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bee, Maybee Not RAW novel - Chapter 9
8. 길의 끝
출장, 혹은 휴가에서 돌아온 첫 주였다. 여름은 절정을 향해 쉼 없이 달리고 있는 중이다. 뜨끈한 지열이 훅훅 종아리까지 올라오고 짙어진 초록의 나무 아래에서조차 끈적거리는 습기는 피할 수 없었다. 사무실 빌딩 전체에 쉴 새 없이 에어컨이 가동되는 중이었지만 한 면이 유리벽으로 된 건물 구조상 햇빛이 내리비치는 쪽 사무실은 더운 편이었다.
경관 대신 서늘함이라는 장점을 가진 사무실에서 재희는 준우의 방을 생각했다. 조금 더울지도 모르겠다. 그는 분명 긴 와이셔츠 소매를 반쯤 접어 올리고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오전은 재희에게도 바쁜 시간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일간신문 사이트에 들어가 헤드라인을 훑어보다가 재희는 커피잔을 놓칠 뻔했다.
이지연 귀국 독주회
기사 속 그녀는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를 한쪽 어깨에 드리운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끝은 날아갈 듯 상큼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고, 여성스럽게 커다랗고 동그란 눈매 속의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동자는 맹금류처럼 날카로웠다. 지연은 더 아름답고 화려해져 있었다. 재희는 홍보용 사진이라 언제 찍은 건지 모르겠다고 구차한 트집거리를 잡는 자신을 발견했다.
싸움이라도 하듯이 기사를 찬찬히 읽었다. 잘 걸러진 완벽한 기사였다. 6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다는 지연이 그동안 얼마나 화려하게 경력을 쌓았으며 어떻게 유럽 대륙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는지 정리한 뒤, 그 찬사는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따라다니던 화려한 일화와 놀랄 만한 기록의 연장선이라고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결혼 생활의 실패는 잠시 동안의 방황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지나가고 대신 그녀의 굉장한 배경이 양념처럼 소개되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특히 H그룹 창업주 외할아버지를 기념하여 2년 전 건립한 종합예술 문화 센터에서 독주회를 열게 되었다는 이지연은 꿈과 같은 여자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발을 내딛는데 발끝서부터 머리까지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어요. 실제로 눈앞에서 반짝 스파크가 일었어요. 이곳이 많이 그리웠나 봐요.’
눈으로 박히는 활자가 그녀 특유의 억양을 지닌 소리로 바뀌어 귀에 들어왔다. 지연은 여전히 머뭇거리지도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 서준우 씨 있죠?”
봄이었다. 재희는 샛노란색과 꽃분홍색 옷을 섞어 입고서도 그토록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보았다. 어느 초라한 귀퉁이에 피어도 순식간에 공간을 화려하게 바꾸는 개나리와 진달래처럼 그녀는 예뻤다. 굵게 웨이브 진 머리는 푸른빛이 나도록 검었고, 홍조 띤 뺨과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생기, 그 자체였다.
“서준우 없어요?”
다들 일을 멈추고 넋이 빠져 그녀를 주목했지만 19층 구조조정 본부 회색 공간에 갑자기 들이닥친 봄꽃에게 적절한 답을 하지는 못했다. 지연은 사무실을 휙 빠르게 훑어보고는 곧장 재희 앞으로 다가왔다. 재희는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상무님 회의 들어가셨습니다.”
“회의? 또? 전화 안 받아요. 연락해 주세요.”
누구라고 어떻게 연락을 취해야 하나 재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지연을 쳐다보았다.
“지연이에요, 이지연. 왔다고 말해 줘요.”
바퀴 달린 작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지연은 비어 있는 아무 책상 의자에 앉았다. 평소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재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연에게는 달랐다. 그만큼 그녀는 매력적이었고 그녀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타인을 무시하거나 오만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선택받은 존재가 가지는 일종의 특권이었다. 평범한 다른 사람들과 편하고 무난하게 어울릴 수 있는 대화법과 태도라는 사회화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도 용납되는 대상. 뒤집어 보면 그만큼 아이처럼 순수했다.
“나, 목이 무지 말라요. 공항서 숨도 안 쉬고 오느라. 사무실 엄청 건조하네요. 물 마실 데 있어요?”
재희가 또 선택되었다. 재희는 웃으면서 일어섰다. 사무실 한쪽에 있는 냉장고에서 주스 한 잔을 따르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지연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뭐라 불러요? 이름이…….”
“한재희예요.”
“재희, 재희, 한재희.”
지연은 노래하듯이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예쁘다. 얼굴처럼 예뻐요.”
지연이 봄 햇살맞이를 하는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준우와 결혼한 뒤에도 지연은 가끔 사무실로 찾아왔고 번번이 허탕일 때가 많았다.
“오빠랑 맛있는 거 먹으려고 예약했단 말이에요. 재희 씨가 대신 가요, 응?”
지연은 ‘속상해. 진짜 속상해.’ 하면서 재희를 끌고 가곤 했다. 한국에서 수다를 떨 만한 여자 친구는 없다 그랬다. 지연은 재희와의 대화를 꽤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식사 내내 새처럼 지저귀듯 말했다. 처음에는 주로 준우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하다가 결국 찬양에 가까운 애정 표현으로 마무리되었다. 서준우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활을 버리도록 만들 만한, 그녀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다시 있을 수 없는 절대적인 남자였다.
“아침에 베이글 전문점에 들어갔는데 저만큼에 웬 남자가 앉아서 커피랑 베이글을 먹고 있어요. 손에는 파이낸셜 타임즈. 그런데 왜 그런 거 있죠? 세포 하나하나가 부르르 깨어나서 말하는 거예요. 네 운명이 저기에 있어.”
지연은 정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매일 가서 훔쳐보는데 한 번도 안 쳐다봐요. 통화 엿듣고 이름도 알았죠. 그러다가 꼬박 2주 동안 안 보여요. 내가 미친 거예요. 두 주 만에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본 순간 그대로 달려가서 고백했죠. 당신이랑 사귀고 싶어요.”
지연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떼어 냈다. ‘창피해…….’ 중얼거리면서.
“오빠는 정말 저를 그때 처음 봤대요. 가만히 보고만 있는데 얼마나 부끄러운지. 하하, 나 되게 자존심도 없죠? 게다가 그때 내 차림이 머리 이렇게 질끈 묶고 브라톱에 낡은 청바지. 오, 지저스!”
그랬단다. 지연이 당황스럽고 무안해서 바이올린을 두고 나왔는데 그 속에 들어 있던 전화번호를 보고 준우가 연락했다고 했다. 지연은 엄마가 물려주신 바이올린을 잃어버린 줄 알고 엉엉 울다가 또 찾아서 기뻐서 울었고, 엉망으로 얼룩진 얼굴인데 준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였다.
‘지금 답해도 되나요? 나도 지연 씨랑 사귀고 싶은데요.’
지연의 입을 통해 듣는 서준우는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서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름다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재희는 지연과 준우의 첫 만남과 연애를 그렸다.
이지연, 미워한 적 없는 사람인데 지금은 무척 밉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람을 망가뜨리고 가 버렸을까 싶어서. 아니, 그냥 미운 거다. 그를 온전하게 차지했던 그녀가 밉다. 싫다.
재희는 컴퓨터 화면 스크롤을 움직여 지연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익스플로러를 종료시키고 밖으로 나갔다.
― 사장님, 뵙기를 원하는 분이 있어서요.
“누구? 약속은 없는데요.”
― 이지연 씨가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점심시간 시작 15분을 남겨 놓고 혜선으로부터 내선 전화가 왔다. 지연은 불쑥 들이닥치는 것까지 변하지 않았다. 독주회 기사 덕에 덜 당황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준우는 회의실에서 지연을 잠시 기다리게 한 뒤, YK 회장 비서실과 통화를 마무리했다.
전처와 6년 만의 해후다. 과거의 사랑과 실패는 아직도 생생하지만 정작 이지연이라는 실체에 대해서는 무감각에 가까웠다. 전부를 퍼부었다가 전부를 잃고 깨진 후에 가질 수 있는 무감각이다.
준우는 담담하게 회의실 문을 열었다. 지연이 화사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어쩜, 오빠는 하나도 안 변했네.”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더 예뻐졌어.”
“주름살 생기려고 해.”
지연은 코를 찡긋해 보였다. 어색할 때 나오는 그녀의 오랜 습관이었다.“아니야, 훨씬 좋아 보여.”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지 마요. 가슴 뛰니까.”
준우는 피식 웃었다.
“소식은 가끔 전해 들었어. 잘살고 있다고. 고마워. 잘살아 주니 좀 가벼워졌어.”
“오빠 소식 나는 생각보다 자주 듣는데. 서준우 유명하더라.”
유명의 의미를 굳이 가려낼 생각은 안 들었다. 준우는 남녀 간의 긴장과 탐색으로 이어지는 대화의 맥을 차단했다.
“기사 봤어. 독주회 축하해.”
지연은 기다렸다는 듯 봉투를 내밀었다.
“와 줄 거죠?”
“다음 주던가? 시간 비울게.”
“오늘 점심 괜찮아요?”
“미안해, 오늘은 약속이 있어. 국내에 있는 동안 기회가 있겠지.”
지연의 조심스런 제안을 자르며 준우는 시각을 확인했다.
“또 나 혼자 바보야. 굉장히 들떴네. 서울행이 결정된 때부터 계속 만나는 순간을 상상했는데……. 맥 빠져.”
금세 침울한 표정이 되는 지연을 향해 준우는 그저 후후 웃었다.
“하긴 ‘엑스 와이프하고 친구처럼’이라면 아직 한국서 특히 어른들은 이해 못 하죠?”
무슨 소린가 쳐다보자니 지연이 말을 이었다.
“YK 정 회장님, 멋진 분이기는 하지만 유쾌하지는 않겠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YK가 왜 나와?”
“어머, 서운하려고 하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어차피 오빠 소식 내 귀에 제일 먼저 들어와. 물어다 주는 황새들이 많아서. YK 일 한다면서요? 그 집 장녀, 정소영 남편감으로 꼽혔다던데요.”
‘꼽혀? 누구 남편감?’
준우는 턱까지 차오르는 불쾌감과 짜증을 꾹꾹 내리눌렀다.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있었던 회장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스필라트와의 협상에 크게 만족하며 중국에서 진행 중인 인수 건을 부탁했다. 중국 건은 의외라 준우는 확답을 못 하고 돌아왔다. 그런 사연이 숨겨져 있다면 어이없는 일이다.
“누구 맘대로 ‘남편감’이라니. 그런 거 전혀 없어. 정소영 씨는 본 적도 없는데.”
지연이 잠시 입을 다물고 준우를 세밀히 탐색하듯이 살폈다.
“다른 여자 있나 봐. 느낌이 그래요. 별로 내 느낌 틀린 적 없는데, 맞죠?”
“맞아.”
준우는 봉투를 가로로 세워 테이블에 툭툭 두 번 쳤다. 신호나 된 듯 지연이 일어섰다.
“그 여자분이 괜찮으시다면 나 소개시켜 줘. 독주회 같이 와도 좋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만나서 텅 빈 사이라는 거 보여 주면 더 좋아할지도. 아니, 핑계예요. 되게 궁금해. 불공평하기도 하고. 상대는 나를, 오빠의 엑스 와이프가 누군지 알잖아.”
지연은 어린애처럼 한번 떼를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시작부터 잘라야 했다.
“불공평하지는 않은데.”
준우는 지연의 눈을 외면하면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말,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뜻?”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나갈 방향을 가리켰다.
준우는 자리로 돌아와 스케줄을 확인했다. 정 회장과의 저녁 약속이 금요일, 그러니까 내일로 잡혀 있다. 불쾌한 소문을 확인해야겠다. 다시 끈적거리는 점액질로 뒤덮인 기분이다. 호흡이 힘들고 뇌가 터질 듯한 기세로 팽창하는 것 같다.
준우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어머! 재희 씨? 맞죠? 재희 씨!”
지연은 십년지기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팔짝 뛸 듯이 좋아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붙잡혀 정신을 차려 보니 음식점 테이블 앞이었다. 홍보용 사진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는 여전히 종달새처럼 이야기했다.
“재희 씨는 그럼 줄곧 오빠랑 같이 일하는 거예요?”
“네.”
“정들겠다. 그렇게 오래 같이 일하면. 호호, 농담이요.”
지연은 누들을 감아올려 한입 먹더니 뭔가 생각난 듯 급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맞다! 그럼 혹시 재희 씬가?”
“네?”
“엄마 친구 아들이 준우 씨 회사 여직원이랑 결혼할 거라고 하더라구요. 엄마도 이제 이름 같은 건 기억 못 한대요. 들으면 바로 다른 귀로 빠져나간대. 아들 이름이 뭐더라, 아버지가 검사였는데. 아들도 지금 검사라던가?”
재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맞아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헤어졌어요.”
