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107)
겨울
* * *
데일은 케인의 품에서 사악한 빛을 내뿜는 수정구를 찾았다. 수정구를 손에 들자, 무언가가 머릿속에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다.
강력한 유물이었다. 만약 이 수정구가 없었다면, 피해는 훨씬 줄어 들었을 것이다.
데일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파각!
산산이 조각난 수정구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수정구 안에 모여 있던 힘이 흩어져 버렸다. 이제 언데드가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뒤처리를 마친 데일은 밖으로 나섰다.
용병과 병사들이 지친 얼굴로 널브러져 있었다. 주위에 시체가 가득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만큼 오늘 밤의 전투가 격했다는 증거였다.
데일을 향해 누군가가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엘드리엄 영주였다.
“흑기사는?”
“처리했소.”
“수고했네. 만약 그 흑기사가 제멋대로 날뛰었다면, 더 볼 것도 없이 우리는 전멸당했을 거야.”
엘드리엄은 기억을 떠올렸다.
사제들의 기적에 반토막이 났음에도 곧바로 병사들을 먹어치워 부활하던 흑기사를.
괜히 그 위험성에도 전선의 장군들이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게 아니다.
강하다. 지금의 시대에서 그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었다.
흑기사의 무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주는 데일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 역시…….’
영주가 대뜸 물었다.
“결혼은 했나?”
“?”
데일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흑기사가 되고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마침 막내딸이 곧 적령기라서 말이야.”
“그거 파격적인 제안이군.”
귀족가에 이교도의 기사를 받아들이겠다니.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다.
강한 전사를 대우하는 북부의 기조와 영주의 피에 절반 정도 섞인 엘프의 피가 그녀에게 이런 결심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데일은 설명했다.
“모를까봐 얘기하는 거지만, 나는 자식을 만들 수 없소.”
“알아. 상관없어. 엘드리엄의 이름 아래에 들어오기만 하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대우를 해줄게.”
혼인 얘기는 바로 그런 대우에 대한 약속이다.
혼인은 신성한 계약이고, 데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주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으니.
어쩌면 영주는 이번 일로 느꼈을 것이다.
황실에 기대기보다는 직접 힘을 길러 해결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는 걸.
그런 면에서 데일은 탐스러운 인재다.
다른 모든 면을 제쳐두고, 무력만을 생각해도 북부에 큰 도움이 될 터.
“딸이 썩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어쩌겠나.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감수해야 할 부분이지. 그리고 외모를 많이 보는 아이니,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확실히 하지 않으면 계속 권할 것 같은 기세다.
데일은 단호히 말했다.
“사양하겠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놀랍도록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런 부분은 북부 사람다웠다. 아니면 엘프답거나.
“피해 상황은 어떻소.”
“700명이 죽었다네.”
“……피해가 크군.”
“뭐.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오히려 선방했다고 할 수도 있지.”
허드렛일꾼들이나 잡일꾼들까지 합쳐서 1,000명을 훌쩍 넘던 토벌대다.
그중 700명이 죽었단다.
“언데드 몬스터를 처리할 때 특히 애를 먹었네. 찔러도 찔러도 당최 쓰러지질 않으니, 나중에는 눕혀놓고 도끼로 토막을 쳐야 했지. 어찌나 발광을 하는지…….”
영주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문득, 찬 바람이 불며 그녀가 걸친 망토를 들추었다.
왼쪽 팔에 붕대가 감겨있고, 그 아래로는 허전하다.
데일의 시선에 영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어쨌든 수고했고,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겠네. 경은 북부와 엘드리엄을 지켜내었네. 어디로 사라졌을지 모를 영웅들보다는, 경에게 영웅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리겠지.”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오.”
“그렇지. 가서 우리 지휘관 위로나 해주게.”
영주는 왼손을 들어 가리키려다, 팔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에른스트가 앉아 있었다.
에른스트는 여전히 시종의 몸을 안고 멍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일은 그 옆에 가 말없이 앉았다.
