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211
제212화
“처음 뵙겠습니다.”
서지혁은 나태의 말을 읊어 나갔다.
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이 술술 나왔다.
“백도운 헌터 님. 축하는 많이 받으셨을 테니 각설하고. 폭식. 먹은 대상의 힘을 흡수하는 그 돼지가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대비하세요. A+급이 됐다고 자신의 강함에 취하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엔 당신보다 강한 이들이 잔뜩 있어요. 폭식, 그 처먹는 것밖에 못 하는 돼지 또한 강하죠. 조심하기 바랍니다.”
전언이 꽤 기네.
그나저나, 나태라고 하지 않았나?
“나태라며?”
“그런데.”
“전언만 보면 나태한 사람 같지 않은데.”
“그렇겠지. 그녀가 전하고자 한 말을 정리해서 작성한 건 내 부하니까.”
부하?
이 전언을 작성한 건 나태 본인이 아니었구나.
최기정…이 작성했으려나?
내가 아는 서지혁의 부하 중 머리가 똘똘한 놈은 녀석 말곤 없었다.
전명환이 했을 리는 없으니까.
“그 녀석도 고생이 많네.”
“하하. 내 오른팔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지.”
“그런데.”
“음?”
“나태는 왜 내게 이런 전언을 남긴 거지? 마치 내가 폭식을 잡길 바라는 것처럼.”
“후후….”
서지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는다.
마치 내가 중얼거린 게 옳다고 긍정하듯.
“잘 봤다. 그녀는 네가 폭식을 잡길 바라고 있다. 진심으로.”
“바란다고?”
“그래. 이유는 두 가지.”
서지혁이 검지와 중지를 들어 보인다.
그 상태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첫째로는 균형을 위해서다.”
“균형…?”
“우리도 우리 나름의 균형이란 게 있거든. 놈이 네 힘을 흡수해 그만큼 강해져 버리면 균형이 무너지겠지.”
“균형…. 서로 치고받을 거란 소린가.”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렇지. 하지만. A+급들이 치고받는 거다. 그게, 단순히 치고받는 거로 끝날까? 그 피해는 국가 간의 전쟁과 비슷할 거다.”
“전쟁….”
국가 간의 전쟁….
그것과 비슷할 거라는 말은 절대 허풍이 아니다.
한진환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나라를 없앨 수 있으니까.
설령 그게 리롄제가 있는 중국이라고 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리롄제의 몸은 하나 뿐이기에.
한진환으로서는 리롄제가 보호할 수 없는 지역을 쳐들어가고 돌아오는 걸 반복하면 그만인 일이다.
“그리고 전쟁의 피해자는 늘 힘없는 자들이 되는 법이지.”
옳은 말이다.
서지혁이 말한 비공식 A+급들은 모두 악인들이다.
놈들이 싸울 때 과연 주변을 걱정하며 싸울까.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녀석들이었으면 애초에 비공식으로 남지도 않았을 거다.
한진환처럼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두 번째 A+급 헌터가 됐을 터.
“응? 잠깐.”
“뭐지?”
“그 균형이라는 거. 내가 잡는다고 해도 무너지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
“아니에요.”
도희가 끼어들었다.
아니다?
목소리에 확신이 차 있는걸.
빤히 바라보자 도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넷에서 셋이 되거나 셋에서 둘이 되는 거라면, 오라버니의 말대로 균형은 완전히 무너질 거예요. 하지만… 일곱에서 여섯이 될 땐 그저 새로운 균형 체계가 만들어질 뿐이죠.”
일곱에서 여섯?
비공식 A+급들이 일곱 명이 있다는 소리다.
나와 한진환까지 합쳐 총 9명이군.
“성녀의 말이 옳다. 아마 나머지 여섯은 새로운 폭식을 만들어 내려고 할 거다.”
“새로운 폭식을?”
“그래. 균형을 위해서 말이다.”
“…뭐야? 말만 들어보면, 나머지 여섯은 균형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은 것 같네?”
“놈들도 사정이란 게 있는 거죠. 인간이니까.”
“아. 그렇군….”
도희의 말마따나 놈들은 인간이다.
악인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큰 힘을 얻는다고 해도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 하고 싶지는 않다.
새로 출시될 신작 게임을 하기 위해서도.
놈의 검지와 중지를 보며 물었다.
“두 번짼?”
“둘째로는, 그녀가 나태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
“폭식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귀찮게 하고 있다.”
“귀찮게…?”
“먹어치워서 힘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소리다.”
“말인즉슨….”