지연은 ‘어머.’ 그러면서 미안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애초부터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엄마 친구 아들과 재희의 결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오빠는 하나도 안 변했더라구요. 이러고 자세히 보면 좀 늙었나?”
지연은 ‘이러고’를 길게 발음하면서 눈을 가늘게 떠 보였다.
“나, 오늘도 점심 거절당했어요. 변한 게 하나도 없네? 하하. 게다가 충격적인 말도 들었어요. 오빠가 여자가 있다고 딱 자르는데…….”
재희는 헉하고 숨을 삼키느라 사레가 걸릴 뻔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에서 뻣뻣하게 서는 우동 면발을 꿀꺽 삼켰다. 지연이 냅킨 한 장을 빼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입가를 닦고 쳐다보니 지연이 빙긋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오빠 여자 있으면 안 되나?”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지연이 차갑게 말을 끊었다.
“하긴 나도 놀랐으니까. 아직 싱글이고, 부모님들도 은근히 다시 잘됐으면 하는 눈치고, 나도 그렇고 해서 기대하고 왔거든요. 근데 딱 자르네요.”
잘못이라면 지연의 말에 조금, 아주 조금 우월감이 생겼다는 걸까. 재희는 표정을 감추려 물을 마셨다.
“더군다나 상대가 YK 딸인데. 알죠? 그 집 딸만 둘인데 장녀가 무척 똑똑하고 예쁜 걸로 유명했어요. 어느 집 며느리로 들어가나 그랬는데 정 회장이 후계자로 키우겠다고 다 거절했대요. 재벌가 2세들, 거창한 집 자제들한테 줄 생각 없다고. 데릴사위 들여 딸이랑 같이 경영 맡게 할 거라는 소문이 그렇게 났죠. 정 회장이 큰딸을 얼마나 아끼는데. 사윗감 직접 고를 거 같더니만.”
지연이 입을 비쭉하면서 웃었다.
“정소영, 그러니까 그 딸은요, 나랑은 비교가 안 되는 사람이죠. 심지어 착하고, 뭐라더라, 그 표현 있죠. 참하다 그러는 거. 그렇대요. 오빠는 나랑 결혼한 게 신기할 정도로 되게 여성스런 스타일 좋아해요.”
재희는 멍하니 움직이는 입술만 쳐다보았다.
YK 딸? 후계자, 사위, 뭐……?
“YK 일도 한다면서요. 오빠가 아무리 능력 있어도 그 정도는 아니죠. 일종의 테스트? 아 참, 아직까지는 비밀인 거 아시죠? 공식적으로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어야 하니까.”
뺨을 세차게 얻어맞은 것같이 얼얼했다. 기가 막혀 숨이 툭 떨어지는데 갑자기 지연의 눈이 보였다. 정수리에 시선으로 만든 화살이라도 박을 듯이 쏘아보는데 야릇한 비웃음이 한 겹 덧입혀져 있었다.
‘너 따위가 되겠니, 한재희?’라고 묻는 거 같다.
“암튼 난 헛물켰어요. 나뿐 아니라 헛물켜는 여자들 좀 될 거 같아. YK 아니고도 서준우 탐내는 집안 많더라구요. 후우, 나 덕분에 생긴 이혼 경력이 아무래도 걸리겠지만 워낙 짧은 기간에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보기에 따라, 실제도 다르지 않구요. 내가 바이올린 다시 하겠다고 그 사람 일방적으로 버린 거니까 서준우가 불량인 것도 아니고. YK 정 회장님 입장으로야 데릴사위로 들여 기업 맡기기에 서준우만 한 사람 찾기 힘들죠. 그건 확실해요.”
지연이 고개를 까닥이면서 가방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나 독주회 해요. 초대장이랑 팸플릿. 꼭 와요, 재희 씨.”
음식점에서 헤어져 돌아서는 재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연은 입술을 실룩였다. 팡팡 구둣발로 바닥을 두 번 굴렀다.
“뭐야, 나 너무 유치하잖아.”
지연은 준우가 소영과 잘되는 거라 생각하고 만났다. 그런 일이라면 축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 좋은 곳으로 간다니 아쉬우면서도 후련했다. 죽도록 사랑한 사람인데 서로를 죽도록 망치고 헤어졌다. 너무 잘못하고 가 버린 거 같아 죄책감이 지겹도록 내내, 무겁게 짓눌렀다. 여전히 미련은 있지만, 그를 보는 순간 심장도 펄떡거렸지만 그래도 축하해 줄 준비를 했다. 다른 여자는 의외의 변수였다. 그리고 순간, 머릿속을 관통하는 얼굴을 떠올리다가 설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희를 봤을 때는 진심으로 반가워서 손을 맞잡고 팔짝거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재희를 이유 없이 좋아했다. 그녀가 가지지 못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단순히 아름답다, 지적이다 그런 형용사가 전부가 아니었다. 나긋하고 부드럽고 여성스럽고……, 그랬다. 언제나 듣고도 무슨 뜻인지 몰랐던 ‘참하다.’는 말이 이런 거로구나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은은한 향이 묻어나는 여자.
좋아했던 사람이라, 부러워했던 사람이라 더 속상하다. 준우가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고 자신과 했던 것처럼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지연은 도리질 쳤다. 재희가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미소를 보이지만 않았어도 혀를 깨물어서라도 다음 말을 중지했을 텐데.
갑자기 매미가 울어 대는 소리에 놀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하루 싸우고 말겠지. YK 건은 날아갈지도 몰라. 정소영 마다할 만큼 재희 씨가 좋을까?
다시 질투가 날름날름 혀를 내밀었다.
안 돼, 그만. 몰라, 모르겠어. 머리 아파.
반주자와 연습 스케줄 시간에 대려면 시간이 빡빡했다. 지연은 택시를 잡으려 도로변으로 한 발 나가다가 더워서 손부채질을 했다. 집에서 차 내어 준다고 할 때 그러라 할걸 괜히 택시 타고 왔다고 후회하면서 눈가에 흘러내리는 액체를 쓱쓱 닦았다. 손등에 까맣게 마스카라가 번졌다.
이건, 땀이 눈에서 나는 거야.
지연은 나무 아래에 기대서서 눈을 감고 독주회 때 선보일 곡을 순서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곡이 끝날 때,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두 번째, 세 번째 곡이 이어졌고 바이올린 음률이 복잡한 감정들을 마음속에서 밀어냈다.
재희는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뭔가 말을 하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듯 입을 쫑긋거리는 혜선을 발견했다.
알아,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재희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사장님 엑스 와이프가 왔었어요.’로 시작되는 혜선의 수다를 들었다. 유명 인사를 봤다는 흥분과 감탄, 이지연에 대한 경이로움이 남의 말을 옮기는 호기심 사이에 비죽비죽 머리를 디밀었다. 혜선에게 지연은, 재희에게 그녀의 첫인상이었던 개나리나 진달래 이상이었던가 보다.
‘나 오늘 눈부신 그 사람에게 전남편 넘보지 말라고 납작하게 밟혔네. 벌레처럼 등이 터진 거 같아.’라고 말한다면 혜선은 놀라 비명을 지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건 재희였다. 굳이 담담한 태도를 꾸민다기보다 그저 깨어났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산들산들 바람을 쐬며 나무 그늘 아래서 노곤한 봄잠을 자다가 소낙비를 맞은 느낌이었다. 깨어 보니 한 계절을 꿈으로 보냈다. 한여름 소낙비였다. 급히 뛰다가 옷이 흠뻑 젖고 신발이 벗겨지고 주르륵 미끄러져 흙투성이가 된 꼴이다.
YK 테스트 통과를 축하드립니다, 인사라도 해 볼까 싶다. 처음 회장을 만나고 온 날, ‘머리가 복잡해.’ 준우가 그랬다. 승산 없는 게임이라 그랬는데 보란 듯이 그럴싸하게 해냈다. 대단하네. 재희는 그 밤, 그리고 그 밤, 뉴욕의 밤과 밤을 곱씹었다.
‘결혼은……, 못 해.’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이기적인 야심가였다. 그러고 보니 서준우는 단 한 차례도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준우의 방으로 걸어갔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를지도 몰랐다.
나를 왜 그 출장에 데려갔냐고. 나를 왜! 스트레스 받는 출장에 섹스 파트너가 필요했어?
문 앞에서 재희는 멍청하게 서 있었다. 퇴근했나 보다. 깨끗하게 비었다. 혜선이 ‘사장님 저녁 약속 장소로 바로 나간다고 그러셨어요.’라고 친절하게 전해 줬다.
*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고 다음 날 출근해서도 준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재희는 보고서 파일을 들고 들어갔다.
“어, 한 팀장. 나 지금 좀 바쁜데. 뭐죠?”
가만히 서 있자니 준우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조금 바빠. 이번 주만 지나면 숨 쉴 틈이 있겠는데.”
“천천히 보세요, 사장님.”
재희는 보고서를 책상에 올리고 꼬박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려는데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찮고 성가시다고 말하는 걸까.
“할 말 있어?”
“많아요.”
준우가 눈매를 좁혔다. 재희가 있는 쪽을 향해 의자를 비스듬히 틀더니 다시 물었다.
“오래 걸려?”
“모르겠어요. 탄력적인데요.”
준우도 못마땅한 내색을 감추지 않고 딱딱하게 받았다.
“오늘 저녁 약속 있어. 밤에 볼 수 있으면 보든가.”
“전화 주세요.”
“지연이 때문이라면…….”
재희는 ‘하!’ 하고 소리를 냈다.
“……신경 쓸 거 없어.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군요. 그럼 전화하지 마세요.”
휙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한 팀장!”
등 뒤에서 준우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문이 덜컹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문이 꼭 단절의 벽만 같다.
퇴근을 하면서 흘끗 보니 준우의 방이 비었다. 아무래도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준우가 그렇게까지 비열하게 군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약속인지 알아보고 귀가 시간을 가늠해서 집에 먼저 가 있을까 싶었다. 재희는 막 자리를 정리하는 혜선에게 다가갔다.
“한 팀장님, 퇴근하세요?”
“혜선 씨, 나 물어볼 게 있는데. 사장님 퇴근하셨어요? 무슨 약속 있으신 건가?”
“아, 오늘요? 오후는 잘 모르겠고 저녁 스케줄 잡혀 있어요. 7시 30분 YK 정 회장님이에요.”
YK 정 회장님, 말만으로도 숨이 콱 막혔다. 정 회장을 만나는 걸까, 혹시 그 딸도 같이?
“그래요? 어떡하지? 제가 빠뜨린 게 있어서요. 통화해야 하는데 혹시 장소가 여기 근처라 만나시기 전에 다시 들어오실 수 있으면 제일 좋구요.”
재희는 혜선을 떠보면서 가슴을 졸였다. 거짓말은 능숙하지 못했다. 평생 이런 구차한 거짓말이 필요한 경우도 없었다. 혜선이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재희를 쳐다봤다.
“아, 그게……, YK 일 관련이라.”
혜선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면서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됐어요. 크게 지장 없겠죠.”
면구스런 상황을 웃음으로 넘기려는데 혜선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떡하죠? 여기 근처 아니에요. 소공동 C호텔인데. 중식당이요. 거기 가시기 직전에 또 약속 하나 있는 거 같았어요. 지금 통화 괜찮으시려나? 제가 전화해 볼까요?”
“아니, 아니에요.”
재희는 수화기를 드는 혜선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다른 사람 알면 곤란하실 거예요. 내일 말씀드리면 돼요. 모르는 척해 주세요. 제가 깜박하고 오늘 못 전한 거 알면 나 꾸중 들을지도 몰라요.”
“설마, 사장님이 실수했다고 화내는 사람이에요? 써늘하게 쳐다보고 말겠죠. 근데 웬일로 한 팀장님이 실수를 다 하세요? 음, 있죠. 저더러 전하라고 했는데 제가 잊어버렸다고 그럴게요. 저에 대해서는 놀라지도 않으실 거예요, 호호.”
재희는 혜선의 순수한 호의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재희는 손사래를 치고 황급히 돌아섰다.
*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트레이가 들어왔다. 코스 요리의 마지막이다. 준우는 기스면의 가늘고 미끈거리는 면발을 많지도 적지도 않게 집어 올리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검은색 단발머리, 검정색 바지 정장, 정 회장이 같이 있을 때도 자리를 먼저 비운 후에도 깔끔하고 빈틈없는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표정 하나, 동작 하나까지 잘 훈련받은 사람이었다.
처음 예약된 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정 회장 옆에서 일어선 여인을 본 순간 준우는 불쾌하고 어이없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겉웃음을 만들었다. 정 회장을 쏙 빼닮은 외모라, 소개받기 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장녀 정소영, YK 차기 경영자라는 사람, 회장이 그 딸에 맞출 사윗감을 고르는 여자.
