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bee, Maybee Not RAW novel - Chapter 8
7. 그래도, 그대를 좇아
적지 않게 긴장되는 자리였다. 준우는 관자가 주재료인 두 번째 애피타이저를 천천히 삼켰다. 아직 이 자리의 목적에 대한 본론이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입에 맞으시나?”
“네, 훌륭합니다.”
“다행이에요. 메뉴를 내가 정한 셈이 되어서 말입니다.”
준우는 정현태 회장을 향해 웃어 보였다. YK통신과의 저녁 약속에 사장 외에 회장도 나온다는 통보는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전해졌다.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정 회장은 겉으로는 상당히 유해 보이는 타입이지만 속을 알기가 그리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주문한 코스 요리는 꽤 긴 시간의 저녁 식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와인을 추천받으면서 회장은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묻더니 하나는 식사 후에 하자며 기분 좋게 웃었다.
회장은 달변가라는 평에 걸맞도록 다양한 화제로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메인 요리를 다 먹었을 즘, 준우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통신 시장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국내 증시 전망이나 세계 증시 동향에서부터 어린 시절 어떤 종류의 개를 키웠는지 그 개가 얼마나 영리하고 충성심이 강했는지 하는 이야기까지 했다. 회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엔 공주만 둘이라서, 서 사장네처럼 사내 녀석들만 있으면 큰 개도 여러 마리 키우고 싶었는데 말이야.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그러니까 큰애가 다섯 살 때던가, 마당에서 키우던 셰퍼드가 줄을 끊고 달려오는 걸 보고 놀라서 넘어졌다고 하더라고. 자는 걸 보니 무릎이 깨지고 얼굴이 바닥에 긁혔는데, 하하, 눈이 확 돌아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군. 그 다음 날로 바로 없앴어. 정말 정이 많이 들었던 놈인데. 그래도 우리 딸애 생각하니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 정말 곱게 공주처럼 키웠거든.”
셰퍼드에게 놀랐다는 큰딸이 지금 스탠포드 MBA 과정 유학 중일 것이다. 정 회장이 엄청나게 아낀다는 그 딸이 YK 후계자라는 것이 업계의 정평이었다. 준우는 머릿속으로 정 회장의 가족 관계를 떠올려 보다가 공주라는 말에 싱긋 웃었다. 준우의 공주님, 재희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적당히 기회를 봐서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장은 식후 디저트와 와인이 서빙된 이후 긴 탐색을 마치고 드디어 이야기를 꺼냈다.
“서준우 사장, 잠깐 이야기했듯이 사실은 몇 달 전부터 그룹 차원에서 해외 통신 시장 진출을 준비했어요. 특히 미주 쪽으로.”
“네, 현재 동남아 지역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계시지요.”
“아니, 그 정도 규모를 생각하지 않아.”
준우의 말에 회장은 손을 휘휘 저었다.
“사실 서 사장도 알다시피 최근 10년간 우리 통신 기술은 엄청나게 빨리 성장했어요. 국내 통신 시장 장악력도 곤란한 지경으로 높아졌고.”
사장이 웃으며 말을 거들었다.
“그룹 차원에서도 새로운 통신 기술과 서비스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 붓고 있는 중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최신 첨단 기술과 서비스를 선도하기 위해 투자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데, 아직은 캐파(capacity, 수용력)에 여유가 있지만 급속도로 증가하는 데이터다 뭐다 해서 수익성이 자꾸 발목을 잡아요. 게다가 데이터 정액제가 당연하게 되면서 말이에요.”
“향후 10년, 빠르면 5년 내에 통신과 전자 기술의 융합 현상은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당연히 투자도 지속적으로 계속 늘어나야겠지요.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선도로 이미 시장 성숙기에 들어 수익률 정체를 보이는 국내시장만을 보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준우가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는 물꼬를 텄다.
“그래요. 서 사장, 그래서 그룹 차원에서 진행되는 글로벌 경영에 통신사업도 이번에는 꼭 해외시장에서 궤도에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것은 사실 긴박한 심정이야.”
회장이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지금은 아직 초기 단계라 구체적인 시장 진출 방식도 정해진 바가 없네. 인수든 제휴나 공동 투자를 하는 조인트 벤처(joint venture, 합작회사) 형태이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상태라네.”
“네, 옵션은 많을수록 유리하죠.”
“우리 회사 사람들이 리서치를 했는데 몇 군데 관심 끄는 곳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미국에서는 글로브 퀘이크(Globe Quake)라고 유선전화도 하지만 MVNO(가상 사설망 이동 통신)가 주인 작은 통신 업체인데…….”
준우는 앞으로 약간 상체를 기울였다.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구체적인 안건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상장된 회사도 아니라서 접근이 용이하지가 않아요. 미국 IT 버블이 꺼지면서 그 회사의 모회사로 있던 글로브 그룹(Globe Group)이 회사에서 손을 뗐는데, 현재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주주는 카일라 펀드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카일라가 보유하고 있는 회사라면 탐내시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준우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카일라 펀드는 미국 정계와 단단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프라이빗 펀드(Private Fund, 사모펀드)로 대부분의 그런 종류의 펀드가 하듯 막대한 자금으로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는 크고 작은 회사들의 주식을 사들였다가 적당한 선에서 팔아 수 배, 수십 배의 이득을 취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때로는 소유 구조에 작은 허점이 있는 상장 기업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적대적 M&A 전략을 구사하여 대규모로 주식을 매입하여 인수를 추진하거나 매입한 주식을 레버리지로 엄청난 뒷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들에게 뒷거래는 이미 M&A 소문으로 폭등해 버린 주식을 장에 내다 팔아 시세 차익을 얻어 엄청난 이익을 실현한 뒤에 덤으로 오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규모의 차이는 크지만 SJ금융 역시 인수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도 많아 근본적으로는 카일라 펀드의 이익 실현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카일라 펀드에서 그쪽 실무를 담당하는 파트너에 대해 알아봤는데……, 예전에 서준우 사장이랑 일을 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대니얼 스필라트라고 아십니까?”
“대니얼 스필라트라.”
준우는 반사적으로 보기 좋은 웃음을 입가에 올렸다. 속마음과는 다른 웃음이었다. 홍콩에서 근무할 당시 작은 M&A 건으로 대니얼 스필라트와 지독한 협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쉽게 보이는 거래라고 생각했었으나 완벽한 오산이었다. 그 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두 달 동안 준우는 혹독할 정도로 시달렸다. 주로 그의 페이스에 놀아나다가 마지막에 겨우 마지노선을 사수했을 정도였다.
그는 맹수처럼 먹잇감을 물면 절대 고이 놓지 않는 사내였다. 그것이 한 줌도 안 되는 토끼 한 마리든 살집이 잘 오른 순록이든. 얼음처럼 차게 빛나는 푸른 눈과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던 대화 방식을 떠올리며 준우는 양손을 맞물리도록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
“알았습니다.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그 외에도 몇 군데 다른 회사들이 있지만, 우선 그 회사를 타진해 봐야겠다는 게 우리 입장이니 미안하지만 좀 서둘러 줄 수 있겠나?”
“네,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일 내로 움직이겠습니다.”
예정하고 있는 미국 출장은 한 달 정도 후였지만 이 일은 놓칠 수 없는 건이었다. YK 일이라면 SJ를 봐서도 상당히 중요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스필라트와의 협상은 기대되었다. 준우는 현재 SJ 펀드의 일부를 운용하고 있는 동부 기반 헤지 펀드와의 미팅을 당겨 다음 주 내로 미국 출장길에 올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에는 와인 한 병이 더 비워졌다. 예상보다 훨씬 더 늦은 시간까지 회장과 같이 있게 되었다. 준우는 택시 속에서 재희에게 지금 들어간다고 전화를 할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잠들었을지도 몰랐다. 겨우 짬을 내서 전화했을 때 재희가 그랬다.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TV 보고 놀다가 졸리면 잘게요. 안 그래도 졸고 있던 중이었어요.’
집에서 기다리게 하는 건 싫다. 기다리다가 잠들어 버린 여자를 보고 싶지 않다. 집에서 기다리는 여자는, 준우가 닫아 버린 기억의 마개를 잔인하게 비틀어 댄다.
준우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조용히 신발을 벗고 안쪽 현관문도 조심스레 열었다. 스탠드 불만 밝혀진 거실 공간 소파를 살폈다. 팔걸이에 엎드리듯 반쯤 누워 재희가 잠들어 있었다. 준우는 천천히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희야.”
등도 쓸어 보았다.
“재희야.”
슬리브리스 소매 아래 드러난 팔을 가만가만 만졌다.
“재희야, 들어가서 자자.”
곤한 숨소리도 바뀌지 않았다.
지연은 항상 그랬다. 꼭 침대에서 자라고 했지만 언제나 거실 소파나 서재, 혹은 식탁에서 엎드린 채 초라하게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준우가 들어오면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깨어서는 뭐라 말하기 전에 일어서서 먼저 침실로 걸어 들어가 버리거나 붙잡는 손길을 쳐 내 버리곤 했다. 차라리 ‘지금이 몇 시야? 오늘은 어제만큼 늦는다고 하지 않았잖아. 아니, 새벽이니 오늘이 아니지. 전화도 못 해?’라고 소리를 지르는 날이 그중 나은 날이었다. 아마 우울증이 시작되면서부터였나 보다. 지연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연은 결국…….
준우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희의 옆쪽으로 앉아 웅크린 등만 바라봤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다시 일어섰다. 아무래도 안아서 침실까지 가야 할 것 같았다. 깨울까 봐 조심스레 팔을 넣었다. 어지간히 깊이 잠든 모양이다. 꼼짝도 안 했다. 준우가 천천히 몸을 세우려 할 때였다. 갑자기 재희가 팔을 올려 목을 감았다. 보드랍고 촉촉한 뺨을 비비면서 까르르 웃었다.
“아우, 술 냄새 나요.”
“안 잤어?”
재희는 웃음을 다 지우지 않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약간 자다가 좀 전에 깨서 TV나 볼까 하는데 문소리가 나더라구요.”
“왜 자는 척해?”
딱딱하게 물으면서 소파에 내려놓자 재희가 눈을 조금 높이 뜨고 올려다보았다. 여름밤이라 그런지 좀 더웠다. 준우는 넥타이를 풀어 버리고 재킷까지 벗었다.
“그러게요. 왜 자는 척했을까.”
재희가 일어서더니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디스펜서에서 투두둑 얼음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물 따르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재희가 앞으로 와서 물컵을 내밀었다. 준우는 말없이 얼음물을 받아 마셨다. 빈 컵을 두려고 싱크대로 가는데 재희가 따라왔다. 얼음을 개수대에 버리고 컵을 세척기에 집어넣는 것까지 지켜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었다.
“가르쳐 주세요.”
“응?”
“갑자기 몸 둘 곳을 모르겠어요. 남의 공간을 침범하는 무례한 사람이 된 거 같아서.”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준우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소파로 가서 앉아 있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혼자 침실로 걸어 들어가 드러누울 수도 없구요. 왠지 당신이 벗어 놓은 재킷도 건드리면 안 될 거 같아요.”
