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219
제220화
의자에 드러눕듯 앉고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옆에는 무기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평화롭군, 평화로워.
이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잠시,
벌컥!
어림도 없다는 듯 대기실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대기실로 들어온 사람은 배수현이었다.
“백도운 헌터, 준비 다 됐습니까?”
“네, 뭐. 대충?”
“…….”
배수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날 싫어하는 마음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얼마 전까진 좀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는데.
뭐,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내게 잘 보이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앞으로 10분 후면 기자회견 시작합니다. 준비 마무리하세요.”
“준비….”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기자회견 말입니다. 꼭 해야 해요?”
“아직도 그 소리예요? 당연히 꼭 해야죠. 기자들도 다 와 있는데.”
“네, 그렇겠죠.”
그녀는 어제 낮부터 문자를 보내며 날 방해했다.
문자 내용은 대부분 오늘 진행할 기자회견과 관련돼 있었다.
왜 기자회견을 해야 하는지부터 질문에 관한 대답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까지.
물론, 그녀가 보낸 메시지에 대해 일일이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후우….”
그녀는 그걸 명목 삼아서 집까지 쳐들어왔다.
아마 처음부터 그걸 노렸던 것 같다.
매시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으니 내가 웬만한 메시지엔 무시하고 응답하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염두에 뒀으리라.
심지어 그녀는 한재임까지 끌고 와 나를 귀찮게 했다.
날 노려보는 한재임의 얼굴이 어찌나 사나웠는지….
그리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메시지에 답을 하는 건데.
그 바람에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야 유재이와 홍수정을 만날 수 있었다.
얼굴도 보고 따로 부탁할 것도 있었는데.
뭐, 늦게라도 봤으니 다행이지만.
“결국, 혼자 가시기로 하셨나 보네요.”
배수현은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현재 방에 있는 헌터는 내가 유일했다.
헌터가 아닌 사람은 한 명 더 있긴 했지만.
“왜요. 도희나 태천이가 함께 했으면 싶었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두 사람도 두 사람 일로 바빠요.”
“그래도 의외예요. 기자회견엔 당연히 오실 줄 알았거든요. 두 분 다 안 오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둘 다 착해빠졌으니까요.”
“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기자회견에 오지 않은 이유가 착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럴 만도 하다.
이런 일엔 보통 찾아와주는 사람에게 착하다고 표현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이었습니다.”
“주인공…이요?”
“어딜 가든 중심이 됐다고요. 그 얼굴에 그 성격에 그 재주인데. 당연하잖아요?”
“아.”
이해한 모양이다.
배수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겁니다.”
오늘 기자회견은 내 기자회견이다.
딱히 마음이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일단 이 회견의 주인공은 나란 소리다.
하나 두 사람이 오면 얘기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
100% 바뀌게 될 거다.
예나 지금이나 나 같은 거보다 태천이 쪽이 훨씬 더 주인공다우니까.
“…뭐, 딱히 혼자인 것도 아니지만요.”
“네?”
“무기도 가잖아요. 혼자 간다고 말하면 무기가 섭섭하죠.”
“……!”
그녀는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 있는 무기를 바라보기 위해서다.
아까까지만 해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무기는 눈을 뜨고 있었다.
배수현을 똑바로 바라본 채로.
스윽….
무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서운하군, 수현….」
“서, 선생님. 방금 제가 한 말은, 그러니까….”
배수현이 당황해서 손을 휘둘러댔다.
무기는 고개를 떨군 채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나의 눈에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그녀를 놀려 먹는 재미가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안성평야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던 덕분일까?
무기와 그녀는 제법 친한 사이가 됐다.
무기는 배수현을 성을 떼고 이름으로만 불렀고, 그녀는 무기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무기의 옆을 가리켰다.
“이성훈 대리도 같이 가고요.”
“으아아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있던 이성훈이 괴성을 질러댔다.
온종일 마라톤을 뛰고 온 사람처럼 다리가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부정의 오라가 몸에서 마구마구 피어나는 걸 보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떠나는 것이 무지하게 싫은 모양이었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가기 싫어어어…!”
“아하하하하하하.”
“웃지 마, 이 양반아! 대체 날 왜 데려가겠다는 건데! 어차피 나 같은 거 아무 도움도 안 될 텐데!”
“에이. 아무 도움도 안 되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넌 충분히 도움이 돼.”
“도움? 내가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그건 저도 궁금하네요, 백도운 헌터.”
배수현이 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수업 시간에 ‘선생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학생 같았다.
아마 그녀는 이성훈 대리가 부상으로 헌터를 은퇴하고 우리 길드에 사무직으로 들어오게 된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녀석은 사무직으로 유능한 인재이긴 해도, 그 뿐이기에 중국에까지 데리고 갈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보고 받았을 서류상으로 보면 말이다.
그러니 내가 굳이 이성훈을 데리고 가려는 이유가 궁금하겠지.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 인물일지 알고 싶은 걸 거다.
“그러니까… 존재?”
“…네?”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도움이 돼요.”
“…….”
“팀장님…?”
이성훈이 감동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내게 저런 얼굴을 보이는 게 얼마만이지?
아니. 얼마만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처음인 것 같기도 한데.
“얘 요즘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되고 있거든요.”
“네?”
배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뜸 연애 이야기를 하니 갑작스러운 듯했다.
이성훈도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랑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새싹이조차 당황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랑 같이 중국에 가면 잘 안 되지 않겠어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
“…….”
두 남녀는 입을 쩍 벌린 채 날 쳐다본다.
