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ome a Fool When It Comes to My Daughter RAW novel - Chapter (382)
382화. 구세주
사각. 사각.
펜을 잡은 손이 태블릿 위를 춤췄다.
작화를 진행중인 소녀와 환상의 숲.
이번 에피소드를 마무리짓는 데에도 이제 몇 컷밖에 남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막바지지.’
최근 작화 속도가 불이 붙은 탓에 이야기의 마무리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 페이스라면 늦어도 이번 달 안에는 끝맺을 수 있겠지.
그에 따라 나는 더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동화책도 곧 완성이라는 생각에 벅차오르는 기분.
마치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거 같다.
학습지 작화, 연두티콘 제작, 공모전 수상, 동화책 작화, 그 밖의 자잘한 것들까지.
작화가의 길.
그 길을 계단이라 친다면 이제 몇 계단 오른 셈이다.
내 이름 아래 적을 만한 커리어가 그만큼 생겼고, 동화책을 완성하면 또 한 계단 올라갈 테니.
고작 몇 계단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허나 내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한 계단 한 계단이 너무나도 높았으니까.
정확히는 과거의 내가 볼 때 절대로 오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올려볼 생각도 못했던 계단이었다.
어느 하나도 낮아 보였던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계단들을 밟고 올라가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연두를 만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계단을 오르려 아등바등한 것도 아니었다.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단을 올라 있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올라가야 할 계단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작화팀을 만들겠다는 명확한 목표도 생겼으니 가야 할 길이 더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두렵냐고? 그 물음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할 수 있다.
아니라고.
‘전과 달라진 건.’
몇 계단 올라서 달라진 내 위치뿐만이 아니었다.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제는 올라야 할 계단을 올려다봐도 전처럼 까마득히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나씩 밟아야 할 과정 정도로 생각될 뿐.
‘마냥 순탄치는 않겠지.’
분명히 계단을 오르는 중간중간에 시련이 있을 터였다.
오르다 지칠 수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수도 있고, 동화 속 소녀처럼 양갈래 길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 경우에는 양갈래 계단이라고 해야 하나.
‘괜찮아.’
그 또한 하나의 크고 작은 계단에 불과했다.
지치면 쉬어가면 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고, 양갈래 길을 마주하면 올바른 길로 나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전부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서로 응원하며 함께 걸어줄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스윽.
펜을 고쳐잡았다.
아까 말했듯 늦어도 이번 달 안에는 끝맺을 예정이고 그러고 싶었다.
작화를 시작할 때부터 좋은 퀄리티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완성된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후..”
마음을 다잡은 나는 작화를 재개했다.
***
툭.
펜을 내려놨다.
태블릿 화면에는 완성된 이번 에피소드가 떠올라 있었다.
‘좋아.’
마음속으로 정한 오늘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대충 점심시간 무렵까지 이번 에피소드를 마무리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목표를 그렇게 설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준비해야 하거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마침 걸려오는 전화.
위이이잉.
바로 전화를 받았다.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여보세요.”
동시에 낯익은 목소리였다. 그가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랑 연두가 시골에 갔을 때 차를 태워준 분이자, 할머니가 나를 예뻐했다는 사실을 알려준 고마운 형님이 분명했다.
이름은 유동길.
이 분 덕에 일방적으로 할머니한테 휘둘리지 않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번에 호칭 정리는 한 상황.
“안녕하세요. 형님 맞으시죠?”
“허허…”
멋쩍은 듯 웃는 걸 보니 확실했다.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바로 본론이 이어졌다.
“이제 곧 도착할 거 같아서요.”
“아, 네. 대충 얼마나 걸릴 거 같으세요?”
“삼십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은데, 제가 급하게 내려주고 가 봐야 해서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군요.”
그러고 보니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데려다주시는 거라 했지.
서둘러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바로 나갈게요. 저도 삼십분이면 도착하니까 시간은 맞을 거예요.”
“네.”
다짜고짜 들려오는 목소리.
“아저씨!”
누가 들어도 선동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오냐.”
“저 데리러 와요?”
“그래. 지금 갈 거니까 딱 기다리도록 해라.”
들려오는 웃음소리.
내색 잘 안 하는 녀석이 이러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신난 모양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연두는 없는데.
‘어린이집에 있으니까.’
오늘 선동이가 온다는 얘기를 안 했으니, 연두는 아마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을 거다.