준우는 팔을 뻗어 재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그렇다고 집에 갈 수도 없고…….”
재희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준우는 재희의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끌어안았다.
“머리가 좀 복잡해.”
품에서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냥 가라고 할걸 그랬어.”
이번에는 재희가 답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나 봐요.”
침실 쪽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재희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답하지 않았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가운을 걸치고 나올 때까지 재희는 침실 중간에 서 있었다.
“안 좋은 일이에요?”
“아니.”
“그럼 왜…….”
생각을 읽으려는 듯 가만히 쳐다보는 재희를 침대에 앉혔다.
“씻고 올게.”
“네.”
올려다보는 얼굴을 양손으로 한번 감싸 쥐어 보고 준우는 돌아섰다.
준우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 냉수를 한 컵 더 마셨다.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은 있다. 아무리 이제 괜찮다 해도 괜찮지 않은 상처가 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다가 억지로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시간을 들여 샤워를 마치고 침실 문을 열기 전, 불안하고 무참한 감정이 드러나던 재희 눈동자가 떠올랐다.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준우는 문득 재희가 가 버리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못되게 굴었으니 가 버렸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비는 수밖에.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대로 자세조차 바꾸지 않고 앉아 있는 재희 모습이 보였다. 안도의 숨이 터졌지만 재희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문이 열려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준우는 옆에 걸터앉아 재희 어깨를 감쌌다. 재희가 몸을 뺐지만 다시 붙잡았다. 억지로 끌어 기대게 했다. 재희는 어깨를 틀어 보다가 맘대로 되지 않자 손을 들어 밀어내기 시작했다.
“놔줘? 갈래?”
그제야 재희가 시선을 맞추었다. 준우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재희의 뺨과 턱을 만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리는 걸 턱을 단단히 잡아 고정시켰다.
“갈 거야?”
재희는 말이 없었다. 준우는 어깨를 천천히 쓸었다.
“……간다고 하면요.”
“못 가게 잡아야지.”
“갈래요.”
재희가 일어섰다. 준우가 손을 붙잡자 모질게 털어 낸다. 준우는 다시 손을 붙잡았다.
“나 집에 갈래요.”
“못 가.”
붙잡은 손에 힘을 더하자 재희가 파드득 어깨를 떨며 손을 빼내려 하였다. 힘으로는 상대가 될 리 없다. 놔요, 놔! 꼴 보기 싫어. 맘대로 되지 않자 발을 구른다. 싫다니까! 준우가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재희는 푹 쏟아지듯 가슴팍으로 무너진다.
“바보야, 붙잡히기 전에 몰래 갔어야지.”
“따지려고요.”
재희가 가슴을 밀치며 발딱 일어섰다.
“그래, 그래 봐.”
준우가 툭툭 옆자리를 두드리자 입술을 꾹 깨물고선 앉았다.
“당신 생각보다 더, 굉장히 독선적이에요. 알아요?”
“응. 반성 중이야.”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무참하게 만들어요! 하긴, 서준우 씨는 내 기분이 어떤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죠? 원하는 대로, 정한 대로만 있어 줘야, 서준우 씨가 하고 싶은 것만 해야 맘에 들죠?”
감정을 터뜨리는 재희를 아프게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재희야.”
하아, 숨을 쉬더니 재희가 작게 답했다.
“……네.”
“차라리 화를 내. 그게 더 낫다.”
무슨 소리인지 쳐다보는 재희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관자놀이 부분에 이마를 대었다가 떼어 냈다.
“제발……, 언제라도 일어서서 가 버릴 것처럼 그러지 마.”
어깨를 감싸 안고 뺨과 귀를 쓸자 재희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가느다란 숨소리와 피부를 간질이는 숨결만 느끼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술 냄새 많이 나?”
“조금요.”
“미안해. 가서 한 번 더 씻고 올까?”
“관둬요. 그런다고 없어지나요.”
좀 부루퉁한 답에 마음이 갑자기 놓였다.
“그럼 어떡하지? 키스도 못 하겠네.”
재희가 고개를 들어 곁눈으로 쳐다봤다.
“꼭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얼마 전에도…….”
무슨 말인가 쳐다보다가 의미를 알 것 같아 피식 웃자 재희는 볼이 발개져서 입을 꼭 다물었다.
“그래서 싫었어?”
어깨를 감쌌던 팔을 허리로 옮기며 물었다.
“싫다면 키스는 안 할게.”
팔에 힘을 주자 재희의 상체가 휘어지면서 몸에 붙었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약간 젖혀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손가락으로 기막히게 예쁜 입술 선을 천천히 따라 그렸다. 손끝에 뜨거운 숨이 닿는다. 조금 더 벌어지는 입술을 두고 턱 선을 따라 귓불로 그리고 귓바퀴로 움직였다. 팔목을 붙잡으려 올리는 손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꽉 눌렀다.
젖혀진 목선과 아름다운 쇄골을 따라 그리고 더 아래로, 오르내리는 가슴에 도착하는 동안 재희가 숨을 몰아쉬었다. 목덜미 맥이 가늘게 팔딱거렸다. 다시 느리게 방향을 틀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턱을 받쳐 올리고 엄지로 아랫입술을 건드리자 재희가 말했다.
“제가 영화 대사라도 하길 원하세요?”
“응?”
“그대 손이 하는 걸 입술이 하게 하라.”
준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맞췄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재희, 잠들었어?”
“아니요.”
팔을 벌리자 재희가 품속으로 들어왔다.
“정현태 회장님이 나오셨더라.”
“YK 회장님이 직접?”
“응, YK가 미국 쪽 통신사 하나를 인수하고 싶어 해.”
“그걸 SJ에 맡겨요?”
재희가 의문스런 눈을 떴다.
“그쪽 담당자랑 내가 조금 아는 사이.”
“아, 사전 협상이에요?”
“응, 잘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지금은 전혀 모르겠어.”
“잘되면 굉장히 좋을 텐데. 그쵸?”
“그래서 말야, 미국 출장을 좀 당길까 해. 약속 잡히는 대로 다음 주라도.”
재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빨리? 홍콩 출장 다녀오신 지 두 주밖에 안 됐는데.”
“그러게. 저번에도 죽을 맛이었는데.”
“네?”
“너 보고 싶어서.”
재희가 웃으면서 몸을 뺐다. 등을 보이는 걸 바짝 안아 들었다.
“이번 출장은 한 팀장도 가는 걸로 할까?”
“말도 안 돼요. 미국 출장은 늘 혼자 가셨잖아요.”
“방법이 없을까…….”
준우는 재희의 어깨에 잘게 입을 맞췄다. 실은 출장이 아니라 재희와 여행을 가고 싶었다. 거치적거리는 시선들을 따돌리고 둘이서 하는 여행. 하지만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다. 출장을 따라가라니, 고집쟁이 한재희가 들어줄 리 만무했다.
“같이 가고 싶다.”
“…….”
어깨와 목덜미가 이어지는 부분에 깊이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가?”
귓불을 깨물자 재희가 움칫거렸다.
“휴가 주세요.”
“응?”
“여름휴가 주세요, 서준우 사장님.”
준우는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를 짚어 재희를 바로 눕게 하고 얼굴을 마주했다.
“진심이야?”
재희가 새치름하게 고개를 틀었다. 준우는 재희 등 뒤로 팔을 넣어 꽉 끌어안았다.
*
“아니요, 저는 여기가 더 좋아요.”
재희는 창가에 앉을 거냐는 준우의 물음에 복도 쪽 좌석으로 서며 답했다.
“그런데 너무 호강하네요. 아무래도 무시무시한 티켓 값은 드려야겠어요.”
널찍한 좌석에 앉기 전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 재희가 준우에게 속삭였다. 만석인 이코노미와 프레스티지 좌석에 비해 반 정도만 자리가 채워진 일등석은 말 그대로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준우가 피식 웃었다.
“한 팀장님 좋은 대로 하십시오. 덕분에 저도 호강합니다.”
“무슨 덕분이요?”
“원래 프레스티지 타거든. 혜선 씨가 하나 남은 프레스티지석을 예약했다는데 퍼스트로 바꾸라고 했어.”
“아무래도 뉴욕은 지금 관광 시즌이니까요. 혜선 씨가 좌석 구하느라 애썼을 텐데…….”
재희는 갑자기 잡힌 준우의 출장 일정으로 무척 바빠 보였던 혜선을 떠올렸다. 혜선은 재희가 긴 휴가를 내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입사하고 처음인 거 같다며 잘했다, 좀 쉬어 가며 해야 한다며 마치 자신이 휴가를 가는 것처럼 좋아했다.
‘일본 가시겠네요? 아버지한테. 어디 무역상사 회장님이라 그랬죠? 교포신가 봐요. 발음에 일본어 억양이 굉장히…….’
혜선의 말에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모양이다. 미안하고 무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휴가 때문에 몇 가지 일도 더해졌는데, 혜선에게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 해?”
“아니요, 아무것도.”
준우가 손을 잡아 왔다.
“가끔 그런 표정하고 있으면 불안해.”
“어떤 표정이었죠?”
“표현력이 부족해서 설명이 잘 안 되는데 암튼 어둡고 슬퍼 보이고 그래.”
“그럴 리가요. 지금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요.”
조금 더 뭐라 말하려다가 옆에 다가선 스튜어디스와 눈이 마주쳤다. 재희는 슬쩍 잡힌 손을 빼내었다. 스튜어디스가 눈높이를 맞추고 웰컴 음료를 권하더니 소개를 했다. 상냥한 미소만큼 고운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경희라고 합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준우와 재희는 스튜어디스가 가져온 주스를 마시고 경제지 한 권씩을 받았다. 비행기가 천천히 이륙하자 재희는 한두 장 넘기던 경제지를 덮고 눈을 감았다.
“좀 피곤해 보이네. 일 몰아서 하고 오느라 그렇지?”
준우가 조심스레 살피면서 물었다.
“아, 아니에요. 어제 잠을 안 자서 그래요.”
“왜?”
“비행기에서 자려고요.”
준우가 웃으면서 눈짓을 하기에 쳐다보니 이경희라는 스튜어디스가 옆에 서 있었다. 재희만 보르도산 와인 한 잔을 부탁했다.
“비행기에서 자려고 잠을 안 자?”
“네, 비행기 멀미가 심해요. 촌스럽죠?”
“촌스럽긴. 그런데 힘들어서 어떡하나.”
“그냥 밥 같은 거 안 먹고 영화나 책 안 보고 계속 자면 괜찮아요.”
“점심도 안 먹어?”
“치즈랑 케이크 같은 거만 나중에 먹을게요. 깨우지 마세요.”
흰색 테이블클로스 위에 화이트 와인 한 잔과 간단한 스낵을 놓은 뒤 스튜어디스가 자리를 뜨자, 곧 전자 기기를 사용해도 좋다는 멘트가 나왔다. 랩톱을 여는 준우를 보면서 재희는 와인 한 잔을 천천히 다 마셨다.
“계속 일하셔야 하죠?”
“응, 그럴까 하는데.”
“자려니까 미안해요.”