준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정 회장이 설명을 더했다. 소영이 스탠포드 후배가 되니 선배에게 좋은 이야기 들으라고 한번 소개시켜 주고 싶었는데 오늘 어떻게 시간이 힘들게 맞아서 자신도 참석 여부를 조금 전에야 알았다고. 준우의 표정을 살피는 정 회장을 향해 예의 바르게 답하고 소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둘의 대화는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준우가 ‘전략 컨설팅 펌에 입사하셨다구요?’라는 식의 질문을 던지면 ‘이번 주가 첫 출근이었어요.’라고 소영이 답했고 준우는 적당한 성의로 말을 받았다. 이를테면 ‘좋은 선택이시네요. 일이 좀 고되지만 경영 시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와 같은……. 모든 것이 적당하고 적절했다.
한 시간 반이 훌쩍 넘어가는 식사 시간 동안 준우는 자신의 거부 의사를 소영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하면서도 어색하거나 나쁘지 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식사 서빙 때문에 잠시 끊어졌던 대화를 소영이 이어갔다.
“선배님 말씀은 스탠포드 동문들한테서 많이 들었어요.”
“그러셨습니까. 소영 씨가 올해 졸업하신 거죠?”
“선배님보다 클래스 기수로는 10년도 더 아래예요.”
“그러네요.”
소영은 시선을 맞추더니 젓가락을 내렸다.
“1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해 오신 일에 대해 어떤 성공 비결이 있나 궁금했어요. 저는, 그래서 선배님을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저는, 그래서’라는 두 단어가 틀에 박힌 대화에서 반보쯤 슬쩍 비켜난 기분이었다. 소영은 곧바로 답하지 않는 준우와 상관없이 시선을 낮추고 국물을 떠올렸다. ‘저는, 그래서 선배님을 한 번 뵙고 싶었어요.’에 대해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준우는 다시 틀 속으로 돌아갔다.
“비결이라뇨. 그 정도 성공도 아니고 이룬 게 있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요.”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운을 좇는 분 같지는 않은데요.”
매끈하게 웃으면서 소영은 식사를 물렸다.
곧이어 서빙된 디저트를 반쯤 남기고 준우가 숟가락을 내리자 소영이 자리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너무 길었지요?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소영은 정 회장과 외모만 닮은 게 아니라 영민한 머리나 화술도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호텔 정문을 나란히 나설 즘에 준우는 피곤한 저녁 식사가 무사히 끝나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소영에게 의례히 하는 인사말을 붙였다.
“집으로 가십니까?”
“아니요, 다시 회사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럼.”
기사가 나오겠거니 생각하며 준우가 발레파킹된 차량 번호를 말하고 돌아서는데 소영이 호텔 직원에게 택시를 부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외다 싶어서 다가섰다.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꽤 고집스런 표정이었다. 순간, 택시 타고 가면 된다고 고집을 부리던 재희가 떠올랐다. 재희를 처음 안았던 그 밤, 도로변을 달려 나가 택시를 잡겠다고 억지를 썼었지. 준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왜 웃으시죠?”
소영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죄송합니다.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요.”
“그렇군요. 그렇게 웃으시니까 훨씬 보기 좋은데요.”
“네?”
“선배님, 저녁 식사 내내 웃고 계셨지만 지금 같지는 않아서요. 대외적인 표정에는 저도 익숙하거든요.”
소영이 대외적인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오늘 저녁 처음으로 정소영이 정말 까마득히 기수가 낮은 똘똘한 후배처럼 보였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이러시면 회장님이 서운해하실 텐데요.”
준우의 말에 한 걸음 옮기려던 소영이 돌아섰다. 미소를 거둔 채,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밤에 후배를 바로 근처에도 바래다주지 않는 야박한 선배라 하실 겁니다.”
소영이 후후 웃더니 ‘그런 거라면 바래다주시지요.’ 하고 상쾌하게 말했다. 준우도 기분 좋게 따라 웃었다. 웃다가 문득 뒤돌아본 건 어떤 남자의 ‘엇, 죄송합니다.’ 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정문 근처에서 휘청거리다가 똑바로 서는 여자는 좀 떨어진 준우가 서 있는 자리에서도 확연할 정도로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재희였다. 도대체 재희가 왜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준우가 재희 쪽으로 한 발을 떼는 순간 재희는 회전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차량 도착했습니다.”
준우는 운전석과 조수석 문을 열어 놓은 차량과 회전문을 난감하게 번갈아 보았다. 결국 소영에게 차에 타라고 권하고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을 보던 재희의 눈동자가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재희에게 일 관계로 만난 사람이라고 설명을 해야 하는지, 구구절절 풀어야 하는지 준우는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갑자기 감당하기 힘들도록 피로감이 덮쳤다.
“어디 아파? 피곤해 보이는데?”
“아니.”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호텔 지하 펍, 작은 무대 위에서는 타악기로 찰랑찰랑 규칙적인 박자를 만들면서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연숙이 재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가라앉아 있는 걸 감지했는지 턱을 괴고 바짝 얼굴을 붙였다.
“갑자기 전화해서 나오라더니 뭐야. 고민 있는 겨? 다 풀어 봐. 내가 또 자격증만 없는 전문 상담가 아냐.”
재희는 코앞까지 들이댄 얼굴을 가볍게 밀어냈다.
“고민 없어. 그냥 왔어.”
“그래서 여기까지 진출? 한재희 양이 잘 안 오는 동넨데? 우리 주로 중간에서 만나잖아.”
“응, 너 너무 보고 싶어서.”
“얘가 연애한다더니 간지러운 소리도 하네. 우아한 재희 양, 안 어울리거든? 아꼈다가 그이한테나 하시죠.”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재희는 맥주잔에서 올라오는 거품 수만 세듯이 쳐다보았다.
결국 이 호텔까지 약속을 만들어 왔다. 오는 내내 생각했다. 혹시 준우와 시간이 맞으면 잠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다 풀기 위해 가는 거라고. 늘 연숙이 그녀의 회사 근처까지 오곤 했으니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오늘은 그녀가 연숙의 회사 근처로 가는 것일 뿐이라고, 계속 초라해지고 비참해지는 자신을 포장했다.
정문 근처에서 마주 보고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을 보는 순간 벼락이 등에 꽂히는 것 같았다. 정소영이 만드는 귀족적인 미소나 분위기, 서준우가 보이는 진심을 담은 웃음, 그 모든 것보다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건 두 사람이 서 있는 멋진 그림 귀퉁이를 차지한 질투에 눈이 먼 초라한 여자 하나다.
한 번도 그런 자신을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현석과 사귀는 몇 년 동안은 물론이고, 현석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런 적은 없었다. 약속 장소를 거짓말로 알아내 뒤를 밟고, 누구를 만나는지 확인하고. 스스로에게조차 염증이 나고 진력나게 만드는 의부증 환자 같았다.
“나가자.”
재희는 먼저 일어서서 연숙의 팔을 당겼다. 연숙은 놀란 듯이 쳐다보면서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나가. 여기 따분해. 재미있는 데 가자. 우리 다른 친구도 부를까?”
“누구?”
“그냥 시간 되는 애 아무나. 남산 쪽이면 다들 오기 편하겠다. 아니, 강남이 나은가?”
계산을 하는 동안 연숙이 머뭇거리면서 재희를 관찰했다.
“늦어서 좀 부담스러워? 너 빨리 들어가야 돼?”
“내일이 주말이니 그럴 거야 없지만…….”
연숙이 ‘오케이’라고 말하듯이 고개를 까닥까닥하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그래, 놀아 보지, 뭐. 늙은 몸이 잘 움직이려나.”
재희는 까르르 웃었다.
쿵쿵쿵, 소음에 가까운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밤에 갔던 클럽의 강한 비트와는 또 다른 박자. 오피스텔 맞은편 건물을 철거하는 공사 소리다.
머리 아파, 머리가 아파, 중얼거리면서 잠이 깼다. 재희는 해가 중천이 되도록 잠을 잤고, 일어난 후에도 게으른 베짱이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오늘 새벽까지 베짱이처럼 노래하고 춤췄으니 몇 시간 더 꾸물거린다고 달라질까 싶었다.
습기를 잔뜩 먹은 솜 인형처럼 바닥으로 축축 늘어져 가는 몸을 끌고 욕실로 갔다. 푸석푸석 부은 얼굴에 찬물을 끼얹다 보니 뺨은 얼얼한데 몸은 여전히 눅진댔다. 차라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게 낫지 싶었다.
재희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욕조 없이 작은 샤워 부스만 있을 뿐이었다. 재희는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연간 회원권을 끊어 둔 근처 스포츠센터에 가서 사우나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샤워 용품을 챙겼다. 집을 나가기 전, 화장대에 둔 꺼져 있는 핸드폰을 떠올렸지만 그대로 현관문을 닫아 버렸다.
전화 따위, 서준우도, YK도 다 신경 쓰기 싫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러닝머신 위를 달린 뒤 뜨거운 물에 어깨까지 잠그고 멍하니 앉아 있을 것이다.
더운 여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려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발갛게 된 얼굴을 선풍기 바람으로 식히고 건물을 나올 무렵 무척 상쾌해진 기분이었다. 피부에 감기는 훅한 바람도 나쁘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걷다가 목이 말라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갈 때까지 재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이스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를 받아 구석 자리에 앉고 나서야 집으로 바로 들어가야 했다고 재희는 후회했다. 언젠가 이렇게 노곤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으로 샌드위치를 먹었음을 기억해 낸 순간 모든 것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재희는 준우가 운동을 하는 동안 느긋하게 사우나를 즐겼다. 준우가 운동을 마친 후에 두 사람은 자그마한 베이커리 테이블에 샌드위치와 수프를 놓고 마주 앉았다. ‘우리 공주님이라 할까.’라고 준우가 말하고 냅킨으로 입술을 닦아 주고 재희였다고 말해 준다. 준우에게 그의 여자가 되겠다고 말했던 밤, 언제까지 유효한 것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고 결정 내렸던 그 밤이 떠오르고 뜨겁던 몸과 따뜻한 품이, 미치도록 좋았던 순간순간들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어떡해.”
재희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 보다가 결국 샌드위치에 손도 못 대고 일어섰다.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돌아와서 TV 볼륨을 왕왕 올려 놓고 보는 내내 두 마음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다.
준우를 만나서 따져 봐. 아니, 싫어. 확인하고 싶지 않아.
재희는 스스로를 겁쟁이로 규정했다. 또한 멍청이로도. 그에게 뭐라고 따져야 하는지 순서도 정해지지 않았다.
‘지연 씨가 그러던데, 맞나요?’라고 시작해야 할지, ‘어제 같이 있었던 여자는 누군가요?’ 혹은 ‘왜 YK 딸과 같이 있어요?’라고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니면 ‘왜 그 여자를 보고 그렇게 웃어요?’라고 해야 할까.
만약 준우가 ‘그걸 왜 너한테 말해야 해?’라고 한다면, 혹은 ‘맞아, 그렇게 됐어. 너한테 말하려던 참이었다.’라고 한다면.
재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준우의 모습을 볼 마음의 준비조차 못 했다. 그의 약속 장소를 비서에게 거짓말로 알아내고, 그 장소에 찾아가고, 확인하고, 화를 내고, 아니, 화조차 못 내고……. 모든 행동이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
“네.”
― 한 팀장, 지금 잠깐 볼까 하는데.
월요일 오전, 내선 전화로 걸려 온 서준우 사장의 호출이었다. 재희는 작성 중이던 이메일을 보류하는 버튼을 누르고 준우의 방으로 갔다. 노크를 한 뒤,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눈을 보면서 유리문을 열었다. 어색할 정도로 단정한 인사를 하고 다가섰다. 재희는 책상 끝만, 준우는 시선을 내린 재희 얼굴만 보는 채로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르셨어요?”
“그래서 온 거 아냐.”
“왜 부르셨냐는 말이었어요.”
“어제, 그제, 금요일 밤부터 계속 연락 안 되던데.”
“그러셨어요?”
준우가 손끝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금요일 밤에 찾아갔었어. 없는 척한 거야, 안 들어온 거야?”
“안 들어간 게 맞아요. 새벽에 들어갔어요.”
준우가 픽 웃었다.
“뭐 하느라 새벽에 들어와.”
“춤추고 노래하느라. 친구들 만나서 클럽 갔어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준우가 위에서 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상상이 잘 안 되는데. 한 팀장 그런 거 좋아했던가.”
“좋아해요. 기억 못 하시겠지만 처음 일 시작할 때는 가끔 가면 잘 놀았는데요.”
그가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아, 그랬던 거 같군.”
“현석 씨가 싫어해서 그 뒤로는 안 갔죠.”
준우가 턱을 괴어 시선을 비스듬히 올렸다. 화를 참고 있는 중이었다. 시계를 확인하더니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하고 싶은 말, 말해. 대답할 테니까.”
“없어요.”
“여자만 관련되면, 그런 식으로 애같이 굴지 마.”
“뭐라구요?”
성가시고 짜증스럽다는 말투에 재희도 더할 수 없이 날카롭게 받았다. 준우가 지그시 보더니 좀 누그러진 표정으로 후후 웃어 버렸다.
“재희야.”
“…….”
“다음에는 같이 가자.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새벽까지 있을 거면 같이 가.”
