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4)
흑기사 데일
* * *
데일이 가만히 있자 경비병들은 창을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찌를 기세. 강한 적의가 풍겨 나왔다.
흑기사의 몸은 그런 적의에 민감하다. 데일은 저도 모르게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 맞다. 부러졌지.’
오히려 다행일지라도 모른다. 회까닥 돌아버려서 검이라도 휘둘렀다가는 돌이킬 수 없다.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하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자자. 너무 열 내지 맙시다들. 아니. 아침 댓바람부터 힘 빼서 뭐합니까. 경비병분들도 어서 퇴근하고 집에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밥도 좀 먹고, 잠도 좀 자고, 마누라 엉덩이도 좀 주무르고.”
넉살 좋은 태도에 경비병이 미간을 좁혔다.
“넌 또 뭐야.”
“저는 하켄이라고 합니다. 철패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습죠. 여기 용병패입니다.”
하켄은 용병패를 꺼내 보여주었다. 얇은 구리 판에는 용병 길드의 문양과 ‘하켄’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경비병이 미심쩍은 눈으로 살폈다.
“위조는 아니겠지?”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용병패를 위조해 길드에 쫓기느니 차라리 목매달아 죽는 게 나을 겁니다.”
“큼. 그건 그렇다만. 그래서?”
하켄은 데일을 흘끔 쳐다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경비병분들이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끼어들었습니다. 이 데일 경이 겉으로는 흉악하고, 사악하고, 어. 사람 잘 죽일 것처럼 생겼는데, 막상 맨 얼굴은 기생 오라비 같고, 재수 없지만 말입니다.”
“…….”
데일이 하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켄은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 다른 흑기사들과는 다르다 이 말입니다. 말도 통하고, 다짜고짜 사람을 찔러 죽이지 않아요.”
다른 흑기사들은 그러나 보다.
“저기 뒤에 보십쇼. 저 사람들이 다 우리 데일 경께서 지킨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런 흑기사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개는 안 물어요.
하켄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조용히 듣던 경비병이 말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아. 드디어 이해하셨군요!”
“너도 저놈과 한패란 거지?”
“?”
“네 놈도 감옥에 집어처넣어야겠다!”
용병 역시 그다지 신뢰 가는 족속들은 아니었다.
고위급 용병이라면 모를까, 철패 용병의 말에는 무게가 없다.
경비병들은 눈을 부라리며 천천히 하켄에게 다가갔다.
흔들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하켄이 발작하듯이 외쳤다.
“무, 무슨 소리야! 동료라니! 내 별명이 고독한 늑대라고! 난 언제나 혼자 다닌단 말이다!”
“?”
“아, 아무튼 난 관련 없어.”
경비병과 데일까지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헛기침한 하켄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경비병들은 다시 데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밧줄로 데일을 묶기 위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데일은 고민했다.
‘어떡하지. 일단 물러나야 하나.’
설마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당장은 후퇴하는 방법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그거야말로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데일이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였다.
뒤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에스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사제 특유의 복장과 에스델의 미모를 본 경비병들이 움츠러들었다.
에스델이 차분히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제님들.”
“아. 사제님. 저희가 기다리게 만들었군요. 사제님은 그냥 안으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경비병은 공손히 말했다.
따로 신분증을 제시하지도 않았지만 상관은 없었다.
빛의 신앙을 따르는 사제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거짓으로 꾸며낼 수 없었다.
에스델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앞으로 나선 건 여기 있는 데일 혀, 형제…….”
형제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다, 도저히 아니다 싶었던 에스델이 단어를 바꿨다.
“데일 경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합니다.”
“예에?”
경비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빛의 신앙을 따르는 사제가 흑기사를 두둔하다니? 하켄과 데일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내내 자기들을 언짢게 쳐다보던 에스델이 나서줄 줄은 예상 못 했다.
에스델도 썩 내키지는 않는 듯.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비록 제가 데일 경과 함께한 시간은 적지만, 저 용병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데일 경은 다른 흑기사들과 다릅니다.”
에스델은 이곳에 오기까지의 여정을 차분히 설명했다.
마차가 습격당한 일. 그 습격에서 데일이 사람들을 구한 일. 데일이 사람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일까지.
