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475
제477화
최희석은 헌터 협회에서 그에게 마련해준 방에 홀로 앉아 자작하고 있었다.
호록….
소주를 따른 맥주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켠다.
그의 손에 들린 맥주잔은 작은 소주잔처럼 보였고, 소주가 많이 따라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맥주잔을 한번 비울 때면 소주병에 담긴 내용물이 반 가까이 비워지기 일쑤였다.
탁.
맥주잔을 내려놓은 최희석이 정면에 있는 소파를 응시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친한 동생, 한진환이 제 방 침대처럼 누워 지냈던 소파였다.
“…무슨 일인가?”
소파를 보던 최희석이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그 뒤로 향한 것이었는데, 그곳엔 어느새 조우민 협회장이 서 있었다.
파란 무기 침낭을 몸에 두른 채로.
“너와 대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 대답하며 조우민 협회장은 깡충깡충 맞은편 소파로 뛰어가 앉았다.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한진환 대신 이상한 꼴을 한 친구를 보게 된 최희석은 눈을 찌푸렸다.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조우민 협회장은 제 할 일을 했다.
품속에서 웬 위스키병을 꺼내 소주병 옆에 내려놓았다.
“그건….”
“맥켈란. 진환이 좋아하던 위스키지.”
“…….”
“마실 거지?”
조우민 협회장은 최희석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공간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공간에서 다시 빠져나올 때, 그의 손엔 컵 두 개와 얼음통이 들려 있었다.
탁, 탁. 쪼록….
컵에 빙산 같은 모양의 얼음을 놓고 맥켈란을 따른다.
황금빛 술이 잔에 담기는 모습을 보면서 최희석은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아네.”
“…….”
“그런 일은 없을 거니, 걱정하지 말게.”
“그런데 대낮부터 소주를 마셔? 바빠서 몸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은 이 상황에?”
“…….”
최희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전적으로 옳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며칠 후면 블랙 드래곤 토벌이 시작되는데, 그전에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현재 협회의 모든 이들이 협회가 생겨난 이래 가장 바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오죽하면 대기 명령을 받았던 안지민조차 나와서 다른 직원들이 할 일을 대신했겠는가.
최희석 또한 협회 소속 헌터였으므로 바쁘게 일하고 있어야 했다.
직책이 높은 만큼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지금 이렇게 소주나 마실 때가 아니었다.
“음욕의 마녀의 처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알아.”
“…….”
“나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고.”
스윽. 찰랑….
조우민 협회장이 잔에 따른 맥켈란을 최희석 앞으로 밀었다.
최희석은 내용물이 찰랑거리는 위스키 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적절한 판결이었어.”
“적절한 판결이었다고? 그게?”
최희석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음욕의 마녀가 받은 판결은 무기징역이었다.
하지만 갇히게 된 장소는 감옥이 아니라 그녀가 지금껏 지내왔던 보육원이다.
평생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게 됐다고 해서, 그런 곳에서 지내는 것을 과연 벌(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최희석의 생각을 아는 조우민 협회장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음욕의 마녀라고 불리긴 했지만, 사실 그녀가 한 일은 칠죄종이라고 불리기엔 별것 아닌 일들이었어. 가장 큰 사건이 진환과 싸웠던 것일 정도니까.”
“하지만 여러 사람을 유혹하고 세뇌해 이용한 범죄자인 것은 달라지지 않지.”
“그렇지. 그런데 그게 또 정상참작이 가능한 일들이라…. 그녀에게 당한 놈들 대부분이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범죄자들이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
“선량하고 불쌍한 피해자들이 아니다 보니, 애초에 형량이 그리 높지 않았어.”
“그럼….”
최희석이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도 조우민 협회장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말을 예상했다.
그럼… 진환은?
진환의 시간을 고정해버린 죄는?
조우민 협회장은 최희석이 조용히 삼켰던 말에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뭐라고…?”
황당한 듯 되묻는 최희석을 보며 조우민 협회장은 반으로 접힌 쪽지를 건넸다.
쪽지는 반으로 접히기 전에 완전히 구겨졌었는지 구깃구깃한 곳이 많았다.
최희석이 구겨진 쪽지를 건네받으며 물었다.
“이게 뭔가…?”
“진환이 내게 남긴 편지.”
“……!”
“대체 언제 다녀간 건지, 이 침낭 주머니에 남겨놓았더라고.”
“뭐라고 쓰여 있었나…?”
“네가 직접 보면 될 걸 뭘 물어?”
“…….”
그 말에도 최희석은 반으로 접힌 쪽지를 펼치고 읽지 않았다.
조우민 협회장이 내밀었던 맥켈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듯이 제 손에 들린 작디작은 쪽지를 멀거니 보았다.
팔랑….
하지만 그는 결국 펼쳐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생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흔적이었으므로.
[난 이미 용서했어.] [그러니까] [시시콜콜하게 따지지 마시라고.]아주 짧은 쪽지를 읽은 후 최희석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쪽지 내용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란 것은 이미 읽기 전에 예상한 바였다.
바로 펼쳐 읽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또한, 이 쪽지가 구겨진 이유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조우민 협회장이 쪽지를 읽고 꽉 쥐었을 테니.
“웃기는군….”
최희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 맥켈란이 든 잔에서 얼음이 녹아 움직이는 달그락 소리가 났다.
“진환이 용서했으니 나도 용서하라고?”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조우민 협회장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왜 자신한테 묻냐는 듯한 태도에 최희석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최희석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조우민 협회장이 말을 이었다.
“난 그저 전달했을 뿐이야. 진환이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를.”
“…….”