“천만에.”
“비행기 안에서는 아무것도 못 해요. 도착하면 도와드릴게요.”
준우가 손을 뻗어 재희 머리를 쓰다듬었다.
“휴가 즐기시죠. 무슨 일을.”
와인 한 잔에 벌써 노곤해진 느낌이었다. 좌석에 몸을 묻은 채로 재희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준우를 보았다.
인터뷰에서 처음 본 남자, 이제 저 얼굴을 본 지 꼬박 여덟 해가 다 되어 가는구나.
재희는 눈을 감았다. 하나씩 그려 보았다.
이마, 콧날, 입술, 턱, 목과 어깨, 그리고 가슴…….
준우는 선명한 선으로 떠올랐다가 흐리게 흩어지다가 했다. 눈썹은, 눈은 어떻더라, 조금 더 짙고 깊고 차갑고, 아니, 가끔은 너무 뜨겁고……. 지우고 또 그리기를 반복하다가 재희는 눈을 떴다.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 때문인지 준우는 그려 본 것보다 훨씬 더 눈부시게 화려했다.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칼도 작은 숫자를 보느라 조금 찌푸려진 미간과 꾹 다문 입술 선까지도. 재희는 제대로 기억하려 가슴에 꼭꼭 압인처럼 눌러 담았다.
“눈부시지?”
준우가 창 덮개를 내리면서 물었다.
“눈부셔요.”
“진즉 내려 줄걸 그랬다.”
준우가 베개를 목 뒤에 받쳐 주고 귓바퀴를 슬쩍 쓰다듬었다.
“담요 덮어 줄까?”
“싫어요. 아직 더워요.”
“응.”
여전히 쳐다보고 있자 준우가 미소 지었다. 고개를 기울여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재워 줄까?”
“아뇨.”
재희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머릿결에 귓바퀴에 가만가만 기분 좋은 손길이 느껴졌다. 준우의 체온이 바로 옆에서 느껴지고 그의 체취가 가슴까지 들어왔다. 편안하고, 그리고 행복하다. 아기처럼 조심스레 포대기에 싸인 기분이다.
“준우 씨.”
“응.”
재희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내밀었다. 따뜻하고 묵직한 손을 느끼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재희야, 담요 덮자. 온도가 좀 내려갔는데?”
“…….”
답이 없어서 쳐다보니 이미 재희는 깊이 잠든 후였다. 준우는 담요를 펼쳐 덮어 주고는 조심스레 재희 좌석의 등받이를 뒤로 더 젖혀지도록 만들었다. 다리 받침도 올리고 보니 재희는 아직 구두를 신은 채였다. 아래로 내려가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구두를 벗기고 비치된 실내용 슬리퍼를 신겼다. 일어서서 에어컨 바람 방향을 조절한 뒤에 준우는 자리에 앉아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비행이 시작되고 두 시간이 지났다. 점심을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타임이었다. 경희는 서빙을 시작하기 전, 갤리(galley, 배나 항공기 안의 주방)에 붙여 둔 승객 좌석과 명단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명단의 중간에 있는 이름 하나를 다시 보았다.
서준우, SJ파이낸스 사장. 분명 혜선이네 회사 사장이 맞지 싶다. 경희는 익숙한 동작으로 식사 준비를 하면서도 기억을 더듬어 혜선에게 들었던 사장의 이미지와 그 승객을 연결시켜 보았다.
‘우리 사장님? 아니야, 되게 젊어. 마흔도 안 됐어. 보기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나?’
‘우와, 그래?’
‘게다가 잘생겼지, 싱글이지. 모르긴 해도 여자들이 줄줄 따를걸?’
‘좋겠다. 사장님이 멋져서.’
혜선은 입을 비죽거리면서 답했다.
‘멋진 건 좋다 치고, 매너도 훌륭하시고 근데, 얼마나 무서운데. 막 화를 내거나 그런 건 아닌데 진짜 편하지 않아. 일은 기계처럼 오차 없이 하는데 사람이 좀 감정도 없고 메말랐어. 인간미도 없고. 암튼 처음 석 달은 잔뜩 긴장해서 얼마나 움츠리고 있었던지.’
서준우 사장과 동행한 사람은 하얀 피부에 가지런한 눈썹, 지적인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매력적이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살포시 떠올리는 미소가 사랑스런 여자였다. 줄줄 따른다는 여자 중 하나인지는 몰라도 분명 사랑하는 사이인 듯했다. 혜선에게 그 무섭다는 사장이 잠든 여자 신발을 갈아 신겨 주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을 해 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머 어머 어머!’를 연발하며 입을 딱 벌리지 않을까. 생각만으로도 배시시 웃음이 났다.
식사에 앞서 뜨거운 물수건을 차례로 제공하는 중이었다. 경희는 집게로 물수건 하나를 집어 서준우 사장에게 내밀었다.
“뜨겁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서 사장님.”
“감사합니다.”
준우가 랩톱을 덮지 않고 물수건만 받았다. 동행한 여자는 아직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여자와 식사 서빙을 위해 음식을 담은 트레이를 번갈아 보았다. 전채부터 긴 설명과 함께 앞좌석 승객부터 서빙되는 중이었다.
“식사는, 저는 괜찮습니다. 나중에 간단하게 하죠. 지금은 음료만 주세요.”
“한재희 선생님 건 어떻게 할까요?”
“깨우지 말라 그래서…….”
서 사장이 후후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 사람 일어나면 치즈랑 디저트, 음……, 케이크 있나요?”
“무스케이크 있습니다.”
“네, 그것만 부탁드릴게요.”
“식사도 그때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경희는 가볍게 목례하고 지나치다가 남자가 여자의 담요를 여며 주고 베개를 바로잡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굉장히 부드러운 미소까지 띠고 잠든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흘러내린 머리칼을 걷어 주고 이내 일거리로 돌아갔다.
‘뭐, 감정도 없고 메말랐어? 인간미가 없다고?’
혜선은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눈치가 둔하고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 여전하다 싶다. 만나면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넌 네가 모시는 상사, 기계처럼 일에 오차가 없는 거 하나만 제대로 파악한 거 같다고.
경희는 잠든 애인 깨울까 봐 식사를 거절한 남자를 위해 치즈와 간단한 샌드위치, 음료를 챙겼다. 남자에게 건네면서 덧붙였다.
“한재희 선생님 치즈는 따로 있어요.”
남자는 싱긋 웃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
맨해튼은 예전에도 지금도 언제나 어디서나 번잡하다. 한가한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는 거리조차 주변 풍경과 냄새, 온도와 공기만으로도 번잡하고 산만했다. 맨해튼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두 가지로 분류될 것만 같았다. 자신이 도착해야 할 목적지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 외의 다른 모든 것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 재희는 이번에는 후자에 속하기로 했다.
준우가 아침을 서둘러 먹고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면 재희는 느긋하게 준비하고 호텔방을 나섰다. 첫 사흘은 꼬박 뮤지엄만 다녔다. 어떤 그림은 말을 걸고 어떤 그림은 생각하게 하며 어떤 그림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게 만들었다. 재희는 한창 그림에 빠졌었던 10대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작품을 마주하고 있자면 발목부터 목덜미, 그리고 정수리까지 넘실넘실 감정의 잔물결이 밀려 올라오곤 했다.
원하고 좋아하는 만큼 직접 그리고 만드는 재능은 없었다. 딱히 예술가적 감각이나 훌륭한 안목을 가진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취미로 보고 감상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재희는 아트는 가지 못한, 그리고 가지 못할 길로 판단하고 어느 순간 깨끗하게 접었다. 조용히 앉아 냉정하고 치밀하게 머리로만 분석하는 금융이 편안하고 안전했다.
하지만 그림을 완전히 인생에서 밀어내지는 않았다. 재희는 금융 공부를 하면서도 부지런히 아트 관련 과목을 수강했었다. 학부생이 들을 수 없는 강의는 교수님을 찾아가 간곡하게 말씀드리고 청강을 하기도 했다. 안전한 길에 서서 아쉬운 길을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재희는 믿었다.
나흘째 되는 날이다. 재희는 자신 외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는 부류에 속하여 뮤지엄 대신 맨해튼 거리를 발 닿는 대로 다녀 보기로 했다. 6월이 끝나 가는 맨해튼은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햇빛과 보기 좋은 하늘 속에 있었다.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다리가 아프면 커피 전문점이나 테라스가 있는 샌드위치집으로 들어갔다.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하면서도 열 가지쯤은 되는 옵션을 말하는 뉴요커들 뒤에 줄을 서서 흑판에 써 놓은 메뉴와 어설픈 그림, 가게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증명하는 흑백사진들이 걸린 벽면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맨해튼 인포메이션이 있는 소책자를 뒤적거리고 진한 커피를 손에 들고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색과 번호를 확인하고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뻔했다. 저만큼 가고 있는 어떤 남자를 보느라 그랬다.
점심은 먹었겠지.
준우 생각을 했다. 실은 하늘을 보면서도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가면서도 인포메이션 책자를 펴고 커피를 홀짝이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얼굴, 손, 가슴, 감촉, 체온, 냄새, 웃음, 목소리……. 쉬지 않고 생각하느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재희는 끝없이 속삭이고 기대고 말을 걸었고, 그는 옆에서 웃고 답하고 잡아 주고 안아 주었다.
“오늘도 뮤지엄에서 하루 종일 있었어?”
준우가 뉴욕의 바람 냄새를 묻히고 들어섰다. 벌린 품속으로 들어가서 바람 냄새, 심장 소리를 느꼈다.
“아뇨, 오늘은 두 시간 정도만. 여기저기 구경했어요.”
재희는 붙였던 몸을 떼면서 대답했다.
“점심은 뭐 먹었어?”
“샌드위치 먹었어요.”
“저녁은?”
“샐러드랑 핫도그.”
“너무 부실하다.”
준우가 재킷을 옷장에 걸다가 못마땅한 내색을 했다.
“뉴욕 와서 줄곧 넘치도록 잘 먹었어요.”
“낮에는 그렇다 해도 저녁은 같이 해야 되는데……. 내일도 저녁 약속이 있어.”
“괜찮아요. 오늘도 혼자 나름대로 좋았어요.”
“어딜 갔었는데 그렇게 좋았어?”
지갑과 시계를 데스크에 놓더니 준우가 목덜미를 가리는 재희의 머리칼을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소호 거리도 다니고……. 아, 그리고 벼룩시장에 갔었어요.”
간질거리던 느낌이 걷히고 시원하게 파진 스퀘어 네크라인 위로 재희의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추면서 준우가 물었다.
“어디?”
“6th 애비뉴 39번가 사이. 원래 아넥스 플리마켓이었던 곳이요.”
준우의 입술이 벌어지고 혀끝이 목덜미를 스치듯이 움직였다. 재희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39번가? 25번가 정도 아니었나?”
이번에는 답하지 못하고 손에 힘만 더했다.
“25번가가 아니었다고?”
준우가 느릿한 물음과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가빠지는 숨결을 놀리는 중이었다. 재희가 그의 손을 잡는 동시에 준우는 얇은 원피스 드레스 위로 솟은 가슴을 깨물었다.