물론. 중간에 데일과 에스델이 거래를 했다는 것도 밝혔다. 데일이 마냥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당장 그곳에서 사람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쳐도 누구도 탓하지 않을 거다.
조금 질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아예 약한 사람들을 죽여 그 주머니까지 털었을 거다.
데일의 행동은 경비병들이 생각하기에도 충분히 명예로웠다.
경비병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데일을 쳐다보았다.
흑기사가 그런 일을 했다니 영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음.”
“사제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실이라는 건데…….”
둘은 잠시 고민하다가 에스델에게 말했다.
“최근 이교도들에 대한 검문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놈들이 사고를 많이 쳐서 말이지요. 그래서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교도를 함부로 들여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 기사의 신원을 사제님이 보증해주시겠습니까?”
“윽.”
신원 보증.
즉, 데일이 도시에서 사고를 치면 에스델이 책임지겠냐는 뜻이다.
에스델은 갈등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에스델입니다. 데일 경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제가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경비병들은 마지못해 수긍하며 길을 열어주었다.
셋은 커다란 성문을 지나쳐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침묵을 지키며 눈만 또르르 굴리던 하켄이 에스델에게 말했다.
“와. 설마 우리 견습 사제가 그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보기보다 의리가 있는 타입?”
“벌써 후회가 될 것 같으니 조용히 해주시죠. 그리고 보기보다라니, 무슨 뜻이죠? 제가 의리 없어 보인다는 겁니까?”
에스델이 날카롭게 눈을 치뜨자, 하켄은 앗 뜨거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스델은 침묵을 지키는 데일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저 빚이 있으니 갚았을 뿐이니까요.”
데일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이걸로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럴 때는 먼저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나요?”
“너는 고맙다고 했었나?”
그러고 보니 처음 마차에서 습격이 있었을 때. 데일은 에스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 에스델은 너무 당황해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 했다. 그만큼 상황이 어지러웠으니까.
그 점을 깨달은 에스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염치와 양심이 있는 여자였다.
“그건 고, 고맙……. 아무튼! 도시에서 사고 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의 보증인이니까요. 아시겠습니까?”
“그래. 믿어도 좋다.”
“…….”
에스델은 미심쩍은 눈으로 데일을 보았다. 세상에 흑기사만큼 믿기 어려운 존재들이 또 있을까.
역시, 보증을 서준다고 한 건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에게 적선하는 모습만 안 봤어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에스델은 사제답게 설교를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도시에서 하지 말아야 할 짓과 지켜야 할 예의 등등.
하지만 얘기가 길어질 것처럼 느껴지자, 하켄이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자자. 긴 얘기는 길에서 하지 말고. 여정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한잔하면서 하죠? 요정의 노래라고, 제가 잘 아는 술집이 있습니다.”
“……도시로 들어오니까 갑자기 태도가 친절하군요. 버리니 마니 하시던 사람이.”
“하하! 중요한 건, 내가 끝까지 함께했다는 거 아니겠어?”
데일이 하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맞는 말이다. 고독한 늑대 하켄.”
“……하하. 아직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까? 그건 다 제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거라……. 데일 경. 손 좀 치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아픕니다.”
둘을 보며 쓴웃음을 짓던 에스델이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교단으로 가보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절대 사고 치지 마세요. 아시겠죠?”
“알겠다.”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세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먼저 견습 딱지나 떼라.”
“이익! 금방 정식 사제로 승격될 겁니다!”
에스델은 그렇게 씩씩대며 사라졌다.
눈치를 보던 하켄이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저어. 그러면 데일 경은 술 먹을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저도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
데일이 하켄의 팔을 붙잡았다.
“예? 왜 그러십니까.”
“길 안내가 필요하다.”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이제 사양이다. 하켄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뭐. 길 정도야. 그래서 어디로 가십니까?”
데일이 바로 답했다.
“밤의 신전.”
“켁.”
* * *
대륙에는 크게 두 가지 신앙이 있다.
빛과 생명을 관장하는 빛의 여신.
어둠과 죽음을 관장하는 밤의 여신.
두 여신은 수천 년을 싸워왔다.
지상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길고 격렬한 전쟁 이어졌고, 수많은 피를 흘리고 나서야 비로소 전투의 결과가 나왔다.
