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ark Knight in the Game RAW novel - Chapter (5)
흑기사 데일
* * *
데일은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게 아니라, 고개가 저절로 내려졌다.
방안을 메운 연기는 이내 형상을 만들어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발과 바닥까지 내려온 기다란 검은 머리.
비록, 데일은 고개를 숙인 탓에 발밖에 볼 수 없었지만, 앞에 선 존재가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데일은 차분히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밤을 따르는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란다. 너의 성별은 남성이니, 아들이라 부르는 게 맞지 않겠느냐. 아니면, 좀 더 애정을 담아 왕자님이라고 불러주련?]“…….”
끄응. 속으로 신음을 삼키는 데일에게 밤의 여신이 말했다.
데일은 투구를 벗어 겨드랑이에 고정했다.
하얗게 센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여신은 감탄을 흘렸다.
[정말이지, 누굴 닮아 이리 잘생겼는지. 못돼먹은 년들이 채갈까 걱정이구나.]데일은 그 반응을 무시하며 말했다.
“러셀에서 이곳으로 오던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산을 헤매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가버렸습니다.”
[……내 아들은 지독한 길치구나. 앞으로는 꼭 길잡이와 함께하도록 하거라.]인정하기 싫지만, 데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건 이런 잡담이나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껏 모은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데일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손이 데일의 손을 잡아주었다.
데일이 안쪽에서 무언가가 빨려 나갔다.
데일의 눈앞에 세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근력 상승》
《갑옷 강화》
《영혼 강화》
‘이런 부분은 게임이랑 똑같단 말이지.’
여기서 뭘 선택하냐에 따라 추후 성장 방향성이 달라진다.
우선은 근력 상승.
말 그대로 힘이 더 강해진다. 전투 수행 능력에 가장 직접 적으로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다음은 갑옷 강화.
갑옷은 흑기사의 신체와 다름없으며, 흑기사 본인과 함께 성장한다.
갑옷을 강화한다는 건 단순히 단단해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무게를 늘리거나, 크기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며, 갑옷에 숨겨진 기능을 활성화하기도 한다.
가령, 갑옷 일부를 변형해 칼날처럼 날카롭게 만든다거나.
마지막으로 영혼 강화는 마력 총량을 늘려준다.
흑기사는 제법 다재다능한 직업이다. 인간으로서 많은 걸 잃은 대신, 밤의 여신에게 뛰어난 육체 능력은 물론에 마법적 재능까지 하사받았다.
성장 방향에 따라 고위 흑마법도 구사할 수 있다.
‘그리고 마력은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까. 후반 가면 훨씬 더 중요해지고.’
만렙 캐릭을 여러 개 키워봐서 안다. 후반부에 마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데일은 고민에 빠졌다. 3가지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선뜻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
흑기사를 키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
밤의 여신은 그런 데일을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아니. 오히려 기꺼워하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데일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기분 좋아 보였다.
마침내 데일이 결정을 내렸다.
“전부 근력을 올리겠습니다.”
[확실하느냐?]“예.”
초반 단계에서는 역시 근력을 올려주는 게 맞았다.
갑옷을 강화해봤자 힘이 부족하면 두들겨 맞기만 할 테고, 마력을 늘리기에는 시기상조다.
‘방어력에 전부 투자해서 탱커를 맡는 역할도 있지만…….’
그러려면 데일이 등을 믿고 맡길 뛰어난 동료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데일은 흑기사다.
‘뛰어난’ 동료는커녕, 그냥 동료도 모으기 쉽지 않았다.
결국. 혼자서 다 해먹을 정도의 역량이 필요하다.
데일은 선택했고 여신은 들어주었다. 흐릿한 연기가 데일을 감쌌다.
뿌드득.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며 아우성쳤다. 고통은 없었다. 데일은 그저 담담히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데일은 신체의 변화를 느꼈다.
‘더 강해졌어.’
근육의 밀도가 더 높아졌다. 1년간 모아두었던 영혼을 모두 바쳤으니, 그 차이가 상당히 크게 느껴졌다.
여신이 흐뭇하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듯하구나.]“예.”
“부탁드립니다.”
여신은 데일의 투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한차례 퍼지고 모인 연기가 데일의 눈앞을 덮어, 자신의 달라진 정보를 보여주었다.
[데일]등급: 2
직업: 흑기사
근력: 40
내구: 20
마력: 10
체력: ―
정신력: 10
[보유 기술 목록]생기 흡수: 시체에 남아 있는 생기와 잔혼을 흡수한다.
[특성]반인 반언데드: 통각과 미각, 촉각이 둔해지는 대신 지치지 않는다.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는 등의 모든 생리 활동이 불필요해진다.
부정한 감각: 통각과 미각, 촉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적의와 살의, 그리고 피 냄새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밤의 여신의 축복: 생기를 흡수해 신체를 수복할 수 있다. 여신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밤에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칭호]―
데일은 천천히 정보를 읽어내렸다.
근력이 40에 내구가 20. 등급이 2인 것치고는 과할 정도로 많은 수치였다.
‘확실히 흑기사가 스탯은 좋아.’
설정에 따르면 흑기사는 원래 명예로웠던 기사들이 타락해서 변질된 존재다.
밤의 여신에게 직접 세례를 받고, 그 영혼과 육체가 어둠의 힘이 서린 갑옷에 고정되어버린 부정한 존재.
중요한 건 이들이 원래 기사였다는 점이다.
이 세계의 기사들은 그야말로 인간 병기나 다름없다.
그러니 원래 기사였던 흑기사 역시 능력치 자체는 뛰어날 수밖에.
꼼꼼히 정보를 살피는 데일의 귀에 여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등급이 2로 상승하고, 근력 능력치가 35를 넘어섰구나. 데스나이트로 전직할 조건을 충족했는데, 어찌할 생각이느냐 데일.]여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문구가 떠올랐다.