반대로 이 녀석은 설렘에 가득 부풀어 있겠지.
곧 연두 볼 생각에.
‘안 알려줘야지.’
나 혼자 데리러 간다는 건 굳이 지금 얘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이 녀석아.
다시 들려오는 잔뜩 신난 목소리.
“빨리 오세요, 아저씨!”
“하하, 그래.”
틱.
그렇게 끊긴 전화.
바로 차키를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선동이와의 만남이.
***
한편 그 시각.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휘파람을 불며 행복감에 빠져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걸로는 부족한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룰, 룰루~ 룰루~”
참다못한 운전석에 앉은 유동길의 한 마디.
“조용히 좀 해라, 이 녀석아.”
“~ 루.”
멋쩍은 듯 콧노래를 멈추는 오선동.
머리를 긁적인다.
이렇게 보면 분위기가 차가워 보일 수 있겠으나 둘은 무척 친한 사이였다.
워낙 유동길의 평소 말투가 딱딱해서 그렇지.
그는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렇게 신나냐?”
“예. 아저씨는 안 신나요?”
“내가 왜 신나? 신날 일이 뭐가 있다고.”
“서울 가잖아요.”
너무나도 단순한 논리였다.
서울에 왔는데 안 신나는 게 말이 되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동이의 멘트.
유동길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짜샤. 서울이라고 신나는 게 어딨어? 서울이나 우리가 사는 동네나 다 사람 사는 곳이야. 너무 환상에 젖어있지 마라. 실망하니까. 그리고..”
“그리고요?”
“이미 서울이야.”
그 말에 선동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여기가 서울이라고요?”
“그래. 서울 들어온지 얼마나 됐는데. 아까부터 서울이었어.”
“헉쓰…”
크나큰 반전이라도 목격한 듯 입을 벌리고 놀라는 선동이.
유동길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뭐, 서울이 우리 동네처럼 그렇게 작은 마을인 줄 알았어? 서울이 얼마나 넓은데.”
“아, 알아요! 서울 넓은 거.”
“그래? 흐음.. 모르는 거 같은데……”
“알거든요? 저 서울 가 봤어요!”
“언제?”
“…”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예전에 부모님을 따라 서울을 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문제는 기억이 거의 안 난다는 거지.
“아, 아무튼 알아요! 무시하지 마세요!”
“무시한 적 없는데.”
“…”
제 발 저린 것까지 티 내 버렸다.
그런 선동이를 향해 유동길은 힘껏 액셀을 밟으며 말했다.
“그래서 알아, 몰라. 서울 얼마나 넓은지.”
“알아요.”
이번에는 자신 있게 답했다.
서울에 오기 전에 아빠와 서울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선행학습을 한 선동이였다.
그중에는 서울의 크기도 있었다.
“그래? 얼마나 큰데?”
“우리 동네가 열 개 있어야 서울 되잖아요!”
“엥? 열 개?”
“네. 저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어요?”
“누가 그랬어? 우리 동네 열 개 있으면 서울 된다고.”
“아빠가요.”
“푸흡.”
결국 유동길은 못 참고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짓궂으시네, 그 형님.
서울에 가는 아들한테 이런 오개념을 심어놓다니.
“.. 왜 웃으세요?”
“아냐.”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은 시골소년 선동이였다.
***
선동이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다.
이렇게 자동차를 오래 탄 적도, 휴게소에 들러 음식을 사 먹는 것도, 고속도로에서 창문 밖으로 쌩쌩 달리는 자동차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이제는 창 밖으로 엄청나게 높은 건물들도 보였다.
“우와..”
아빠한테 들은 그대로였다.
서울에는 삐까뻔쩍한 건물들이 넘쳐나고 길에서도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고.
여기서도 선동이 아버지의 짓궂음이 드러났다.
100% 거짓만 말한 게 아니라 사실과 오개념을 섞어서 아들한테 얘기해 준 거다.
오개념도 사실처럼 느껴지도록.
끼익.
아직 선동이 아버지가 주입한 오개념은 끝이 아니었다.
선동이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끼익.
곧이어 목적지에 도착한 차량.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번화가였다.
유동길은 이 곳에 볼 일이 있었다.
스륵.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유동길은 시간을 확인했다.
‘큰일이네.’
시간이 촉박했다.