“후……, 준우 씨.”
재희는 한 걸음 물러서며 그의 얼굴을 떼어 냈다.
“거기는 이제 콘도가 들어섰어요. 많이 없어지고.”
“아, 그렇군.”
중요한 사실이라도 파악했다는 듯 진지하게 답하지만 시선은 목덜미와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들썩들썩 오르내리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동그랗고 작은 가슴 위에 떨어졌다. 나른하게 자극하면서 그가 물었다.
“그래, 재미있었어?”
“그냥, 낡은 느낌의 물건들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요. 다들 각자 사연도 있는 것 같고.”
깊어지는 손길에도 태연하게 답하자 준우가 오호, 하듯이 눈썹을 올렸다. 생긋 웃어 주려는데 몸이 꽉 잡히나 싶더니 데스크 위로 덜렁 앉혀졌다.
“벼룩시장 말고 쇼핑은 안 해?”
“안 그래도 내일 5번가 가 보려고요. 세일 기간에 5번가를 모르는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뭐 살 거야? 같이 가서 사 주면 좋은데, 도저히 쇼핑할 시간을 못 내겠어.”
준우가 상체를 기울여 데스크 위에 올려 둔 지갑을 끌어당겼다. 툭 소리를 내며 지갑 위에 있던 시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갑을 열어 카드 한 장을 집는 것을 보며 재희는 입가에 떠올린 웃음을 순식간에 굳혔다.
“지금 뭐 하세요? 아는 척 마세요. 혼자 실컷 살 거예요.”
준우 역시 굳은 표정으로 응시하였다. 재희는 맞부딪친 시선을 먼저 거둬 버렸다.
“물어볼 게 있어.”
준우가 지갑을 놓고 말했다. 고개를 약간 뒤로 젖혀서 그런지 내려다보는 시선이 더 오만해 보였다.
“전에도 선물 사 온다 그래서 화를 냈었나. 사 주는 거 왜 싫어하지?”
“싫으니까요.”
재희는 데스크에서 내려섰다.
“왜냐고 물었어.”
“서준우 씨한테 물건 받는 거 싫어.”
“같은 말 하게 하지 마. 왜냐고 물었어.”
준우에게 휘어 잡힌 팔이 아팠다.
“몰라서 물어요?”
“모르니까 물어. 왜 그렇게 파르르 화를 내냐고.”
재희는 잡힌 팔을 털어 냈다.
“그런 취급, 기분 나빠요.”
“그런 취급?”
“그래요. 당신 주변 그렇고 그런 여자들한테 하는 듯한 그런 취급!”
“한재희!”
노기를 삭이지 못한 목소리가 정수리를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희도 입을 다물고 소리가 떨어진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고개 들어.”
턱을 쥐어 올리면서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시선은 피한 채로 손을 걷어 내려 하는데 준우가 턱을 쥔 손에 압력을 더했다.
“아!”
반사적으로 쳐다보자 손을 떼면서 느리게 말했다.
“됐어. 나 쳐다보면서 할 말 더 해 봐.”
“할 말 없어요.”
준우가 눈에는 여전히 화를 감추지 못한 채로 기가 막힌다는 웃음을 흘렸다.
“한재희, 네가 꼬인 거야, 아니면 내가 한심한 놈인 거야?”
“제가 꼬였겠죠.”
재희는 준우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얼굴을 보이기 싫었다. 비뚤어지고 꼬인 게 맞았다. 엉망이다. 숨겨 둔 여자처럼 출장까지 몰래 따라와 몸을 섞으면서 무슨 어울리지 않는 자존심이며 자격지심이란 말인가.
“꼬인 거 알면…….”
준우가 재희를 거칠게 돌려세워 숨기고 싶은 얼굴을 붙잡았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딴 소리 하지 마.”
준우의 검은 눈동자에 차마 더 분출하지 못한 감정이 어른댔다.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를 서늘한 강바람이 지나갔다. 발코니와 연결되는 문이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창밖으로 푸르고 검은 뉴욕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준우가 깊이 숨을 내쉬더니 데스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네가 멸시하는 내 주변의 그렇고 그런 여자, 그런 관계, 정확하게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모르는 채로 몇 가지만 말할게. 선물은 원하면 거의 다 갖게 했어. 바쁘니까, 쇼핑 따라다니면서 노닥거릴 시간 없으니까 카드 주로 줬어. 연애하는 사이도 그랬고 결혼할 사람한테도. 그래, 와이프한테도 그랬어. 아무도 너처럼 사람 우스운 꼴로 만든 여자는 없었어. 물건이 필요했던 여자는 물건 받아 좋아했고, 사 주고 싶은 마음을 받고 싶은 여자는 고맙게 받아 줬어.”
“준우 씨…….”
준우가 쳐다보는데 입이 붙은 듯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 한재희 너는 언제나 모든 것에 예외야. 이제 예상도 못 하겠어. 분명한 건 너 같은 여자, 이렇게 골고루 한심한 짓 해 가며 붙여 놓은 적 없어. 가장 큰 예외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다. 차가운 눈이 무서웠다.
“미안해요.”
재희는 겨우 발을 떼서 한 걸음 다가섰다.
“잘못했어요.”
“뭐가?”
“……바보처럼 굴고 함부로 말했어요.”
준우는 팔을 뻗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함부로 말한 건 맞는데 바보처럼 군 건 아니야. 꼬인 것도 아니고. 내가 그리 섬세하지 못해서 제대로 배려를 못 해 줘.”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바람에 날린 재희의 머리를 쓸어 넘기는 준우의 손길은 무심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했다.
“그만하자. 난 이제 씻고 일을 좀 해야겠는데.”
준우는 그대로 재희를 비켜 지나쳐서 욕실로 들어갔다.
준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재희는 유리 너머 짙어진 밤 가운데 서 있었다. 강바람에 오렌지색 원피스가 팔락거렸다.
바람이 찰 텐데…….
준우는 ‘위험한 예외’를 잠시 쳐다보다가 데스크에 앉았다. 랩톱을 열고 하루에도 수십 통씩 쌓이는 이메일을 처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오늘 미팅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토대로 투자 기회에 대한 결정도 내려야 하고 내일 잡힌 미팅 준비도 마쳐야 했다. 무엇보다 그다음 날로 잡힌 통신사 인수 사전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고 싶었다. 욕심이 나는 만큼 부담이 커지고 대니얼 스필라트, 그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신경 줄이 끊어지도록 팽팽하게 당겨진다. 뒷머리가 말라 버린 가죽처럼 뻣뻣하게 굳어 감각이 없어졌다. 준우는 고개를 좌우로 틀어 보다가 눈을 감고 뒤로 젖혔다.
열이 오른 머리에 서늘하고 보드라운 물체가 놓였다. 준우는 눈을 번쩍 떴다. 열을 재어 보는 것처럼 이마를 덮었던 손을 떼면서 재희가 미간과 눈썹이 만나는 부분을 점을 찍듯 눌렀다. 준우는 재희의 손을 잡았다.
“일이 많죠?”
“먼저 자라.”
재희는 끄덕이고 돌아섰다. 빳빳한 시트가 걷히는 소리, 직물이 마찰하는 소리가 서걱서걱거렸다. 재희가 침대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준우는 12시를 훨씬 넘기고 랩톱을 덮었다. 침대로 다가서서 등을 보이게 웅크리고 잠든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시트를 걷으니 오렌지색 부드러운 질감의 면 원피스가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하얀 허벅지가 스탠드 불빛 아래 도드라져 보였다. 옆에 반쯤 누워서 말린 원피스를 내려 주려 끝단을 잡았다가 준우는 충동적으로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멈추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재희가 뒤척이기도 전에 원피스를 끌어 올려 완전히 드러나게 만들고 몸을 붙였다.
“으응. 준우……, 씨?”
벌어지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양팔을 벌려 등이 침대에 닿도록 손을 잡았다.
“싫으면…….”
양손으로 깍지를 단단히 껴서 바닥으로 눌렀다.
“……싫다고 그래.”
재희가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깜박였다. 길게 감았다가 뜬 눈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물었다.
“그러면……, 멈출 건가요?”
준우는 붉어진 입술과 흐려진 갈색 눈동자를 보았다.
“……아니.”
뉴욕의 푸른 여름밤 귀퉁이가 오렌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으음.”
뒤척이자 재희가 나긋나긋한 손길로 머리를 만져 주며 속삭였다.
“더 주무세요.”
“몇 시?”
“5시 조금 안 됐어요.”
재우듯이 팔을 쓰다듬자 눈이 절로 감겼다. 준우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왜 일어났어? 더 자야지.”
“그냥……. 눈이 떠졌어요.”
팔을 벌렸지만 아무것도 품으로 들어오지 않아 눈을 떴다. 재희는 잠기운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언제 깼어?”
“시계 확인한 건 4시 6분.”
“계속 이러고 깨어 있었던 거야?”
끄덕거리는 턱을 만지다가 준우는 재희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깨서 뭐 했는데?”
“당신 자는 거 봤어요.”
“뭐하러.”
“심심해서요.”
“후후.”
웃음이 터져서 들썩거리는 동안 준우도 잠이 달아나 버렸다.
“자는 거 보니 안 심심했어?”
“네.”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손을 피하려는 듯 재희가 엎드려 누웠다. 어깨를 잡고 몸을 다시 돌려 버릴까 만지작거리는데 재희가 고개만 옆으로 내밀고 말했다.
“준우 씨……, 잠든 얼굴이 좋아서 몇 시간이라도 볼 수 있겠어요.”
드러난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뭐가 다른가?”
“달라요. 많이.”
재희는 등에 닿는 것도 싫은지 움찔거렸지만, 눈이 마주치자 찌푸려지려던 얼굴을 펴고 웃었다.
“눈 뜨고 있을 때는 준우 씨 좀 무섭거든요.”
“내가 무서워?”
재희가 불분명하게 웃었다.
“어제 저녁에 화내서 그래?”
“어제는 제가 잘못했죠. 그냥 어제뿐만이 아니라……, 거의 항상 긴장하고 있어요.”
“전에는 같이 일하기 시작하고 처음에만 무서웠다 하지 않았던가?”
준우는 재희의 표정을 제대로 읽으려 흘러내린 머리칼을 걷어 귀 뒤로 넘겼다. 재희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랬었죠. 서준우 사장님과는.”
“사장이라……. 그러면 남자로는 무섭고?”
“조금요.”
“곤란하네. 왜 그럴까?”
“모르세요? 한 팀장한테는 너그럽고 여자 한재희한테는 엄격해요.”
맙소사, 뭐 그런 엉망진창이 다 있나.
준우는 영어로 몇 마디 뱉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야 오해가 풀릴까.”
부드러운 머리칼에 손을 넣어 살살 만져 주자 재희가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아. 어느 쪽이든 엄격이라니…….”
“그런 거짓말, 하지 마세요.”
또렷하지는 않지만 분명 ‘거짓말’이라고 재희가 발음한 순간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재희의 머리칼에 감춰져 있던 다섯 손가락까지. 재희가 반짝 눈을 뜨더니 미소 지었다. 준우도 따라서 웃자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감정 감추시는 거죠?”
