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127)
051. 대격변을 준비하다(2)
4.
1823년 봄,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느새 정보국의 단골손님이 된 나는 쿠즈민과 세르게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구나. 그간 잘 지냈느냐?”
“예, 폐하. 북아메리카와 하와이, 알래스카 등 이곳저곳 출장 다니면서 관광 하나는 원 없이 했으니까요.”
“저는 폐하께서 폴란드로 발령을 내주신 덕분에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살피던 나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세르게이 너는 신혼이라 앞으론 얼굴 보기도 힘들겠구나. 그래도 이해심 많은 여인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크흠. 폐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폴란드에서 유명한 언론인이자 청년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한 세르게이 남작은 내가 소개해준 구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 귀족 영애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겉으로는 러시아와 폴란드의 화합을 위해서였으나 비단 그것에만 한정된 얘기는 아니었다.
‘측근들을 반발이 심했던 지역의 토호들과 엮어주면 진심이 전달되겠지.’
사실 이런 종류의 발상은 내가 처음이 아니었다.
당장 나폴레옹만 하더라도 유능한 신하들을 확실하게 포섭하기 위해 자신의 친족들과 결혼시켰으니까.
하지만 여동생과 남편인 뮈라가 쌍으로 배신하는 등 그 끝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친족의 자질조차 따지지 않고 무작정 혼인을 주선했으니. 피가 섞였다고 너무 무르게 대한 것도 있고.’
그러니 앞으로 내 측근들은 사상, 자질, 인격 등 다양한 방면에서 철저히 검증한 다음 정말 괜찮은 여인과 맺어줄 생각이었다.
수상쩍은 자 대부분은 영국으로 보내버렸다고 하나 변수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다 내 눈에 결혼 적령기의 총각 하나가 들어왔다.
“쿠즈민 그대도 슬슬 결혼해야 할 것인데. 혹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나?”
“험험. 저는 한곳에 머무는 것보단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게 좋습니다만……”
“머나먼 타국에서 만난 운명적인 사랑! 그런 상상 한번 없이 팍팍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고?”
“……”
‘나는 프로이센, 세르게이는 폴란드와 엮었으니 쿠즈민 얘는 북아메리카가 나으려나? 아니면 아예 청나라? 아, 근데 여기는 막심이 적임자긴 한데.’
쿠즈민의 처가를 어디로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갈 즈음.
세르게이가 식은땀을 흘리던 그를 구원해주었다.
“폐하. 슬슬 청과 영국의 사정에 대해 보고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아. 그럼 당연하지.”
이미 얘기를 듣긴 했으나 전문가와 함께 하나씩 되짚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까.
세르게이는 침착한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일단 청나라를 장악하는 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돈 냄새를 맡은 한족 상인과 토호들이 폐하께서 말씀하신 일대일로(一带一路)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준 덕분입니다.”
“허어. 제국과 함께 꿈을 꾸는 자들이 많아서 기분이 좋구나.”
아무리 유럽연합으로 묶어 시장을 크게 확대했다고 한들 러시아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을 전부 수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 역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공장이 지어지고 노동 인력이 늘어났으니까.
‘게다가 복지와 근무환경에 신경 쓰느라 생산성도 조금 뒤처진단 말이지. 기술로 보완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어야 해.’
다행히 로스차일드 러시아 지부장이자 재무성 고위 관료로 승진한 리처드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일대일로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철도로 유럽과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와 민족을 잇는 순간.
해상무역을 장악한 영국에 대항할 새로운 무기가 생기는 셈이리라.
뒤이어 세르게이가 다른 안건 하나를 꺼냈다.
“영국 공산당이 드디어 시위를 시작했답니다. 따로 조치할 게 있을까요?”
그 말에 나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혁명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후대만큼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놓으려 하겠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물론이다. 나는 수많은 민족이 섞이게 될 영국의 저력을 믿는다.”
공산주의의 아버지.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절친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들을 비롯해 원 역사에서 혁명과 반란을 주도 했던 굵직굵직한 인물들.
자석에 이끌리듯 모두 영국으로 보내놓으면 그간의 시위를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한번 감당해보거라. 내가 장담하건대 핵무기 못지않을걸?’
어느덧 내 입가에는 소름 끼치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5.
첫 시위는 영국의 수도, 런던의 빈민가에서 일어났다.
“빈민과 노동자들에게도 투표권을 달라!”
“돈이 있어야만 국민인가? 우리도 사회의 일원이다!”
보통선거를 비롯해 진정한 의미의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한 차티스트 운동.
원래대로라면 족히 10년은 뒤에 일어났어야 할 시위가 벌어지자 그 충격은 사회 전체에 퍼져나갔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왜 우리만 투표권이 없는 거지? 사람 취급도 해주기 싫다는 건가?”
“나랏일을 한다는 놈들이 시민들 목소리 한번 제대로 들어 주지 않는다니. 이러니까 나라 꼴이 개판인 거지.”
여기에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유에 관해 황색 언론들이 일제히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으니.
더는 의회의 판단과 결정을 믿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거세게 항의해댔다.
“의원들은 어디 가고 경찰만 가득한 거야?”
“죽일 테면 죽여봐!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아?”
시위 한 번에 수백, 수천 명이 거뜬하게 모이다니!
가능성을 엿본 혁명가들이 속속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폴란드 민족주의 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네. 자네는 어디 소속인가?”
