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93
93
정령술 (2)
* * *
정령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지만, 물질계의 존재가 아닌 그들이 이곳에 나타날 때면 모두 공통적인 모습을 띤다.
실프라면 어린 소년, 카사라면 작은 새와 같이 일반적인 모습이 있다.
“그런데 왜 저 친구는 그런 모습이 아니지?”
엘런이 소환한 정령은 반투명한 구체球體였다.
혹시나 계약에 실패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페리스의 표정을 보니 실패는 아닌 것 같았다.
“저건 잊힌 정령?”
그녀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표정이었다.
휘잉.
엘런이 페리스의 반응을 보며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그 구체가 엘런에게로 다가왔다.
엘런의 코앞까지 다가온 구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인간의 말로 자신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프로뱅처럼 심어心語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 소리, 그는 그 소리가 이해되는 것이었다.
“제피로스.”
엘런은 그 소리를 들리는 대로 되뇌었다.
휘이잉.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기분이 좋았는지 구체는 좌우로 진동했다.
그러더니 엘런의 몸에 스며들었다.
이물질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면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제피로스가 들어오자 오히려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엘런 님에게서 느껴지던 바람의 기운은 바로 그 나침반 때문이었군요?”
정신을 차린 페리스가 엘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엘런은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나침반을 보았다. 허공에 떠 있던 바늘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나침반이 그를 불러내는 매개체가 되었나 봐요.”
“내가 계약한 이 녀석은 다른 정령들과는 다르다는 거야?”
엘런은 자신의 옆에 제피로스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주변 공기의 흐름도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엘런 님께서 소환한 것은 잊힌 정령이에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4대 정령이나 그 외 다른 자연의 정령보다 훨씬 앞서 존재했던 이들이죠.”
다른 정령들보다 먼저 존재했다니. 엘런은 그 시기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저도 그들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다른 정령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계약자의 성장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형성해 간다고 들었어요.”
“제피로스가 잊힌 정령이라고?”
그녀의 말에 긍정이라도 하는 듯 제피로스의 바람이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그것이 그의 이름인가요?”
“그런 것 같아.”
“그도 엘런 님이 마음에 드나 봐요. 매개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들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저도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괜히 그들의 명칭이 잊힌 정령이 아니었다.
인간보다 10배 이상의 수명을 가진 엘프도 그들을 본 적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아무튼 정령과 계약을 하신 걸 축하드려요.”
엘런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고마워, 앞으로 제피로스와 더 교감해야겠어.”
“그럼요. 정령의 힘은 계약자와의 교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그리고 그도 같은 바람의 정령이니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페리스가 자신의 가슴을 쿵쿵 치며 말했다.
“앞으로 특훈에 들어가야겠어요.”
* * *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엘프라고 해도 그들에게 잊힌 정령의 출현은 꽤나 큰 이야깃거리였다.
엘런과 친분이 있는 엘프 중에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러 오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첫 만남 이후 찬바람이 쌩쌩 불던 러셀도 제피로스를 보고 싶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제피로스와 계약하고 난 후, 엘런은 정령술을 배우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직은 간단한 바람을 일으키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점차 그 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페리스의 도움이 가장 주요했다. 그녀는 정령의 힘을 끌어올리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 힘을 어떻게 응용하여 쓰는지도 알려 주었다.
그렇게 정령의 힘에 빠져 있다가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어느새 지성의 탑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이곳에서의 두 달이 그대에게 전혀 지루하지 않았는가?”
“모두 테오스 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이곳에는 배울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런 말은 그대들의 왕에게나 하는 소리라네. 모든 엘프에게 그 감사를 돌려주게나.”
그들은 엘리너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세계수 앞에 서 있었다.
구름까지 뚫을 정도로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이 나무는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웅장한 모습에 엘런의 입에서는 감탄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곧 세계수의 문이 열릴 시간이라네.”
그를 감탄의 호수에서 꺼내준 것은 테오스였다.
“따로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네. 나조차 저 안에서의 기억은 부분적이게 남아 있어서 말일세.”
1,000년을 넘게 살아온 엘프들의 로드마저도 저곳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됐든 결과는 강해진다는 것이다.’
결심을 굳힌 엘런은 푸른빛을 머금고 있는 세계수의 입구로 다가갔다.
“잠깐 기다리게나.”
그가 입구로 들어가려는 찰나 테오스가 그를 멈춰 세웠다.
“세계수는 태초의 세상과 함께한 분일세. 그 때문에, 그대의 목걸이는 그 안에서 정화되어 버릴 수도 있네.”
