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57
제157화
38. 여명 (1)
“적어도 하나만은 바꾸고 가자.”
이 계층의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고 한들, 상관없다. 적어도 이 순간을 떠올리는 내 마음만큼은 달라질 테니까.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어느 쪽이든 좋으니 전부 하고 오세요.’
한차현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그러했듯, 다른 일행들도 나를 이해해 줄 거다.
초 단위로 남은 제한 시간은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괜히 눈을 뒀다가 결심만 흔들릴 것 같아 과감하게 퀘스트 창을 껐다. ‘퀘스트’라는 형식은 이제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미처 다 완성하지 못한 연결부의 회로를 마저 그렸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흐른다는 본질을 가진 강과 ‘연쇄’는 내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렸다. 내 어설픈 솜씨로 덧대어 붙였음에도 ‘연쇄’는 기존의 회로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다.
“마력이 누수되는 곳도 없고.”
스테이터스의 상승은 ‘탐색자의 눈’에도 영향을 줬다. 마력 수치가 올라서인지 성능이 더 좋아졌다. 덕분에 평소라면 으레 나오곤 하는 작은 실수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연결의 목적은 하나였다. ‘연쇄’의 성질을 이용해 유등들과 천화강을 하나로 묶는 것. 과연 제대로 작동할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지막 검토를 마치자마자 회로를 활성화했다.
시동을 거는 것이라 그런지, 회로의 규모가 커서인지 상당히 많은 양의 마력이 들었다. 하마터면 마나 고갈이 올 뻔했지만 구미로부터 흡수한 마력이 있어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처음에는 내 마력으로 운용되는 ‘연쇄’와 천산의 맥이 섞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연쇄’의 식에 주홍빛이 어리며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결계를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이지 이 산의 마력은 침투력이 좋았다.
‘따지자면 이것도 일종의 오염이겠지.’
내가 천산의 안개를 떠올리던 그때, 천화강의 회로에서 민들레 홀씨를 닮은 회로들이 톡톡 돋아났다. 각각이 고작해야 약지 정도인 작은 회로들은 쉴 새 없이 반짝였다. 성공의 징표를 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좋았어.”
연쇄의 효과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뒤이어 모양은 비슷하나 제각기 따로 놀던 유등의 회로들이 착착 연결되었다. 단단히 얽힌 회로들은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뻗어 나온 뿌리 같았다.
아직 하나의 공정이 더 남았지만, 그건 방금 한 작업보다 훨씬 간단했다.
본래부터 석등과 화구호, 그리고 천화강은 유기적인 관계였다. 그러니 연결부는 손댈 필요 없을 테고. 밸브 역할을 하는 부분에 약간의 조정만 가하면 될 듯했다.
‘화구호에 힘을 집중시키고, 출력도 조금만 더 올리자.’
10초는 진작 지났다. 아마 작업을 마치고 이곳을 나갈 때쯤이면 구미가 혼나비들을 전부 삼킨 뒤겠지. 어중간한 힘으로 자극했다간 오히려 이쪽이 곤란해질 것이다.
“출력을 상승시키는 스위치는 간편하게 내 마력으로 할까.”
뭐, 마땅한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석등의 회로에 약하게 마력을 불어 넣어 촉매가 될 흔적을 남겼다.
도화선을 마련한 것을 마지막으로 회로가 완성되었다. 내가 만든 것답지 않게 유등의 힘을 강물에 실어 나르고, 석등으로 그를 강화하는 일련의 구조가 모두 완벽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했다.
‘칼리아나 스승님이 이걸 봤어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날 지켜보고 있는 것은 세계탑 시스템밖에 없었다.
유례없이 후한 보상이었다. 최초란 수식어가 있다는 걸 감안해도 과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개입하기라도 한 걸까?
순간 고개를 들이민 가능성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남을 관음하고 참견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러나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좋게 생각하자. 스탯도 스탯이지만, 작업 방향이 틀리지 않았단 보증을 받은 거잖아.’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자, 불쾌감 대신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찾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결과물이 잘 나오니 아쉬움이 더욱 짙어졌기 때문이다.
