 배우나 스태프의 특징을 잘 파악해서 적재적소에 쓰시더라고요. 꼼꼼하시기도 하고요. 덕분에 촬영 시간이 짧은데도 아주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렇구나. 나중에 감독님 만날 일 있으면 나도 소개해 줘.”
재인은 그렇게 하겠다 대답하면서도 조금 놀랐다. 대놓고 유능한 감독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할 성격이 아니면서 부탁하는 게 역시나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호의를 가지고 친근하게 구는 사람을 내칠 수도 없고.’
김수혁은 박세영처럼 대접받기 위해서라거나 혹은 그의 유명세를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하는 게 아니었다.
배역에서 비롯된 감정이긴 했지만, 순수하게 호의로 하는 접근이었다. 연기법과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재인은 최대한 김수혁의 배려를 받아 주는 중이었다.
촬영이 끝난 뒤에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끔 친한 관계라는 걸 기정사실로 만드는 중이었다. 비록 두 사람이 생각하는 친하다는 기준이 많이 다르긴 했지만.
“너희 매니저님 요새 바쁘시던데 좋은 소식 기대해도 되겠지?”
“네? 매니저님이요?”
“어, 영식이한테 들었는데 조감독님하고 일정 맞추느라 바쁜 것 같다고 하더라.”
“저는 아무 얘기도 못 들었는데요.”
김수혁은 어리둥절한 재인을 보고 저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매니저 영식한테 듣기로는 재인의 매니저가 촬영 일정 조율로 바쁘다고 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배우가 모르는 게 의아했다.
“뭐, 못 들었어도 뻔하잖아. 백산 예술대상이 코 앞인데 일정 조정하는 중이라면.”
“아! 기억나요. 얼마 전에 일정 조정 하신다고 했었어요.”
“시상식 참가밖에 없지.”
“그렇네요.”
재인은 그제야 얼마 전 최상호가 스케줄을 조정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촬영에 정신이 팔려서 이유를 제대로 못 들었는데 백산 예술대상 참석을 위해서 조정한다는 말이었나 보다.
백산 예술대상은 종합 예술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화, TV, 연극 부문으로 나누어 시상한다. 재인이 만약 참석한다면 민선영 감독의 영화 >그래, 가족이야>가 심사 기간에 들어간다.
“개봉 시기도 딱 좋았고 개봉 시기 이상으로 영화도 잘 나왔으니까. 기대해도 될 것 같아.”
“아니에요. 쟁쟁한 작품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다른 건 몰라도 인기상은 확실하게 네 거니까. 하나는 확정이잖아.”
“하, 하하.”
김수혁의 말에 재인이 멋쩍게 웃었다. 100% 팬 투표로 수상자를 가리는 인기상에 관해서는 보탤 말이 없었다. 그럴 입장도 아니었고.
개봉한 영화가 흥행 성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외의 여러 가지 이유로 재인은 인기가 많았다.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기부 기사도 그렇고 매달 한 번씩 뽑는 선행 동참자 감사 이벤트도 그랬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힐 틈을 주지 않고 화제가 되고 있었다.
‘최우수 연기상은 언감생심 욕심낼 게 아니고, 신인 감독상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백산 예술대상의 시상 부문 중 재인이 수상 가능성 있는 부문은 김수혁의 말대로 인기상뿐이었다. 신인 시기는 이미 지난 데다 다른 영화제이긴 하지만, >조선 탐정 한설록>으로 데뷔하면서 신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니 그가 받을 수 있는 상은 인기상을 제외하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민선영 감독은 달랐다. 심사 기간 활약한 신인 감독 중 민선영 감독 이상으로 좋은 성적을, 좋은 작품을 보여 준 감독은 없었다.
‘운이 좋으면 작품상이나 시나리오상 중 하나를 더 받을 수도 있고.’
데뷔작으로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재인은 이번 작품이 잘되길 바랐다. 타협하지 않고 뚝심 있게 자기 작품을 지킨 민선영 감독이 적절한 보상을 받길 바랐다.
* * *
“짜증 나! 김수혁, 저 인간 대체 뭐야!”
“쉿! 세영아. 목소리 낮춰.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흥! 들으려면 들으라지. 내가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사실만 말하는 건데 뭐 어때. 김수혁 선배는 대체 뭐가 문제야? 왜 나랑 재인 선배 사이를 계속 방해하냐고.”
“…….”
너랑 재인 씨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귀찮아한다. 김수혁이 막아 줘서 그나마 사람들의 눈총을 덜 사는 거지, 아니었으면 넌 벌써 재인의 팬한테 테러당했을 거다, 등등.
매니저는 박세영의 말에 대꾸할 말이 잔뜩 있었다. 다만 촬영을 앞두고 배우의 기분이 저조해질까 걱정되어 꺼내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김수혁에서 김수혁 선배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내뱉는 말이 곱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주변에 신경 쓸 정신은 있는 듯했다.
“재인 선배랑 내가 사이좋은 게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야지. 왜 자꾸 방해하는데?”
“딱히 사이가 좋지는…….”
“언니.”
“……그래. 나도 김수혁 배우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자기한테 따로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맞장구를 치긴 했지만, 박세영의 매니저는 김수혁보다도 재인의 매니저가 더 신경 쓰였다. 저를 노려보던 서늘한 시선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르르 몸이 떨렸다.
직접적인 경고를 한 건 아니지만, 어찌나 눈빛이 살벌하던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알아서 박세영을 말리게 됐다.
