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285
◈ 285. [Side Story] 무투대회 (2)
“이국(異國)의 축제도 제법 즐겁지 아니하느냐!”
쿠일란을 손가락 하나로 날려버린 소녀가 당차게 외쳤다.
그제야 알아챘다.
흑발. 금안. 은빛 왕관.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작은 키에, 고풍스러운 말투.
저 외모. 저 체격. 그리고 저 행동거지.
알아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이명을 중얼거렸다.
“드래곤 레이디……!”
브링어 공작.
마침내 그녀가 크로스로드에 도착한 것이다.
***
브링어 대공(大公). 용혈의 공왕(公王).
저녁놀의 용왕.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
온갖 별호를 주렁주렁 달고 사는 반인반룡.
브링어 공국의 지배자이자, 제국군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도망자이며, 구원의 손길을 내민 내게 도리어 선전포고를 던진 당돌한 여자.
시조룡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녀의 이름은- 더스크 브링어.
그녀는 현재 나와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독대 중이다.
“정찰을 위해 기사들은 뒤에 두고 과인(寡人)이 먼저 이곳에 왔도다.”
병영. 회의실.
나와 마주앉은 더스크 브링어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생글생글 미소해 보였다.
“세계 끝의 전선답게 촌구석 시골 동네이긴 하다만은, 축제의 흥겨움은 썩 나쁘지 않구나. 마음에 들었느니라.”
“…….”
“그래, 바로 네놈이렸다? 건방지게도 과인을 이곳에 초대한 애송이가.”
외견상으로는 끽해야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녀지만.
실제로는 일백 하고도 이십 년을 더 살아온 노회한 요괴다. 나는 방심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싱긋 마주 미소했다.
“애쉬. 애쉬 ‘본헤이터’ 에버블랙이라고 합니다.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대공.”
“흐음~?”
그런 나를 호박색 두 눈으로 쏘아보던 더스크 브링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과연, 나름대로 강골(强骨)이로구나. 과인의 기세 앞에서도 태연하게 버텨 내다니.”
악몽 군단장 놈들이 사기(邪氣)를 뿜어내는 것처럼 이 반인반룡도 뭔가 살기 같은 걸 뿜어낸 모양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패시브 스킬이 있어서 그런 건 안 통하지롱.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요.”
그녀의 앞에 놓인 잔에 차가운 차를 따르며 나는 말했다.
“선전포고 하셨기에 성벽에서 뵐 줄 알았습니다만.”
“그럴 생각이었노라. 하지만 아무런 방비 없이 성문을 활짝 열어 놓은 건 네놈 아니더냐? 덕분에 어제부터 즐겁게 축제를 만끽하고는 있다만.”
더스크 브링어가 낭랑하게 깔깔 웃었다.
“팔자 좋게 축제라니! 이 도시의 지배권을 노리는 무서운 악룡이 코앞에 있는데 말이다.”
“악룡은 악룡이지만.”
히죽.
나는 한쪽 입가를 틀어올리며 썩소를 머금었다.
“이빨 빠진 악룡이지요.”
“……호오.”
기반을 모두 잃은 그녀의 상황을 비꼬자, 더스크 브링어의 앳된 얼굴에 살벌한 분노가 스쳤다.
“건방진 것은 제 아비를 꼭 닮았도다.”
“먼 친척인 대공과도 닮았다 할 수 있겠지요.”
너도 건방지다는 소리였다.
내가 한 마디도 지지 않자 드래곤 레이디 역시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소녀의 얼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악독한 미소였지만, 기묘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 앞에 내 얼굴을 가져다 대며 나는 으르렁댔다.
“나라는 불타고, 군대는 궤멸하고, 이제 남은 것은 그 조그마한 육신과 친위기사 몇 명이 전부이면서. 여전히 머리 꼿꼿하게 세우고, 도와주겠다는 우리 전선에 선전포고부터 날리는 그 건방짐.”
“…….”
“황도 아카데미에 건방짐학과가 개설된다면 필히 대공을 수석교수로 모셔야 할 정도입니다그려. 대공.”
“혓바닥이 매끄럽구나, 3황자. 확 뽑아 버리고 싶을 만큼.”
“정중하게 초빙했는데 이빨 들이민 건 대공이지 않습니까?”
나는 이제 존대도 집어치웠다.
“활로를 열어 줬더니 지휘권 놓고 전쟁을 벌이자고? 가진 판돈도 없으면서 내게 승부를 걸어?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오히려 그쪽 아닌가, 더스크 브링어?”
어차피 서로 칼부림 놓기로 약조한 사이다. 예의 차려 줄 필요도 없다.
