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50
제150화
36. 바람 앞 등불 (3)
“꼬리야말로 녀석의 원천이니. 저것들을 모두 베어 내야만 끝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차태양의 말대로 사로뫼는 답을 알고 있었다. 불완전한 상태인 삼두구미는 구미와 궤가 다른 존재 같아 여태껏 말을 아꼈단다. 천산에 좌정한 채 지내던 사로뫼가 어떻게 알고 있었나 했더니 다 구미를 낳은 여우 덕분이라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였는가. 볼수록 네 어미를 쏙 빼닮았구나.”
사로뫼는 구미를 낳은 여우에 대해 꽤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추측이지만, 영물이 되려다 요괴가 된 여우가 상당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귀 밝은 구미가 성벽 너머의 대화를 훔쳐 듣고 으르렁대며 경고했다.
“그 입 조심하라 했을 텐데요.”
왜인지 그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 굴할 사로뫼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보고 들은 게 많아지는 법이지.”
“고귀하신 영물의 왕께선 침묵의 미덕은 모르시나 봅니다.”
“군림하지 않는 왕도 있던가.”
대화의 맥락이라곤 손톱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사로뫼의 화법에는 구미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는 성벽이 깨질 때까지 우리를 관망하려던 계획을 집어치우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꼬리를 휘둘렀다.
강철보다도 단단한 꼬리가 성벽을 무너뜨리려던 찰나.
“영원이 아닐지라도.”
또 하나의 방벽이 나타났다. 깡-! 털로 뒤덮인 꼬리에서 난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힘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뻗은 윤수호의 손 끄트머리가 미미하게 떨렸다.
밀어내려는 자와 파고들려는 자. 지지부진한 승부는 한쪽이 자진하여 물러나며 종결되었다.
“성가신 벽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여우가 샐쭉 웃으며 힘을 뺐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닮은 아름다운 방벽이 검은 여우를 튕겨 냈다. 속절없이 나뒹굴던 요괴들과 달리, 구미는 반탄력을 이용해 다시금 복사나무 위에 안착했다.
하나를 깨부숴도, 그다음 하나까지 꿰뚫기에는 위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채고 물러난 듯했다. 구미는 사로뫼를 향한 화를 삭이고, 빠르게 작전을 선회했다. 금이 간 성벽으로 부닥치는 바람이 한층 맹렬해졌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5분.”
“충분해.”
격려와 감사를 담아 윤수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그러곤 이 사이를 못 참고 앞발을 핥는 호랑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구미가 전처럼 부활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차였다.”
사로뫼는 이전의 토벌에서 꼬리들의 시체를 처리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나기 전부터 강렬한 욕망을 내보이던 이가 아닌가. 구미는 그 어떤 요괴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작은 불씨를 놓쳤다간 언젠가 그것이 큰불이 되어 온을 덮치겠지. 마치 오늘의 삭월처럼 말이다.”
“불씨는 밟아 끄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다.”
산군의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다른 곳도 아닌 이 천산이 전장이거늘, 걱정할 것이 무어 있겠느냐. 정화의 힘을 깨우친 영매까지 있으니 후일의 염려는 접어 두고 한껏 부딪치거라.”
어르는 듯한 어조 사이 그의 결의가 엿보였다. 우리더러 부딪치라고 말했지만, 사로뫼는 누구보다 앞장서 싸울 것이다.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인벤토리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고 살피기 바쁘던 한차현이 대화의 주도권을 낚아챘다.
“공감하는 바입니다. 변수가 있었다고는 하나, 지금 이 상황은 상정했던 경우의 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지, 진형은 어젯밤 논의했던 대로 갈 건가요?”
“일단은요.”
깔끔하지 못한 지시였다. 뭔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잠시 안경테를 쓸며 몇 초간 침묵하던 한차현이 제 생각을 내뱉었다.
“힘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1대 다수의 구도가 좋지 못하다는 건 구미 역시 알고 있을 겁니다. 이미 여러 차례 저희에게 역공당했으니 방심하지도 않겠죠.”
“같은 의견입니다.”
내가 제 의견에 편승하자 한차현이 작게 미소 지었다. 다른 파티원들도 동의하는 바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용기를 얻어 내심 생각했던 가정을 공유했다.
“어제 짠 진형을 사용할 수 있을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여기서부터의 내용은 누출되면 곤란하다. 도깨비에게 도움을 얻어 소리를 차단했다. 곧바로 눈치챈 여우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해 보란 듯 몸을 늘어뜨렸다. 같은 순간, 성벽을 허물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저런 게 강자의 여유란 거겠지.
‘그 안일함이 네 숨통을 조일 거다.’
뭐, 시간을 끌어서 나쁠 게 없단 판단도 한몫했겠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문이 열린 정도를 가늠했다.
어느덧 새까만 융단 같은 밤하늘 위에 둥그런 문의 형상이 나타났다. 천산을 휘감은 하얀 숲도 거세게 풀썩였다. 혼나비들이 이곳으로 날아드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문이 열리기 전, 결판을 내야 하는 우리에겐 이런 비보가 없었다.
“아마 구미는 이전의 토벌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나올 겁니다.”
“……곤란하게 됐네요.”
가장 먼저 내 말뜻을 파악한 한차현이 낭패를 표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평소의 온유한 낯을 되찾고 다른 일행들에게 상황을 풀어 설명했다.
“메인퀘스트의 사령관들, 기억하시죠? 가호 씨는 구미가 그때처럼 여덟, 아니 아홉으로 갈라질 거라고 보시는 거예요.”
“무슨 근거로?”