그런 생각에 박세영의 말을 정정하려다, 말았다. 촬영이 며칠 남지 않았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무마될 일이니 굳이 언급해서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재인 선배도 나한테 호감이 있다니까. 안 그럼 어떤 사람이 어깨 결린다고 치유를 걸어 주냐고. 그냥 어깨 주물러 줄까 그러지.”
“…….”
“이름 부를 때나 나랑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야. 얼마나 다정하고 매너 있게 구는데.”
“…….”
재인은 촬영 현장에서 촬영 스태프나 배우, 가리지 않고 치유를 걸어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이 어린 스태프한테도 말을 놓거나 하지 않고 매너 있게 대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 친해져도 호칭을 편하게 부를 뿐 태도는 비슷했다. 특별히 박세영이 상대라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었다.
‘얘가 참 똑똑했는데, 얄미울 정도로 눈치도 빠르고.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여신급 미모라는 평에 걸맞게 도도하기가 하늘을 찌르던 애였는데 재인을 만나고 이상해졌다. 친분을 과시하면서 유명세를 조금 이용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정신 못 차리고 들이대고 있었다.
‘그 이재인이 상대이니 어쩌면 당연하지만…….’
매니저는 재인과 촬영장에서 딱 하루를 지내고 나서 알았다. 어째서 여배우들과 아무런 스캔들이 없었는지.
차별 없이 모두에게 친절하고 매너 있는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전부 누구 옆에 서든 상대를 오징어로 만드는 넘사벽 외모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어서 박세영이 깨닫길 바랐다. 재인은 여배우가 가까이할 상대가 아니라 최대한 피해 다녀야 할 상대라는 사실을.
* * *
“아! 여기에 롱 코트를 딱 둘러 줘야 하는데. 아쉬워라.”
“더워요.”
“그러니까. 겨울에 하는 시상식이면 여기에 코트를 매치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는 건데 말이지.”
“겨울에도 기회가 있겠죠.”
“그래야지. 입혀 보고 싶은 거 아직 한참 남았어.”
재인이 거울에 몸을 비춰 보면서 하는 말에 김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싱> 이후로 잡힌 작품은 없지만,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하는 재인이니 곧 차기작에 들어갈 것이다. 연말에 열리는 시상식에 마음에 드는 코트를 입힐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다음에는 검은색 말고 다른 색 슈트로 해 보자. 백산은 권위 있는 영화제라 클래식하게 입었지만, 다른 곳은 괜찮잖아?”
“실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주시는 대로 입을게요.”
“하하하. 그래. 오늘 슈트 소매 디자인이 독특해서 팔이 예뻐 보이거든, 손 흔들 일 있으면 이렇게 들어서 잘 보이게 해 줘.”
“네.”
“헤어 때문에 그런가, 라인이 오른쪽이 더 보기 좋다. 포토 월 앞에 설 때 오른쪽, 아이고! 잘하는 애한테 또 잔소리를 했네. 진짜 이것도 직업병이라니까.”
“괜찮아요.”
재인한테 맵시 좋게 보이는 포즈나 손을 드는 각도 등을 조언하던 김신우가 제 입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미 모델로서 완벽하다는 평을 듣는 중이라 굳이 할 필요 없는 조언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진짜 만족도 높은 직업이라니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해서 완성한 스타일을 앞에 둔 김신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 멋있게 보이도록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진짜로 필요 없는 일이었다. 재인은 레드 카펫의 주인공이 그라는 점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멋있었다.
“좋아! 완벽해. 오늘도 누군가의 로망을 실현했네. 사진 많이 찍혀 주고 와. 이따가 행사장에서 보자.”
“네. 이따 봬요.”
재인은 흡족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김신우의 사무실에서 나와 최상호가 모는 차에 탔다. 레드 카펫에 민선영 감독과 같이 서기로 해서 마중을 가야 했다.
“와! 슈트네요. 잘 어울리세요, 감독님.”
“어휴! 드레스는 도저히 못 입겠더라고요.”
“지금 딱 좋으세요. 이대로 무대 올라가도 되겠어요.”
“에헤이! 내가 무대에 올라갈 일이 뭐 있겠어요. 오늘은 박수만 열심히 치고 올 거예요. 이따 재인 씨 무대 올라갈 때도 박수 열심히 칠게요.”
“올라가시게 될 거 같은데요.”
재인의 말에 민선영 감독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대본이 운 좋게 재인의 눈에 들어 마음껏 찍고 싶은 작품을 찍었지만, 솔직히 수상에는 욕심이 없었다. 작품에 자신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영화를 찍어서 개봉한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던 >그래, 가족이야> 대본으로 이루고 싶었던 것은 전부 이뤘다. 그래서 신인 감독상 후보에 들었다고 전달받았어도 욕심이 나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우, 씨! 심장 벌렁대 죽겠네.’
박수만 열심히 칠 거라고, 기대는 없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신인 감독상 후보로 대형 스크린에 모습이 비치자 심장이 무지막지하게 뛰었다.
-이어서 신인 감독상 수상이 있겠습니다. 시상에는…….
십몇 초 스치듯이 스크린에 나왔을 뿐인데 긴장감이 엄청났다. 카메라 들고 찍을 때는 몰랐는데, 카메라에 찍히니 몸이 저절로 뻣뻣하게 굳었다. 수많은 스태프 앞에서 태연한 배우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신인 감독상. 수상자는 >그래, 가족이야> 민선영 감독님. 축하드립니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 민선영 감독을 시상자의 목소리가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