“자기가 잡기 귀찮으니까 도운이 폭식을 잡길 바란다는 거구만?”
잠자코 듣고 있던 태천이 짧게 정리했다.
간단한 요점 정리에 서지혁은 손뼉을 두어 번 쳐댔다.
태천이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 바보는 뭐 저런 거로 쑥스러워해.
나도 머릿속으로 서지혁이 한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한 건 이런 거다.
7명의 비공식 A+급 중에서 나태와 폭식은 최약체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
그런 게 아니라면 폭식이 굳이 나태를 귀찮게 할 리가 없다.
다른 5명을 쫓아다니며 힘을 먹어치우려고 하면 그만이니까.
“이태천 말대로다. 백도운 네가 폭식을 잡는다면, 그녀는 귀찮게 굴던 놈 하나를 치워버리는 거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나태하네.”
“그래. 그 단어보다 그녀를 더 잘 나타내는 말은 없지.”
그리 말하며 서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뭐지?
동맹 관계에 있는 여자를 생각하는 얼굴이 아닌데.
설마….
에이, 아니겠지.
“…조언을 덧붙이자면.”
“조언?”
“폭식은 널 직접 찾아오지 않을 거다.”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날 노린다며?”
“그 돼지 자식은 습성이 거미와 같다.”
“거미? 그렇다면….”
“그래. 거미처럼 거미줄을 친 후 너를 부를 거다. 자기가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고 싶을 테니까.”
거미줄이라….
한국 어딘가에 불합리한 싸움 장소를 만들려고 하겠군.
“그뿐만이 아니에요.”
“응?”
“한진환도 대비해야 할 테니까요.”
“한 선배?”
“과연, 하얀 성녀.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짝, 짝….
서지혁은 또다시 손뼉을 서너 번 쳐댔다.
도희는 태천이와 달리 쑥스러워하지 않았다.
눈을 찌푸리는 얼굴은 하얀 성녀가 아니라 백발 마녀 같았다.
마치 ‘감히 누굴 칭찬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날 보며 말했다.
“폭식은 널 먹고 싶은 것뿐이다. 한진환까지 상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겠지.”
“즉. 내가 혼자서 제 거미줄 안으로 들어갈 상황을 만들 거다?”
“그렇지. 불리한 전장(戰場)인 걸 알면서도 들어올 수밖에 없는 미끼를 놓을 셈일 터. 그리고 그 미끼는….”
서지혁은 도희와 태천이를 돌아봤다.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한걸.
도희나 태천이가 납치된다면 난 불리한 전장이고 뭐고 두 사람을 구하고자 안으로 뛰어 들어갈 거다.
다만….
“푸흐흐….”
입에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폭식이 과연 두 사람을 납치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해 아무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방심했다면 또 모를까.
정보가 있는 지금 상황에서라면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에는 납치하려던 폭식을 두 사람이 사로잡는 모습이 떠올랐다.
두 사람도 나처럼 생각한 듯 자신만만한 얼굴로 피식 웃는다.
아마 태천이는 오늘부터 그러기 위해서 한재임을 들들 볶지 않을까.
앞으로 고생할 한재임이 불쌍하군.
“…세 번째는?”
“음?”
서지혁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세 번째, 가 무얼 뜻하는지 까먹기라도 한 것 같다.
이런 정신 빠진 놈을 보았나.
[세계수 어린나무는 황당한 시선으로 관리인을 바라봅니다.] [세상에서 나사가 가장 많이 빠진 관리인이 할 말은 아니라고 전합니다.]나사가 가장 많이 빠졌다니….
내가 뭐 어때서 그래.
날 머릿속에 있는 나사를 꽉 조이며 살아가고 있어, 새싹아.
[어린나무는 관리인의 말을 부정합니다.] [도저히 긍정할 수 없다고 전합니다.]좀 해.
해줘, 좀.
“…여기에 찾아온 이유 말이야. 총 세 가지라며.”
“아. 그 소리였나.”
“그래. 그 소리였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말이다.”
“중요한…?”
“그래. 그러니 잘 들어주기 바란다. 백도운.”
확실히….
날 축하하는 건 놈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동맹 관계인 나태의 말을 전하는 건 A+급의 말을 전하는 것이니만큼 중요도가 높기는 했겠지.
그저 중요도가 높을 뿐이지만.
서지혁 개인으로서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터.
“…뭔데?”
“백운천에 동맹을 제안한다.”
“뭐?”
“못 들었나? 천칭과 백운천이 동맹을 맺었으면 한다.”
“…….”
정말….
진지하게 들으려고 했던 5초 전의 내가 싫다.