“근거는 정황뿐이야. 하지만 확신해. 자기한테 유리한 판을 뒤집을 놈이 아니야.”
하나의 꼬리라도 살아남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다. 거기다 숫자에서 오는 메리트도 무시 못 하지. 구미가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영특한 자 아닌가.
이쪽의 전력은 일곱. 해랑과 도깨비까지 센다면 아홉이었으나, 둘 다 독립적인 전력으로 보긴 어려웠다. 도깨비는 신비한 재주들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 같이 전투와 거리가 멀었고, 툭 하면 예측을 벗어나는 어린 고래를 혼자 보낼 수도 없었다.
비슷한 계산을 했는지 윤수호가 냉큼 제 몫을 늘렸다.
“내가 셋을 상대하지.”
“세엣? 허세도 정도껏 합시다, 윤수호 헌터.”
“비꼬는 건가?”
“네가 남의 말을 꼬아 듣는 건 아니고?”
1분 1초가 금 같은 때에 뭘 하는 거야, 정말. 티격태격하는 신주와 윤수호 사이에 끼어들었다.
“신주 너 꼭 사람 속을 긁어야겠어? 그리고 윤수호 너도. 말투는 좀 그랬지만 신주 말에 틀린 거 없어. 왜 멋대로 혼자 짊어지려는 건데? 그거 파티원들 무시하는 거야.”
두 사람은 불만스러운 듯 입을 꾹 다물면서도 한 걸음 물러났다. 자기 잘못은 아는 모양이었다. 철없는 어른들을 보며 차태양이 웃음을 터뜨렸다.
와중에 구미의 인내심이 다 했는지 바람의 기세가 되살아났다. 성벽의 균열이 눈에 띄게 벌어졌다. 그를 본 사로뫼가 혀를 차며 나섰다.
“내가 둘을 맡으마.”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땅히…….”
“물러나십시오!”
제대로 대답을 듣기도 전, 윤수호가 나를 뒤로 당기며 지시를 내렸다. 윤수호의 등 뒤에 강제로 숨겨짐과 동시에 성벽이 허물어졌다.
탄식을 삼켰다. 이렇게 된 이상, 사로뫼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나.
‘정 위험하면 석등을 사용하면 돼.’
성정상 구미는 꼬리가 모두 베어진 뒤에도 마지막 발악을 할 거다. 그때를 위해 남겨 두고 싶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답시고 사로뫼의 안위를 위협하게 둘 순 없었다.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하게 생겼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의도한 것이 이것인가 싶어 혀를 찼다.
‘준비한 건 하나 더 있지만…….’
지금껏 도착하지 않은 걸 보니 실패한 모양이었다. 강 하류를 따라 천산에 왔을 이강토에게 확인차 질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괜한 질문으로 주의를 흐트러뜨릴 때가 아니었다.
‘실망할 일도 아니지.’
사람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헛헛함이 들어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담을 나누는 이강토와 신주를 보며 기분을 전환했다.
“깜짝이야. 꼬, 꼬리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오, 나이스 판단! 할 땐 할 줄 아는 양반이었네.”
이강토의 칼날이 연이어 바람의 잔재를 걷어 냈다. 신주의 칭찬에 이강토가 채신머리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일행의 곁을 비껴간 바람이 피가 말라붙은 머리칼을 엉망으로 헝클였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상황은 나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우리가 진형을 가다듬는 척을 하자마자, 구미는 연달아 세 바퀴 재주를 넘었다. 이내 아홉 마리로 불어난 여우가 뱅뱅 우리를 가두듯 둥글게 원을 그리며 뛰놀았다.
“일곱과 아홉. 어느 쪽이 우위인지는 명백하지요.”
얄미운 발언에 신주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여우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를 보고 더욱 약이 바싹 오른 신주가 사로뫼에게 손을 뻗었다.
“저거 내가 요절을 내고 만다! 호랑 님, 마커. 그러니까 내 표식을 박을 테니…….”
“에잇!”
“억, 소리소리!”
신주의 손바닥이 호랑이의 털에 닿으려던 그 순간, 도깨비가 포르르 날아들었다. 졸지에 도깨비의 뺨에 마커를 새기게 된 신주가 눈을 깜박였다. 반면, 도깨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편 채 외쳤다.
“산수도 못 하는 여우를 상대하자니 자존심이 상하네. 안 그래, 김 서방!”
“예?”
“다들 너무하다니까. 우린 여섯도, 일곱도 아닌 여덟이잖아!”
언제나처럼 웃는 낯이었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도깨비는 저를 전력에서 뺀 구미와 파티원들을 동시에 저격했다.
평소 도깨비에게 앙심이 있던 이강토가 곧장 반박에 나섰다.
“무, 무슨 자신감으로 큰 소, 소리래요!”
“모처럼 부정 탄 김 서방이 맞는 말 했네.”
“……?”
자그마한 몸에서 낯익은 이채가 흘러나왔다.
“오늘의 소리는 아주 큰 소리야!”
도깨비가 아흔아홉 갈래의 굴의 문지기, 그레고리를 꾸짖었을 때 본 그 빛이었다. 일행 중 홀로 그 정체를 알아챈 차태양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엑, 대왕님?”
차태양과 도깨비의 입에서 몇 번인가 언급된 적 있던 대왕님.
이전에 내 방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눴을 때 언뜻 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대왕님’은 도깨비들을 돌보는 왕으로 시대에 맞지 않은 힘을 보유하고 있댔다. 엄격하나 인정이 넘치는 그가 차태양을 거뒀다지.
‘균형을 지키기 위해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