에른스트는 데일을 흘끔 본 뒤, 다시 고개를 내렸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론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나랑 붙어있었어. 내 전속 시종이었지. 나는 예전부터 제멋대로 구는 멍청이라…… 사고를 많이 쳤거든? 그때마다 아론은 나 대신 매를 맞아야 했어. 귀족이 잘못하면 그 아랫사람이 대신 처벌받는다. 우리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었거든.”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기에, 데일은 조용히 들었다.
“난 그게 너무 싫었어. 내가 잘못한 건데 왜 처벌은 아론이 받지? 대체 귀족이라는 게 뭐길래? 아론에게는 너무 미안했어. 하지만 아론은 매를 맞아 종아리가 새빨갛게 부어도 늘 웃으면서 말했어. 자유롭게 행동하는 도련님이 보기 좋다고. 자기한테 미안할 필요 절대 없으니, 원하는 대로 살라고. 이런 일로 위축되면 오히려 자기가 화낼 거라고 했어. 그렇게 말해주는 아론이 좋았는데…….”
에른스트는 아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잘못하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에른스트에 아론이란 비록 자기보다 낮은 신분이었지만 친우이자, 형제, 그리고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을 거다.
언제나 지지해주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는 부모 같은 사람.
에른스트가 철없이, 혹은 순진하게 굴었던 건 아마 아론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거다.
에른스트가 힘겹게 말했다.
“데일 경이랑 아론이 말했던 것처럼 중간에 돌아갔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데일이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여기 있는 모두 죽었을 거다. 북부가 엉망이 되었을 거고, 사람들은 불행해졌겠지.”
“하지만.”
“이제와서 후회되나?”
아론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데일은 엄하게 말했다.
“모든 결정은 네가 내린 거다. 그 결정으로 인한 결과도 네가 책임져야 한다.”
“그건 그렇지만.”
“너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데일은 에른스트의 보호자가 아니다. 아론이 했던 것처럼 듣고 싶은 말만 해줄 수는 없다. 그럴 생각도 없고.
“아론도 선택했을 뿐이다.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했고, 그 책임을 졌을 뿐. 아론이 후회하는 거로 보이나?”
에른스트는 아론의 얼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만족스럽게 미소 짓는 얼굴.
그 얼굴에 일절 후회는 없었다.
“아론이 스스로를 희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똑바로 행동해라.”
데일은 그걸로 말을 마쳤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이제 받아들이는 건 에른스트의 몫이다.
‘언제까지 애같이 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순진하고 철없는 시절도 언젠가는 졸업해야 한다.
에른스트에게 때가 왔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야 하는 때가.
한참을 말없이 있던 에른스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눈가에는 강한 의지의 빛이 서렸다.
“응. 경 말이 맞아. 아론을 위해서도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그래.”
“친위대의 단장이면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을 거야. 하지만 그보다는 우선…… 당장 뒷수습부터 해야겠지!”
에른스트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일부러 쾌활하게 외쳤다.
눈가에는 물기가 맺혀 사라지지 않지만 데일은 모른척했다.
소년이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티센 가문의 얼간이 에른스트는 이제 없다.
에른스트 단장이 있을 뿐.
왜인지 그 모습을 보며, 영원한 잠에 빠진 아론의 미소가 더욱 진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 *
한때 강대했던 세력과 고등한 문화를 자랑하며, 제국과도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던 위대한 왕국이 있다.
하지만 그 왕국은 악마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백성도 모두 사라지고. 악마의 군세마저 모두 어디론가 이동해버려, 홀로 남아버린 왕성만이 그 영광스러웠던 나날들을 고독하게 증명할 뿐이다.
그러한 왕성의 꼭대기.
한때 왕이 신하를 알현할 때 사용하던 왕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었다기보다는 고정되어 있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룬 문자가 새겨진 검이 앉아 있는 이의 가슴과 의자를 동시에 꿰뚫고 있었으니.
꿰뚫린 자는 그저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결코 죽은 건 아니었다.
앉아 있는 이의 보석 같은 눈동자는 요사한 빛을 내뿜었다.
그. 혹은 그녀는 무언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다리던 이가 왔다.
공간이 커튼처럼 걷히며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등장했다.