“안 돼요.”
“왜?”
“사장님이랑 너무 안 어울려요. 불편해요.”
준우가 눈썹 끝을 슬쩍 올렸다. 불쾌한 감정을 누르려는 듯 숨을 짧게 내쉬더니 다른 말을 꺼냈다.
“후배였어. 후배.”
재희는 YK 정소영을 후배라고 발음하는 준우의 입술만 뚫어지게 봤다. 거짓말은 아니다. 분명 스탠포드 후배이기는 했다.
“후배? 그렇군요. 미인이시던데요.”
“그러는 한 팀장은 아니야?”
“저랑은 차원이 다르던데요.”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요. 귀하디귀한 그 사람이랑. YK 회장이 유달리 아낀다는 예쁜 딸과……, 아빠한테 버림받은, 천애 고아 같은 내가!
“그만해라. 심통 부리는 애 같아. 피곤하게 그러지 마.”
재희는 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준우 씨, 교묘한 데가 있어요.”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사장님이랑 한 팀장이 무슨 이슈로 저렇게 분위기 험악한가 그러겠네요. 나가 볼게요.”
재희는 꼬박 머리를 숙여 보이고 돌아서서 방을 나왔다.
닫히는 유리문을 통해 어깨에 꼿꼿하게 힘을 주고 걸어가는 재희의 뒷모습을 보다가 준우는 마른세수를 했다. 마지막 말이 걸렸지만 지연에 다른 여자까지, 신경이 곤두섰겠거니 했다. 둘 다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다.
문제는 정 회장이었다. 큰딸에 대해서 모양새가 좋도록 거절해야 하는 절차가 아직 남았다. 또한 다른 이유나 의미를 포함한 일거리라면, 어마어마하게 바보 같은 짓이지만 YK 일은 포기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정 회장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혀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작정한다면 SJ나 서준우쯤이야 간단하게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준우는 팔꿈치를 괴고 양손으로 깍지를 만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모든 상황이 갑자기 단단하게 꼬여 가고 목을 죄고 있다.
‘후배? 그렇군요. 미인이시던데요.’
냉소 섞인 비아냥거림에 맥이 탁 풀려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었다. 사랑과 붙어 다니는 함정들, 불안과 위험, 배신의 굴레.
재희야, 너만이라도 제발, 그냥 믿어 주면 안 되는 걸까.
불안감이 야금야금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준우는 예민하게 굴지 말자 고개를 저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긴 시간 동안 서준우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신뢰를 해 주던 사람이 재희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 재희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로 준우를 다독였다. 그 밤에 준우는 절대적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일을 다시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거짓말처럼 생각했다.
*
목요일 오후, 준우는 연락을 받고 YK 정 회장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정 회장은 썩 개운하지 않게 인사를 했다.
“서 사장, 식사라도 같이 하면 좋은데 잠깐 여기서 차 대접 하는 걸로 괜찮겠나?”
마주 앉아 차를 몇 모금 마시는 동안 준우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정 회장이 주의를 환기하려는 듯 탁, 찻잔 내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쳐다보는 준우를 향해 머리를 끊어 낸 몸통만 질문했다.
“중국 건은 어떻게 할 건가?”
정 회장이 그 정도 운을 뗀 황공한 사안이라면 벌써 실무 담당 이사 쪽과 수차례 만나 논의했어야 했다. 정 회장은 지금 건방진 대응에 대해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없나 보군.”
정 회장은 몹시 실망스럽다는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여러 가지 예상했던 경우 중 최악의 상황까지 갈 수도 있다. 준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SJ는 이미 수차례 비슷한 인수 건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단지 회장님이 절 어떻게 판단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정 회장은 가느스름한 눈으로 준우를 보았다.
“소영이가, 내 딸이 말이야.”
역시 단도직입적인 화법에 절로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날 들어와서 서 사장이 좋은 선배라고 하더라고. 수다스럽지 않은 아이인데 한마디 덧붙이길 사업적 관계로도 믿을 만한 사람일 거라고 하기에 내가 그랬어. 안 그래도 그 사람 하나 믿고 중국 일 맡길 거라고.”
“회장님?”
“난 사업하는 사람이야. 미국이든 중국이든 해외 진출은 가장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이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자리에서 일어서는 회장을 따라 준우도 일어섰다.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했다는 딸을 감히 거절하겠다는 남자에게 정 회장은 예상을 뛰어넘는 호의를 보였다. 준우는 진심을 담아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깊이 숙인 고개를 들기 전, 잘 부탁한다는 흔쾌한 답을 들었다.
*
내내 마음이 지옥이었다. 며칠 동안 준우는 재희를 보려고 하지 않는 듯했다. 더 이상 호출하지도 핸드폰으로 연락하지도 않았다. 지나치면서 형식적인 인사와 가벼운 말은 하지만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울 만큼 굳어 있었다. 도저히 준우를 붙잡고 YK니 정소영이니 따지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재희는 그가 감정적으로 상당히 지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연과 한창 힘들 때의 그가 꼭 그랬으니까.
지금 그를 자극하는 건 마치 폭약에 불을 붙이는 행위와 같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쩍쩍 가슴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갈라진 틈 사이로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의 끝이 보였다. 고개를 털어 봐도 눈을 꼭 감아 봐도 지워지지 않았다.
재희가 지옥을 헤매는 동안에도 SJ는 이번 주 들어 베트남 투자 건에 중동 지역이 더해지면서 부쩍 일거리가 늘어 버렸다. 재희는 비능률적으로 늦게까지 야근하면서 준우가 월요일에 했던 말과 보였던 반응을 수십 번도 더 반복해서 생각하고 끈질기게 분석하려 했다. ‘다음에는 같이 가자.’는 다정한 투였고 그들의 관계가 적어도 당분간은 지속적임을 암시했다. 하지만 후배였다는 변명과 ‘미인이시던데요.’ 하는 말에 불쾌한 투로 뱉은 대꾸, 마지막으로 ‘피곤하게 그러지 마.’라고 내뱉은 말은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건조하고 딱딱했으며 그의 말대로 피곤함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그런저런 부질없는 분석 따위를 하면서도 재희는 스스로를 안심시킬 여러 가지 정황들을 갖다 붙이기도 했다. 빠질 것 없다는 YK 딸이 준우를 그리 흡족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같이 경영을 하기에 적합한 파트너라 해도 그건 정 회장만의 시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YK 사윗감 테스트라는 것도 지연의 추측일 뿐, 따지고 보면 스필라트 협상 건은 준우와 그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한 건 사실이었다. YK로는 조용히, 적은 비용으로 시도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생각과 논리가 여기까지 흘러가면 재희는 지옥 밖으로 고개를 디밀고 후우, 숨을 쉬었다.
하지만 곧 더 깊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만약 YK의 그녀가 그를 맘에 들어 한다면, 아니, 그녀의 맘과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혼사일 수도 있다. 절대 결혼은 못 한다는 준우 입장에서 오히려 감정이 섞이지 않는 결혼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YK가 제공할 엄청난 가치들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거리야.’
이 모든 생각의 반복은 온몸이 쪼이고 뜯기는 고문과 다름없었다. 결코 정답이나 진실에 도달하는 것과는 요원한 채 말이다. 사람의 뇌는 절대적으로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관이다. 이성도 감성에 조종될 수 있고, 감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완벽한 논리를 끼워 맞출 수도 있다. 재희는 스스로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금요일 아침, 재희는 프린터실로 가다가 사무실에 들어서는 준우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은 지난 며칠 동안과 다르게 힘이 넘치고 홀가분해 보였다. 무슨 일인가 꼬리를 무는 잡념에 빠지면서 나온 김에 커피를 뽑으러 갔다가 재희는 박 이사가 흥분한 상태로 알려 주는 빅뉴스를 들었다. YK그룹의 중국 통신사 인수 건에 곧 착수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단하지 않아?”
“네, 잘됐네요.”
재희는 막 추출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잘못 들이켰는지 혀가 덴 듯했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화끈거렸다.
“한 팀장, 지금 무슨 일 하지? 거기로 들어가야지. 알아서 하시겠지만 웬만하면 거기 넣어 달라 그래. 놓치기 아까워.”
“네.”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화끈거리는 감각도 죽어 버린 혀는 쓴맛만을 느꼈다. 펄떡펄떡 심장이 뼈를 들이받듯이 뛰었다. 이제 정말 ‘축하합니다, 서준우 씨.’ 하고 인사를 해야 하나, 조용히 우아하고 멋있고 쿨하게 꺼져 줘야 하나 결정해야 했다. 자신이 죽도록 한심하고 준우가 죽도록 미웠다.
길고 비참한 여름날 오후다. 이제 부질없는 추측과 생각놀이를 할 기운도 없었다. 재희는 벙벙한 상태로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새로 온 메일 체크를 위해 이메일을 열었다. 사이드 바 드래프트에 표시된 숫자가 하나 늘었다. 월요일에 작성하다가 보류한 메일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케이시 교수가 관심 있어 했던 한국 쪽 전시회 규모와 최근 수익률에 대한 자료를 보내 주려 했었다. 보류 메시지를 클릭하여 첨부 파일은 그대로 둔 채 메일의 내용을 고쳤다. 건조한 자판 음이 토도독, 귀를 두드리며 불편한 감정을 더 자극하는 것만 같다.
케이시는 저번 메일에서도 넌지시 뉴욕에서 일할 생각이 있냐고 의견을 물었었다. 연봉과 상관없이 그 분야 일을 하고 싶다는 문장을 썼다가 차마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결국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는 내용으로 고쳤다. 메일이 성공적으로 보내졌다는 메시지가 떴을 때, 핸드폰에도 메시지가 떴다. 오늘 밤에 그녀의 집으로 오겠다는 준우의 메시지였다. 재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밤에 몇 시에 오신다구요?”
― 약속이 있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9시나 10시쯤 갈게.
약속, 이지연의 독주회다. 재희는 그녀가 보이던 야릇한 비웃음을 떠올렸다.
“독주회가 7시 아니에요? 그 시간은 어려우실 텐데요.”
준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독주회 초대권 받았어요. 그날 지연 씨 봤거든요. 꼭 오라고 하던데요.”
― 그럼 같이 갈래?
단순히 보조를 맞춰 빈정거리는 것인지 정말 의사를 묻는 것인지 그의 진심이 무엇이든, 질문이 너무 어이가 없어 재희는 웃었다. 그 와중에도 독주회에 간다면, YK 딸과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지겨운 희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짜증으로 재희는 히스테리를 부리듯 말했다.
“뭘로 데리고 가실 건데요. 여직원?”
― ……알았어. 그만둬.
화가 난 목소리로 준우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재희는 감은 눈이 손등에 꼭 붙도록 책상에 엎드렸다. 이를 악물어도 눈이 계속 젖어 들었다. 점점 더 흉한 꼴로 못난 소리만 지껄이는 자신에게 넌덜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불안한 시작이었다. 결과가 자명한 남자에 욕심 부렸고, 실수했고, 번번이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애써 모르는 척했던 그와의 관계로 오는 피로가 한계치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도대체 난 뭐야. 여직원? 한시적 연인? 섹스 파트너?’
그에게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무슨 자리인지 애초에 접었던 의문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가 선을 그을 때마다, 몸만 원하는 것처럼 굴 때마다, 결혼은 못 한다고 잘라 말할 때조차 비위 좋게 꿀꺽꿀꺽 삼켰던 절망감과 모멸감이 한꺼번에 토해지는 느낌이었다.
재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겹겹이 단단하도록 싸맸던 껍질이 갑자기 쫙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갈라지자 초라한 실체가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지연이든 정소영이든 그녀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 남자 옆에 어정쩡하게 붙어 있으면서 그를, 자신을 괴롭히는 아둔하고 불투명한 여자가 있을 뿐이었다.
눈물로 엉망이 되어 버린 얼굴을 들키지 않도록 재희는 머리를 숙인 채 화장실로 갔다. 찬물에 얼굴을 씻어 내고 역시 바닥만 보면서 걸어갔다. 그대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자라처럼 머리통을 몸통 어딘가로 집어넣고 싶었다. 잔뜩 부은 얼굴도, 지질히도 부질없는 생각만 하는 머리도 모두 숨기고 싶었다. 재희는 벽에 기대듯 멈춰 서서 어깻숨을 쉬었다.
“한 팀장?”
뒤통수에 꽂히는 목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는데 휙 몸이 뒤로 끌려갔다.
“너 얼굴이 왜 이래?”
준우가 돌려세우더니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걷어 올리려 했다. 재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놔요. 누가 보면 어떻게 하려고.”
준우는 팔을 놓는 대신 손을 움켜쥐고 끌고 갔다. 구석에 있는 비상구가 철컹 요란하게 열렸다가 닫혔다. 둘은 좁은 계단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왜 그래?”
“더워서 세수했어요.”
“그래?”
“네.”
