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Tyrant of a Defense Game RAW novel - Chapter 632
◈ 632. [Evil Side] 놈놈놈
흑룡의 어금니, 투스티베안.
거대한 악룡은 옆으로 쓰러져 죽었다. 얼굴의 대부분이 날아간 처참한 모습으로.
“…….”
쓰러져 죽은 놈의 시체 앞에 더스크 브링어는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놈의 브레스에 휩쓸린 바람에 그녀는 온통 검댕 범벅이었다. 갑옷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파손되었고, 옷은 모조리 흉하게 나풀거리고, 탐스럽던 흑발도 엉망진창이다.
그 옆에 서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흑룡 군단을 직접 쓰러뜨린 건…… 처음이시겠네요.”
흑룡 군단에 소속된 용은 총 일곱.
그중 우리가 제압한 것은 현재 셋.
하나는 내가 1년차에 콜로세움에서 죽였고, 하나는 며칠 전에 포획했고……. 제대로 레이드로 쓰러뜨린 건 이 녀석이 처음.
“기분이 어떠세요, 숙적을 쓰러뜨리셨는데.”
예전에 더스크 브링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흑룡더러 ‘태어난 것이 죄’라고 말했었지.
선대로부터 이어 온 악연 때문에, 그리고 세계의 존립을 둘러싼 가치관 차이 때문에…… 더스크 브링어는 흑룡을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증오했다.
“……잘 모르겠구나. 기분이 이상해.”
하지만, 더스크 브링어의 목소리는 그때만큼의 독기가 없었다.
“마주하자마자 깨달았다. 나와 이 녀석은 서로 싸워 죽여야 할 운명이라고.”
“…….”
“지금도, 생각에 변함은 없다. 흑룡은 존재 자체가 죄악이며,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이놈들을 살려둘 수 없다는…… 그것은 나의 신념이고, 당연한 순리라고 믿는다.”
더스크 브링어는 투스티베안의 뜨인 채 풀린 눈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 자와 눈을 마주했을 때. 서로 죽이기 전에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눴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직후 더스크 브링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네 옆에 있다 보니 나도 약해져 버린 모양이지.”
“…….”
“착각하지 말거라. 흑룡은 결국 세계를 멸하려는 존재들이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놈들을 죽여야 한다. 내가 말한 것은, 그저.”
더스크 브링어는 더듬거리다가 내뱉었다.
“향수(鄕愁) 때문이다.”
“향수요?”
“그래, 향수. 서로 틀림없이 싸워 죽여야 할 숙적이지만, 같은 용종이기도 하니까. 이제는 멸종해버린, 이런 형태로밖에 재회할 수 없는…… 같은 근원을 둔 종족이니까. 변덕처럼 든 옛것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다.”
쏘아붙인 더스크 브링어는 나를 흘겨보았다.
“이런 쓸데없는 감상이나, 같잖은 고민 따위는 집어치우고. 우리는 철인이 되어 싸워가야 한다. 알고 있겠지, 애쉬?”
그녀는 자신의 몸에 묻은 검댕을 털어내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뽀글뽀글 엉킨 머리가 총총거리며 멀어졌다.
“…….”
멀어지는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어낸 나는 아군 영웅들이 정리를 시작하는 창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군수 창고 내부에는 여러 값진 아이템들이 쌓여 있었다. 용이 드래곤 레어에 모은 보물뿐만 아니라, 호수왕국 시절 비축된 여러 군수 물품이 남은 채였다.
‘물론 이것들도 훌륭한 전리품이지만, 역시 가장 큰 전리품은.’
투스티베안 그 자체다.
투스티베안은 우리가 처음 얻은 온전한 용의 사체였다. 다시 말해, 본격적인 드래곤 슬레이어 장비 제작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파레키안의 발톱으로 만들 수 있는 장비는 한정적이었다. 등급도 SR이 한계였고. 하지만 이제 뼈, 가죽, 비늘, 심장…… 다양한 부위로 장비를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활성화된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창고 내부의 물건들이 남김없이 크로스로드로 실려 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에반젤린이 히죽 웃었다.
“이런 식이면 나머지 용들도 쉽게 잡겠는걸요?”
“어허.”
플래그 금지라고 했지, 내가!
에반젤린의 입 위에 검지를 톡톡 두들기는 시늉을 하자 에반젤린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루카스는 재밌어 보였는지, 자신의 검지도 에반젤린의 입술 위에 올렸다. 에반젤린은 두 눈을 희번덕이더니 그대로 루카스의 손가락을 씹었다.
으아아악- 울리는 루카스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어느새 내 주위에 모인 메인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다음 용들부터가 진짜 ‘드래곤 레이드’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전투가 될 거야.”
킬리티안도, 파레키안도, 투스베티안도.
