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535
◈ 535. [Side Story] 장례식 (6)
검을 뽑아보았다.
스릉-!
서늘한 소리와 함께 검이 세상 밖으로 칼날을 드러냈다.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가벼워.”
도저히 3차 전직까지 마친 각성 캐릭터라고는 볼 수 없는 허접한 체력의 보유자인 나였지만, 이 예식용 장검은 아주 가뿐하게 휘두를 수 있었다.
게다가,
“……너무 아름답게 만드셨는데요?”
하얀 검은 마치 유리로 만든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투명하기까지 하다. 검이 아니라 예술 세공품 같아.
내가 감탄을 계속하자 켈리베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살면서 실전용이 아닌 예식용 검을 만들어본 건 처음이어서. 기왕 예식용으로 만드는 거 힘 좀 써봤지.”
“대단해요, 켈리베이. 아주 훌륭해요.”
“대신 내구도는 더럽게 낮으니까 살살 써야 한다! 알겠지?”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켈리베이는 계속 설명했다.
“네가 요구한 기능은 모두 갖췄고, 또 네 요청대로 칼날은 일부러 무디게 해두었어. 종이는커녕 채소도 못 썰 거야. 그냥 이쁜 몽둥이여, 몽둥이.”
“정확하게 제가 바란 그대로네요.”
“싱거운 녀석…… 그리고 검집은.”
켈리베이는 내 반대편 손에 들린 검집 쪽으로 살짝 긴장한 눈빛을 흘렸다.
“조심해서 다루는 게 좋을 거야. 오히려 검 쪽보다 더 위험한 게 그 검집이니까.”
나도 내 손에 들린 검집을 보았다.
새카만…… 자정의 어둠 같은 빛깔을 띤, 불길하기까지 한 캄캄한 검집.
사그락, 사그락…….
검집에서 문득, 그런 어둠 갉아먹는 벌레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동시에 베이스캠프의 조명이 일제히 훅- 하고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동시에 횃불에 입을 대고 불기라도 한 것처럼…….
“웜멈머!”
“엄마약?!”
기겁한 켈리베이와 한니발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무언가 사악한 기류가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흡!”
나는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의식을 집중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주위를 잠식해가던 벌레 갉아먹는 소리가 일시에 사라졌다.
흔들리던 조명이 단숨에 복구되고, 베이스캠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빛에 감싸였다.
“이 정도는 이제 감당할 수 있어요.”
나는 싱긋 웃으며 예식용 장검 [빛]을 천천히 검집 [그림자]에 꽂아 넣었다.
검집 뿐만 아니라, 이 장검 또한 틀림없는 요기(妖氣)를 풍기고 있었다.
자체적인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마치 스스로 사람의 눈길을 유혹해내는 듯한 마력이 느껴진다.
그리고 서로를 하나로 합쳐, 검집 안에 검을 꽂아넣자 두 장비가 뿜어내던 요기는 서로 상쇄되듯 사라졌다.
‘조심하지 않으면 잡아먹히겠군.’
이것이 나이트메어 슬레이어.
빛으로도, 그림자로도, 사람을 홀릴 수 있다.
하지만 또한 사람은 빛도 그림자도 다룰 수 있다.
리스크를 감당하고 이 장비를 휘둘러서, 공략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겠다. 허리춤에 검을 차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 여기서 끝이 아니야! 네가 요구한 그 ‘변형’ 기믹을 넣어두었거든!”
켈리베이가 신이 나서 뭐라고 더 설명하려 했지만, 나는 듣지 않고 검집에 설치된 잠금장치- 이른바 비녀장이라 불리는 장치를 작동시켜서 검을 잠가버렸다.
찰칵!
이 잠금장치는 환도(環刀)에만 쓰이던 독특한 것인데, 오더메이드 하는 김에 주문했더니 켈리베이가 멋지게 만들어주었다.
“어어? 안 해보느냐? 변형?”
내가 검을 잠가버리자 당황한 켈리베이가 어버버거리며 물었다.
뭐랄까…… 어린 아들한테 자기가 좋아하는 변신로봇 장난감을 사줬는데, 아들이 정작 변신 기능을 안 써서 실망하는 아버지 같은 눈빛이라고 할까…… 뭐 이렇게 구체적이야.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크로스로드에서 장례식이 열리거든요. 슬슬 가봐야 해서요. 변형 기믹까지 테스트하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하지만…… 으음. 그래, 장례식이면 어쩔 수 없지…….”
