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55
제155화
37. 도화 (3)
시체를 삼키는 여우가 끝내 마지막 선을 넘었다. 검은 꼬리가 덩굴처럼 복사나무의 둥치를 휘감았다. 입을 쩍 벌린 구미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포식에 바빴다.
여우가 복사나무의 껍질을 파헤치고 가지와 속살을 씹어 삼킬 때마다 꽃과 과실이 검게 물들었다. 피처럼 붉은 진액이 질질 흘러 섬을 적시고, 구슬픈 현악기의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참혹하게 물어뜯긴 복사나무가 지른 비명이었다.
구미라 하여 아무 타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신의 조각이 깃든 땅에 발을 들이니. 여우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일고 세 눈에서는 줄줄 피눈물이 쏟아졌다.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구미는 기행을 멈추지 않았다.
‘점점 커지고 있어.’
복사나무를 삼킬수록 구미는 거대해졌다. 몸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놈을 휘감은 검은 안개 역시 빠르게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탐색자의 눈으로 보면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남들과 다른 시야가 꼭 좋은 것만이 아니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안개가 품은 불길한 기운이 너무나 선명히 보였다. 안개가 짙어짐에 따라 점차 숨이 가빠 왔다.
“네 이놈!”
경악 어린 침묵을 깬 것은 사로뫼였다. 한달음에 섬으로 뛰어온 사로뫼가 불경한 여우를 나무에서 떼어 내기 위해 기를 썼다. 등불지기에게 공명한 석등의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걸 보자니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가호, 지금이 겁에 질려 손 놓고 있을 때야? 저거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사달이 날 거 안 보여?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높여 소리쳤다.
“다들 구경만 하실 겁니까!”
나만큼, 혹은 나 이상으로 굳어 있던 일행들이 퍼뜩 행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호수를 건너는 동안,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차오르는 달’에 ‘복제’를 적용.”
언제나 구미에게 잘 먹혔던 ‘차오르는 달’을 부여한 화살을 메겼다. 상극의 힘을 삼켰으니, 마나로드가 멀쩡할 리가 없다.
‘제대로 속을 뒤집어 주마.’
긴장을 숨기려 일부러 호승심 서린 다짐을 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웬일로 기민하게 내 기색을 읽은 해랑도 흰 화살을 소환해 띄웠다.
세 발의 흰 섬광이 검은 짐승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빛은 너무나 쉽게 꺼졌으니.
야심 차게 쏜 것과 달리, 화살은 구미를 감싼 안개를 뚫지조차 못했다. 파스스 흩어지는 흰 화살을 보는 내게 구미가 조롱하듯 말했다.
“아직 당신의 차례가 아닙니다.”
나와 눈을 맞춘 여우가 붉은 진액으로 젖은 주둥이를 핥았다. 의도가 물씬 풍기는 행동이었다.
‘이 나무 다음으론 날 먹겠다는 건가.’
눈살을 찌푸리자 구미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곤 이따 다시 오라 멋대로 명하며 나무를 감고 있던 꼬리 하나를 풀어 휘둘렀다.
순간 몸을 멈칫했다. 섬이 좁아 피할 곳이 빈약했다. 그리고 사로뫼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여러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허용될 정도로 느릿한 공격이 아니었다. 공격이 개시되자마자 호수에 몸을 던져도 피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으니까. 생각이 많아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잘못된 판단의 대가를 톡톡히 돌려받기 직전.
까강, 깡! 나보다 반 뼘은 작은 인영이 꼬리를 가로막았다. 헝클어진 회색 머리칼이 주인을 닮아 제멋대로 휘날렸다.
“가호가호, 설마 기죽은 거 아니지?”
“……누가.”
“까칠하게 구는 걸 보니까 아직 괜찮네.”
뒤로 질질 밀려나고 있는 주제에 박신주가 나를 달랬다.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긴장하고 있는 게 다 보였다. 껄렁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앙다문 입가를 보라. 숨 쉬듯 하는 게임 비유도 멎었다.
“가까이 오니까 더 장난 아니네.”
신주의 뒤를 이어, 일행들이 속속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반전되지 않았다.
금단을 어긴 구미는 강력했다. 쉴 새 없이 각혈할지언정 끝까지 신성한 나무를 씹어 삼켰으며, 그 결과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낸 것이다. 어쩌면 그가 첫입을 베어 문 순간, 승기는 완전히 기운 걸지도 모르겠단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사로뫼나, 파티원의 그 누구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두 쌍의 팔다리와 아홉 개의 꼬리만 있을 때도 승부가 되지 않았건만, 구미의 주변을 휘휘 돌기만 하던 안개에서도 팔다리와 꼬리가 튀어나왔다.
끝까지 구미를 저지하려던 일행들이 속속들이 호수로 추락했다. 놈이 꽃잎과 복숭아도 스스럼없이 삼킬 때쯤에 이르러서는 섬에 발을 디디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하.”
물속에서 빠져나오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걸로 몇 번째인지, 원. 함께 내던져진 파티원들이 수면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다들 내색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밤중 내내 이어진 싸움으로 모두가 지쳤다.