어딘가 한 군데(혹은 몇 군데)씩, 다른 용들에 비해 명확한 약점을 가진 존재였지만.
앞으로 마주칠 놈들은 다르다.
용으로서의 모든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각자 특장점을 보유한 용들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본격적인 드래곤 슬레이어 제작, 그리고 철저한 준비 뒤에…… 하나씩 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흘깃 시스템 창을 보았다.
[STAGE 40]– 시작까지 : 25일
스테이지 40…… 나이트 브링어가 크로스로드로 쳐들어오기까지는 이제 4주도 채 남지 않은 상황.
우리 앞에 놓인 험로는 더욱 좁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배부른 고민 따위는 더 이상 머릿속에 남겨두기 힘들 만큼.
***
호수왕국 10구역.
왕성 앞의 분수 광장.
범람의 때가 아니기에 거대한 분수에서는 정화된 맑은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본래 왕성 앞을 경호하던 악마 수호병단도 모두 도망쳐서, 인적이라고는 없는 이곳에.
휘익-
쿵……!
거대한 용이 날개를 펴고 날아와 내려섰다.
온몸이 빈틈없이 검은 비늘로 뒤덮인 용의 육체는 마치 잘 제련된 갑옷을 입은 듯했다. 미려한 곡선을 그리는 몸의 위로 목이 셋으로 갈라졌고, 목마다 사납게 눈을 번뜩이는 머리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삼두룡(參頭龍).
‘흑룡의 눈’. 아이피안.
《약속 장소가 이곳이었지.》
가운데 머리가 근엄한 목소리를 내자, 왼쪽 머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알 게 뭐냐, 등신아. 우리랑은 말도 안 하고 니 X대로 약속 잡았으면서.》
《…….》
뒤이어 오른쪽 머리가 고개를 꾸벅거리며 중얼거렸다.
《졸려…… 자고 싶어…….》
《…….》
구시렁구시렁 욕설을 뱉어내는 욕쟁이 왼쪽 머리와, 진짜 잠들어서 코를 골기 시작하는 오른쪽 머리.
양쪽을 번갈아 본 아이피안의 가운데 머리는 긴 한숨을 뱉었다. 까마득한 세월을 이 두 놈과 함께했지만,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 너는 계속 욕이나 하고, 너는 계속 잠이나 자라. 회의는 내가 주관할 테니.》
《아앙?! 또 은근슬쩍 네가 주도권 쥐려 하는데, 야! 우리 셋이 통틀어서 ‘흑룡의 눈’인 거야. 자꾸 혼자 잘난 척 하지 마, 재수 없으니까!》
《……드르렁…….》
세 머리가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하며 싸우고 또 졸고 있는데, 저쪽 하늘을 가르고 또 다른 용이 광장으로 접근해왔다.
커다란 날개를 좌우로 뻗은 응룡(應龍)이었다. 그 날개는 일반적인 용종과 달리 풍성한 깃털이 잔뜩 돋아 있었다.
우아하게 허공에서 한 바퀴 돈 그 용은 날개를 접으며 사뿐하게 광장에 내려섰다.
‘흑룡의 날개’, 윙드후안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맏형님……들.》
윙드후안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오든 말든 아이피안의 세 머리는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무식한 네놈보다는 내가 대표가 되어 회의를 이끄는 게 당연하잖느냐!》
《너는 항상 잘난 척하지만, 그래서 전생에 우리가 죽은 이유가 누구의 판단 때문이었지? 아앙?!》
《쿨쿨…….》
투닥거리는 아이피안의 세 머리를 번갈아 살핀 윙드후안은 ‘또 이러시네’라며 한숨을 토해냈다.
윙드후안의 뒤로는 그가 부하로 삼은 괴수들- 이른바 ‘가디언’들이 우르르 몰려와 주위를 경계하듯 진을 차렸다.
다른 용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무리 형성을 즐기는 윙드후안은 여러 괴수 군단을 제패하고 복종시켜둔 상태였다. 윙드후안은 부하들의 시중을 받으며 맏형의 머리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때.
《우와아앗! 형님들, 죄송해요! 늦었네요!》
마지막으로 또 다른 용이 하늘을 가르며 등장했다.
뱀처럼 긴 몸에 네 개의 다리가 돋아난 형태의 용이었다. 이곳 대륙이 아니라, 바다 건너 동쪽에서 신수(神獸)로 모실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긴 메기수염을 펄럭이며 날아온 이 용의 눈에는 기이하게도 커다란 안경이 쓰여 있었다.
흑룡의 순린(純鱗), 스케이리안.
공중을 부양하듯 둥실거리며 날아온 스케이리안까지 광장에 내려섰다. 마침내 이번 회의에 모이기로 한 세 마리 용이 모두 소집되었다.