이 정신 빠진 놈이 또 동맹 소릴 해대네.
[어린나무는 이번엔 관리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이거 봐.
새싹이도 동의하는 거.
나처럼 진지하게 듣고 있던 새싹이도 실망했잖아.
중요하다고 해서 신중하게 들으려고 했더니만….
“넌 또 그 소리냐?”
“이제 제안을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나?”
“응. 안 됐어.”
“너무하는군….”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나와 동맹을 맺고 싶으면 전명환의 목이라도 갖고 오라고.”
“하하. 그건 좀 선처해 주지 않겠나? 나한테는 귀여운 부하다.”
“선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휙휙.
손을 들어 위아래로 젓는다.
할 말 다 했으면 꺼지란 뜻이다.
“너무하는군. 찾아온 사람 성의가 있는 법인데.”
“성의라…. 원한다면 열과 성을 다해 쫓아가 줘?”
“…할 수 있겠나? 내가 있는 곳까지 온다고 해도 도망가면 그만인데.”
“오만한걸. 서지혁.”
“……?”
“난 네가 세계 반대편에 있다고 해도 쫓아갈 수 있어.”
“쫓아올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녀석을 친구로 두고 있거든.”
“빠른…?”
세상에서 가장 빠른 녀석.
그건 보통 한진환을 지칭하는 말이다.
번개의 마나를 극한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그는 곧 세계 최속의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방금 내가 말한 건 한진환이 아니었다.
이제 한국엔 그 말고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이 있었으니까.
사람은 아니었지만.
“설마…!”
서지혁이 몸을 홱 돌렸다.
돌리자마자,
콰직!
거대한 입이 닫히는 소리가 옥상에 울렸다.
원래 몸으로 돌아온 무기가 서지혁을 한입에 집어삼킨 거다.
물론, 허상이니 통하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서지혁은 무기의 다물어진 입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유령이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허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런 것치곤 많이 놀란 것 같은데?”
“하하. 인정한다. A+급 몬스터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더군.”
“그 유쾌하지 않은 일이 계속 이어질 거야.”
“이어진다?”
검지를 앞으로 내뻗는다.
스마트폰이 들린 손의 검지는 그의 뒤를 가리켰다.
그의 뒤에서 한입 크게 물었던 무기는 이미 사라진 상태다.
서지혁은 무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걸 보고 당황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무기가 보일 리 없었다.
“우리 무기가 어딜 갔을까?”
“뭐…?”
“허상인 널 물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걸 아는데 왜 굳이 그랬을 것 같아?”
“……?”
“네놈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서지.”
“…찾는다?”
“그렇게 여유 부려도 괜찮아? 이미 무기가 널 잡으러 갔는데.”
서지혁은 몸을 돌려 뒤쪽을 바라봤다.
무기가 사라진 이유.
그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설마…!”
“맞아. 무기 지금 너 잡으러 간 거야.”
“이건, 정말 너무한 처사 아닌가. 백도운!”
“그러게 가랄 때 가지 그랬냐.”
“…그래. 불청객은 이만 물러나 주지.”
그리 말하고서, 서지혁은 제 목을 움켜잡았다.
설마 마법을 푸는 방법이….
콰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스스로 목뼈를 부러뜨린 것이다.
털썩….
곧 몸이 쓰러졌다.
쓰러진 몸은 투명해지며 사라졌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
“응?”
“저놈 쫓는 거 말이야. 그냥 도희가 결계를 다시 펼치면 될 일인데.”
“그래요. 무기 씨만 괜히 고생스럽게….”
“고생? 그게 무슨…. 아, 아아!”
짝.
손뼉을 한 번 쳤다.
“너희도 속았구나?”
“어? 속아?”
“그래. 무기 지금 서지혁 있는 곳으로 안 갔어.”
“안 갔다고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 한 채 옥상 난간을 바라봤다.
서지혁이 걸터앉아 있던 그 자리였다.
“무기야, 나와.”
불쑥.
부르자마자 무기의 머리가 아래에서 올라온다.
무기는 아까와 달리 작아진 상태였다.
「…놈은 갔나?」
“응. 갔어.”
무기는 주변을 살피며 올라왔다.
구불거리며 옥상 난간에 몸을 휘감는다.
그 모습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놋뱀 같아 보였다.
무기는 두 사람을 보며 씩 웃었다.
「두 사람도 속을 줄은 몰랐군. 내 연기가 제법 그럴듯했나?」
“끝내줬어.”
할리우드 보내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우리 무기는 분명 세계에서 연기를 가장 잘하는 몬스터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