《데스나이트로 전직하시겠습니까?》
데스나이트. 흑기사 직업의 갈래 중 하나.
육체 능력에 큰 보정이 붙는 게 특징이다.
‘근력이 못해도 지금의 1.5배 정도는 나오겠지.’
하지만 데일은 고민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직하지 않겠습니다. 데스나이트는 완전히 언데드가 아닙니까.”
데일은 비록 이런 꼴이 되어 버렸지만, 인간으로 남고 싶었다.
조금 강해진다 하나 완전히 언데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 될 말이다.
‘데스나이트는 초반에 좋지만, 성장 기대치가 낮기도 하고.’
데일의 선택에 밤의 여신은 기꺼워했다.
[그래. 여신도 네가 못생긴 언데드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 용무는 없다. 데일은 꿇었던 무릎을 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여인의 형상을 이루었던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데일의 수준으로는 여신의 본모습을 보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그가 기도실을 나서려 하자, 여신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던 데일이 멈칫했다.
데일이 원하는 것.
‘지구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다시 인간이 되는 것.’
그 두 가지를 이룰 수 있다면 데일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데일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뒤편에서 여신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렸다.
[이른 시일에 다시 오거라 데일! 이번처럼 1년 만에 오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랬다가는 이 여신은 눈물을 펑펑 흘릴 것이야!]* * *
데일은 신전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아까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짙은 어둠. 한쪽에서 검을 휘두르는 스켈레톤. 그리고 야릇한 미소를 짓는 사제장.
사제장이 데일에게 말을 걸었다.
“원하는 걸 얻으신 듯하군요.”
끄덕. 데일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로 신전을 나서려던 데일은 문득, 궁금증이 일어 고개를 돌렸다.
“질문 하나 할 수 있나?”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지요.”
“여신님……. 원래 저런 성격인가?”
왜인지 밤의 여신은 첫 만남 때부터 데일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다.
뭐라더라?
‘나는 특별하다던가?’
뭐.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다만 그 친근함이 조금 과하다고 해야 할까.
남들에게도 저리 행동하는지 궁금했다.
데일의 물음에 사제장 에리얼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마세요. 여신님께서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그러한 태도를 보이시니까요.”
“아. 그렇군.”
“여신님은 죽음을 관장하잖아요? 죽음은 차갑고 조용한 것이에요. 여신님께서 얼음장처럼 차갑다 해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
아무래도 여신은 데일을 대할 때와 남을 대할 때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신전을 나섰다.
데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늘 높이 뜬 해가 사방에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데일은 서둘러 투구를 머리에 쓰고, 면갑을 내렸다.
그제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데일은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게임의 무대가 되는 이레네에 도착했으니 할 것도 많았다.
당장 롱소드도 새로 사야 했고.
데일은 혹여나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올 때 이용했던 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한낮의 이레네는 매우 복작거렸다. 다양한 종족의 행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녔는데,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엿보였다.
지난 1년간은 보기 힘든 광경이기도 했다.
악마가 활개 치는 곳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늘 어두운 표정을 하고 다녔으니.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데일이 지나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수군거렸다.
“……흑기사잖아.”
“전선도 아니고 왜 도시 한복판에.”
“호, 혹시라도 해코지당할 수 있어. 피하자.”
빛과 어둠은 화친을 맺었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감정의 골까지 좁혀진 건 아니다.
밤의 여신을 따르는 자들은 여전히 경계와 적의의 대상이었다.
데일은 저도 모르게 손이 품을 더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적의에 민감한 흑기사인지라, 본능적으로 무기를 찾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흑기사들이 회까닥 돌아서 사람을 찔러 죽인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하켄이 해준 말이었나?
어쨌든 이런 분위기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흑기사는 데일만큼 자제심이 깊지 않은 듯하니.
데일은 걸음을 서둘렀다.
사람들이 데일을 겁내며 물러나니, 복잡한 길거리도 빠르게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이동하는 데에 집중하던 데일이 걸음을 멈춘 곳은 어느 주점 앞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하켄.’
그러고 보니 하켄은 술을 마시러 간다 했었다.
데일은 아는 체나 할까 싶어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하켄은 문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니.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술 먹고 꼴았군.’
손을 뻗어 하켄을 깨우려던 데일이 멈췄다.
하켄의 어깨가 흔들렸다.
“흑. 흐흑. 미안. 미안해.”
하켄은 울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퀼. 미안해.”
“…….”
유쾌하고, 가볍고, 조금은 천박하던 사내지만 그렇다고 슬픔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함께하던 친우를 잃은 건 견디기 어려웠을 터.
하지만 하켄은 도시에 오는 내내 그런 내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마 용병으로서의 프로 의식일 것이다.
아니면 함께 걷는 동료에게 약한 모습은 죽어도 보여주기 싫은 사내 특유의 고집이거나.
“…….”
데일은 그런 하켄의 태도에 존중을 표했다.
굳이 말을 걸지 않고, 모르는 척 주점 밖을 나갔다.
오늘. 데일은 주점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새삼 자기가 어떤 세상에 떨어졌는지를 실감하며, 데일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데일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건 바로 신분 문제였다.
에스델이 신원을 보증해줬지만, 언제까지 에스델에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막말로 에스델이 운 나쁘게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데일은 도시에서 쫓겨나야 했다.
‘신분을 얻으려면 단체에 소속되어야 하는데…….’
과연 누가 흑기사를 선뜻 자기네 일원으로 받아들여 줄까.
그런 곳은 이 거대한 도시에서도 딱 한 곳밖에 없다.
늘 일감이 넘쳐나, 반송장의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곳.
데일은 용병 길드의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