“…한 가지 덧붙여 말할까.”
“……?”
최희석은 말없이 조우민 협회장을 향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 태도가 곧 대답이 되었으므로 조우민 협회장은 첨언을 말했다.
“당사자가 용서했는데… 제삼자인 우리가 왈가왈부하는 것도 웃기는 것 아닐까?”
“…….”
“물론 네게 그녀를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야. 친하게 지내란 말은 더더욱 아니고.”
“…….”
“그저… 네가 진환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그 뜻대로 해주는 게 어떻겠냐는 거지. 그게, 먼저 떠나보내고 남은 우리가 녀석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최희석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 말을 들었다.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기에 조우민 협회장은 그가 다시 말하기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슥….
1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원체 고민을 길게 하지 않는 최희석은 금방 행동을 취했다.
손에 들린 쪽지를 반으로 접고는 조우민 협회장에게 건넨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 있다.”
“무슨 부탁일지 알 것 같긴 한데…. 일단 들어보자. 뭔데?”
“음욕의 마녀…. 그녀를 제대로 조사해다오.”
“아, 역시.”
“난 그녀를 정말로 믿어도 되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 도운… 아니. 그들 모두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확인이라….”
달그락….
조우민 협회장은 손을 뻗어 맥켈란이 담긴 잔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고 코에 갖다 대며 향만 맡았다.
시나몬 향과 시트러스 향이 은은하게 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탁….
그는 끝까지 마시지 않고 향기만 맡은 후 도로 내려놓았다.
“그럴 필요 없어.”
“조우민.”
“그녀는 이미 현재 교황이 보증했어. 그런데 조사를 왜 해? 시간만 아깝지.”
“…음욕의 마녀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지.”
“그건 네가 현 교황의 과거를 몰라 하는 소리야.”
“……?”
“프란치스코 2세. 그 영감이 교황이 되기 전에 뭐였는지 알아?”
“모른다만….”
최희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헌터 협회의 베테랑으로서 여러 정보를 알고 있는 그였으나 교황청의 정보는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았다.
교황의 약력 정도는 들어봤을 법도 하지만, 말 그대로 들어만 봤을 뿐 자세하게 알지는 못했다.
심지어 교황청은 특히 비밀이 많은 장소였기에 모든 정보가 진실한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단 심문관장.”
“……!”
당황스러운 최희석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요즘 세상에 이단 심문관이란 게 있을 줄 몰랐던 거다.
최희석이 느끼는 당황스러움을 이해한 조우민 협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은 직책만 남아 있는 자리이기는 해.”
“아.”
“한데, 중요한 건 이단 심문관장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출중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능력? 그게 뭔가.”
“거짓을 파악하는 능력.”
“……!”
“즉, 프란치스코 2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진위(眞僞)를 잘 파악하는 인간이란 뜻이야. 그런 인간이 괜찮다고 보증했다면, 그것으로 끝이고.”
“그렇군….”
“원래 교황은 마녀의 심장을 봉인하려고 하지도 않았었다더라. 하지만….”
톡.
조우민 협회장이 말끝을 흐리며 검지로 최희석의 가슴을 가리켰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 더욱 강조한 것이었다.
그것이 잘 통했는지 최희석은 조우민 협회장이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을 알아차렸다.
최 클라우디아 수녀의 심장은 봉인된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 부탁했다는 건가?”
“그래, 맞아. 교황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구태여 부탁했다더군.”
그리 대답하며 조우민 협회장이 다시 맥켈란이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코로 가져가 향을 맡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최희석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달그락….
얼음이 조금 녹아 내려앉는다.
황금빛의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에 최희석이 시선을 옮겨 잔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가 이름이라도 부른 듯한 반응이었다.
조우민 협회장은 최희석이 한진환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잔을 바라보며 동생을 보고 있을 최희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얼마든지.”
“자네는 용서했나?”
“웃기는 걸 묻네. 진환이 용서했다고 나까지 할 필요는 없지.”
잔을 보던 최희석의 시선이 올라왔다.
한진환의 부탁에 용서한 줄 알았더니?
그리 묻는 듯한 시선을 마주 보면서 조우민 협회장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녀석의 뜻엔 따라줄 생각이야. 그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단, 그녀가 룰을 어기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
“어길 경우엔… 백도운에게 경고한 대로 후회하게 되겠지. 나도, 놈도….”
“…그런가.”
최희석이 한숨을 내쉬듯이 중얼거렸다.
세계수 관리인이자 S급 헌터인 백도운이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에도, 최희석은 가능 여부를 따져 묻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럴 수 있다는 듯이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그가 조우민 협회장이 어떤 인간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세상만사 다 귀찮은 듯이 구는 인간이 한 국가의 헌터 협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
이내 결심한 최희석이 손을 뻗어 잔을 집었다.
잔에 담긴 얼음이 부딪쳐 달그락 소리를 냈다.
“용납은 되지 않지만, 자네 말이 맞긴 해. 진환이 용서했는데 내가 꿍해 있는 것도 우습군.”
“…잘 생각했어.”
슥….
조우민 협회장이 최희석의 말에 동조하며 잔을 내민다.
건배하자는 뜻인 걸 인지한 최희석은 바로 손에 쥔 잔을 내밀었다.
툭…!
허공에서 서로의 잔을 맞부딪친 그들은 바로 맥켈란을 마셨다.
얼음으로 차가워졌을 텐데도 목을 넘어가는 위스키는 뜨거운 차를 마신 듯 화끈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귓가에 맥켈란을 함께 마셨던 남자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소리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충분히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한진환이 옆에서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하…!”
“하하….”
두 남자는 살풋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