준우가 한 발 뒤로 떨어졌다. 등을 벽에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했지. 아님 제대로 말을 하든가.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다른 거 다 제치고 네 맘만 헤아리고 있어야 해? 너 이럴 때마다……, 힘들다고. 재희 너, 왜 이렇게 사람을 지치고 진력나게 만들어.”
지치고 진력나게 만들어? 속에서 울컥울컥 설움이 솟았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달라 요구한 적 있어요? 무시하세요. 나 역시 당신 마음 일일이 헤아려서 그에 맞춰 움직이지는 않으니까요.”
“좋아, 지연이 독주회 가는 거 그게 그렇게 싫어?”
“그렇게 싫다면요.”
재희는 도전적으로 쳐다보면서 반문했다. 준우가 입을 꾹 다물더니 숨을 삼키고 답했다.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하냐는 투였다.
“지연이 나랑 이혼하고 한국 떠나서 이번 방문이 처음이야. 내가 걔를 완전히 망가뜨릴 뻔했어. 재기해서 독주회 한다고 와 달라는데 모르는 척할 수 없어.”
“그럼 제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준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지 마. 가뿐한 기분으로 가는 거 아니야. 모르겠어?”
“그렇군요.”
재희는 목소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그러면 YK 일은 그만둘 수 있으세요?”
준우의 얼굴에 놀라움과 노여움이 차례로 스쳤다.
“너 그건,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리야?”
재희는 냉소를 한쪽 입가로 흘렸다.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그럼 설명해 주실래요? YK 중국 일은 어떻게 땄어요? SJ가 그렇게 커졌나요? 아니면 서준우 씨가 개인적인 능력이 훌륭했던 거예요? 아, 매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순간적으로 준우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땀이 배어나는 이마에 정맥이 툭 솟아올랐다.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데 준우가 손을 들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경고였다.
“그만해라.”
그의 놀랄 만한 자제심에까지 비위가 틀렸다. 재희는 비명을 지를 것만 같은 기분을 억지로 눌렀다. 준우가 돌아서서 먼저 들어갔다. 비상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자, 혼자 남은 공간에 그가 남긴 소리의 파동만 미미하게 남았다. 재희는 무너지듯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가슴과 무릎 사이에 머리통을 파묻었다.
한재희 너, 진짜 추하다. 최악이야. 정말이지 진력날 만하잖아…….
*
검은색 스트로가 액체 속에서 원을 그릴 때마다 각이 살아 있는 얼음이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히다가 떨어졌다. ‘이렇게 불쑥 집 근처 찾아오는 거 안 하기로 하지 않았어?’ 자리에 앉아 아이스티를 주문한 뒤, 재희는 그 말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울었어?”
재희는 현석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가 다시 낮췄다.
“현석 씨가 그런 말 하니 기분이 묘하다. 왜 온 거야. 할 말 없으면 나 일어날래.”
현석이 손에 쥐었던 담뱃갑을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지연 씨 독주회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어머니가 오늘 빠질 수 없는 부부 동반 모임이 있어서 대신 이지연 씨 어머니한테 인사만 드리고 왔어.”
“그렇구나.”
재희는 맥없이 대답했다.
“그 사람도……, 갔어.”
“봤어. 그래서 생각나서 왔어. 그리고 그때 통화……, 심하게 말해서 미안하다는 말 하려고.”
“심한 건 없었어.”
“그 사람 결혼 생활 이야기도 못 들은 걸로 해. 모르긴 하지만 지연 씨가 평범하지는 않잖아. 예술 하는 사람이고 또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하느라 성장 과정도 달랐고…….”
“상관없어.”
재희는 말을 끊었다.
“그 사람이랑 끝낼 거야. 그렇다고 누구랑 다시 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현석이 못을 박듯 말하는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다시 앉았다.
“현석 씨는 날 사랑했었어? 지금도 사랑해? 우리가 한 게 사랑이었나, 내 부모님, 엄마 아빠는 사랑을 한 거였나 계속 고민해 봐. 전에는 결코 아니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두 분은 어쩌면 너무 사랑해서 도저히 같이 살 수가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해. 사랑, 참 어렵더라. 나는 정말 남녀 간의 사랑이 뭔지, 어떤 건지, 뭘로 확신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혼잣말을 하듯이 작고 느리게 재희는 말을 이었다.
“차라리 사랑이 상호작용이 아니라 일방적이었으면 좋겠어. 두 사람이 칭칭 얽혀서 원하지 않는 부분까지 주고, 받고, 요구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치명적인 상처도 남기고……. 어느 순간 내가 사랑을 하는 건지 사랑을 지속하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돼. 원래 내가 이렇게 생겨 먹었나 봐.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잘하지도 못하면서 욕심만 많아. 그래서 이런 꼴이겠지.”
재희는 축축 처지는 어깨를 끌어올렸다. 억지로 웃음을 만들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 현석 씨도 나한테 부담이든 죄책감이든 미련 가질 필요 없어. 그래도 고마웠어. 덕분에 꽤 오랫동안 가족이라는 걸 꿈꿨고 꿈꾸는 동안 행복했었어.”
“……재희야.”
“현석 씨, 이제 정말 더 이상 연락하지 마. 찾아오지도 말고. 우리, 이렇게 만나는 거 마지막으로 하자.”
재희는 먼저 일어서서 카페를 나섰다. 잠시 후 현석이 뒤따랐다.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걸 거절하고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인사를 했다. 현석이 차 문을 열다 말고 돌아섰다.
“재희야.”
“응.”
“……차라리 그 사람이랑 결혼해. 하자고 그래.”
재희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 끝에 눈 가장자리가 묵직해져 왔다.
“싫다 그래?”
“…….”
“미친 새끼.”
“욕하지 마.”
“그 사람, 처음부터 재수 없었어. 네가 워낙 믿고 따르니까 꼭 친오빠나……, 아빠처럼 그러니까 내버려둔 거야.”
현석이 아빠라는 단어 앞에서 조금 머뭇거렸다. 아빠처럼, 그랬던가. 아빠처럼……. 그 말이 가슴을 쿡 찔렀다.
“미친놈, 그런데 어떻게 너를…….”
분해 못 견디겠다는 듯 구는 현석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재희는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알았어, 결혼하자 그래 볼게.”
현석이 허탈하게 웃더니 차에 올랐다. 창문을 내리고 다시 말했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는 않겠지만,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은 못 하겠어.”
재희는 답 대신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다정한 연인처럼 손을 흔들고 차량 뒷모습까지 지켜보던 여자가 이내 힘없는 걸음걸이로 움직였다. 준우는 욱신거리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재희의 모습이 오피스텔 건물로 향하는 코너를 돌아 사라진 후 준우는 차에서 내렸다. 어스름한 주차장을 비추는 가로등 빛 아래서 그림자가 몽당해졌다가 출렁거리면서 천천히 커졌다. 뉴욕에서 보았던 메시지가 한 단어씩 그림자처럼 떠올랐다. 재희가 사라진 코너를 뒤쫓아 돌아서면 사라진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준우는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좁은 복도를 지나 벨을 누를 때쯤에는 불안과 분노가 뒤섞여 울렁거리던 감정이 조절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태였다. 벨에 응답이 없었다. 두 번째 누르고 다시 기다렸지만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번호를 누르는 손이 조금씩 떨렸다. 꺼져 있다는 응답에 집어던질 기세로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주먹 쥔 손으로 철문을 두드렸다. 핸드폰 플라스틱 케이스 귀퉁이가 날아가면서 손바닥이 찢어졌지만 배어나는 핏방울이 붉다는 것 외에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없었다.
디링, 굳게 닫혔던 문이 어이없게도 너무 작은 신호음 이후로 스르륵 열렸다. 재희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그녀가 등을 돌려 걸어가면서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아니,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재희가 거실 중간쯤에 서서 돌아봤다.
“독주회는 성공적이었겠죠?”
“너, 왜 이러는 거야?”
꽉 막힌 목소리가 나왔다.
“끝내요.”
“뭐?”
“그만하고 싶어요.”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지연이 때문이야, 아니면 YK 딸? 둘 다 아무것도 아니야.”
재희는 차분하게 올려다보면서 답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 건 한재희겠죠. 그러니 한마디도 안 했겠죠. 전처를 만났고 또 만나러 가는 것도, 회장에게 사윗감 후보로 꼽혀서 선본다는 것도.”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작정하고 속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작정인지 아닌지는 당신 맘을 어떻게 알겠어요. 난 보고 들은 거밖에는 몰라요.”
재희는 불신의 벽을 통해 준우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준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저버릴 믿음이라면 처음부터 희망의 싹 따위는 물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 배신. 두 번 다시 갇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덫에 다시 잡혀 버렸다.
“한재희, 고작 이것밖에 안 돼? 남의 말이나 듣고 비서 통해서 스케줄 알아내고, 그래서 혼자 자기 연민에 빠졌어? 나한테 물었어야지. 눈곱만큼이라도 나라는 인간을 믿는다면 나한테 와서 말했어야지!”
“말, 안 해 줬잖아요. 물을 수도 없게 만들었잖아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니, 내가 왜, 너 같은 거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는 식으로 구는 남자한테 구차하게 설명을 요구해야 해요?”
“구차? 결국 그거로군. 잘난 한재희 자존심이 더 중요했어. 그동안은 어떻게 견뎠어. 자존심이 상해서!”
준우는 재희 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놔요! 놔! 나 건드리지 마!”
잡은 팔을 힘껏 뿌리치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재희가 뒷걸음질 쳤다.
“난 그냥 이제 다 귀찮아요. 당신 더 이상 봐주기 싫어! 낮에는 한 팀장 소리 들으면서 일하고, 밤에는 사장님 여자 되는 것도 헷갈리고요. 혹시나 걱정하며 먹는 피임약도 지겹구요. 무엇보다 싫어졌어요. 싫어요. 내 몸에 서준우 씨 손끝 닿는 것도 진저리치게 싫어요. 형편없고 끔찍해요. 어떻게든, 이렇게 저렇게 그 좋은 머리로 나 꼼짝 못하게 묶어 두는 것도 이젠 진짜 진절머리 나요!”
재희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낮에는, 밤에는, 피임약…….
하나하나 살처럼 심장을 관통했다. 준우는 들썩이는 어깨를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손끝 닿는 것도 진저리치게 싫다. 싫다. 형편없고 끔찍하다. 주술에 걸린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얼이 빠진 모양으로 서 있는데 울음 섞인 목소리가 고막을 찢고 들어왔다.
“나, 당신을 그 세월 동안, 7년이 넘도록 무조건 존경하고 좋아하고 믿고 따랐어요. 그리고 딱 한 번 욕심냈어요. 단 한 번 기대도 좋지 않을까 그랬어요. 그 대가, 참 크네요. 잘난 사람이에요. 그래서 처음부터, 난 꿈도 안 꾼다 그랬잖아요! 그날도 제발 한 번만 그냥 넘어가 달라고 비굴하게 빌었어요. 사장님 잃기 싫어서 사과도 하고 도망가기도 하고. 그런데 기어이 붙잡아 당신 여자 되라고 하대요. 그래서 다, 사장님 원하는 대로 다 했어요. 그랬잖아요!”
준우는 얼어붙은 듯이 한마디도 못 하고 입만 벌렸다가 다물었다. 재희가 올려다보더니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니 뭔가 엉망이에요. 말이 되지 않아. 내가 꼭 피해자처럼 말하는데 그건 틀렸어요. 실은 내 욕심의 연장이었고, 많이 외롭고 슬펐으니까 내민 손 좋다고 달랑 잡았던 거죠. 아마……, 대단한 사람, 상처받은 자존심 치료하는 데 적당히 이용해 보고 싶기도 했을 거예요.”
재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을 깨끗하게 닦고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마치 그렇게 가슴 아프게 쳐다볼 필요 없어요, 말하듯이. 마치 내 마음 다 읽어 괴로워할 필요 없어요, 말하듯이.
돌이켜 보면 8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동안 재희는 늘 그랬다. 굳이 관찰하려 들지 마세요. 내 마음 헤아리려 할 거 없어요. 왜 그랬는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머저리. 준우는 가슴을 치듯이 후회했다. 지난 몇 달 동안도 그렇게 품으면서도 일부러 보여 주지 않는 부분은 안 보는 채로 안전하게 가려 했다. 나쁜 놈. 치사한 놈. 저 여자에게, 저렇게 약하고 작고 바스러질 것 같은 재희한테 다 미뤘다.
“공평하네요.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공평해져요. 시작은 서준우 씨 당신 의지로 했으니, 끝은 내가 맺게 해 주세요. 당신은 내 남자가 되기에 너무 부족해요.”
“재희야……, 제발! 잘못했어.”
언젠가 지연에게 했던 말, 가시처럼 입속을 온통 긁고 피를 내는 말을 무력하게 되풀이했다. 재희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러니 날 놔줘요. 잡힌 적 없는 사람이니 내가 놓겠다는 소린 못 하겠어요. 당신이……, 놓으세요.”
“못 해. 절대로 안 해.”
