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481
제483화
「이쯤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관리인.」
빠르게 날던 무기가 멈춰 서고는 내게 조언했다.
세계수를 소환하고 빛의 성역을 발동하자는 소리였다.
무기의 말에 주변 지형을 빠르게 파악함과 동시에, 전방에서 느껴지는 블랙 드래곤과의 거리도 가늠했다.
“…확실히,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블랙 드래곤이 있는 곳에서 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다.
여기서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블랙 드래곤이 토벌대를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았다.
운석을 떨어뜨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후욱….
무기가 바닥으로 내려왔고, 토벌대원들이 질서를 지키면서도 빠르게 내렸다.
딱 한 사람.
리롄제만 빼고.
이 영감탱이가 정말….
“안 내려가고 뭐 합니까?”
“잠시만… 아주 잠시만 더 있으면 안 되겠나?”
되겠냐?
그런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예의 바른 한국인으로서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반말하는 것이 영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수가 관리인을 황당하게 바라봅니다.]“…….”
“…알았네. 알았어. 내려가면 되지 않나!”
얼씨구.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이러는 거람?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롄제는 혀까지 차며 계속 투덜거렸다.
“쯧쯧…. 이렇게 노인을 공경할 줄 몰라서야, 원…!”
놀고 있네.
이런 상황에 비속어 안 썼으면 충분히 공경해준 거 아닌가.
마음 같아선 노인 공격하고 싶은데 말이다.
[세계수가 관리인을 빤히 응시합니다.] [예의 바른 한국인은 어디 갔느냐고 질문합니다.]새싹이의 메시지와 무기에서 내려오는 리롄제를 무시하며 이자벨 성녀를 돌아봤다.
그녀는 다른 사제들과 둥글게 모인 채로 십자가 모양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앞서 계획했던 대로 빛의 성역을 발동하기 위한 준비를 끝마친 거다.
이자벨 성녀가 도희를 돌아봤다.
“자매님, 시작할까요?”
“네. 먼저 시작하시면, 바로 이어나갈게요.”
그리 말하면서 도희도 이자벨 성녀를 따라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린다.
알루키노르의 송곳니로 만든 흰 지팡이의 머리 부분에 새하얀 빛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두 성녀와 사제들이 들어 올린 지팡이에 빛의 마나가 눈부시게 모여 베르동 협곡 게이트를 밝게 비췄다.
“음…. 눈이 멀 것만 같은걸?”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릴 때였다.
새싹이가 푸르스름한 메시지를 연달아 보내왔다.
왠지 재촉하는 것 같아 확인해보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세계수가 나뭇가지를 휘둘러 관리인을 재촉합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걸 구경하지 말고, 어서 빨리 자신을 소환하라고 전합니다.]새싹이의 귀여운 재촉에 미소를 지으며 드넓은 대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세계수 소환.”
바로 새싹이를 소환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몸속에 충만했던 마나가 소실된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이 활짝 트였던 대지에 새싹이가 푸른빛을 뿜어내며 순식간에 자라났다.
두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함에 우리 새싹이의 모습은 위용이 넘쳐났다.
저 모습만 보면, 시스템 창으로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보내는 개구쟁이란 걸 알 수 없을 듯하다.
“오오…! 저것이, 세계수의 진체(眞體)!”
“이럴 수가! 온몸에 힘이 넘쳐흐르잖아…?”
“이 힘이라면, 흑룡과 충분히 싸울 수 있겠어!”
“세계수…님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버프와 회복이 되는 모양이군요….”
“놀라워라.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실감하니 색다른 기분이네요.”
“으음….”
“흠, 흠!”
리롄제의 제자들과 밀러의 학생들이 각기 다른 반응으로 감탄했다.
그들과 달리 교황청 사제들은 감탄스러운 마음을 자중하는 느낌이었다.
신을 모시는 자들이라 그런 것인지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을 조심하는 것 같았다.
반면,
“우후후…!”
“암! 처음 보면 놀랄 수밖에 없지!”
“우리도 그랬었으니까. 하하!”
백운천 녀석들은 실실 웃으면서 잘난 척을 했다.
나도 가만히 있는데 왜 저놈들이 난리인 걸까.