머리를 툭툭 헝클이며 웃어넘기려는데 재희가 팔을 짚으며 상체를 비스듬히 세웠다. 원피스 어깨 끈 한쪽이 흘러내리면서 가슴이 반쯤 드러났다.
“조금 전, 엎드려 버렸을 때도 그랬죠?”
재희가 옷을 바로잡지 않고 바짝 다가왔다. 준우의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비비고 한 팔로 끌어안은 뒤 말했다.
“여자 한재희한테는 화가 자주 나나 봐요. 바다같이 깊은 사람인데 내가 그렇게 만드는 거죠? 미안해요.”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자주 화가 나?”
“자주는 아니라 해도 가끔 몹시 화난 사람처럼,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다그치는 것 같아요. 그럴 땐 정말 낯설어요. 모르는 사람 같아. 사장님 7년 넘게 봤지만, 누가 기가 막혀 입이 딱 벌어질 실수를 하거나 정말 엎어 버리도록 화가 날 상황도 그냥 잠시 쳐다보고 웃는 걸로 넘기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너무 박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재희의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희 앞으로 마주 앉았다. 얼굴을 들게 해서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거칠게 구니?”
“아니요.”
“그럼 부담스러워?”
재희가 빤히 보더니 입술을 꼭 맞물리게 다물었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부담……스러워?”
고개를 두 번 저었다. 이번에는 준우가 그 말을 돌려주고 싶었다.
‘거짓말……하는구나.’
낯설게 군다는 말이 맞았다. 오랜 세월 익숙해진 안정감을 순식간에 부수고 일방적으로 시작한 관계다. 바닥으로 떨어진 상황을 이용한다 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억지로 밀어붙였다. 치사하게 긴 세월 쌓았던 호의와 신뢰를 이용해 코너로 몰아 서준우 여자 하라고 그랬다. 처음부터 싫다는 여자를 기어코 붙잡았다. 재희가 이럴 때면, 무언가를 깊숙이 밀어 넣고 불안한 눈을 하거나 외려 억지로 행복한 척 웃을 때, 혹은 서준우를 외면하거나 빠져나가려 한다고 느껴질 때면 손끝까지 저릿해질 만큼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도 제 손가락을 물어뜯고 싶도록 강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재희가 손을 들어 준우의 귓바퀴를 문질렀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신경 쓸 거 없어요.”
“거짓말.”
“어떻든 별건 아니에요. 주무세요.”
말을 마치고 재희가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준우는 어깨를 움켜잡았다.
“왜……?”
“돌아눕지 마. 싫어.”
“네.”
“말하다가 그만두지 마. 싫어.”
“괜히 말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한 일 아닌데, 성가신 일 적당히 처리하듯 미안하다는 말로 그저 넘기지도 마, 싫다고!”
“준우 씨.”
재희가 눈매를 찡그리더니 몸을 반쯤 일으켰다.
“……지금 화내고 있네요.”
“너는 나를 부담스러워하고 있고.”
재희가 준우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했잖아요.”
준우는 상체를 펴고 꼿꼿하게 앉은 채로 재희를 떼어 냈다. 얼굴을 감싸는 손도 걷어 내었다.
“이러지 마요. 무섭고 무안하고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서준우 이렇게 성질 잘 내는 사람인지 몰랐어. 정말.”
“성질부린 적 없어.”
“거짓말. 화나면 얼마나 무섭게 구는지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적어도……, 자주는 아니야.”
재희가 갑자기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화내고 있으면서.”
재희가 얼굴을 바짝 붙이며 다가왔다.
“화나면 어디가 제일 티 나는 줄 알아요? 여기.”
검지를 들어 준우의 인중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평소에도 뚜렷한 편인가 싶지만, 화나면 더. 그리고 여기 코끝도 빳빳해지고, 그리고…….”
재희가 손끝으로 콧등을 쓰다듬은 뒤 얼굴을 기울여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입술이 달라져요.”
그대로 있자니, 재희가 입술을 붙인 채로 마치 입에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나는……, 이제 당신 눈은, 잘 읽지 못해요.”
왜냐고 물으려는 순간 자그마한 혀가 입술을 벌리며 들어왔다. 잡으려는 순간 도망치듯 나가며, 그러나 여전히 입술만은 붙인 채 귓속말하듯 말한다.
“당신 눈을 보면…….”
“…….”
“……온통 하나만 알아보려 애쓰거든요.”
아랫입술을 깨물듯 머금었다 놓으면서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말했다.
“……지금은, 아직은, 그러면 언제까지, 내 남자인가…….”
“너는 대체 왜…….”
준우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답이 필요 없다는 듯, 혹은 더 이상 말다툼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재희가 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재희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오랫동안 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 해가 커튼 사이를 뚫고 침대 발치까지 가늘게 뻗었다. 재희는 발갛게 물든 얼굴이다.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는 동안 품으면서 물었다.
“지금도 무서웠어?”
묻는 목소리만큼이나 가라앉은 음성으로 재희가 답했다.
“아니요.”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부끄러운데 말이야…….”
“네?”
준우는 흐트러진 재희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면서 마저 말을 이었다.
“……너한테 화가 난다기보다 불안하다는 게 맞아. 그럴 때면 확인하고 싶어서 다그치게 돼. 무섭게 느낀 적도 있을 거야. 몇 번은 그러라고 작정했던 거 같기도 하고.”
“그 몇 번이 언제인지는 알아요?”
“대충. 네가 우리 관계가 실수라고 말했던 날도 그랬고, 너 장 검사 만나는 거 본 날도……. 또 언제 있었던가. 홍콩 출장 전에도 그랬나? 또……, 후우, 그래도 맹세해. 그리 많지는 않아. 정말이야.”
재희가 삐져나오는 웃음을 깨물었다.
“준우 씨.”
“응.”
“막내라 그랬죠?”
“응.”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답했다.
“LA에 산다는 형들은 몇 살 더 많아요?”
“여덟 살, 다섯 살.”
재희가 팔을 벌려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들이켰다.
“부러운 가정이었을 거 같아요. 아버지가 굉장한 애처가였다고 하셨죠? 어머니는 대장부 같은 분이시고요. 준우 씨는 똑똑하고 귀여운 막내아들이었겠네요.”
“그렇지 않아. 삼형제라 항상 시끄러웠어. 먹을 것 하나 두고도 전쟁이고, 과일이든 요리든 산처럼 쌓아 두고 먹었어. 게다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이 초대하는지, 1년 내내 북적북적. 사생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지. 막내 취급은 평생 달갑지 않고. 어머니랑 형들은 대학 때부터 떨어져 있었더니 요즘도 가끔 사람을 애 취급하고…….”
“당신을 애 취급해요?”
“응, 어제도 번갈아 가며 전화 와서는 틴에이저한테나 해야 할 잔소리를 쏟아 놓더라고.”
재희가 작게 웃더니 땀이 식어 서늘해지는 등을 천천히 쓸어 주면서 말했다.
“자는 얼굴이요, 참 다르다고 했잖아요.”
“응?”
“아이 같더라구요. 꿈꾸는지 슬쩍 웃기도 하고 머리라도 만지면 귀찮은지 찌푸리기도 하고……. 이제 보니 눈 뜨고 있을 때도 당신, 아이 같은 데가 있었군요.”
얼굴을 들자 뺨을 손으로 감싸듯이 쥐고 빙그레 웃었다.
“안 무서워할게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불안한 마음도 안 생기도록 노력할게요. 서툴러도 봐줘요.”
“봐줄 사람은 내가 아닌 거 같은데.”
재희가 후훗 작은 소리로 웃었다.
“아시나 봐요.”
“응.”
“봐 달라는 말은 안 하시네요.”
“염치가 없어서. 보통 서툰 게 아니거든.”
재희가 팔을 둘러 안더니 등을 톡톡 두드렸다.
“……더 자요. 재워 줄게요.”
재희의 가슴에 코를 박은 채 눈을 감았다. 등을 쓸어 주는 느낌이 점점 무뎌지면서 포근하고 달콤한 향이 콧속에, 입속에 가득 찼다. 머리 위로 가느다랗게 내려오던 더운 숨결도 규칙적이고 안락하게 바뀌었다.
“재희야.”
“……네.”
졸음 가득한 대답을 들으면서 준우는 푹 잠에 빠져 버렸다.
“준우 씨…….”
깊은 숨소리만 들렸다. 재희는 눈을 뜨고 가슴에 묻은 얼굴을 살폈다. 편안하게 잠든 아이 같았다.
“나쁜 사람,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들어.”
등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쓰다듬고 귓바퀴를 만졌다.
당신도 불안해하는군요. 당신도 나도 아는 일, 끝이 보이는 관계. 그런 거죠……. 이러다가 언젠가는 당신 쪽이든 내 쪽이든 손들고 돌아서겠죠…….
준우가 잠결에 더 깊이 파고들며 허리를 감았다. 재희는 숱이 많은 머리칼에 다섯 손가락을 묻었다.
“차라리 당신, 잘 안 보였으면 좋겠다. 몰랐으면 좋겠다. 그냥 안아 주면 황홀하고, 다정하게 구는 거 즐기면서 영원히 내 남자다 착각하면 좋겠다…….”
재희는 긴 숨을 나누어 쉬었다.
“아니면 내가 당신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용기 있고 뻔뻔하고 그리고 잘났으면 좋겠어. 당신이 나한테 하듯이 내 남자 되라고, 아니면 이제 끝이라고.”
재희는 팔을 뻗어 준우를 꼭 끌어안았다. 정수리에 뺨을 대고 한참을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한테 나는 없으면 불편한 직원, 잃기엔 아쉬운 여자이겠지만 나한테 당신은 너무 크네. 안으로 들여놓을 수도, 보낼 수도 없어…….”
재희는 입술을 깨물어 떨어지려는 눈물을 삼켰다. 아직은 울 시간이 아니었다.
*
[마감은 4월에 끝났고 내년 클래스 브로슈어는 아직 안 나왔어요. 만약 필요하다면 올해 브로슈어는 거기 꽂혀 있어요.]여자는 자신이 준비한 말은 전부 했다는 듯 벽에 붙어 있는 브로슈어 꽂이를 턱을 들어 가리켰다.
재희는 브로슈어 한 부를 들고 오피스를 나왔다. 별다른 생각 없이 찾아가 본 학교였다. 몇 년 전, MBA 유학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 필요한 시험을 보는 것에 그쳤다. 복도 벽에 붙어 있는 비즈니스 스쿨 교수진들의 사진과 이름을 의미 없이 훑어보았다.
[재희?] [케이시 교수님?]세련되게 커트한 붉은빛이 감도는 금발 머리, 밝은 암녹색 슈트, 거기에 꼭 맞아떨어지는 브로치를 한 여자가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에 놀랍고 반가운 건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3년 전쯤, 미국을 방문했을 때 찾아뵌 이후 처음이다.
케이시는 재희가 학교 다닐 때 무척 좋아했던 미술사 과목 교수님이었다. 그녀는 재희가 가진 그 방면의 재능을 진심으로 아까워했다. 고맙게도…….