준우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재희가 손을 들어 어깨와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한 팀장 할게요. 사장님 해 주세요. 그때가 평화롭고 행복했어요. 알잖아요. 내가 사장님 얼마나 좋아했는데. 다시 그렇게 좋아하고만 싶어요. 당신, 정말 미워하기 싫어. 그래서 서준우 여자 자리 이제는 못 하겠어요. 제발, 그렇게 해 줘요.”
재희가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다시 웃었다.
*
벽장과 침실 옷장에 있는 옷들을 분류했다. 버릴 것과 부칠 것, 여행용 가방에 넣어 들고 갈 것으로. 단출한 살림살이지만 막상 처분하려니 어마어마하도록 많게 느껴졌다. 재희는 꼭 가져갈 것, 처분할 것으로 정리한 리스트를 들여다보았다. 이제 정리가 거의 끝나 가고 있다.
소파와 책상, 침대, 화장대와 같은 가구와 오디오, TV, 그리고 부엌살림 대부분은 처분할 예정이었다. 어떻게 할까 막막하던 차에 집에 오시던 아주머니가 필요한 물품들은 본인이 쓰고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했다. 자취하는 대학생 조카가 무척 좋아할 거라 했다. 아주머니는 굳이 사양하는데도 봉투를 준비해 왔다. ‘얼마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 결국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결혼해서 간다는 거면 얼마나 좋아.’
재희는 편안하게 길이 든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벌써 두 주 전인가. 준우는 소파 앞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의 표정, 잘못했다는 낮은 절규, 아물지 못한 생채기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재희는 털어 내듯 일어서서 이메일을 체크했다. 케이시 교수로부터 온 안부 메일에 일정은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답을 보냈다. 케이시는 여러 가지로 크게 도와주었다. 그녀의 소개로 다음 달부터 일을 시작하고 10월에 시작하는 이브닝 클래스도 들을 수 있다. 이제 하나의 길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점으로 연결되는 모퉁이를 틀었다. 그와 같이 갔던 뉴욕은 길의 끝과 시작이 겹쳐진 곳이다.
재희는 의자에서 일어서려다가 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 주저앉았다. 줄곧 잠을 이루지 못하다시피 했다. 회사에서도 갑자기 몰려든 일거리로 힘들었고, 집에 와서는 이런저런 떠날 준비에 바빴다. 겨우 침대에 누워서도 그의 생각에 꼬박 밤을 지새웠다.
‘오늘은 연숙이 준 차라도 마실까.’
일주일 전, 없는 시간을 쪼개서, 갑자기 유럽으로 1년간 연수를 떠나게 된 연숙을 만났다. 연숙은 땜질로 돌아온 기회가 좋기는 하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해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 허둥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재희의 혈색이 엉망이라며 정겹게 수선을 떠는 걸 잊지 않았다. 잠을 못 자 그렇다는 말에 무어라 궁싯궁싯 수면에 도움을 주는 차가 있다고 설명을 하더니 바쁜 중에 잊지도 않았나 보다. 며칠 전에 회사로 부쳐 주었다.
택배 박스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면서도 재희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뉴욕에서 도통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던 준우, 가까이 지내면서 지켜본 그는 절대적인 수면 양도 부족할 뿐 아니라 그나마 회사 일로 평소보다 더 신경 쓸 거리가 생기면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재희는 찻물을 끓이려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으면서도 준우 생각을 했다. 그는 내일이면 중국으로 긴 출장을 가게 된다. 그러니까 오늘 회사에서 본 모습이 마지막이다. 방에 보고하러 들어갔을 때 한 번, 복도에서 또 한 번,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뒷모습까지 세 번이던가.
서준우가 어떻게 생겼더라.
재희는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핸드폰 벨이 울렸을 때 막 가스레인지 위 찻주전자도 소리를 내었다. 재희는 거실 중간쯤에 서서 열린 침실 문과 찻주전자를 보다가 침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까지 먹먹했다. 마지막 다섯 걸음쯤은 달려갔다는 편이 맞았다.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 잠 깨웠어?
“아니에요.”
삐익 삑, 요란한 소리를 내는 주전자 쪽으로 걸어가면서 답했다. 가스 불을 끄고 뚜껑을 열어 김을 빼내는 동안 핸드폰으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됐어요.”
― 무슨 소리였어?
“찻물 끓였어요.”
― 으응.
“내일 출장이시죠.”
― 응.
“열흘 정도 걸린다 하셨죠.”
― 정확하게는 열하루.
“네.”
다시 말이 없었다. 재희는 내려놓은 카밍(Calming) 허브티 유리병과 벽시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일 출장 가시려면 빨리 주무셔야죠.”
― 응, 그래야지.
“아직 집 아니에요?”
― 아니야.
어디냐고 물으려다가 재희는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외부인을 위한 지상 주차장에 헤드라이트가 켜진 차 한 대가 보였다.
그가 오기를 기다리는 맘을 들킨 걸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은 들어주는 걸까.
― 잘 자라. 시간이 늦었다.
차량 헤드라이트가 더 밝은 빛으로 바뀌었다. 곧 출발할 것만 같았다.
“잠시만요.”
전화를 끊기 전에 겨우 붙잡았다.
― 응?
“혹시 가까운 데 있다면 잠깐 오실래요?”
― …….
차 문이 열리자 내부가 환히 보였다. 준우는 아직 양복 차림이었다. 차 문을 닫기도 전에 그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보이는 걸까.
준우는 잠시 동안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허브티 마시려고 해요. 두 잔은 넉넉하게 나오는데요.”
재희는 돌아서서 싱크대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운 채 카밍 허브티 뚜껑을 열었다. 티포트 거름망 위로 두 스푼 넣고 물을 붓기 전에 준우가 답했다.
― 지금 올라갈게.
붙박이 식탁에 찻잔 두 개를 놓고 마주 앉았다. 재희는 한 손으로는 티포트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뚜껑을 누르고는 조심스레 준우 앞으로 차를 따랐다.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퍼졌다.
“드세요.”
“응.”
준우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무슨 차야?”
“카밍 티래요. 고요하고 평온하고.”
“응.”
“오렌지 향이 나죠? 저는 오렌지 향 좋아하는데. 괜찮으세요?”
“응.”
재희는 카밍 티를 병째 들고 와서 구성 성분을 읽었다.
“레몬밤, 호돈, 페퍼민트, 음……, 오렌지필도 들어 있고. 그래서 오렌지 향이 나나 봐요. 아무튼 숙면에 도움을 주는 차라고 친구가 줬어요. 저도 오늘 처음 마셔 봐요.”
“잠 못 자?”
재희는 눈을 맞추고 살짝 웃었다.
“아뇨, 잘 자요. 그러니까 처음 마셔 보죠. 요즘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오자마자 쓰러져서 잠들어요.”
“그래.”
“중국 일까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사장님 사람 몇 더 뽑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응, 지금 구하는 중이야. 팀장급 한 명, 주니어 레벨 두어 명 정도.”
“……네.”
재희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다행이네요, 말 대신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야.”
“네.”
준우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찻잔을 톡톡 두드리기만 했다.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뒤쪽 위 싱크대 문을 열었다. ‘어디 뒀지.’ 중얼거리며 세 번째 문을 열다가 다시 처음 열었던 칸으로 돌아왔다.
“역시 여기 뒀네요.”
컵 때문에 안으로 밀려 들어가 있었던 티백 스무 개짜리 카밍 티 종이 박스를 팔을 쭉 뻗어서 꺼낸 뒤, 아래 칸을 열어 작은 쇼핑백 하나도 집어냈다. 쇼핑백 속에 박스를 넣고 식탁 위에 둔 티도 병째 집어넣었다.
“이거 드릴게요. 가져가세요.”
“이걸 왜?”
“저번에 보니까 출장 가면 더 못 주무시는 거 같던데…….”
준우가 답 없이 차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이번에도 신경 많이 쓰실 거잖아요. 확실하게 도움이 된대요. 친구가 장담했어요.”
“친구가 선물한 걸 날 주면 어떡해.”
“저는 필요 없어요. 무척 잘 자거든요.”
재희는 생긋 웃었다.
“그래.”
준우가 쇼핑백 끈을 쥐고 일어섰다.
“가시게요?”
“응.”
“출장 잘 다녀오세요.”
“잘 있어.”
“네.”
준우는 돌아서지 않고 테이블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재희는 웃으면서 가볍게 재촉했다.
“가세요.”
“응.”
뺨으로 다가오는 준우 손을 피하지 않았지만 손은 팔만 스치듯 닿고 툭 떨어졌다.
“내가 잘못한 거 많지?”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너 싫어하는데 억지로 잡은 것부터 잘못이지.”
“잡힌 척했던 제가 더 잘못이에요. 아시면서.”
재희는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어떻게 해도 다시 안 올 거야?”
“이제 저는……, 안 가요. 갈 자리가 뭔지, 있기나 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한 팀장만 하겠다고.”
“지금은 팀장이니까요.”
준우가 눈을 감았다가 깊은 숨을 내쉬면서 똑바로 쳐다봤다.
“원하는 건, 정말 그게 전부야?”
“아니라면, 뭘 주실 건데요. 저한테 뭘 주실 수 있어요?”
재희는 피식 웃었다.
“이런 식으로 싸움 걸고 싶지 않아요. 오늘은 화내는 모습 보고 싶지도 않구요.”
“한 번만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마지막, 준우가 힘을 주어 발음했다.
“네.”
“내 손끝 닿는 것이 진저리치게 싫다고, 서준우는 한재희 남자로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형편없고 끔찍하다고.”
재희는 고개를 숙였다. 목이 메어 와 반쯤 남은 차를 단숨에 다 마셔 버려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못 봐 주겠고 서준우의 여자 사양한다고.”
재희는 답 없이 속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그런 독한 말들을 다 퍼부었을까. 혼자 끊어 내면 될 일, 왜 이 사람한테 상처를 그리고 말았을까.
“그 마음 돌이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가?”
차분한 어조, 편안한 표정, 멀쩡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눈동자만 의지를 배신한 모양이다. 형편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재희는 손을 들어 가려 버리고 싶었다.
“재희야.”
준우가 이번에는 안타깝게 불렀지만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긴 싫었다. 아니,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 다시 끄덕이면, 품에 기대어 버리면, 이제 정말 진절머리 낼 사람은 준우였다. 아마 끝없이 그를 바라보고 확인받고 싶어 하고 오르내리는 여자들 하나하나에 손톱을 세울 것이다. 정부도 애인도 아닌 위치를 불평하고 저주하고 분노할 것이며, 더 이상 아무것도 아름답지 않고 아름답다 착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재희야.”
재희는 바닥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갈게. 나오지 마라.”
준우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현관 문손잡이를 비틀려는 것을 본 순간, 재희는 뛰어갔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그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긴 세월, 웃고 빛이 나고 따뜻하고 당당하고 멋있던 서준우를 모조리 뭉개 버리는 지금 그 눈동자가 마지막인 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준우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달려가서 등에 이마를 부딪고 양팔을 벌려 허리를 감았다.
“사장님, 죄송……해요.”
준우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덮어 쥐었다. 여전히 처음 본 그날처럼 따뜻하고 묵직한 손,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재희는 쏟아 내듯 말했다.
“취소할게요. 끔찍하다는 말, 형편없다는 말, 진절머리 나게 싫다는 말, 다 취소할래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단 한순간도 그런 적 없었어요. 제가 사장님한테 거짓말했어요.”
쥐고 있던 손을 쓸어 주더니 준우가 돌아섰다.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숙인 채로 가슴팍에 기댔다.
“끔찍하고……, 형편없는 건 저예요.”
준우가 양팔로 꼭 안아 주면서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렇지 않아.”
“일부러 아프게 할 말만 골라 했어요. 잘못했어요.”
“괜찮아.”
눈을 들자 준우가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한마디는 취소 안 하네.”
“네?”
“재희 네 남자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말.”
재희는 고개를 다시 떨어뜨렸다. 준우가 등을 두드리더니 어깨를 잡아 기대어 있는 몸을 바로 세웠다. 재희 얼굴만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갈게.”
“일 잘하시고 잘 다녀오세요.”
“응, 잘 지내.”
준우는 오른손을 한번 들어 보이고 조금 웃고는 뒤돌아섰다. 문을 열고 닫으면서 눈을 맞추지는 않았다. 갑자기 까마득한 과거가 익숙하게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준우는 아빠처럼, 현관에서 매달리는 재희를 한번 꼭 안아 주고 오랫동안 쳐다보고 돌아섰다. 문을 열고 닫으면서 뚫어져라 따라붙는 재희의 시선을 피해 버리는 것도 같았다.
재희는 멍하니 있다가 급히 베란다로 달려갔다. 종종거리며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오가면서 밖을 살폈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발꿈치까지 들고 내려다봤다. 베란다 창에 붙어서 그가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한 번도 고개를 들어 재희 집 쪽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그리고 그의 차가 유연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안녕히.