켈리베이는 영주로서의 내 업무를 존중해주고 있었지만, 영 아쉬운지 내 허리춤을 보며 입맛을 계속 다셨다.
변형 기믹이 회심의 역작이었나 보다.
하지만 그 기믹을 사용했다간 테스트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실제로 사용해보며 감을 익혀야 할 무기라서.
그러니 테스트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슬슬 장례식을 준비해야겠다.
“……저, 사부님.”
그때 한니발이 조심스럽게 켈리베이를 불렀다. 언제부터 사부-제자 관계가 된 건지 저렇게 부르네.
“잠깐 지상에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
한니발의 간절한 시선을 잠시 마주보던 켈리베이가 수염을 홱 치키며 호탕하게 웃었다.
“좋다! 나도 같이 가자. 마침 바깥 공기를 쐬고 싶었거든.”
“네!”
사이좋게 외출 준비를 하는 둘을 가만히 보다가 생각했다.
켈리베이, 자식농사는 모르겠는데, 제자 육성은 나름 잘 하는 것 같다고.
박수를 짝 친 나는 앞장서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좋아요! 얼른 가십시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
크로스로드 서쪽. 무덤터.
이곳에는 지금 장례식이 한창이다.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고, 무덤에 성수가 뿌려지고, 사자(死者)의 내세(來世)를 축복하고…….
일련의 장례식 절차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돌려 무덤들을 응시했다.
지난 석달간 또 많은 무덤이 늘어났다.
스테이지27부터 계속해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요즘 계속해서 장례식을 치른 탓에 이제 이 풍경이 익숙할 정도였다.
그 점이 싫었다.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 슬픔에 무뎌지는 것이, 장례식이 당연한 일상의 하나가 되는 것이…… 싫었다.
식순이 끝나고 내 연설 차례가 되었다.
단상 위에 올라선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영시의 한 단락을 낭송했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어두운 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말라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시들어가는 이는 저무는 날에 몸부림쳐 저항해야 한다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라, 또 분노하라!
낭송이 끝나자 침묵이 찾아왔다.
평소의 장례식 헌사와는 다소 결이 다른 시구였다. 그래서 시민들은 조금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길게 숨을 뱉고, 나는 입을 열었다.
“올해 들어 장례식이 자주, 연이어 열리고 있다.”
스테이지27부터, 스테이지30까지.
방어전을 치를 때마다, 네 번 연속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여러분, 장례식이 익숙해졌나?”
느닷없이 내가 질문을 던지자, 내 앞에 모인 사람들은 당황했다.
나는 평소의 장례식 헌사와는 달리 공격적이고 거친 어투로 사람들에게 쏘아붙였다.
“이제 방어전이 끝나면 아군의 시체를 수습하고, 이곳에 모여 장송곡을 들으며 죽은 사람을 보내주는 것이 일상의 광경이 되었나?”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슬픈 시구를 읊고,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스러진 사람들을 눈물로 기억하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워졌나?”
누군가는 동의하는 듯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도 아니면, 솔직하게 말해보라. 이제 누가 몇 명 죽는 정도로는 슬프지도 않은가? 이 모든 것이 당연한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렸나?”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열기를 담아 내뱉었다.
“익숙해지지 마라.”
“……!”
“장례를 일상으로 여기지 마라. 죽음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 마라. 슬픔에 무뎌지지 마라. 체념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나는 고함을 내질렀다.
“분노하라!”
“……!”
“괴수에게! 죽음에게! 이 전쟁에게!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 영혼에 새겨진 상처 위에 딱지가 앉아 아물었다면, 여러분의 손으로 그것을 뜯어내라! 스스로 피를 내라! 고통을 되새겨라!”
부상당한 병사들의 이가 악물렸다. 붕대에 휘감긴 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적이 아무리 강대했어도! 전투가 아무리 어려웠어도! 이 모든 죽음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며 체념하고 넘어가지 마라. 한 번 더 고민하고, 한 뼘 더 팔을 뻗어라.”
나 또한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방법은 있다. 묘수는 있다. 공략은 있다. 우리가 제때 찾아내지 못한 것뿐.”
“…….”
“순순히 결과를 받아들이지 마라, 악착같이 저항하라! 필사적으로 몸부림쳐라! 전력을 다해 싸워라!”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새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장례식이 찾아온다면.”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때는, 울어라.”
“…….”