노인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흑기사와 언데드 무리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이번에도 역시 데일이라는 이름의 흑기사가 방해했습니다.”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노인이 이마에 머리에 고통이 찾아왔다. 노인은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마가 깨져 피가 흘러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됐어. 그 흑기사는 어디까지나 날뛰게 하는 목적이었으니까. 성과는?”
“흑기사가 크고 작은 마을 6개를 괴멸시켰습니다. 그가 일으킨 언데드 군세가 끼친 피해까지 합치면 전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되었다. 이번 북부의 겨울은 유독 춥게 느껴지겠군.”
노인은 고개를 조아리며 계속 말했다.
“제국은 그 손발부터 천천히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레네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단과 마탑, 그리고 황실 기사단이 버티고 있지만, 그뿐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이제는 움직일 때가 아니겠습니까?”
의자에 앉은 자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가슴에 박힌 룬검을 쓰다듬었다.
“그래. 배신의 상처도 이제 거의 아물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이곳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정말로 때가 온 것 같구나.”
“그러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새 계절과 함께 새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나의 친우. 나의 가족. 나의 사랑. 나의 주인. 그리고…… 내가 가장 증오하는 배신자.”
눈에 강렬한 분노를 가지고 중얼거렸다.
“내가 만나러 갈게요.”
* * *
“티센 가문의 에른스트! 그대는 병사를 모아 흑기사에게 맞섰으며, 북부의 혼란을 무사히 해결했다. 또한, 다른 귀족들이 자기 의무를 내팽개치고 도망칠 때, 끝까지 남아 백성을 구했고, 제국 귀족으로서의 위신을 지켜냈다. 이에 황제 폐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그대에게 친위대의 부단장 직위, 황금검 훈장, 그리고 금화 500닢을 하사하셨다.”
잘 차려입은 에른스트가 기사단장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기사단장이 말했다.
“한동안 친위대의 단장 직위는 내가 맡겠다. 내가 직접 단장으로서 너를 교육해,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면 단장 직위를 넘겨주겠어. 하지만 안심은 마라. 만약 내 눈에 차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부단장 직위를 박탈할 테니. 게으름 부리지 말도록!”
“네!”
기사단장의 선언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기사단장이 직접 가르침을 주겠다 선언했다.
이는 단순히 검술뿐만 아니라, 조직을 이끄는 법부터 시작해 단장이 지닌 여러 노하우를 사사하겠다는 말이다.
즉. 에른스트는 기사단장의 또 다른 제자가 된다.
황실 기사단장은 제국에서도 어깨를 겨루는 자가 몇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내다.
그런 기사단장의 제자가 된다는 건 뭇 귀족들이 열렬히 탐내는 자리다.
어쩌면 친위대의 단장보다도 더 가치 있는 자리일 것이다.
이제 에른스트는 명실상부 상위 구역의 신성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이만한 권력. 나쁜 물이 들어버리기 좋은 조건이지만…….
‘그러지는 않겠군.’
여전히 어수룩한 저 청년의 마음속에 충직한 시종이 남아 있는 한, 그는 지금 그대로의 에른스트로 남아 있을 거다.
즉위식이 끝나고.
에른스트가 데일을 붙잡았다.
“데일 경. 역시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어? 내가 단장이 되고, 경이 부단장. 좋지 않아?”
에른스트는 데일에게 친위대에 들어와달라고 부탁했지만, 데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만약 내가 친위대에 들어갈 생각이 있었다면, 단장 자리를 노렸을 거다.”
“엇. 음. 그건 곤란한데.”
에른스트는 아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갓 생겨난 조직을 꾸려나가는 거니 꽤나 바쁠 것이다.
이번 토벌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대거 친위대로 등용했지만, 여전히 뽑아야 할 인원이고 많고,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니까.
데일은 그런 에른스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열심히 해라.”
“응. 그러려고. 데일 경도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찾아와. 이 새로운 실세인 에른스트 님께서 친히 도와줄 테니…… 아얏!”
건방지게 말하는 에른스트의 어깨를 조금 세게 두드린 데일은 등을 돌렸다.
볼일이 끝났으니 이제 여관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신전에 들러야겠군.’
이번에는 얘기할 게 꽤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