누가 보면 자기들이 키워낸 줄 알겠어.
눈썹을 찌푸리는 것으로 어처구니없는 마음을 표출하던 순간이었다.
『어서 오너라.』
블랙 드래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토벌대원들이 기겁하는 모습을 보며, 핵심 전투원들을 돌아봤다.
끄덕. 끄덕. 끄덕….
태천이, 밀러, 리롄제 등 세 사람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발언권을 넘겨준 것이다.
“흠….”
하지만 난 말하기에 앞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블랙 드래곤은 우리가 게이트에 진입했던 걸 이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야 인사를 전해왔다는 것은….
기다린 건가?
우리가 모든 준비를 끝마칠 때까지?
정말 그런 것이라면, 여유롭다고 말해야 할지 오만하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쉽겠구나, 세계수 관리인이여.』
갑자기 뭐가 아쉽다는 걸까.
조용히 서 있자 블랙 드래곤이 말을 이었다.
『세계수 말이다. 저번에 봤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전혀 성장하지 못했어.』
“아.”
세계수의 성장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여를 살해하려면, 지금 성장도로는 무리이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냐?”
『당연히.』
“그래. 그렇게 상상력이 부족하니까 등신같이 아바돈한테 뒤통수를 처맞았지.”
『…….』
꿀꺽…!
토벌대원들 목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났다.
누가 침을 삼켰는지 찾을 필요도 없었다.
내 시야에 들어온 모든 대원이 침을 삼켰고 숨을 들이켰으니까.
심지어 무기와 임페일조차도 눈을 부릅떴다.
유일하게 태천이만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모욕적인 말을 할 걸 믿어 의심치 않은 모습이었다.
『꽁지 휘날리며 도망쳤던 주제에 자신만만하구나. 왜? 오늘은 동료들이 곁에 많으니,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으허허?”
황당한 소리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내가 동료 많다는 소릴 듣다니….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도희와 태천이에게 “친구가 없어 걱정이야.”라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관리인이여.』
블랙 드래곤이 황당함을 느끼는 나를 부른다.
『자격 없는 자들은 데리고 와봐야 달라질 것 없다.』
“뭐?”
『그런 의미에서, 여가 직접 선별(選別)해주겠노라.』
“선별한다고?”
『자격이 없는 놈들까지 상대하기엔 여가 너무 귀찮거든.』
“귀찮으면 그냥 숨 참고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
히익…!
토벌대원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황청 사제들이 이자벨 성녀에게 속삭이고, 밀러의 학생들이 밀러에게 소곤거린다.
아마 내게 준 발언권을 다시 빼앗아와야 하지 않겠냐는 내용의 대화를 하는 듯했다.
바보 같긴.
인류를 멸망시킬 생각으로 가득한 블랙 드래곤을 정중하게 대해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먼저 무례하게 군 것은 저쪽이었는데 말이다.
『…여가 명한다. 꿇어라.』
뜬금없이 뭐래, 이 도마뱀 놈이.
명령을 들은 내 머리가 평소처럼 팽팽 돌았다.
곧바로 반발을 일으킨 거다.
그런데….
“……?”
털썩!
털썩털썩!
주변에 서 있던 토벌대원들이 하나둘 땅에 무릎을 처박듯이 꿇기 시작했다.
왜들 저래?
의문이 떠올랐을 때, 자리에서 멀쩡한 건 열 명과 두 마리뿐이다.
날 포함한 핵심 전투원 넷, 도희와 한재임, 이자벨 성녀, 리우이호와 진지우, 머리를 한 갈래로 땋은 여성.
이들을 제외한 모두가 땅에 박아넣듯 무릎을 꿇었다.
아무래도 이게 블랙 드래곤이 말한 선별인 모양이었다.
“진호우.”
“…죄송합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요.”
리롄제의 낮은 부름을 들은 진호우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은 듯 몸을 비틀지만 두 다리는 요지부동이다.
도희도 백운천 녀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못 일어나겠어요?”
“끄응! 이런 씨…!”
“어. 끄떡도 안 해.”
최희주의 욕설 뒤로 이현욱이 대답했다.
다른 녀석들도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퍽퍽!