“무던해지지 말고,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며, 할 만큼 했다며 손 놓지 말고, 동료의 죽음 하나하나에 슬퍼하고 분노하라. 그 고통을 잊지 마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겨 정리한 뒤, 나는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 전선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괴수로부터 인간의 세상을 지키는 것.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인간성을 지키는 것.”
후자를 포기한다면.
사람의 목숨을 갈아넣고, 병사들의 감정을 제거하고, 기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전선을 운용한다면.
어쩌면 클리어는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갈 길은, 그리고 우리가 갈 길은, 그곳이 아니라고. 진작 결론 내렸으니까.
“인간성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여전히 슬퍼하고, 여전히 기뻐하고, 여전히 분노할 수 있는 것. 그 마음이 마모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성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괴수로부터 인간 세상을 지키는 방법은 내가 찾아내겠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디, 여러분 각자의 인간성을 지켜내길 바란다.”
괴수전선은 위기에 봉착했다.
병사들은 피로에 지쳐가고, 급하게 뭉친 단체와 영웅들은 서로 충돌하며 불협화음을 낸다.
하지만, 그러나.
해결책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무뎌지는 마음을, 꺼져가는 빛을, 바라보고만 있지 마라.”
사람들을 향해 나는 힘을 담아 나지막이 읊조렸다.
“분노하라.”
잠깐의 침묵 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창공을 날며 세계를 수호하는 데에 앞장선, 버밀리온 왕국의 기사 19인. 이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세계는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이들이 누구보다 높이 날았음을, 누구보다 용맹했음을, 영원히 기억해주길 바란다. 먼저 하늘로 돌아간 창공기사단 19인을 위하여 묵념하겠다.”
내가 먼저 고개를 숙였고, 사람들이 뒤따라 우르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묵념이 끝났고, 나는 단상을 내려갔다. 이번 장례식 총괄을 맡은 에반젤린이 팔을 크게 휘저었다.
펑! 퍼버벙!
사자를 기리는 메마른 포성이 높게 울렸다.
장례식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흩어지지 못하고 가만히 제자리에서 곱씹고 있었다.
이번의 죽음을, 전번의 죽음을.
그리고 어쩌면, 어느새 죽음에 무던해진, 각자의 마음을.
***
미하일은 무덤터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아름드리나무의 드러난 뿌리 위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장례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소년은 수척했다. 선명했던 주홍색 머리칼과 눈빛은 며칠 만에 생기가 빠져나간 듯 색이 바래 있었다.
“미하일.”
부르며 다가가자, 미하일은 장례식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푹 꺼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애쉬 황자. 부하들의 장례를 챙겨줘서 고마워.”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버밀리온 왕국 기사 19인의 시체는 모두 화장(火葬)되었다.
이곳 무덤터에는 우선 장례를 치르기 위해 빈 무덤을 만들고, 이후 유골함을 이장(移葬)하는 식으로 버밀리온 왕국까지 보낼 계획이었다.
그 빈 무덤 앞에서, 버밀리온 왕국 사람들은 슬피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미하일은 끼지 못한 채 이곳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저기 가는 게 어때?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조심스레 권하자 미하일은 쓰게 고개를 저었다.
“면목이 없어서 말이야…… 다 내가 죽인 건데, 어떻게 저기서 뻔뻔하게 울 수 있겠어.”
“미하일. 전투 중 사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알잖아. 게다가 지시를 내린 건 나고…….”
“네 작전 지시는 정확했어. 내 부하들도 완벽했지. 틀린 건 그때 적진으로 돌진한 나뿐이야.”
미하일은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없어. 고향에서 저들의 귀환을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어떻게 뼛가루가 든 함을 건네야 할지…….”
“…….”
“죽음과 패배 말고는 돌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니…….”
빈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 미하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래. 알아. 이것도 내가 왕세자로서, 기사단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무라는 걸.”
이윽고 미하일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를 향해 위태롭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애쉬 황자. 정말로…… 네 말대로, 내 사람들에게 가볼게.”
“그래.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미하일은 흔들리는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는데, 문득 걸음을 멈춘 미하일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참, 연설 멋졌어. ‘분노하라’라니…….”
“……”
“그래, 분노해야지.”
당장이라도 산사태처럼 무너질 것 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미하일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분노해야지.”
그리고는, 언덕길을 비틀비틀 마저 걸어 내려갔다.
“…….”
나는 소년기사의 아지랑이처럼 휘청이는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저 소년의 위태로움이 부디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