재희는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입을 막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고 소리가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져서 창에 머리를 쿵쿵 부딪는 것도 모르고 울었다. 윽윽 새어 나오던 소리가 어느샌가 엉엉 소리로 바뀌고 결국엔 ‘엄마아, 엄마아.’ 부르면서 울었다.
지금이라도 그의 집으로 달려갈까. 한 번만 더 안아 달라고 할까.
재희는 털썩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서준우를 아빠처럼 미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버림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떡하지. 어떻게 살지. 저 사람 안 보고 어떻게 살아가지.
기댄 등이 시리고 엉덩이가 시리도록, 목이 쉬어 버려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밤이 지나 새벽이 될 때까지, 그리고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을 때까지 원이 없도록 울었다. 기억하는 스물몇 해 동안의 눈물을 다 합친 만큼이나…….
그리고 깨달았다. 서준우는 아무리 울어도, 눈물로 강을 이룬다 해도 도저히 흘려 버릴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가슴속 깊이 숨겨 둔 비밀 주머니에 담지는 않을 거라 마음먹었다. 그저 매일매일 고장 난 영사기 돌리듯이 기억하고 떠올리고 되새기다가 또 되새기다가 아프면 아픈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잊히는 그날까지 떠올리고 기억하고 부딪히며 살 거라고 결론지었다.
재희는 손을 뻗어 창틀을 붙잡았다. 감각이 없어진 다리로 겨우 일어섰다. 아래를 보았다. 차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다. 비틀거리며 돌아서서 식탁을 보았다. 그가 앉았던 자리 역시 비었지만, 재희는 억지로 웃었다.
다행이다. 아빠랑은 다르게, 기억할 것이 많은 시간들을 같이했으니까. 그리고 가슴속에 가득 차 있으니까. 가슴속 서준우는 누구도 가져갈 수도 훼손할 수도 없으니까.
*
기이한 정적이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문밖을 조심스레 지나가는 발소리, 랩톱 팬이 돌아가는 소리까지 다 잡아낼 수 있었다. 준우는 줄곧 한 가지 사물만 뚫어지게 보았다. 노란색 서류 봉투는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다. 봉투를 갈라 속을 뒤집으면 이제 정말 현실이 된다. 재희가 떠났다. 영원히 사라졌다.
두 주 전 출장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들었던 소식이 한재희의 부재였다.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기 하루 전 날, 갑자기 모든 걸 정리하고 봉투 하나만 남기고 떠났다고 했다.
‘몸이 안 좋다고 좀 쉰다고 그랬어요. 사장님께는 벌써 말씀드렸다기에, 저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그냥 잠시…….’
이성을 잃고 무슨 이야기냐며 소리 지르는데 혜선이 겁먹은 표정으로 겨우 답했다. 누구도 재희와 제대로 이야기해 본 사람은 없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일로 바쁜 중에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고 아쉬워했다. 재희는 마치 꼭 금방 다시 올 것처럼 ‘몸이 안 좋아서 조금만 쉬다가 올게요.’ 그렇게 말한 것이 전부였다고 하였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텅 빈 재희의 오피스텔을 찾아가고, 해지된 핸드폰에 계속 전화를 걸고, 그리고 막막했다. 형식적으로 받았던 입사 카드 기록에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것만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대로 놓쳐 버릴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올 거라고, 조금만 기다리면, 노력하면 재희가 마음을 돌려 줄 거라고 바보처럼 믿었다.
김영재 검사에게 전화해서 출국 기록을 뒤지고 재희가 한 학기를 다녔던 연세대 경영학부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겨우 가장 친했다는 친구 연락처를 알아냈는데, 유럽에서 연수 중이라는 그녀는 재희 연락처는 자신도 아직 모른다며 마지막 통화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힘들어서 일을 잠시 쉬고 여행이라도 다녀올 거라는 말만 했다는 짤막한 답변만 이메일로 보내왔다.
별로 길게 들쑤시고 다닐 거리도 없었다. 그는 재희에 대해 너무 몰랐고 재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서준우 사장의 결재만 남은 한재희 퇴사 관련 서류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입구를 벌리고 봉투를 뒤집었다. 접혀 있는 사직서 한 장, 그리고 편지 봉투 하나가 더 나왔다. 두 장의 짧은 메시지였다.
사장님,
제가 하던 일은 태진 씨와 최 팀장에게 넘겼습니다.
잘 마무리하리라 믿습니다.
다음 장은 ‘준우 씨’로 시작되는 메시지였다.
준우 씨,
비겁하게 출장 중에 떠나는 걸 용서하세요.
서준우 상사와 같이했던 7년 반,
그리고 제게 남자로 있어 주었던 지난 두 계절이
저에게는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어요.
아직 그 빛이 남아 있을 때 가슴 깊이 간직하고 떠납니다.
준우는 봉투를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나도 모릅니다. 내가 서 사장님이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알아요.”
장현석은 딱딱하게 답했다. 재희 아버지 연락처라도 내놓으라는 말에 현석이 기가 막힌다는 듯 비웃었다.
“나도 잘못했지만 당신은 더해. 그렇게 아는 게 없습니까? 그랬겠죠. 성가시게 엮이지 않으려고 적당한 선에서 만났겠죠.”
양해를 구하더니 현석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서빙된 음료는 둘 다 손도 대지 않았다.
“전에 그랬죠. 가족 없는 애가 유일하게 피붙이처럼 의지하는 대상이었다고. 당신 재수 없고 싫고 붙어 있는 거 무척 찝찝했지만 그만두라 강요하지 못한 이유는, 재희한테 서 사장은 언제나 가족 대신이었으니까. 내가 걔한테 가족을 만들어 주기 전까지 그마저 뺏을 수가 없었어요.”
돌아오는 길에 결국 차를 갓길에 세우고 준우는 핸들에 머리를 기울였다. 현석이 담배를 비벼 끄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갈퀴처럼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몰랐다고는 못 하시겠죠. 남들에게 말하면 무슨 헛소리냐 하겠지만, 나랑 당신은 아는 이야기 아니에요? 걔는 친오빠처럼, 그리고 여섯 살 때 자기 버리고 간 아빠 대신으로 무조건적으로 당신을 따랐다고! 나를 남자로 사랑했는지 그 깊이가 얼만지 모르겠지만, 항상 불쾌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교 불가였어. 서준우 사장은 남자가 아니라 절대적이었으니까. 가족이 그리워서 새끼 새처럼 따르는 애한테……,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여자가 궁했습니까?’
인터뷰 장소에서 열리는 문소리에 놀라 일어서던 여자애는 서늘한 손과 차분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라기보다 예쁜 인형 같은 소녀였다. 일본 이야기를 하면서 어두워지던 표정이 떠오른다. 언제나 옅은 베일처럼 재희에게 드리워 있던 건 외로움과 슬픔이었다. 늘 한 발 뒤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고 신뢰의 눈을 반짝이며 ‘고맙습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사장님, 괜찮으세요?’ 재희가 웃고 재희가 울고 팔을 벌려 안아 주고 다독이고……. 8년의 세월이 파도가 되어 덮치듯이 와르르 몰려왔다.
‘결혼은, 못 해.’
눈물이 무겁게 달린 눈으로 괜찮다고 그랬다.
‘내가 사장님 얼마나 좋아하는데…….’
혀를 깨물어 죽어도,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져도 시원치 않았다. 준우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액자처럼 보이는 창틀 속으로 잎을 떨어뜨린 가로수가 보였다. 하늘은 푸른 가을빛을 많이 잃었다. 겨울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준우는 가끔, 언젠가 재희가 서 있던 로비층 구석 자리에 홀로 서 있곤 했다. 그 봄날, 재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표정을 잘 살필 수 없는 멀리서도 확연히 알아챌 만큼 슬퍼 보였다. 그날, 모르는 척 냉정하게 돌아서지 말고 다가가서 손을 잡아 줄걸 그랬다. 가족처럼 따뜻하게 잡아 줄걸 그랬다.
재희가 그날 본 건 새순이 돋는 나뭇가지였나.
준우가 처음에 섰을 때는 진초록의 나무였는데 노란색으로 바뀌고 이제 가지만 남았다. 준우는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사무실은 일종의 형벌장 같았다. 이미 채워진 재희의 자리, 새로 들어온 다른 남자 직원의 뒷모습을 볼 때면 매번 놀라고 매번 송곳에라도 찔린 듯 깊은 통증을 느꼈다.
재희가 했던 ENP 코드로 불렸던 투자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옆에서 느껴지던 숨소리, 재희의 향기, 고집을 부리고 만들었던 백업 슬라이드, 사장님,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준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모든 것을 견디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재희가 포기하라던 YK 일을 하면서 죄책감으로 심장이 쪼이고, 사무실에서 재희의 흔적을 만나고, 그 흔적과 부딪치면서 계속 고통으로 몸서리치는 일이었다. 재희의 연락처를 알 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국 전체 MBA 학생 명단을 하나씩 뒤졌다.
미국 시민권자라 일본으로 출국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입국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김영재 검사의 말에 희망을 걸었다. 그가 연락을 취할 때마다 귀가 먹먹하도록 부풀었던 기대가 매번 풍선 터지듯 펑하고 터졌다. 오늘의 단순한 저녁 약속도 쭈그러지고 찢어진 기대만 확인했다. 영재는 날개옷 숨기라니까 그걸 안 했다고 타박을 주다가 결국 작정하고 숨은 여자를 어디서 찾느냐고 완전히 떠난 사람 포기하라는 실질적인 충고로 마무리했다.
‘이 자식아, 널린 게 그 여자보다 예쁜 여자들이야. 정신 차려!’
준우는 참지 못하고 영재에게 화를 냈다.
*
아마도 그날은 늦은 봄밤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준우는 만조의 바다처럼 감정이 일렁였다. 너무 밝아 모든 것을 표백해 버리는 햇살처럼 재희는 그를 빠르게 점령해 가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듯한 햇살 속에서 그는 종종 어찌할 바를 몰라 벌거벗은 아이처럼 당황스러워했다. 기쁨과 환희, 불안과 고약함이 번갈아 넘실거렸다. 준우는 그런 자신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정을 시험하는 아이처럼 기어이 싫다는 짓을 하고서, 확인받으려 들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하나. 사랑하나, 사랑……. 어쩌면, 조금.
“잠시만, 잠시만요.”
문을 열고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준우는 껴안고 재희는 밀어냈다. 아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억지로 허리를 붙잡고 손목을 움켜쥐었다.
“싫어요, 여기선.”
“오늘만.”
재희가 눈을 감았다.
“예뻐…….”
준우가 재희 눈두덩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속눈썹이 젖은 까닭은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었다. 자그마한 조명등 외에 집 안에 불은 밝히지 않았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도심 불빛 아래 유달리 젖은 속눈썹만 선명해 보였다. 재희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벗어던진 준우의 와이셔츠를 집어다 팔을 꿰어 넣으면서 재희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 마실래?”
준우가 따라 일어서며 물었지만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커다란 통유리창 앞에 서서 재희는 물끄러미 밖을 내려다보았다.
“오렌지 강물 같아.”
차량 불빛이 꼬리를 물며 도로를 덮고 있었다. 창으로 재희의 얼굴이 파르스름하게 비쳤다. 품이 큰 와이셔츠로 몸을 반쯤 덮어서 그런지 재희는 더 작아 보였다. 준우는 등 뒤에서 팔을 둘러 어깨를 감쌌다. 재희 귓바퀴에 코끝을 문지르며 말했다.
“어딜 보는 거야?”
간지러운 듯 재희가 목을 움츠리며 빠져나갔다.
“어딜.”
준우가 허리를 붙잡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만하세요.”
재희가 손을 두드리며 목을 외로 비틀었다.
“그만?”
짓궂게 귓등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아아, 그만이요. 그만 그만.”
곱게 그만 둘리가, 준우는 집요하게 움직였다.
“간지러워. 간지러워요.”
재희가 숨을 할딱거렸다.
“약속하면 그만할게.”
“무슨?”
“다른 데 보지 마.”
재희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왜 그러세요?”
여전히 젖은 속눈썹이었다. 준우는 재희를 양팔로 덜렁 들어 올렸다.
“어머!”
재희가 목을 끌어안았다.
“내려놔요!”
“나랑 있을 땐, 다른 데 보지 마.”
“못됐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슴에 꼭 붙어 있었다.
“……나는요.”
“응.”
“나는…….”
“응.”
“가끔 슬퍼져요.”
“왜?”
“다 타 버려 텅 빈 것처럼. 불꽃놀이가 끝난 것처럼.”
“무슨 말이야?”
“그러게요. 너무 좋아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봐요.”
“거짓말.”
재희가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
“아니요……, 정말. 불꽃놀이 같던걸요. 나는 정말이지, 눈이 멀어 버렸나 싶었어요.”
*
‘예뻐, 예뻐, 예뻐…….’
‘그렇게 속삭이면 진심 같아요. 착각하거든요. 나 굉장히 예쁜 공주라도 된 건가.’
‘너는 눈이 멀도록 예뻐.’
‘What a sweet lie (달콤한 거짓말).’