그 모습은 꼭 말하는 방법을 까먹은 듯이 보였다.
[…….] [세계수 어린나무는 관리인에게 실망합니다.] [사랑의 방해꾼으로 명명하겠다고 전합니다.]사랑의 방해꾼이라.
그거 좋네.
새싹이에게 새로운 이명도 얻었겠다 더 열심히 이성훈을 방해해야지.
“그 꼴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이 편안해질 거예요.”
“…….”
“그, 그따위 이유로….”
이성훈이 떠듬떠듬 말을 잇는다.
말하는 방법을 다시 익히는 사람 같았다.
“나를, 데려가는 거였습니까…?”
“그따위라니. 내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있어! 있을 겁니다. 제발 그런 이유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고 말해줘요! 그렇지 않으면 난 팀장님을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
“…….”
“…나는 앞으로 3개월 동안 못 만날 건데, 네가 행복해지는 꼴을 두고 보라고? 절대 안 되지.”
“이 빌어먹을 개자식아…!”
이성훈은 절규했다.
마치 뭉크의 그림을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우히히히히.”
절로 웃음이 나오는걸.
이성훈. 너는 존재만으로 내게 즐거움을 주는구나.
후, 행복하다.
“…정말 그게 답니까?”
“네, 뭐. 대충?”
“…….”
배수현은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내 대답을 믿고 싶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믿어야만 했다.
정말이니까.
50% 정도는.
“설마 싶어서 묻는 겁니다만.”
“뭔데요?”
“팀원 소개할 때 그걸 이유로 들지는 않을 거죠?”
“…….”
“…하지 마세요. 절대로.”
“걱정하지 마요. 한재임이 대본 써줬으니까.”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녀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왠지 기분 나쁘네.
한재임이 대본 써줬다고 하니까 바로 넘어가고.
확 그냥 연애 방해하려고 데려가는 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보다.
“…아.”
이성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을 들고 손목시계를 가리킨다.
“시간 다 됐습니다.”
“그래.”
좋아. 그럼 가볼까.
일하러.
***
백운천 회의실엔 세 사람이 있었다.
이태천과 백도희, 한재임이다.
두 남자는 조용히 앉아 벽에 걸린 TV를 바라봤다.
TV엔 ‘곧 백도운 헌터 기자회견 시작!’이라는 자막이 쓰여 있었다.
회의실의 유일한 여자인 백도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이태천이 이상하게 바라봤다.
“웬 기도야?”
“…왜겠어요. 걱정돼서지.”
“그렇게 걱정되면 따라가지.”
“설명했잖아요. 우리가 가면-”
“그래, 그래. 이목이 우리에게 쏠릴 거라고. 오늘은 도운이만을 위한 자리가 돼야 한다고.”
“…….”
“알면서도 한 말이야.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도운이 뭐 애야?”
“흠, 흠!”
그녀는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나이로 치면 도운이 두 살이나 더 많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인지 자꾸만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잘 할 거야.”
“…네.”
“오히려 잘못하면 곤란하다.”
한재임이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이태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왜 곤란해?”
“저곳에 있는 기자들은 전부 배수현이 데려온 이들이다.”
“그래서?”
“질문이 전부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응? 그런 짓을 왜 해?”
“쓸데없는 거 물어보지 말라는 거다.”
“쓸데없는 거?”
“오라버니가 더 잘 알지 않아요?”
“내가?”
백도희는 오른손을 들고는 그에게로 내밀었다.
마치 그녀의 오른손에는 마이크가 쥐어진 것만 같았다.
“유명 여배우 M양과 사귀는 사이라는 말이 사실입니까?”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얼굴 한 번 마주친 게 단데 사귀긴 뭘 사귀어.”
“세계적인 모델 C 씨와 열애 중이라는데, 정말입니까? 정말이라면 언제부터 사귀신 겁니까?”
“그쪽은 모델이 아니라 헌터로서 만난 거. 백운천에 가입하고 싶다고 해서. 당연히 거절했고.”
“…뭐, 그렇다 쳐요.”
“치는 게 아니라 그런 거라니깐.”
“네, 네.”
“아무튼…. 이해했어. 그런 거 물어보지 못하게 사전에 차단했다는 거지?”
“그래. 질문지에 대한 답은 당연히 내가 써줬다. 백도운은 그걸 외우기만 하면 그만이야.”
“그럼 문제없겠네.”
“그래서 잘하지 못하면 곤란하다고 한 거다.”
“아항.”
이태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말한 대로 기자회견은 별문제 없이 흘러갈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
백도희는 다르게 판단했다.
그녀와 같은 백 씨 성을 가진 남자 때문이었다.
백도운.
그는 대답이 전부 정해진 기자회견 따위 얼마든지 망칠 수 있었다.
빳빳한 지폐를 구겨 공처럼 만드는 일쯤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버리는 인간이었으니까.
곧 이태천과 한재임도 그 불편한 진실을 떠올렸다.
“…….”
“…….”
꼬옥…!
백도희는 다시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하얀 손이 더 하얗게 질렸다.
“…역시 기도를 해야겠어요.”
그녀가 신에게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리기로 정한 순간,
– 세계에서 둘뿐인 A+급 헌터죠? 백도운 헌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 네, 이제는 사라진 울릉도 게이트에서 친구가 된 이무기도 함께 들어오고 있네요.
– 유일한 팀원인 이성훈도 있군요.
TV 속에 도운이 등장했다.
그는 평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어이쿠.”
“저 등신이….”
문제는 평소와 너무 똑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도운은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며 입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