아이피안의 가운데 머리가 반갑게 웃으며 두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래, 오랜만이다. 윙드후안. 스케이리안. 다들 잘 지냈…….》
《이런 씨발! 정말이지 볼 때마다 기억하기 X같은 이름들이군!》
왼쪽 머리가 성질을 부리며 난입했다.
《X같이 헷갈리니까 그냥 앞으로 너희를 날개, 비늘이라고 부르겠다. 괜찮지?》
《…….》
《너희도 나더러 눈깔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괜찮지?!》
아이피안의 가운데 머리는 물론이고, 윙드후안과 스케이리안까지 모두가 당황했다.
크흠! 소리를 내며 목청을 가다듬은 윙드후안이 제안했다.
《……이대로는 대화가 힘드니, 우선 폴리모프하는 건 어떻습니까?》
용 사이즈로 이 난리를 피우는 것도 난감했다. 뭣보다 아이피안의 왼쪽 머리는 성량이 무시무시해서 목소리를 듣기 괴로웠다.
동의한 세 용은 동시에 용족의 권능-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들보다 아래의 동생들은 사용하지 못하는 권능이었지만, ‘온전한 용’인 이들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먼저 변신을 끝낸 것은 맏형 아이피안이었다.
짧게 깎인 흑발에, 미려한 흑색 갑옷 차림. 그리고 장식으로 기다란 귀걸이를 착용한 이 남성에게는 눈이 세 개 있었다.
미간에 세로로 길쭉하게 뜨인 세 번째 눈까지- 총 세 개의 황금안을 치뜬 존재.
폴리모프를 끝낸 이 용은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주도권은 내가 쥔다!》
《닥쳐, 맨날 너만 재미 보고! 오늘은 내가 한다!》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진짜…….》
세 눈이 데구르르 굴러 서로를 노려보며, 한 입을 통해 번갈아 말이 튀어나왔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하자마자 3중인격이 되어버린 맏형을 바라보며 윙드후안과 스케이리안은 동시에 생각했다.
‘정신 사나워…….’
윙드후안은 말총머리에 깃털 장식 코트를 걸친 잘생긴 남성, 스케이리안은 안경을 쓴 소심한 인상에 로브를 입은 학자 차림으로 변했다.
《으으, 으윽…….》
내면에서 주도권 투쟁을 벌이길 잠시.
아이피안의 오른 눈과 가운데 눈이 꾹 감겼고, 왼 눈만 부릅뜨였다.
《좋다, 동생들아! 이 몸은 이 몸께서 차지하셨다!》
아무래도 왼쪽 머리가 승리한 모양이다.
참 볼 때마다 지랄병이라고 생각하는 두 동생의 앞에서 아이피안이 귀를 파며 물었다.
《그래서, 뭐였지? 우리 오늘 왜 모였지? 날개, 비늘, 말해봐.》
《……눈깔 형님께서 저희를 모으셨습니다.》
《어?! 그랬나?!》
사실 이유야 뻔했다.
최근 흑룡 군단에 연달아 변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파레키안이 실종됐고, 얼마 전에는 투스티베안이 사망했습니다. 인세의 수호자가 군대를 끌고 와서 이런 일을 벌인 듯합니다.》
윙드후안이 차분하게 설명하자, 아이피안이 버럭 화를 냈다.
《하여간에 이 씨발놈의 용 새끼들 이름 한 번 외우기 힘드네! 걔네는 어느 부위야?!》
……화를 내는 이유가 좀 달랐다.
윙드후안은, 아니 날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지금의 아이피안, 아니 눈깔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발톱하고 어금니입니다. 둘이 실종되고 죽었습니다.》
《하여간에 이 허접 새끼들 전생도 지금도 아주 그냥 개 호구마냥 털리는구만!》
구시렁대던 눈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데 그 뭐…… 우리 동생 하나 더 있지 않았냐?》
《킬리티안…… 핏방울 말씀이십니까? 2년 전에 죽었잖습니까.》
《아이고, 내 가엾고 약해빠진 여동생! 기어코 또 뒈졌구나!》
탄식한 눈깔이 뒤이어 물었다.
《누구한테 죽었어?》
《인세의 수호자에게 죽었습니다.》
《그 씹어먹을 새끼! 내 소중한 여동생을 감히! 내가 반드시 죽이고 만다!》
반응이 2년쯤 늦긴 했지만, 아무튼 동생을 소중히 여기는 눈깔이었다. 어째 남동생들은 죽든 말든 별 신경 안 쓰는 거 같긴 해도…….
《오늘 그것에 대해 회의를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날개가 차분하게 눈깔과 비늘을 번갈아 살핀 뒤 속삭였다.
《인세의 수호자. 놈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우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건방진 인간에게 어떤 벌을 내릴 것인가…… 그것을 결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