케이시는 저번 학기부터 뉴욕의 이곳으로 옮겨 예술 금융 과정 교수로 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미술 분야에 상당히 영향력 있는 전시 기획가였다. 주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지라 케이시 교수도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이제 좀 더 같이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서 웃었다.
[회사는 계속 다니고?]6층에 있는 그녀의 방에 마주 앉자마자 케이시 교수는 활발하고 다소 급한 성격답게 여러 질문을 쏟아 냈다. 한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 한국 근황에 대한 것, 그리고 재희의 결혼 이야기도. 이제는 회사에 관한 질문이었다.
[전에 회사 옮긴 건 말씀드렸었죠? 그 회사 계속 다녀요.] [아이뱅커, 멋지지. 그런데 여전히 아까워. 예술 관련이 꼭 맞았는데 뱅커라니.]케이시는 코를 찡긋하면서 웃었다.
[교수님은 뉴욕 생활 어떠세요? 예술 금융 과정은 어떤가요?] [뉴욕 생활이야 번잡한 만큼 피곤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아트 파이낸스(art finance) 과정은 야간 강의 위주라 좀 힘들기는 한데, 과정 자체는 좋아. 요즘은 갈수록 전시 기획이든 공연이든 굉장한 규모의 투자를 요하니까. 그런데 생각만큼 예술과 금융을 다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거든. 아, 재희, 그쪽으로 혹시 관심 있어?]‘관심 있어?’ 물어보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재빠르게 답하지 못했지만 케이시는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하는 표정으로 마저 말을 이었다.
[커리어 체인지 해 볼 생각은 없어? 재희라면 적격인데. 안 그래도 요즘 제프리가 사람 필요하다고 그러거든. 그이뿐 아니고 사람 구하는 곳은 많아. 원한다면 내가 몇 군데 당장이라도 추천해 줄 수 있어.] [제가 뭘 알아서요.] [아냐, 아트 쪽이야 학부 때 부전공도 했고 감각이야 내가 잘 알고. 그리고 금융 쪽에서 그 정도 경력이면 얼마든지. 여기 이브닝 클래스 들으면서 해도 되고 말야. 처음이라 연봉이 어떨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장기적으로는 이쪽 분야가 훨씬 나을걸?]케이시는 조금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홍조를 띠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그녀를 막을 수 없어서 재희는 그저 따라 웃었다.
[맞아,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네.] [그래도 꼭 생각해 봐. 계속 연락하고, 응?]재희는 케이시의 새로운 명함을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멋진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더 미안하고 고마웠다.
케이시 교수의 제안을 생각하며 호텔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준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 재희야, 뭐 하고 있어?
“이제 호텔 들어가려던 참이에요. 쉬려고요.”
외부에서 전화하는지 준우의 목소리가 소음에 묻혀 들려왔다.
― 그러면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할게. 한국 YK통신 측에서 구한 자료를 이메일로 보냈어. 내일 오전 인수 관련 미팅에 필요한 내용인데, 내가 오늘 저녁도 약간 늦을 것 같아. 네 이메일로 포워드했거든. 호텔 비즈니스 센터에서 프린트 좀 해 줄래?
“그럴게요. 제가 정리해 드릴까요?”
―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쉬어.
“보고 정리할 수 있으면 해 드릴게요.”
― 또 일 시키네. 그치?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 고마워.
준우가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랩톱으로 확인해 본 자료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다. 재희는 오후와 저녁 시간 거의 전부를 자료를 읽고 정리하는 데 보냈지만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직접 정보를 찾아 보완하는 작업까지 하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준우가 밤늦게 들어왔을 때, 재희는 피곤한 기색으로 겨우 마지막 검토를 하는 중이었다.
“아직 정리하고 있었던 거야?”
재희는 웃으면서 책상 위에 둔 서류 뭉치를 툭툭 두드렸다.
“생각보다 좀 그랬어요. 포워드해 준 자료 외에 필요한 거 좀 더 찾았어요.”
준우가 선 채로 자료를 뒤적거리는 동안 재희는 랩톱 화면을 바꿨다.
“몇 장으로 요약했어요. 이거부터 봐요. 그리고 밸류에이션(valuation, 기업가치)한 거 체크하고 몇 가지 베이스로 다시 했는데 엑셀 파일 이름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랩톱에서 폴더를 클릭하려다 말고 돌아보았다.
“괜히 너 고생시켰어.”
“왜 괜히……예요?”
“이길 확률이 낮은 게임이야. 욕심 같아. YK는 우리와 함께 일하기에는 너무 크지. 내일 만날 사람도 나랑은 수준이 다른 사람이고.”
재희는 팔을 둘러 준우를 꼭 껴안았다.
“잘하실 거예요.”
“좋은 경험은 되겠지.”
“아니, 꼭 잘해야 해요.”
양팔로 감싼 채로 고개를 들어 준우를 보았다.
“저 고생했는데 잘하시라구요. 그래서 내일 이야기 잘되면 맛있는 거 사 주세요. YK랑 일하는 거 확정되면 더 좋은 거 사 주시구요.”
준우가 웃으면서 알았노라 답했다.
오늘 있을 미팅 준비를 하느라 새벽녘에나 둘 다 잠들 수 있었다. 아침나절 다소 바쁘게 준비를 하는데 넥타이를 매던 준우가 ‘아, 이런…….’ 하고 짤막하게 소리를 냈다.
“무슨 일……?”
옅은 핑크색 타이 중간에 선명한 얼룩이 있었다.
“어제 와인이 튀었나 봐. 여분 타이가 없는데. 뉴욕이라 하나 사면 되겠거니 했지. 호텔 아래층 숍이 오픈했으려나?”
넥타이를 풀고 재킷을 입으려는 준우에게 재희가 슬며시 다가섰다. 주뼛거리면서 납작한 붉은색 상자를 내밀었다.
“응?”
“이거 하실래요?”
준우가 상자를 열고 속에 든 넥타이를 꺼냈다. 수십 마리의 작은 동물이 그려져 있는 옅은 노란색의 타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자, 기린, 코뿔소나 코끼리 같은 동물들이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마치 동화책에서 뽑아낸 동물 그림 같았다. 그래서 무척 재희의 맘에 들었었다.
“나 주려고 샀어?”
준우가 한 손에 타이를 들고는 물었다.
“어제 잠깐 5번가 지나가다가……. 즐겨 하는 브랜드 중에 하나 같아서.”
“나쁘네.”
“네?”
“물건 같은 거 사 주고 말이야.”
무안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준우가 볼을 톡톡 두드리면서 웃었다.
“고마워.”
*
두 사람이 약속 장소인 맨해튼호텔 로비에 들어선 건 정확하게 9시 53분이었다. 준우가 프런트에서 받은 카드키를 엘리베이터 인식기에 대었다가 떼었다. 가야 할 층수를 누르고는 시선을 반쯤 내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재희가 스치듯이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자 준우가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재희 맛있는 거 사 주도록 오늘 잘해야지?”
목적한 층에 도착하자 준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시원시원하게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노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반갑습니다, 서준우 씨.]만면에 미소를 만들면서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시리도록 파란 눈, 은빛이 감도는 머리, 턱과 이마가 길어 보이는 갸름한 얼굴. 그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그다지 크지 않은 키에 벌어진 어깨, 부드러운 목소리. 그것이 대니얼 스필라트의 첫인상이었다.
웃음을 거두지 않은 얼굴이지만 그저 눈을 맞추고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재희는 충분히 긴장되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자그마한 응접실로 갔다. 대니얼은 직접 한편에 있는 바에 가서 음료를 가지고 왔다. 주스를 앞에 두고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마주 앉았다.
[바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쁩니다. 서준우 씨와 같이 일했던 게 언제던가요. 10년이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네, 홍콩 오피스 있을 때였습니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봤죠.] [기억하시는군요. 뉴욕에서 두 번 뵈었죠.]근황에 대한 느긋한 물음이 조금 더 계속되고 명함을 주고받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물을 천천히 마시고 대니얼은 마치 일상적인 질문을 하듯 먼저 물었다.
[서준우 씨가 오늘 저를 찾으신 용건은 무엇이지요?]대니얼은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전해졌음에도 모르는 척 시작했고, 준우도 예상했다는 듯 천천히 새로운 사실인 것처럼 답했다.
[카일라 펀드가 보유하고 있는 회사의 주식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요? 고마운 일이로군요.]준우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스필라트는 느긋하게 앉아 그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로브 퀘이크사를 실질적으로 보유하고 계시더군요.] [네.] [제가 원하는 것은 카일라 펀드가 가지고 있는 그 회사의 주식을 인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요?]준우의 정공법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더 말해 보라는 듯이 여전히 준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준우도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다면 내가 이 협상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죠?] [이 협상을 통해 상호 이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까요.]스필라트는 눈을 살짝 크게 떠 보이더니 다시 침묵을 지켰다.
[상호 이익을 만들어 내려면 스필라트 씨에게도 명백한 이득이 있어야겠지요. 저는 이 협상에서 제가 원하는 바를 말씀드렸으니 저의 제안에 대해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검토해 보겠습니다.] [명백한 나의 이득이라……. 그런데 불행히도 당신의 제안이 도무지 내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는군요.] [현재 보유하신 주식에 대한 미실현 이익을 극대화해서 현실화시키는 것이지요.] [글쎄……, 나는 별로 서두를 것이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서두르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만.]준우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스필라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해 보라는 듯이 잠시 앉아 있었다. 옆에서 둘을 지켜보는 재희도 팽팽한 긴장감에 숨을 크게 쉬기도 어려웠다.
침묵을 깬 건 스필라트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알아봤겠지만 글로브 퀘이크는 장기적인 투자 관점을 가지고 사들인 회사입니다.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시기라는 것이 지금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설명해 주겠어요?] [카일라가 글로브 퀘이크를 인수했을 당시에는 단순한 단기 자금 운용이 그 투자 목적은 아니었을 겁니다. 여러 가지 포석을 둔, 말씀하신 대로 장기 투자 대상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회사를 인수한 것은 5년 전, IT 버블이 막 꺼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이루어졌죠. 다소 성급하게 뛰어든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요?]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카일라는 그 회사에 막대한 자금이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글쎄, 막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둘의 대화가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언제나처럼 재희는 없는 듯이 옆에 앉아 정리한 자료들을 눈으로 빠르게 좇았다.
재희는 평소처럼 다음으로 나올 이슈에 대해 백업을 준비했다. 카일라 펀드 투자 회사 주식에 대한 가치 평가와 수익률 자료를 꺼내 그의 눈에 잘 들어오도록 슬쩍 옆자리에 두었다.
[그래요? 요즘 내가 수익률 체크까지 안 해서……. 어떤지 알려 주시겠습니까?]스필라트는 빤한 거짓말을 하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준우의 입에서 거침없는 대답이 나왔다.
