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got the world tree in my phone RAW novel - Chapter 69
제69화
블랙 만티코어는 한라산 게이트의 왕이다.
온종일 산 정상에 누워 나태한 모습을 내보인다.
그 모습은 천성이 게을러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온전히 비축하기 위해서다.
제 영역에 발을 들이민 존재를 무자비하게 물어뜯고 찢어발기고자 송곳니와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쩝, 쩝!”
지금 그런 왕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낱 먹이가 되어있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새 왕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진다.
새롭게 왕이 된 그것은 블랙 만티코어와 외형이 비슷했다.
사자의 풍성한 갈기와 굵은 몸통, 박쥐의 날개, 독침이 날카로운 전갈의 꼬리 등등.
다만, 딱 하나 다른 것이 있었다.
바로 머리다.
블랙 만티코어는 사자의 머리가 달려 있었으나, 새로운 왕의 머리에는 사자의 그것이 달리지 않았다.
핼쑥한 인간의 머리.
지상욱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지상욱…!”
그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상욱이 생기가 없는 눈으로 고개를 쳐들고 주변을 돌아봤다.
입에 문 고깃덩이에서 붉은 핏덩이가 뚝뚝 떨어졌다.
헌터들이 각자 무기를 뽑아 든 채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공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 때문이다.
동료는 아니었지만, 같은 게이트를 도는 헌터로서 서로 안면을 튼 사이였다.
그것이 그들의 실수였다.
선공권을 그에게 빼앗긴 것이다.
몸이 만티코어처럼 변한 지상욱이 헌터들을 덮쳤다.
“막아!”
“아니, 막지 말고 피해! 우리 수준으로는 못 막아!”
또 한 가지 실수.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파티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세 개의 파티가 급하게 하나로 합쳐진 상태였고, 오더를 내릴 사람을 정확하게 정해 둔 상태가 아니었다.
“헉, 피해! 무조건 피해!”
가까스로 지상욱의 발톱을 피한 헌터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발톱에 부서진 땅바닥이 부식되는 것을 봐서다.
맹독이었다.
막지 말고 피하라던 헌터가 소리쳤다.
“이제 오더는 내가 내려!”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 그녀가 가장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격을 이어 나가는 지상욱을 보면서 그녀가 오더를 내렸다.
그 덕분일까?
손발이 맞지 않았던 헌터들이 빠르게 합을 맞춰 나갔다.
서로의 실력과 버릇을 파악해 파티 플레이가 어설프게나마 이어졌다.
물론, 겨우 그뿐이었다.
아무리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간다고 해도 눈앞의 괴물을 상대하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톱니바퀴들 전부를 부숴 버릴 힘을 지니고 있었다.
전선을 유지하지도 못하고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
“어?”
그때였다.
헌터들을 맹렬히 공격하던 지상욱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등에 달린 박쥐의 날개로 낮게 날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렇다. 원래 있던 곳이다.
아직 다 먹지 못한 고깃덩이가 놓여 있는 곳.
“사, 살았다…?”
발톱에 독이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던 헌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열 명의 헌터가 동시에 그 헌터를 노려봤다.
‘살았다.’
‘해치웠나?’
‘돌아갈 수 있어!’
그 말들은 헌터들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하고 듣게 되면 재수가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헌터들은 더 재수가 없어지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이대로 도망치기 위해서다.
“멈춰…!”
오더가 내려왔다.
헌터들은 곧바로 물러나던 발을 멈췄다.
왜 멈춰 서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해가 가지 않지만, 오더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 그것이 그들이 헌터로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멈춘 채로 오더를 내린 헌터를 쳐다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지상욱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상욱은 고깃덩이를 물어뜯으면서도 시선은 헌터들을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헌터들은 깨달았다.
먹잇감과 멀어져서 일단 되돌아갔지만, 새 먹잇감들이 도망치려 한다면 다시 쫓아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살려 주지 않고 끝까지 가리라는 것을.
그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사냥감이 돼 버린 신세를 저주했다.
“빌어먹을!”
“이게 다 네가 살았다고 말해서 그런 거잖아.”
“잉? 이걸 내 탓을 한다고?”
“그럼 누구 탓을-”
“그만들 해요. 방어선 구축하는 게 먼저니까.”
헌터들은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고 바로 움직였다.
더 멀어지지만 않으면 공격해 오지 않는다.
그것은 곧 지상욱이 다시 공격해 올 때까지 대비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귀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물 함정 따위들을 설치하는 등 방어선을 구축했다.
물론, 그들도 알고 있었다.
급조한 방어선 같은 것은 별 힘도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거라는 것을.
그러나 불편한 진실을 굳이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1분 1초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서 방어선을 계속 구축할 뿐이다.
“새싹아, 정말 그렇게 느낀 거 맞아?”
그때,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들은 고개를 돌려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곧 목소리의 주인은 그들에게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생각해 보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도 그들의 입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목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들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형이 왜 너를 의심해?”
“겨우 이런 거로 삐지지 말고. 응?”
“형 말 듣고 있니? 저기, 새싹아? 백 새싹?”
한 남성이 혼자 중얼거리고 서 있다.
머리를 뒤로 묶은 남성은 통화나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게이트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들고만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상대방과 통화를 하는 것처럼 화면을 들여다보며 연신 말을 걸고 있었다.