빛은 승리했고, 어둠은 패배했다.
어둠의 추종자들은 음지로 스며들었으며, 빛의 추종자들은 그들을 쫓았다.
사람들은 빛이 영원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 우주 너머에서 침략자가 찾아왔다.
드넓은 별의 바다를 항해해 온 그들은 자기들을 악마라 칭하며, 이리 선언했다.
“이 별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겠노라.”
그들은 뱉은 말을 지켰다.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 대륙의 절반이 점령되었다. 악마의 군세는 너무 강했다.
숱한 왕국이 무너졌고, 여러 종족이 멸종당하였다.
그들은 별에 있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 빛을 따르든, 어둠을 따르든 공평하게 죽여버렸다.
결국. 빛의 여신은 힘겨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모든 신전에 계시가 내려졌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밤의 여신과 그 추종자들을 아군으로서 인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곤란한 상황이던 밤의 여신 또한 이 화해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기나긴 전쟁 이후. 처음으로 빛과 어둠은 손을 잡았다.
밤의 신전이 제국 최대의 도시에 당당히 들어서게 된 경위였다.
* * *
밤의 신전은 외벽 근처 유난히 그림자가 짙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했다.”
“다음에 봅시다!”
안내를 해준 하켄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데일은 신전의 입구를 바라봤다.
지붕 없는 두 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었는데, 기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크고 작은 균열이 가득했다.
기둥 너머로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지하는 마치 심연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러니 인기가 없지.’
게임을 할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밤의 여신은 취향이 고약한 듯하다.
잠시 서성이던 데일은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자 정사각형 모양의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침이지만 마치 새벽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하지만 실내에 있는 그 누구도 어둠이 불편하지 않은 듯했다. 그건 데일도 마찬가지.
어둠 속을 살피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신전 구석에서 검을 휘두르는 뼈다귀다.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뼈다귀는 롱소드를 들고 허공을 향해 쉴새 없이 내리쳤다.
데일은 멈칫했다.
스켈레톤이 대놓고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밤의 신전답다고 해야 하나.
‘아니. 왜 신전에서 검술 연습이지?’
의아해하는 데일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처음 보시는 분이군요.”
데일은 고개를 돌렸다.
미려한 몸선이 드러나는 검은 신관복을 입고, 잿빛 머리칼을 길게 드리운 여인이 데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특이한 건 검은색 천을 머리에 묶어 두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양옆의 귀가 뾰족하다는 것.
‘귀쟁이인가.’
데일은 경계했다. 그는 엘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형제님. 밤의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이곳의 사제장을 맡고있는 에리얼이라 합니다.”
사제장이라니.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다.
“데일이다. 한동안 이곳 이레네에서 활동할 예정이다.”
“그러시군요. 동지가 늘어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죠.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도록 하세요.”
에리얼은 매우 친절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둠을 따르는 이들은 계산에 철저하다.
만약 도움을 원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이 물었다.
“기도실을 이용하고 싶은데.”
“복도 끝 왼쪽 방이 비어 있습니다. 일직선이니 길을 헷갈릴 일은 없을 거예요.”
“고맙다.”
데일은 에리얼이 말해준 대로 이동했다.
복도 양옆으로 기도실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사방이 웅얼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보자. 끝에서 왼쪽 방이라 했지.’
데일은 기도실 문을 열었다.
“?”
“?”
기도실 안에는 웬 마녀가 양손을 모으고 있었는데, 데일의 갑작스러운 침입에 상황을 이해 못 해 굳어버렸다.
데일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아. 그렇군. 복도 기준에서 왼쪽.’
기도실 안에서 마녀의 고함이 들렸지만 데일의 신경 쓰지 않았다.
반대쪽 기도실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음.’
좁은 기도실 안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단출한 제단 하나만이 툭 놓여 있었다.
제단 위에는 은 촛대가. 그 은 촛대 위에는 꺼져버린 양초 세 개가 꽂혀 있었다.
데일은 제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을 마주 잡으며 기도를 올렸다.
“왔습니다.”
그러자 곧장 반응이 나타났다.
양초에 불이 붙지도 않았는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기도실 안을 가득 메웠다.
이어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거라 내 아들아!]한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몹시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