[투자 자금 규모 상위 열다섯 개 정도의 회사 투자 수익률을 글로브 퀘이크 주식 보유 기간 대비로 따지면 대략 평균 110퍼센트에 이르더군요. 글로브 퀘이크의 자산 가치와 이제 겨우 소폭의 흑자로 돌아선 영업 이익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가치 창출 능력을 최대한 고려한 회사 자산 가치는 200밀리언 달러도 되지 않습니다. 저희가 추정한 바로는 160밀리언 달러 정도입니다. 70퍼센트의 보유 주식을 고려하여 투자 금액을 따지면 겨우 20퍼센트 정도의 수익률이지요.] [그렇군요. 최대한 높게 산정한 가치가 실망스럽게도 저의 추정과는 전혀 다르지만, 아무튼 그러니 더욱 시기가 아니라는 제 말을 이해해 주시겠군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늦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요.]스필라트가 빙그레 웃었다.
[카일라가 기대하는 수익을 얻기 위해선 몇 가지 방법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주제넘게 제가 제안하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로 생각됩니다만.] [세 가지라. 어떤 것이죠?] [주식시장의 흐름을 보아 상승점이 거의 고조에 달했을 즘에 상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카일라는 글로브 퀘이크의 실적이나 주식 흐름을 볼 때 시기를 놓쳤습니다.]준우가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재희가 찾아서 표시한 미국 주식시장 분석 그래프와 글로브 퀘이크의 실적을 훑었다.
[주식시장 흐름으로 봤을 때 지난 분기가 가장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글로브 퀘이크의 계속된 적자가 발목을 잡았겠지요.] [이제 치솟는 유가와 미국의 달러화 약세, 금리 상승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피할 수 없는 트렌드가 되어 버렸지요. 부동산 버블 붕괴까지 위협받는 시점에서 다시 IT 버블이 생기지 않는 한 그 시기는 당분간 오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카일라는 그 정도 투자금의 회수에 조바심을 내는 회사는 아닙니다. 그 시기가 조만간이 아니라 해도 그다지 걱정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글로브 퀘이크의 미래 가치를 여전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에는 저도 당연히 동의합니다만 그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은 글로브 퀘이크의 현재 경영 방식으로는 요원한 일입니다.]재희는 다시 자료의 장을 바꿔 글로브 퀘이크의 영업 구조와 수익 형태를 보였다.
[그래요? 글로브 퀘이크가 어떤 문제가 있죠, 재희 씨?]느닷없는 질문에 놀란 건 재희와 준우 두 사람 모두였다. 준우가 눈짓으로 동의하자 재희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글로브 퀘이크의 영업 수익이 작년에 흑자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 구역을 대상으로 할인 정책을 펼친 후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일반 전화 가입자를 상대로 저가와 할인 혜택을 공격적으로 한 결과라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 흑자로 돌아선 영업 정책은 할인 혜택이 끝난 가입자들의 이탈과 기존 가입자들의 동등한 혜택 요구로 곧 오히려 수익 구조에 발목을 잡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뚫어져라 바라보는 스필라트 때문에 혀가 빳빳해지는 기분이었다. 재희는 억지로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저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글로브 퀘이크의 할인 기간이 끝나자마자 또 다른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비슷한 중소 규모의 경쟁 업체로 옮기는 비중이 이미 30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또한 저수익층을 타깃으로 한 까닭에 무선통신 부문, 비교적 높은 마진을 창출할 수 있는 추가 수익원에 대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지난 3년간의 추이를 보면 총 가입자 수는 15퍼센트 증가한 반면 무선통신에 있어서는 7퍼센트 정도 감소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한재희 씨. 그러면 서준우 씨 당신의 두 번째 제안은 무엇이죠?] [글로브 퀘이크의 자체 혁신입니다. 현재의 경영 방식과 고객군으로는 안 좋은 상황으로 진행될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하니까요.] [혁신.]스필라트가 짧게 되풀이하자 준우가 빠르게 받았다.
[혁신에는 외부의 충격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한국의 YK통신은 그 외부 충격의 가장 적임자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제안하는 마지막 방법이며 처음 제가 말씀드렸던 협상에서 제가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스필라트는 미소도 잠시 거두고 그를 관찰하듯 지켜보았다. 몇 분 되지 않는 침묵은 재희에게는 견디기 어려웠지만 준우는 자신의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좋아요. YK라는 외부 충격이 가져다주는 혁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스필라트가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준우도 그제야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악수를 나누면서 스필라트가 저녁 식사 제안을 했다.
준우가 환하게 웃었다.
“후우.”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긴 숨을 쉬었다. 겨우 한 시간이 넘는 미팅에 진이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준우가 뺨을 쓰다듬었다.
“힘들었지? 고생시켜서 미안해.”
“고생이라니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지 않아.”
정문을 빠져나가면서 준우가 재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다른 준비도 대답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그 사람, 숨통을 조여 오거든.”
정말이냐는 물음 대신 가만히 쳐다보았다.
“맛있는 거 사 줄게. 배고프다.”
“나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괜찮아요?”
“뭐든 말만 하시죠.”
그 말이 새삼스레 좋아서 재희는 배시시 웃음이 났다.
월스트리트 끝 부분에 늘어선 벤더(vendor, 행상)들을 재희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거요, 저거.”
재희가 준우의 손을 붙잡고 빠르게 걸어갔다. 꽤 줄이 길게 늘어선 벤더 앞이다. 메뉴는 케밥. 일회용 플라스틱 통 하나씩을 받아 들고 대충 계단에 걸터앉았다. 벤더 앞에 늘어선 줄의 반 이상은 월스트리트 사람들처럼 보였다. 줄을 서는 동안에도, 아무렇게나 앉아 점심을 때우면서도 다들 손에서 주식시세 화면을 띄운 폰을 떼지 못했다.
그들처럼 준우도 그랬다. 그리고 그 시절엔 지연이 있었다. 뉴욕에는 그들의 사랑과 열정이 곳곳에 드러누워 있다. 죽은 듯이 누웠다가 한 발 잘못 내딛으면 숨겨 둔 쥐덫처럼 불쑥 튀어 올랐다. 발목을 물고 살갗을 파고들고 그리고 피를 낸다. 이후로 많이도 다닌 출장길인데 또 잘못 디딘 모양이다. 준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와아! 날씨 무지하게 좋아요.”
재희가 손부채를 만들면서 하늘을 쳐다보더니 검정색 재킷을 벗었다. 곧게 뻗은 하얀 팔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것만 같다. 케밥을 크게 한입 먹으면서 말했다.
“맛있어. 아, 맛있어.”
“이 케밥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
준우도 따라서 먹기 시작했다.
“네, 사 들고 가서 호텔에서 먹을까도 했는데 그러면 제맛이 안 나잖아요. 그렇다고 혼자 앉아서 먹기는 좀 그랬어요.”
음료수 마개를 열어 건네자 몇 모금 마시더니 재희가 만족스럽고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살 것 같아요.”
“응?”
“아까 힘들었어요. 지금은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시원한 것도 마시고 날씨도 좋고, 살 것 같아요.”
재희야……, 나도 살 것 같다, 정말.
준우는 재희의 목소리, 재희의 웃는 얼굴,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봐요? 뭐 묻었어요?”
“응.”
“정말?”
재희는 금세 발그레해졌다. 핸드백을 열려는 손을 잡았다. 올려다보는 얼굴에 다가가자 재희가 눈을 크게 떴다.
“준우 씨, 여기……서?”
응, 대답을 하면서 입을 맞췄다.
이런 곳에서 키스를 하는 남녀라……, 게다가 케밥을 먹다가라니. 잔뜩 흥분한 어린 관광객들이나 해당될까.
하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준우는 수줍게 응대하는 입술에 오랫동안 부드럽게 머물렀다.
날씨가, 햇살이, 바람이, 그리고 뉴욕이 참 좋았다.
*
펼친 다이어리에는 붉은색 한 줄이 일주일을 표시하는 일곱 칸을 통과하고도 하루를 더하고 화살표로 끝났다. 화살표가 끝나는 날, 재희의 긴 휴가가 끝날 것이다. 온전하게 남은 건 내일 하루, 비행기 티켓은 내일 저녁 것이다. 텅 비어 있는 내일자 칸을 검지로 색을 칠하듯이 살살 문질렀다. 이미 지나온 날짜 아래에도 암호처럼 표시된 몇 글자들이 전부다. 그와 같이하는 시간에 대한 기록은 작은 점 하나로 표시하면서도 두려웠다. 언젠가 펼쳐 보며 새록새록 아플까 봐. 이런 적이 있었지, 그랬었지 하면서 더 쓸쓸해질까 봐.
내일은 하루 종일 같이 있자고 그랬다. 오늘 오후도 줄곧 같이 붙어 있었다. 저녁 약속을 나가면서 준우가 좀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재희는 피식 웃었다. 스필라트가 제안한 식사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더욱 그랬다. 나가기 싫다, 싫다,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준우를 억지로 떼었다.
“괜히 그러지 말고 어서 나가요. 트래픽 걸려요.”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고 발꿈치를 들어 머리를 매만졌다.
“됐어요. 가세요.”
깃과 어깨를 손으로 살짝 털어 내고 쳐다보니 준우가 재희의 콧등을 톡톡 검지로 두드리고는 말했다.
“왜 이렇게 냉정하실까.”
“지각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오, 그러세요?”
“보내 주는 걸 고마워하셔야죠.”
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대신 얘랑 놀고 있을게요.”
재희는 파란색 실크로 만들어진 조그만 테디베어를 들어 보였다.
“정말 똑같네.”
준우의 가슴 쪽에 대어 보고 말했다.
“곰은 아닌데.”
“넥타이만이라고 할게요.”
재희는 준우의 넥타이를 끌어당겨 바짝 가까워진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오후에 우연히 들어간 매장에서 찾아낸 테디베어였다. 건방지게도 재희가 준우에게 사 준 넥타이와 똑같은 감으로 만들어진 타이를 목에 매고 머리 쪽으로는 자신의 용도가 뭔지 알려주듯 긴 줄을 달고 있었다. 준우에게 사 달라고 했다. 바쁜 사람 대신 핸드폰에 매달고 다닐 거라고. 재희는 다이어리 앞에 앉혀 둔 테디베어를 한번 쓰다듬었다. 탁자 쪽 시계를 확인해 봤다. 준우가 조금 늦어지나 보다 생각하는데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재희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용건만 먼저 듣고 재희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 나를 뭘로 아는 거야!’
화를 삭이기도 전에 현석에게 곧장 전화를 했다.
― 네.
“우리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내가 어떻게 돼서 파혼했다고 사방에 알리고 다녀야겠어? 광고라도 내?”
― 잠시만 기다려.
현석이 자리를 옮기는 듯했다. 시계를 보니 서울은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는 아침이었다.
― 무슨 소리야?
“일본에서 전화 왔어. 현석 씨 아버지가 일본 출장길에 만나고 싶다 하셨대. 다시 결혼하는 거냐고 물으시는데 기막혀.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이니?”
현석은 딱딱하게 답했다.
― 아버지가 일본에 연락하신지 몰랐어. 너랑 다시 잘됐으면 해서 그러셨겠지. 아버지는 처음부터 너 무척 좋아하셨잖아. 많이 미안해하시고 지금도 꼭 며느리 삼고 싶어 하셔. 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그런 분한테 우습게 보는 거라니 말이 좀 심하지 않아?