순간, 헌터들의 머릿속에 ‘미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미친 사람이라면 게이트 관리인이 들여보내 주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게이트의 마나 압박에 짓눌려 죽었을 터였다.
그럼 저 남성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의문을 품고 쳐다보고 있는데, 남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때마다 꽁지머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백도운…?”
오더를 내렸던 헌터가 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제야 다른 헌터들이 그를 알아봤다.
헌터들은 아는 것을 본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한 마디씩 떠들어 댔다.
“맞네! 백도운이네!”
“백도운? 그게 누군데?”
“아, 왜 있잖아. 요새 TV만 틀면 나오는 그 양반!”
“TV? 아, 백도희 오빠라는?”
“그래, 그 사람!”
“그런 대단한 사람이 여기 왜 있어?”
조잘대던 헌터들의 시선이 도운에게로 향한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막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 우선 퀘스트부터 깨자.”
도운은 이상한 말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헌터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빙긋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괴물을 눈앞에 둔 사람 같지 않게 해맑게 웃는다.
그 때문에 헌터들도 평화롭게 인사해 버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휴, 다들 저놈 하나 때문에 수고가 많으시네요.”
“네? 아닙니다. 수고는 무슨…. 어, 네?”
“앞으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괜찮죠?”
“그야 당연히….”
“그럼 얘기 다 된 겁니다. 저건 내 거예요.”
그러고는 그는 헌터들을 지나치며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헌터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공통으로 떠올랐다.
한 헌터가 생각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나사 하나 빠진 새끼 같은데?”
열 명의 헌터가 동시에 그 헌터를 쳐다본다.
그 헌터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왜. 맞잖아? 너희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
헌터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앞을 바라봤다.
지금 중요한 건 그들의 생각 같은 게 아니었다.
그가 A급 헌터 김무연과 싸워 이긴 남자라는 점이 중요했다.
특히 하트 브레이크를 사용해 S급 헌터의 전투력을 지니게 됐던 김무연을 죽인 실력자라는 점이 중요했다.
그라면 혼자서도 괴물이 된 지상욱을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어, 어? 저렇게 가면 어떡해?”
누군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운은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갑옷도 착용하지 않아 캐주얼한 옷차림이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기와 갑옷은 꺼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봐-”
“기다려! 지상욱이 이쪽 쳐다본다!”
헌터들이 재빨리 무기를 꼬나쥔다.
전투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걸어 나간 도운이 왼팔을 들더니 손바닥을 아래로 내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모인다. 현재 그들이 오더로 정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운의 뜻에 따르고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이 살아남을 길은 그의 말을 잘 듣는 것이었다.
설령 그가 나사 하나 빠진 사람 같아 보여도.
“야, 오랜만이다?”
도운이 지상욱에게 말했다.
그에게 되돌아온 건 인간의 말소리가 아니었다. 짐승이 세차게 울부짖는 소리였다.
헌터들은 어이가 없어졌다.
지상욱은 어떻게 봐도 괴물이었다.
그에게 말을 걸어 봐야 돌아오는 건 괴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일 게 뻔했다.
그러나 도운은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람이면 짖어 대지 말고 말을 해, 인마.”
“크르으!”
“그래, 정 짐승처럼 대해 주길 원한다면 그래 주마.”
으르렁거리던 지상욱이 앞발을 숙이며 몸을 낮춘다.
앞서 열한 명의 헌터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의 모습이었다.
퍼억!
어느새 도운의 오른 주먹이 지상욱의 얼굴에 꽂힌다.
아니, 정확하게는 얼굴이 아니라 입에 꽂혔다. 그의 주먹이 이빨을 부러뜨린 채로 지상욱의 입으로 들어가 있었다.
“으, 더러워.”
입에서 주먹을 쑥 빼낸다.
그의 오른손엔 어느새 긴 유리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유리병은 깨져서 안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부서진 이빨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백도운?”
입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아닌 인간의 말이 나왔다.
흐리멍덩하던 눈에서는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본 헌터들은 당황했다.
설마 괴물이 된 지상욱에게 인간의 의지가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도운이 대체 지상욱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궁금했다.
웬 유리병을 던지는 걸 보고 어떤 포션을 먹였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괴물이 된 존재의 정신을 차리게 할 정도의 포션.
분명 희귀하고 값비싼 포션이었으리라.
“아, 아아! 백도운!”
“오, 덤비게?”
“부탁한다!”
“응?”
지상욱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입에서는 애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죽여줘…!”
그 말을 듣고서 헌터들은 침음을 흘렸다.
무슨 이유로 괴물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 변화가 그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상욱이 죽여달라고 부탁한 도운을 바라봤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예상했다.
‘알겠다, 지상욱. 그리 해주마.’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기사 이태천’이라면 분명 그런 식으로 말했을 테니까.
도운은 바로 그 기사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도 있듯이 그도 그의 친구처럼 대답할 터였다.
“죽여달라?”
“그래, 내 마지막 부탁이다. 제발 날 죽여줘.”
지상욱이 다시금 부탁을 해 왔다.
그 부탁을 듣고, 도운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은데?”
그의 입에서는 그들이 예상한 것을 크게 빗나간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