‘The bitter truth (쓴 진실).’
‘시인인지 미처 몰랐네요.’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뭐든 못 될까.’
‘있죠……. 가끔 혼자서 거울을 오랫동안 봐요. 머릴 빗다가, 세수를 하고서, 샤워하다가……. 내 어디를 예뻐하는 걸까, 어디를 좋아하는 걸까 계속 생각해요.’
‘답은 찾았어?’
‘아니요, 그다지 예쁘지 않은걸요. 어느 한 부분도 그저 평범에서 조금 나을까 하는 정도.’
‘지독하게 인색하군.’
‘그러는 사람도 예쁘다 해 주는 데 8년이 걸렸잖아요. 그러니까 거짓말이에요. 달콤한 거짓말.’
‘아니, 쓰디쓴 진실.’
‘왜, 쓰다는 거죠?’
‘…….’
‘왜……?’
준우는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Bitter Truth, 가혹한 현실.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목덜미가 선득하도록 차가운 밤이지만 속옷 바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간다. 얼음물을 들이켜고 가슴을 쥐어뜯듯 주먹으로 문질렀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주먹으로 다문 입술을 누르고 속살이 나달거리도록 깨물어 본다.
왜…….
눈이 멀어 버리지 않았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만 있었다면, 욕심 부리지 않을 수만 있었다면, 아니, 혀를 깨물고서라도 참았더라면, 나는 너를 잃지 않았을까.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언젠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제발……, 그만해요. 이제.’
*
준우는 술에 취해 풀어진 걸음걸이로 집에 들어서고, 차례로 불을 모두 켜면서 안으로 움직였다. 오디오를 켜고 음악 소리가 잘 들리도록 침실 문과 드레스 룸 문 모두 열어젖히고 양복을 벗었다. 밝은 불 아래 보니 양복에 얼룩이 졌다. 양주인지 폭탄주인지 알 수 없지만 세탁을 맡겨야 할 것 같다. 주머니를 차례로 비웠다. 지갑과 손수건을 꺼내고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는데 지폐에 조그만 종잇조각 하나가 묻어서 떨어졌다. 몸을 굽혀 집어 들었다. 가늘고 길게 접힌 종이의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Let your heart make your decisions. ― it does not get as confused as your head.
Open up your heart ― it can always be closed again.
마음이 가는 대로 결정하라, 머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니.
마음을 열어라, 언제든 다시 닫을 수 있을 것이니.
‘미래는 저기 어딘가 있어요.’
재희가 숨을 할딱거리면서 말했다. 포춘 쿠키에서 나왔던 메시지, 미래를 결정짓는 것 같아 두렵다면서 숨겨 버린 메시지였다.
머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니,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을 열어라. 언제든 다시 닫을 수 있을 것이니…….
재희가 남긴 메시지인 것만 같다.
‘되게 맛있어요. 아아, 좋아라.’
혀가 물들도록 오렌지색 막대 사탕을 녹여 먹으며 서 있던 재희가 떠올랐다.
여기쯤이었지.
준우는 환영을 더듬듯이 손을 뻗었다.
‘싫어요. 나 건드리지 마.’
재희가 사탕을 물고 도망쳤다.
‘어린이 손님만 주나 보던데 딸 갖다 준다 그랬어.’
까르르 아이처럼 웃는 재희가 보였다.
드레스 룸 문턱을 넘는데 양팔에 안긴 재희가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약, 먹고 있었어요.’
침대까지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나는……, 사랑해요.’
재희가 팔을 꽉 움켜쥐었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재희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던가…….
준우는 풀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은 채로 바닥에 이마가 닿을 듯이 상체가 꺾였다. 주먹을 쥐어 닿는 대로 내리쳤다. 악물린 잇새로 동물 같은 울음소리가 끝없이 새어 나왔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제발 한 번만 보여 줘.
아무것도 안 바라.
재희야,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
“조금만 기다려. 사장님 아직 퇴근 안 하셔서……. 특별한 말씀 없으시면 그냥 가도 되기는 하는데 요즘은 좀…….”
혜선은 다 챙긴 서류를 다시 한 번 더 챙기면서 말했다.
“어, 괜찮아. 천천히 해. 내일 비행도 없고 오늘은 늦게까지도 괜찮아.”
경희가 아예 리셉션 데스크 맞은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잡지를 뒤적였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건데 기다리게 하니까 영 그러네. 우리 여름 들기 전에 보고 처음 아냐?”
“아마도. 여름이랑 가을, 비행 스케줄이 죽음이었어. 내가 생전 안 하던 감기 몸살도 세 번이나 앓았잖아.”
혜선은 시계를 확인했다 6시 30분이 지났는데 사장님에게 퇴근해도 되는지 슬쩍 전화를 넣어 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요즘 사장의 심기가 정말 엉망이다. 일은 최상으로 잘 풀려 나가는데 다들 이유를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그는 가라앉아 있었다. 원래도 무섭고 냉정해 보였지만 간간이 농담도 하곤 했는데, 이제 여간해선 잘 웃지도 않았다.
가을 타시나. 가을도 끝났는데.
혜선이 달력을 뒤적이는데 사장이 막 리셉션 데스크 앞을 지나갔다. 놀라 일어서서 인사하려는데 그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방금 나간 사람 사장님이지? 이제 그럼 퇴근해도 되는 거?”
경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 사장님이야.”
혜선은 코트를 껴입다가 경희를 돌아봤다.
“너, 근데 우리 사장님 어떻게 알아?”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 앉아 혜선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여름쯤에 뉴욕행 일등석 타셨다고?”
“어, 그때 명단 보고 알았지. 일등석은 이름이랑 어느 회사 누군지 직위가 있으면 같이 알아야 하거든. 아하, 저 사람이 혜선이가 무섭고 인간미 없다고 하던 사장님이구나, 그랬어. 하긴 오늘 사무실에서 보니 찬바람이 일기는 하더라.”
“원래 그 정도는 아니었어. 무섭기는 해도 늘 화난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경희가 샐러드 위에 얹힌 치킨 한 조각을 소스에 찍어 입에 넣었다.
“안 그래도 너 만나면 사장님 무섭다는 네 말 정정해 주려고 했는데 너무 바쁘니까 그걸 다 잊어버렸다.”
“응?”
“너네 사장님 되게 부드러워. 여자한테는 완전히 솜사탕이던데?”
“여자?”
“어, 애인이랑 같이 타셨거든. 그 사람 잠드니까 신발도 갈아 신겨 주고, 잠 깨울까 봐 점심도 거르고 어찌나 부드럽게 살피는지…….”
혜선은 파스타를 꿀꺽 삼키고는 포크를 탁 내렸다.
“여자? 뉴욕행 일등석, 그거 출장이었는데? 원래 프레스티지만 타시거든. 근데 표가 없어서 일등석 구해 드려서 내가 기억하는데…….”
“출장에는 애인 못 데려 가냐? 놀라긴. 설마 너, 혹시 사장님을……?”
경희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혜선은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퍼뜩 뭔가가……, 전혀 말도 안 되지만 그렇지만 연결이 될 것도 같았다.
“여자분은 누구인지 알아?”
“글쎄. 직위는 없었고 이름을 그때나 알았지 지금은 뭐. 으음, 예쁘고 분위기 있는 여자던데. 피부 하얗고 머리랑 눈동자는 갈색이고……, 지적인 편?”
“이름은 전혀 기억 안 나?”
경희가 갸웃하면서 음료를 스트로로 한 모금 마셨다. 혜선의 기억으로는 분명 한 팀장이 그때 긴 휴가를 냈었다. 혜선은 경희의 입만 쳐다보았다.
“몰라. 사장님 이름도 잊어버렸는데 기억하겠니.”
“혹시, 한재희?”
경희가 샐러드를 한입 먹다가 반가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거 같아. 이름 끝 자가 나랑 같았거든. 누구? 아는 사람이야?”
혜선은 후, 한숨을 쉬면서 파스타만 뒤적였다.
한 팀장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했을 때 이성을 잃은 듯이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린 사장이 당황스러웠다. 싱글거리던 사장의 분위기가 바뀐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사장 방에서 나오면서 어색하게 웃던 한 팀장의 모습도 떠오른다. 꼭 금방 올 것처럼 회사를 그만두고는 일절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핸드폰 번호도 바꿔 버린 한재희 팀장이 가끔 야속하게 느껴졌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고 왠지 한 팀장이 안됐다 싶었다. 혜선은 두 사람이 사귀다가 헤어졌다면 틀림없이 여자 많고 냉정한 사장 때문일 거라 단정했다.
“아는 사람 같기는 한데, 근데 우리 사장님이 진짜 잘해 줘? 상상이 안 되는데.”
“엄청. 가식이나 요란 떠는 건 아니고 굉장히 아껴 준다는 느낌? 그랬는데.”
“쳇.”
혜선은 콜라를 쭉 들이켰다. 마지막으로 본 재희는 진짜 아파 보였다. 다들 몸이 안 좋다는 말에 두 번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혜선은 다음 날 이른 아침, 투덜거리면서 사무실로 들어섰다. 괜히 두 사람 때문에 쓸데없이 고민하느라 잠을 설쳤다. 아침 일찍 운동이나 할까 했는데 헬스장이 정기 휴일임을 문 앞까지 가서야 기억했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사무실은 썰렁하도록 추웠다.
‘오래 다니다 보니 이렇게 일찍 출근하는 날도 있네.’
혜선은 코트를 입은 채로 기지개를 켰다. 졸음기를 없애려 따뜻한 차나 마실까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다가 복도 중간에 서서 하마터면 헉,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른 아침빛만 겨우 희미하게 비추는 불도 안 켜진 복도, 복도보다 더 컴컴한 방에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자 등받이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는 듯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혜선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도로 제자리로 갔다가 아예 사무실을 나왔다.
혜선은 결국 커피 전문점에 앉아서 돈을 내고 뜨거운 차를 마셔야 했다. 후후 불어 가면서 한 잔을 다 마시도록 방에 혼자 서 있던 남자의 뒷모습을 생각했다. 그 방은 예전 한재희 팀장이 쓰던 방이었다.
불 꺼진 방에서 사장은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아욱, 나도 몰라, 몰라.”
혜선은 메모지 한 장을 노려보다가 옆으로 휙 치워 버리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연예가 가십을 훑고 70퍼센트 세일이 붙은 의류 사이트 광고 링크를 클릭하다가 창을 다 닫아 버렸다. 퇴근 시간을 다 넘길 때까지 뾰족한 답 없이 고민을 거듭한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까지 겪어 본 바로는 서준우 사장은 대체로 너그러운 편이지만 사생활에 관한 침범은 무척이나 싫어했다.
괜히 무서운 사장 눈 밖에 날지도 몰라.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아프고 힘들어 보이던 한 팀장의 마지막 모습이 아무래도 맘에 걸렸다. 오늘 아침 그 방에 서 있던 사장의 뒷모습도. 결국 혜선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사장실 문을 노크했다. 랩톱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장이 들어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에 다가서자 사장이 무슨 일인지 쳐다보는데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퇴근하셔도 됩니다.”
“저, 그게 아니라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게…….”
“앉으실래요?”
사장이 의자를 끌어당기려는 걸 손을 저어 거절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장을 보면서 혜선은 손에 꾹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한참 여기저기를 뒤지면서 부산을 떤 뒤에 겨우 지난봄에 메모했던 걸 찾아냈다. 사장이 펴 보더니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눈썹을 슬쩍 올렸다.
‘아, 무서워.’
혜선은 침을 꿀꺽 삼키고 준비한 말을 쉬지 않고 했다.
“한재희 팀장 아버지 회사 이름이랑 전화번호예요. 잘 모르겠지만, 동경에 있는 무역상사 같은데 거기 회장님이 한 팀장 아버지세요. 예전에 한 번 회사로 전화 와서 기록해 뒀던 걸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사장이 아무 반응이 없자,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저기, 사장님이 예전에 한 팀장 인사 기록에 다른 연락처 찾으셨던 게 기억나서. 그래서 저는 혹시 지금이라도 필요하신가, 갑자기 생각났어요. 그래서…….”
사장은 메모된 종이를 쥔 채 무표정하게 혜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필요 없으시면 그냥 버리시면 되구요.”
혜선의 이마에 땀이 송송 배어 나왔다.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사장이 불렀다.
“혜선 씨.”
“네?”
“고맙습니다.”
“아, 네.”
다시 인사를 꾸벅하는데 사장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저 내일부터 며칠 동안 자리 비웁니다.”
“네, 제가 사장님 스케줄이랑 정리해서…….”
“좀 오래 걸릴지도 모릅니다. 부탁해요.”
“그럼 다음 주 초에 잡힌 약속들은 어떻게…….”
어물어물 물으려다가 뚝 멈췄다. 놀랍게도 서준우 사장의 목소리도 눈도 물기에 젖은 것 같았다. 혜선은 당장 동경행 비행기 표를 예매해 드릴까요, 튀어나오려는 말을 가까스로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