넉넉잡아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여유를 부린 탓에 늦어진 거다.
아직 민홍임 할머니의 손주는 도착하지 않은 거 같고.
‘이걸 어쩐다.’
고민하던 유동길은 전화를 걸었다.
다름아닌 이주원에게로.
“여보세요.”
“아, 주원씨. 어디쯤이에요?”
“가고 있는데 한 십오분쯤 걸릴 거 같아요. 차가 막혀서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금 상황에 기다리기는 곤란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고.
교통 상황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말이다.
“지금……”
유동길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급한 일정이라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
“아니에요, 형님. 그럼 어떻게 하죠?”
방법은 하나였다.
약속 장소에 선동이를 남겨두고 가는 것뿐.
장소는 특정되어 있기에 서로 생각하는 위치가 엇갈릴 가능성은 없었다.
“괜찮겠어, 선동아?”
뒤에서 통화 내용을 다 들은 선동이였다.
상황은 파악이 끝난 상태.
아빠한테 들은 말이 있어서 조금 겁이 나긴 하지만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네, 괜찮아요.”
차에서 내린 뒤 유동길은 말했다.
“꼭 이 벤치에 앉아있어야 한다? 그럼 금방 데리러 올 거야. 어디 가면 절대 안 된다?”
“네.”
“근데 왜 코를 잡고 있냐?”
“그건……”
“아니다. 아저씨는 급하니까 가 봐야 돼.”
잡답을 떨 시간은 없었다.
다시 한번 당부한 뒤에 유동길은 차를 타고 떠났다.
혼자 남은 일곱살 선동이.
터벅. 터벅.
또각. 또각.
아빠 말대로였다.
자동차는 쌩쌩 달리고, 길거리에 사람은 넘치도록 많았다.
건물은 하나같이 삐까뻔쩍하고.
꼬옥.
선동이는 코를 더 꼭 움켜잡았다.
아빠가 해 준 말.
“선동아.”
“응, 아빠.”
“시골 사람이 서울에 가면 조심해야 할 게 있어.”
“뭔데?”
“서울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거든.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 눈 감으면 코를 베어간다고?”
“그래.”
“지, 진짜야?”
아빠는 으스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짜야. 아빠도 예전에 서울에 가서 베일 뻔했으니까.”
“…”
그 말을 듣고 서울에 가는 걸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봤던 선동이였다.
결국 꿈을 버릴 순 없었지만.
다행히 아빠는 해결방법도 같이 말해줬다.
“걱정하지 마. 이렇게 코를 잡고 있으면 못 베어가니까.”
“이렇게?”
“응.”
“손까지 베어가면 어떡해?”
“.. 손까지?”
“응.”
“서울 사람들은 단순해서 그런 생각은 못 해.”
졸지에 단순한 사람이 되어버린 서울사람이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선동이 입장에서는 신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쌩. 쌩.
터벅. 터벅.
아빠가 말한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니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절대 코는 내어줄 수 없었다.
“우리 선동이는 어쩜 이렇게 코가 이쁠까?”
“오똑한 게 꼭 배우 코 같네.”
“엄마를 닮았나, 아빠를 닮았나.”
나름 마을 내에서 명품코로 통하는 코란 말이다.
선동이는 양손을 활용해 코를 사수했다.
부여잡은 와중에도 슬슬 선동이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 새로움은 쉽게 두려움으로 변하곤 하니까.
‘언제 와..’
벤치에 앉은 채로 코를 부여잡고 웅크려 앉은 선동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아저씨와, 환하게 웃음짓는 연두의 얼굴이.
‘..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동시에 드는 불안한 생각.
정신없는 서울이라 아저씨가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어떡하지? 평생 엄마 못 보는 거 아니야?
‘괜히 그랬어.’
후회가 들었다. 괜찮다고 하지 말 걸, 같이 기다려 달라고 할 걸.
불안한 생각은 또 다른 불안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
또륵.
끝내 눈에 눈물이 고이려는 찰나.
“어이, 오선동!”
“..!”
절로 어깨가 들썩였다.
착각이 아니라면 이 목소리는 분명히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들려오는 말.
“왜 그렇게 웅크리고 있냐?”
이번에는 확신했다.
선동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역시나 아저씨가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 표정 그대로.
“아, 아저씨..”
“.. 엥?”
뜻하지 않게 감자소년의 구세주가 된 이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