“반갑군. 나는 프랑스에서 공화주의 혁명을 시도하다가 온 떠돌이라네.”
“아니, 그러면 이 먼 영국까지는 무슨 일인가?”
“지지자를 모으기에는 이쪽이 훨씬 더 여건이 좋아서 말이야.”
본래라면 프로이센, 프랑스 등 자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죽거나 좌절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영국에 몰래 들어와 숨죽인 듯 살고 있던 그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자 시위 규모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영국 의회를 움직이려면 동지를 더 모아야 하오. 어중간한 인원으로는 토벌당할 뿐일 테니.”
“끌어들일 수 있는 건 다 끌어들입시다!”
영국 공산당은 태생부터가 이미 잡탕이었으니 여기서 뭔가가 더 섞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한데 다단계 회사처럼 가리지 않고 영업하며 끌어들인 끝에 이제는 시대를 한참이나 앞서나간 요구까지 튀어나왔다.
“여성도 투표하게 해달라!”
“국민의 절반이 들고일어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을 것이야!”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바람직한 사회였다.
하지만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수많은 요구가 한꺼번에 밀려드니 시위를 위한 시위가 이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영국은 각지에서 발생하는 소란 때문에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6.
– 우리도 시민으로 인정해달라! 보통선거를 향한 국민의 열망, 사회 각층으로 퍼져 나가……
– 영국 의회는 아편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투표권으로 심판하겠다는 민중의 진정한 의도는?
신문 기사를 읽던 아서 웰즐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라 꼴이 엉망이군. 시위대 규모가 너무 커서 간신히 돌려보내는 게 고작이었다지?”
“죄다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라서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쯧쯧!”
“이건 진보적인 척하는 휘그당 놈들도 고개를 저을 거요.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봅시다.”
당시 영국의 기득권층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렇기에 아서 웰즐리를 주축으로 한 보수파, 토리당 의원들은 처음엔 다른 현안에 관심을 기울였다.
‘청나라와의 무역을 무조건 러시아를 거쳐서 해야 한다고? 혹을 떼려다가 하나 더 붙인 꼴이 되어버렸구나!’
‘나폴레옹, 뮈라 이놈들도 잡아들여서 아예 분란의 싹을 잘라버려야 하는데. 그리하면 러시아군과 대판 싸워야 하나?’
그런데 상황이 점점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난 뒤.
휘그당뿐만 아니라 토리당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뭐? 찰스 앨리엇 소장에게 병력을 지원하자고? 해외에 파견된 병력도 불러들여야 할 판에 그게 무슨 소린가?”
“하. 그러면 유혈 진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리라 보는 건 아니겠지?”
만약 정말로 그러기라도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닥치고 말 것이다.
그 정도 자각은 의회 내 보수주의자들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빈민법을 제정해 민심을 달랩시다. 먹고는 살게 해준다면 말이 덜 나올 테니까.”
“투표권 확대도 진지하게 고려해보겠소. 가장 큼직한 무리부터 하나씩 줄여나갑시다.”
하지만 니콜라이로부터 선동 지침을 내려받은 영국 공산당은 여기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뭐? 고작 무료 급식소나 얻어내려고 이 고생을 한 줄 알아? 이대로 타협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수프는 묽어지고 빵은 작아지겠지.”
“더 이상 의회를 믿을 수 없다. 밖으로 나오시오! 우리의 뜻을 직접 국왕께 전달합시다!”
상황이 진정되기는커녕 점점 심각해지자 왕실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버트 뱅크스 젱킨슨 총리는 조지 4세의 전언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 시위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만약 의회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속히 얘기하라. 아버지 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직접 나설 터이니.
얼마나 답답해 보였으면 정신병으로 인해 제대로 국정을 끌어가지 못한 조지 3세를 거론할 정도였겠나!
이제 영국 의회의 위신은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일에나 매달리고 있다니. 정말 돌아버리겠군.’
나라 안에 근심이 가득하고 밖에는 환란이 몰아치니.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을 테니.’
총리로서 강한 책임감을 느낀 로버트는 극단적인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 수뇌부들을 잡아들여라. 전부 호주로 보내버려야겠다!”
“민중의 반발이 심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뒤에서 부추기는 놈들이 문제란 생각이 안 드나? 그 녀석들을 제거한 뒤, 협상을 통해 타협안을 제시하면 민심도 차츰 회복되겠지.”
“아하. 그래서 죽이는 것보다 유배 보내는 걸 택한 거로군요. 죽음이 기폭제가 되면 소란은 더없이 커질 테니까요.”
어느덧 영국의 전통적인 유배지로 자리매김 호주였다.
로버트 총리는 의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계획을 더 구체화해나갔다.
“만약 캐나다나 다른 식민지까지 급진적인 사상이 전파된다면 일이 아주 골치 아프게 될 걸세. 그러니 절대로 탈출하지 못하도록 경비를 철저히 해야 하네. 잡아들일 때도 손이 여러 번 가는 건 좋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파악한 불온 모임의 명단을 경찰과 군대에 넘겨주겠습니다.”
그런데 의회에 안건을 올려서 집행하려는 사이.
영국 공산당이 먼저 선수를 쳤다.
“너희만 국민이냐? 나도 국민이다!”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
“다른 민족이라 하더라도 영국에서 터전을 잡으면 투표하게 해주시오!”
각지에서 여행객으로 위장하여 모여든 수만 명의 군중.
비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역대급 시위가 런던 번화가를 가득 메우며 의회로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