개중 가장 만신창이가 된 것은 사로뫼였다. 보금자리를 파괴당한 산군이 참담한 눈으로 섬을, 그리고 구미를 보았다.
구미는 끝내 작은 섬보다도 커다랗게 변했다. 그는 피폐한 꼴이 된 복사나무를 밟고 높이 도약했다. 허공에서 몸을 웅크린 그를 중심으로 검은 안개가 뭉쳤다. 마치 우화를 기다리는 고치처럼.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히든퀘스트, 홍복(?)– 제한 시간 : 00:04:59]
퀘스트 제한 시간이 5분 미만으로 떨어지자마자 하늘문이 완전히 열렸다. 마른 가지에 매달린 채 몸을 뒤척이던 혼나비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데서 의문을 해결할 줄이야.’
구미는 염라와의 거래로 무엇을 얻었나? 저승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마지막 의문의 답을 비로소 찾았다. 활짝 열린 하늘문에서 쏟아지는 작은 불꽃들, 아니 혼나비들을 황망히 올려다봤다.
하늘문에서 추락하는 붉은 나비와 그 문으로 들어가려는 잿빛 나비들이 뒤섞여 수라장을 이루었다.
염라가 무슨 수를 썼는지 나비들은 죄 제대로 날지를 못했다. 비틀비틀, 겨우 호수에 추락하는 것을 면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산의 혼나비들에게 흰 가루가 옮겨붙은 나비들은 더더욱 힘을 쓰지 못했다.
돌연 염라를 저지하겠다던 백아의 얼굴이 훅 떠올랐다. 아이가 제압에 성공했다면 혼나비들이 이쪽에 오지 않았으리라.
‘그 말은 곧…….’
그러나 이 짧은 걱정도 곧 내던져야만 했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를 넘기기 바빴으니까.
상황을 가늠하던 한차현이 나를 불렀다. 그가 입에 담은 것은 내 이름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함의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가호 씨.”
“예, 구미가 혼나비들까지 집어삼킨다면 정말로 걷잡을 수 없게 될 겁니다.”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이 된 기분이네요.”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명확한 지시를 내리던 한차현 마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할 만큼 전황은 절망적이었다. 복사나무 하나도 사수하지 못한 판에 저 많은 수의 나비를 보호할 수 있을 리가.
예고된 비극에 심장이 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비야, 안 돼! 여기 오면 안 된다고!”
부정이 엉긴 날개를 퍼덕이는 혼나비들을 보며 도깨비가 소리쳤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린 차태양도 숲에 뛰어들어 나비들의 비행을 막아 내고자 했다.
“너희라도……! 영명아, 부탁할게. 정말 마지막이야. 나 좀 도와줘,”
등롱을 꼭 쥔 아이가 축언을 외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매라 할지라도 귀환의 본능은 막을 수 없는 법. 차태양의 애처로운 몸짓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도 혼나비들은 매정히 제 갈 길을 떠났다.
참혹한 끝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검게 물든 꽃잎과 혼나비들이 검은 안개에 의해 뭉그러지는 꼴을 보며 차태양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 듣자니 무력감에 힘이 쭉 빠졌다.
점점 강해지는 적, 보이지 않는 활로, 다가오는 제한 시간.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때 문득, 내가 석등을 이용해 무언가를 해 보려 했음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저게 소용이 있을까하는 마음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했다.
괜한 짓을 했다가 일행들을 더 위험하게 할 것 같단 망설임이 더 커졌을 무렵. 이런 나를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한차현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격려했다.
“해 보세요, 가호 씨.”
“소용없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뭘 하려는 줄 알고요.”
“전 모르죠. 알려 주지 않으셨으니까요.”
놀라우리만큼 산뜻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어느 쪽이든 좋으니 전부 하고 오세요. 전력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쇳덩이처럼 무겁던 몸에 조금이나마 활력이 도는 듯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날 믿어 주는 이가 있지 않은가. 신뢰 어린 눈빛은 한껏 꺾였던 마음조차 살아나게 만들었다.
한차현에게 혹시 모를 공격을 막아 달라 부탁하고는 잇달아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절망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까지 꿋꿋이 타오르는 불빛을 향해 헤엄쳤다.
섬에 채 올라가지도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반신이 호수에 잠긴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석등을 향해 뻗어지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퀘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 포기하기엔 이르다. 다짐하듯 되뇌며 석등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이 산을 타고 흐르는 힘이 지하수라면, 이 석등은 그것을 길어 내는 우물이자 도르래였다. 거기에 조정을 가해, 천산 전체에 고르게 분배되는 힘을 이곳에 집중하는 거다. 성공한다면, 승기가 보일 수도 있었다.
‘해 보는 거야.’
석등과 나의 마나로드가 교감했다. 석등과 천산은 기꺼이 내게 문을 열어 주었다. 동시에 오감은 사라지고, 오로지 나와 석등, 그리고 이 산의 맥만이 존재하는 이상한 세계가 열렸다.
나를 맞이하듯 일곱 개의 불꽃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제발, 제발 우릴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