엘런은 프로뱅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내려놓고 갔다 오너라. 정말 큰 문제가 생기면 봉인을 풀어 버리면 되니 걱정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프로뱅의 말을 듣고 엘런은 목걸이를 풀어 테오스에게 주었다.
“그대의 목걸이는 내가 반드시 관수하고 있겠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엘런은 세계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은 현실감을 상실시켰다.
슈욱.
‘뭐야, 아무 일도 없잖아?’
입구로 들어오는 것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매우 평범했다.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을 생각했던 엘런은 맥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세계수 안이 이렇게 생겼구나.’
나무 안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커다란 원기둥 모양의 내부에는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은 계단이 있었다.
벽면에는 고대어로 된 글자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이곳을 왜 탑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세계수 내부의 모습은 결코 자연적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테오스가 말한 그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진귀한 아티팩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벽면에 빼곡히 적힌 고대어는 엘런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스승님도 고대어를 알긴 했지만, 이 글을 모두 읽을 만큼은 안 됐을 거야.’
결국 남은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었다.
엘런은 혹시나 해서 레비테이션 마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마법은 발동되지 않았다.
‘직접 올라가 보는 수밖에 없겠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엘런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세계수, 가꿈, 정원사, 창조.’
엘런은 계단을 따라 적혀 있는 고대어를 해석하며 올라갔다.
아직 유창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드문드문 보이는 단어만 이해했다.
‘대략적인 엘프의 역사 같은 건가?’
당장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올라가는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글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졌고 엘런의 몸은 지쳐 갔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엘런은 잠시 멈추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계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약 1시간 전에 보았던 높이와 비슷했다.
처음에는 너무 멀어져서 자신이 착각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아무리 올라가도 바닥에서 전혀 멀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쯤 되니 엘런은 짜증이 치밀었다.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사람을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세계수라면 충분히 인간을 장난감으로 볼 수 있는 존재였다.
엘런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혼자서 놀아나는 기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태초의 세계와 함께한 존재인데 얼마나 잘났냐는 말까지 들어야 하나?”
장난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감이 없어 어디서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소리의 주인을 찾으려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엘런은 그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이게 대체…….’
엘런이 발을 딛고 있던 장소는 방금까지 있던 곳이 아니었다.
상하좌우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완전히 다른 공간. 마치 진리의 문이 있는 곳과 비슷했다.
하지만 공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곳이 완전한 무의 공간인 것 같았다면, 이곳은 숲에 들어온 것처럼 생기가 가득했다.
“아까의 태도는 어디 가고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 건가?”
그제야 엘런의 눈에 한 남자가 보였다.
평범한 청년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가진 존재감이 너무나 거대했다.
이자에게 비하면 테오스의 존재감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당신은 혹시 신입니까?”
“뭐라? 푸하하하.”
엘런의 첫마디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농이 지나치구나. 아쉽게도 신이나 되는 자는 아니다.”
삐이.
그것은 제피로스의 소리였다.
반투명한 구체가 그 사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어떤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엘런은 제피로스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너를 보니 즐겁구나.”
삐이이.
제피로스와 반갑게 인사하고 있는 그는, 외형만 보면 그저 순수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세계수 안에서 만난 존재. 그리고 정령이 저토록 따르는 존재. 엘런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세계수이군요.”
엘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수. 자신이 그를 직접 만난 것이다.
“반응이 격해서 좋긴 하구나. 그러는 너도 특이한 아이로군.”
엘런은 이 현실성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를 쓰느라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자.”
“저를 그렇게 부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꽤 익숙한 단어였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겠지. 아직 그것을 알기에는 네가 어리고 약하구나.”
이놈이고 저놈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하는 게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엘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말씀은 제가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최대한 불쾌한 티를 내지 않으며 말했다.
하지만 세계수의 앞에서 그런 것은 헛짓에 불과했다.
그의 눈은 이미 엘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걸 밝히지 않았다.
“그렇지. 지식을 담을 만한 그릇의 크기를 가져야 한단다.”
“저는 그 성장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제게 그 방법을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엘런이 가장 원하는 것은 마나 친화력과 수집력이었다.
무영창의 마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는 항상 부족한 마나량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했다.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그를 뒷받침할 마나가 필요했다.
“마나량을 늘리는 방법이 궁금하다는 것이군.”
자신의 숙원을 해결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엘런은 세계수의 답변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그의 답변은 허무했다.
“그건 이곳에 올라오면서 전부 해결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