나는 이 드래곤 레이디와 휘하 친위기사단을 내 휘하로 부릴 생각이다. 기싸움에서 밀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내가 존대도 집어치우고 말을 험하게 하는데도 더스크 브링어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어쩐지 애완용 고양이가 앙탈부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라 조금 섬뜩했다.
“그래서, 애쉬. 혹시 자신이 없느냐? 그래서 과인의 선전포고에 응하지 않을 테냐?”
“자신이야 있지. 얼마든지. 당신의 그 잘난 친위기사단 얼른 끌고 와서, 당신이 제안한 대로 5대5 결투 벌여 보자고.”
쿵!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세게 내리친 내가 살벌하게 내뱉었다.
“당신의 올인 승부, 받아들이지. 이기는 쪽이 상대 진영의 지휘권을 온전히 가진다. 동의하나?”
“동의하고말고, 애송이 황자. 과인이 이길 테니까. 너의 남부전선은 과인이 잘 삼켜서 우리 브링어 공국 재기의 발판으로 유용하게 써먹어주겠노라.”
“귀여운 꿈을 꾸시는군. 용왕. 우리가 이긴다. 당신과 당신의 기사들은 이곳 전선에서 괴수들을 몰아내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어주겠어.”
나와 더스크 브링어는 잠시 눈싸움을 했다.
그녀의 호박색 용안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섬뜩함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내 패시브 스킬 완전 개사기라고!
“……뭐, 좋다. 우리 사이의 승부는 곧 치르도록 하고.”
살벌한 시선을 거둔 더스크 브링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은 남은 축제를 즐기도록 하겠노라. 설마 축제에 참가중인 손님을 내쫓을 만큼 냉혈한은 아니겠지, 3황자?”
“당연하지. 크로스로드의 축제는 모두에게 열려 있으니까.”
이곳은 괴수전선이다.
상대가 괴물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포용할 수 있다.
“‘모두’에게라…… 흐음.”
더스크 브링어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내가 건넨 차를 원샷했다.
“강건한 것 같으면서도 또 물렁한 부분이 있구나. 그런 점이 어리고 풋풋해서 마음에 든다만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든다고? 내가?
“그럼, 과인은 계속해서 무투대회에 참가하도록 하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더스크 브링어가 씩 웃었다.
“우리 사이의 전쟁에 앞서서 너희의 전력을 가늠하는 전초전으로 썩 나쁘지 않을 것 같노라. 아, 물론.”
까딱까딱.
더스크 브링어는 조그마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 보였다.
“과인의 손가락 하나라도 버텨낼 전사가 이곳 전선에 있기는 할까 궁금하다만은.”
욱한 내가 꽥 소리쳤다.
“야! 우리 애들 완전 세거든?! 너 정도는 그냥 개처바르거든?!”
“음? 한 방에 날아가던데……?”
“아니 그건 걔가 개복치라 그런 거야! 다른 애들은 진짜 세!”
체력 스탯 5의 쿠일란을 떠올리며 나는 치를 떨었다. 쿠일라아아아안! 서브파티장으로서 위엄을 보여 달라고오오오오!
“후후. 허언이 아니기를 기대하겠노라, 남부전선의 지휘관.”
더스크 브링어는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썼다.
마법적인 처리가 된 로브인지, 그녀의 은빛 왕관과 검은 머리칼, 그리고 황금색 눈이 모두 후드의 그림자 속에 가려졌다.
“고작해야 과인의 손가락 몇 개로 너의 용사들이 모두 쓰러진다면, 앞으로 우리가 벌일 전쟁도 너무 시시해지지 않겠느냐.”
더스크 브링어는 로브자락을 휘날리며 병영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나는 밖에 대고 소리쳤다.
“야! 지금 무투대회 참가 중인 내 파티원들 전원 소집시켜-!”
이제 상품이고 축제고 관광도시 계획이고 뭐고 상관없어졌다.
이 무투대회는 저 드래곤 레이디와 우리 사이의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반드시 저 건방진 용녀의 콧대를 꺾어 주어야 한다.
나는 더스크 브링어의 게임상 스펙과 스킬세트를 떠올리며 입가를 틀어 올렸다.
반드시 너를 ‘공략’해 주마, 이 사악한 용 할머니……!
***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이 무투대회는 순수한 주먹대결이고, 마법이나 스킬은 모조리 봉인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더스크 브링어도 지닌 권능을 사용하지 않고 있기에 일견 공평해 보이지만.
퍼어억-!
순수한 육체대결에서. 반쯤은 용인 저 여자를 피지컬 스펙으로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무기 들고 마법과 스킬을 써가며 싸우면 공략할 변수라도 생길 텐데, 그냥 육체 스펙 배틀로 가니까 도저히 답이 안 보인다!