재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거 나 몰라. 현석 씨 어머니 반대하던 말씀대로 내가, 내가 천애 고아 같은 처지니까 현석 씨도 부모님들도 쉽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라면, 언제 현석 씨 어머니라도 나한테 한번 찾아오셔서 미안하다고 달래 주신 적 있어? 다른 수준 맞는 집 딸이랑 그랬어도 그렇게 가만히 계셨겠어?”
― 너랑 어떻게 연락하시니? 바뀐 전화번호는 내가 안 가르쳐 드렸어. 회사 번호라도 알려 달라고 물으시는데 연락하지 말라 그랬어. 나한테 맡기라고. 어머니, 처음에는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서운해하셨지만 지금은 안 그래. 며칠 전에 너희 회사 찾아가셨대. 휴가라고 못 만났다 하시더라.
현석이 답답한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지금도 휴가야? 시간 괜찮으면 어머니 한번 뵐 수 있겠어?
재희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답답해 죽겠어.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무시해? 나, 현석 씨랑 잘되고 싶은 마음 없어. 그럴 수도 없어. 이야기했잖아.”
― 상관없어.
뭐가 상관없다는 건지, 순간적으로 목 끝까지 열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나 지금 미국이야.”
― 여행 갔니?
“글쎄, 여행인가? 휴가 내서 그 사람 출장 따라왔어.”
지나치게 뻔뻔했는지 현석은 충격을 받은 듯 말이 없었다.
“이제 그 사람 들어올 거야. 전화 끊어.”
― 재희 너, 돌았어?
현석은 이를 갈듯이 으그러진 소리를 냈다.
“말짱해. 왜 미쳐?”
― 서준우, 미친 놈. 누굴 어디로 데려가! 출장에 널 왜, 뭐하러 데리고 가!
“……우습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재희는 정말 풋 웃어 버렸다. 한숨 소리만 두어 차례 들렸다.
“끊을게. 좋은 여자 만나. 부모님 원하시는 대로 현석 씨 검찰총장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자.”
핸드폰을 귀에서 떼는데 현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내가……, 그랬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 그래도……, 재희 네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마치 내가 너를 타락하게 만들었노라, 하는 고해성사 같은 말에 기가 막혀 왔다. 이렇게까지 비참할 일인가.
“현석 씨, 오해하지 마. 불쾌해.”
― 오해? 그자야말로 널 뭘로 보는 거야. 그렇게 우스워 보인대? 아니면 그자가 너랑, 결혼이라도 하자고 속삭여?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 하! 만에 하나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 줄 수나 있을까. 와이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간 지독한 인간이!
“무슨, 소리야?”
― 왜 이혼했는데. 서준우가 지연 씨 외가 등에 업고 날개 다는 동안 지연 씨, 우울증 걸리고 유산하고, 결국 자살 시도했어. 지연 씨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했으면 죽었어!
퉁퉁 머리가 시멘트 벽에 세게 부딪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팽팽 돌아가던 뇌 회로가 갑자기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힘겹게 움직였다. 그랬던 거였나. 6년 전, 그 가을에 그런 일이 있었던가.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토록 험한 일을 겪고 두 사람은 헤어졌나.
‘장 검사 펄펄 뛰었겠군. 이지연 전남편 서준우,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내뱉던 준우의 음성이 윙윙 울렸다.
‘잘 알 텐데. 나, 만나는 사람은 있어도 결혼할 사람은 없는 것.’
재희는 떨리는 입술을 벌려 태연한 목소리를 만들었다.
“현석 씨, 별로 전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야.”
― 나 역시 올리고 싶지 않은 남의 이야기야. 네가 그렇게 얽히지만 않았다면.
“걱정 마. 어느 쪽도 아니야. 손가락질 받을 관계도 아니고 결혼도 안 해.”
재희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발코니로 나가 강바람을 맞고 섰다. 바람에 눈이 시려 오고 뉴저지 불빛이 흐리게 번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사진첩에 나올 만한 야경이 한 덩이로 엉켜들어 오고 머릿속 가득 찬 생각들도 서로 엉망으로 얽히고 뭉그러졌다.
툭툭, 턱에서 아래로 눈물방울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시야는 밝아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어도 숨을 쉬지 않아도 눈물은 계속 차올랐다.
제발, 이제 그만. 그가 올 텐데. 이제 그만.
재희는 난간을 움켜쥐었다.
“왜 여기 있어?”
놀라서 돌아보니 준우가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냥. 언제 오셨어요?”
미소를 만들어 보이자 그가 손을 뻗어 끈 원피스 위로 드러난 어깨를 쓰다듬고 반쯤 드러난 등에서 허리까지 쓸어내리더니 그대로 몸을 끌어당겼다. 강바람을 맞은 입술에 불처럼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젖은 턱과 뺨, 그리고 감은 눈두덩까지 차례로 그가 도장을 찍듯 꾹꾹 눌렀다. 눈물 자국을 들키기 싫어 재희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들어가자.”
어깨에 깨물듯이 입을 맞추면서 준우가 말했다. 재희는 준우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었다.
안겨서 침대에 눕혀졌다. 준우가 내려다보는 채로 재희의 머리칼을 한 번, 두 번, 세 번……, 자꾸만 쓸어 올렸다. 재희는 이마와 귓등을 스치는 손을 잡았다.
“왜 그래요?”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표정에 가까웠다.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재희는 그의 손을 가만가만 만지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놔줄 수……, 있을까?”
잘 들리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내뱉으면서 준우는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그의 습한 숨이 닿는 자리마다 아리고 쓰라렸다. 재희는 팔을 둘러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 데도, 누구한테도 가지 마. 옆에 있어.”
“안 가요.”
“다른 생각도 하지 마.”
“……네.”
“혼자……, 울지 마.”
“…….”
준우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재희 머리를 쓰다듬고 귓등을 스치고 입술을 만졌다. 그가 이를 악물고 숨을 삼켰다.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이고 관자놀이 핏줄이 선명하게 솟았다.
“결혼은, 못 해.”
재희는 입을 벌려 숨을 짧게 들이켰다.
“나는, 다시는……, 죽어도 안 해.”
무섭도록, 마치 가면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이었다. 재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준우가 걷어 내듯 손을 치워 버렸다.
“말해 봐. 널, 어떻게 하면 잡아 둘 수 있어?”
재희는 답하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노란색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열었다. 벨트 버클을 풀 때까지 준우는 가만히 있었다.
“더는 어려운데……. 도와줘요.”
준우가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원피스를 벗겨 내는 동안에도, 평소보다 더 거칠고 급하게, 그리고 더 깊이 들어오는 동안에도 그 눈동자는 줄곧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할 필요 없는 말을 했어. 남의 결혼 생활이고 내가 모르는 사연도 있겠지. 아버지께 일본 건은 재희 아버님이 불편해하신다고 취소하시라고 했어. 한국 오면 다시 연락할게.
훔쳐보려던 의도는 없었다. 발코니에 나가 서 있는 재희에게 가려고 할 때 데스크 위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고 메시지가 액정에 떴다. 준우는 치부를 활짝 열어 보인 기분이었다.
위세척을 했다는 지연은 퍼런빛이 감도는 석고 같았다. 처가는 한마디도 새지 않게 언론을 틀어쥐었지만 끝까지 성가시게 구는 기자 몇에게 다들 시달리다가 지연을 처가로 옮겼다. 두 주 동안 빌고 또 빌었다. 장인에게 장모에게 지연에게……. 집으로 들어오고 두 달을 못 채우고 지연은 떠났다. 그 시간 동안 지연은 물어뜯듯이 싸움을 걸었다. 충분히 끔찍했다고 생각했던 지난 결혼 생활보다 더 처참했다.
‘남자가 있어. 날 사랑한대.’
‘이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사랑해, 지연아.’
‘사랑? 사랑이었어? 차라리 솔직하게 이용했다고 해 줘. 넌,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어. 그게 사랑이라면 서준우는 사랑 같은 거 하지 마. 미쳐서 나가떨어지는 여자는 나 하나로 족해.’
‘지연아.’
‘다른 남자 있다고! 이혼해. 이혼해 줘! 아니면 이번엔 제대로 죽어 줄게. 네 눈앞에서!’
지연이 쏜살같이 달려가 베란다 창문을 열어젖혔다. 준우는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붙잡았다.
‘원하는 대로 해 줄게……. 가, 가라!’
남자든 바이올린이든 지연에게는 서준우 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양립할 수는 없는 종류였던가 보다. 결혼은 유지한 채 다시 미국에 가서 바이올린을 하라고 처가에서도 준우도 혀가 닳도록 설득해 봤지만 결국 이혼 서류를 마무리하고 지연을 보냈다.
헤어진 후에는 죄책감과 원망이라는 끈적끈적한 점액질을 덮어쓰고 사는 기분이었다. 발화성이 강한 액체라 종종 작은 불꽃에도 심장까지 태워 들어갔다. 발작적으로 잠에서 깨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때로는 물건을 부숴 버리기도 했다. 헤어지고 꼬박 두 해 동안 세 번, 거실 장식장 유리에 금이 가고 액자가 부서지고 마지막은 양주병이 줄줄이 박살났다. 속에서인지 겉에서인지 온통 술 냄새로 범벅이 되어 눈을 떴는데, 처참한 꼬락서니가 아침 해 아래 환하게 드러났다. 이후로는 인정하는 쪽을 택했다. 처절하게 실패했다. 인정해라, 서준우. 되돌릴 수 없는 너의 실패다.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준우는 현석이 남긴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아버지, 아버님, 다시 연락, 한국 돌아오면…….
끊어진 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사이라는 느낌이었다. 화가 나고 속이 쓰렸다.
장 검사를 언제든 다시 돌아갈 자리로 접어 둔 것일까.
애써 감정을 삭이고 발코니로 들어서는데 심장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재희 모습은 밤보다 더 캄캄하고 강바람보다 더 시렸다. 무겁도록 눈물을 담고 쳐다보는 눈동자, 억지로 만드는 미소…….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몸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치받고 올라와 목구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폭발할 듯이 열이 올랐다.
어깨를 안아 주고 뺨을 감싸는 손은 열을 식혀 줄 만큼 서늘했고, 조여드는 심장 근육을 이완시킬 만큼 부드러웠다.
포기할 수가 없다. 도저히. 놓아줄 수가 없어. 혼자 울게 만드는 주제에 욕심은 다락이라 도저히 도저히…….
흔적을 새기듯이 움직였다. 재희가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속눈썹은 아직 젖어 있다. 등을 활처럼 휘며 터지듯이 한번 ‘아아.’ 소리를 냈다. 속눈썹이 더 젖어 들었다.
“재희야.”
이마에 맺힌 땀을 걷어 주고 다시 꼭 끌어안아 주면서 재희가 속삭였다.
“괜찮아요.”
쉬……, 괜찮아. 괜찮아요.
속삼임은 자장가 소리같이 편안했고 등을 두드려 주는 손길은 안온했다.
준우는 무너지듯 재희 품에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