몇몇은 일어나고 싶은 마음에 제 다리를 때리기도 했는데, 소용은 없었다.
대단하긴 하군.
겨우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무릎을 꿇리다니….
그때, 임페일이 짐작하듯 말했다.
「왕의 격(格)…인 것 같다. 관리인.」
“격? 그게 뭔데?”
「종의 절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힘이지.」
“그런 게 있어?”
「있다. 아마… 짐도 세계수의 권속이 아닌 상태였다면, 방금 무릎을 꿇고 말았을 것이다.」
“허어….”
그런 재주가 있었다니….
아니, 그보다 알고 있었다면 미리 말 좀 해줄 것이지.
토벌대 괜히 꾸렸잖아?
백운천 녀석들한테 영약 먹인 것도 아깝고.
이럴 줄 알았으면 도희랑 태천이에게 몰아서 줄걸….
그렇게 따지듯 바라보자 임페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짐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지식은 있었으나 믿지 않았었다.」
“아항….”
하긴.
임페일은 뱀파이어 로드로서 제 고성에서만 살았었다.
그동안 드래곤과 만날 일은 없었겠지.
격돌할 일은 더더욱 없었을 거고.
무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걸 보니 전혀 몰랐었나 보다.
용이 되고 싶은 이무기이면서 모르고 있었다니, 좀 웃긴걸.
“즉. 다들 무릎을 꿇은 게 마법에 따른 것이 아니란 뜻인가요?”
「그렇다. 관리인 동생이여.」
“해제 포션은 통하지 않겠군요.”
「그야 당연한 일….」
임페일이 힘없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삐이이이…!
이자벨 성녀가 바로 신성 마법을 썼지만,
“…제 기도로는 무리인 것 같네요.”
당연하게도 꿇은 무릎을 다시 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문일까?
“…….”
“…….”
“…….”
침묵이 내려앉았다.
임페일 말대로 정말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힘이었다.
새싹이를 소환하고, 빛의 성역을 발동한 데다가, 최상급 버프 포션을 복용한 후, 교황청 사제들의 축복 기도까지 받았건만….
그까짓 말 한마디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니.
『이제 알겠느냐?』
블랙 드래곤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껏 조용히 있었던 건, 토벌대원들이 절망을 천천히 곱씹을 수 있도록 기다린 것이리라.
『이런 것이다. 여와 싸운다는 것은.』
“…….”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토벌대원들의 얼굴에 새겨지기 시작한 좌절감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다.
지금은 그들의 감정 따위보다 상황을 파악해야 할 때였다.
말 한마디에 무릎을 꿇은 토벌대원들….
저 사람들을 데리고서 토벌을 더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후방 지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들은 민폐 덩어리에 불과했으니까.
서둘러서 저들을 내보내는 수밖에 없겠다.
지금 상황에 저들을 빠르게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저희한테 맡겨줘요.”
내 고민을 끊어내듯 밀러가 나섰다.
그녀와 그녀의 제자인 머리를 한 갈래로 땋은 여성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순간이동 마법으로 모두를 한꺼번에 데리고 나갈 생각인 듯했다.
『그만.』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능력자용 마나 수갑을 찬 사람처럼 두 사람이 끌어 올린 마나가 곧바로 흩어졌다.
블랙 드래곤의 주특기인, 마법을 봉인하는 마법이었다.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인데도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이 새삼 대단했다.
“앗….”
밀러가 난색을 보이는 가운데, 블랙 드래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몰아넣었다….
그리 생각하는 걸까?
어쩐지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여의 선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느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무릎을 꿇게 한 것이 다가 아니었나.
이제 와서 뭘 더 하려고?
『필요 없는 것은 사라져야 옳지 않겠느냐?』
“아. 자살하려고? 잘 생각했네.”
『…….』
“…아니야?”
이거 웃긴 새끼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놈이 그런 말은 왜 한 거야?
설마 한재임을 없애고 싶다는 개소리는 아닐 테고.
『‘데메르고(dēmergō)’….』
블랙 드래곤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울렸다.
데메르고.
‘가라앉히다’ 혹은 ‘덮다’라는 뜻의 라틴어였다.
뭘 덮고 가라앉히려는 걸까.
그리 생각한 순간,
“……!”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