8강전. 더스크 브링어의 손가락 튕기기에 비명을 지르며 링아웃되는 베르단디를 보면서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오오 드래곤 맙소사!
“죄, 죄송해요, 애쉬님……. 어떻게 안 맞고 피한다고 피했는데…….”
베르단디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사과했다.
SSR등급 암살자답게 베르단디는 날렵한 동작으로 더스크 브링어의 손가락 튕기기를 계속 피해 냈지만, 마지막에 한 방이 어깨를 스쳤다.
그 한 방의 풍압만으로 나가떨어져 링아웃 된 것이다.
아니 이 게임 종족 밸런스 왜 이래? 사기 아니야, 용?! 패치 안 하냐 디렉터 새끼야?!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던 나는 베르단디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들겨 주었다.
“아니야, 고생했어. 베르단디. 그래도 네가 그동안 애들 중에서는 제일 선전했어…….”
“정말 죄송해요, 애쉬님…….”
침울하게 중얼거리던 베르단디는 직후 얼굴을 활짝 폈다.
“그럼 저는 이만! 노점 자유이용권을 써야 해서!”
그러더니 기다리던 성배탐사대를 데리고 룰루랄라 시내로 떠나 버렸다.
야! 너 혹시 마음껏 간식 먹으려고 일부러 진 건 아니지?! 응?!
더스크 브링어의 4강 상대는 에반젤린이었다. 전투에 앞서 몸을 풀며 에반젤린이 투덜거렸다.
“아~ 지난 경기에서 기권하고 저도 노점 무제한 이용권 받으려고 했는데.”
“그건 내가 대신 사준다니까! 아니, 노점 말고도 사 달라는 거 전부 다 사줄게! 저 여자만 좀 어떻게 막아 봐!”
“어?! 진짜죠?! 약속한 거예요! 전부 다 사주기!”
나는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스크 브링어와의 자존심 배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노점뿐이랴? 마음 같아서는 성 한 채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시작된 4강전.
조그마한 두 소녀가 연무장에 나란히 서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심판인 에이더 놈이 손을 아래로 휙 내렸다.
“시작!”
퍼어억!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달려든 더스크 브링어가 손가락을 튕겼고, 에반젤린은 에메랄드빛 두 눈을 빛내며 가뿐하게 피해-
미끌.
“앗.”
……내지 못하고 갑자기 발을 헛디뎠다.
“얌마아아아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에반젤린의 부정특성 [실수투성이]가 터진 것이다! 저거 대체 언제 사라지냐고!
퍼엉-!
“우에에에에엑!”
손가락에 맞은 에반젤린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훨훨 날아갔다.
그대로 링아웃인 줄 알았지만,
촤아아악!
에반젤린은 공중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자세를 고쳐 잡더니, 아슬아슬하게 연무장의 끝에 내려앉았다.
“괜찮아요! 튕겨 냈어!”
에반젤린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반대편으로 손짓했다.
“왜 날 보냐, 이 바보야! 상대를 보라고!”
“아차!”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옆을 돌아보는 에반젤린의 앞에 어느새 더스크 브링어가 다가와 있었다.
로브 후드 아래로 뾰족한 이빨이 돋은 입이 사악한 미소를 그리더니,
퍼엉-!
손가락 튕기기가 작렬.
“미안해요오오오-! 그래도 윈터실버 상단 상품권은 잘 받아갈게요-!”
에반젤린은 저 말만 남기고 멀리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으아아아! 세상에 믿을 파티원 하나 없어!
“쉽도다, 쉬워. 남부전선에 이리도 용사가 없단 말이냐? 이래서야 선전포고를 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 같지 않느냐!”
더스크 브링어가 티배깅이라도 하듯이 연무장 위에서 가볍게 캉캉춤을 춰 댔다.
와! 진짜 겁나 때리고 싶어! 줘패 버리고 싶다고! 그런데 방법이 없네!
“누구…… 누구 없느냐. 적장의 목을 취해올 용사는 없느냐……!”
삼국지에서 화웅의 목을 따오라는 조조 같은 심정으로 중얼거리는데,
“주군.”
어딘가 어색해하는, 하지만 결연한 의지에 찬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제가 저 여자를 막겠습니다.”
돌아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SSR등급 영웅이자, 게임의 주인공이며, 이 게임 최후의 보험이자 보루.
더스크 브링어의 무투대회 결승전 상대.
“루카스……!”
나의 기사가 옆에 서 있었다.
루카스는 의지에 찬 얼굴로 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투대회 1등은 저의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