“고작 10분이 모자라서…….”
퀘스트가 실패 처리 됐을 걸 알면서도 창을 띄웠다.
[ – 제한 시간 : 00:00:01] [ – 제한 시간 : 00:00:00] [ – 제한 시간 : 00:00:01]…….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야?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제한 시간의 마지막 자릿수가 0과 1을 오가고 있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벅벅 문질렀지만, 변화는 없었다.
‘세계탑 시스템이 고장, 났을 린 없지.’
……그렇다면.
■■의 ■■. 목소리의 농간이 틀림없었다.
이번엔 일행들을 건드리려나 보지? 영문도 모르고 괴롭힘당하고 있을 일행들 걱정에 황급히 산맥과의 연결을 끊었다. 서두르는 나의 마음을 천산도 알아준 것인지 나는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화구호로 돌아왔다.
기묘한 퀘스트 창의 진상을 알게 된 것은 그 직후였다.
“언니!”
“7분이나 늦었다. 뭘 하다 이제 온 거지?”
“맞아, 가호 너 완전 지각이야!”
“옳소, 옳소! 얼른 반성해! 우리가 김 서방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보통 때와 다를 것 없는 반응들이었다. 몰골은 그렇지 않았지만. 일행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
몇 마리 남지 않은 나비가 안개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파티원들에 의해서 자유를 되찾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체급 차가 뚜렷한 상대와의 전투를 이어 나가느라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아니, 말이 좋아 전투지. 구미를 물고 늘어지는 파티원들은 무장한 어른 앞에 돌팔매질이나 하는 어린애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다들 뭐가 좋다고 웃고들 있는 거야?’
내가 쏟아지는 비난에 어쩔 줄 몰라 한다고 여긴 한차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호 씨.”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숨을 삼켰다. 태연한 음성 때문에 몰랐는데 그는 일행 중 가장 상태가 심각했다.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옅은 빛깔의 도포가 온통 새빨갰다.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빈사 상태가 되었으리라.
“다들 진심으로 타박하는 게 아닌 거, 아시죠?”
“한차현 헌터. 지금 제 걱정을 하실 때입니까?”
“음.”
내 표정을 본 한차현이 짐짓 산뜻한 어조로 변명했다.
“아,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호숫물에 젖어 피가 번진 것뿐입니다. 정말로요.”
거짓말. 날 속일 거였으면 그 창백한 얼굴이나 좀 어떻게 했어야지. 애써 끌어 올렸지만 떨리는 입술은 또 어떻고.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저…….”
“가호야, 설마 사과할 건 아니지?”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죄송하다의 첫음절도 발음하지 못했건만, 신주와 한차현이 동시에 말을 끊었다. 귀신 같은 눈치로 내 의중을 읽은 듯했다.
겹쳐도 왜 하필 한차현이냐며 툴툴대던 신주가 돌연 무심하게 물었다.
“성과는?”
“……물론 있지.”
“그럼 얼른 보여 줘! 저거 걱정하는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순식간에 ‘저거’로 강등당한 한차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더, 지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흐뭇한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섬 위로 기어올랐다. 물을 잔뜩 머금은 옷이 무겁게 달라붙었지만, 왜인지 여느 때보다 몸이 가벼웠다.
작은 섬에 발을 디디자마자 가장 가까이 있는 석등에 손바닥을 댔다. 그리고 마력을 부어, 미리 심어 두었던 흔적이 출력을 올리는 식을 발동시켰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석등의 불꽃이 화창(火窓)을 넘을 정도로 세게 치솟았다.
그대로 섬을 시계 방향으로 돌며 석등들을 만졌다. 손이 닿은 석등이 늘어날수록 섬과 호수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좋은 징조였다.
물론 일이 수월하기만 하면 세계탑이 아니었다.
“또 당신이로군요.”
안개 사이, 내내 잠잠하던 삼색 눈동자가 안개 사이 나타났다. 포식한 힘을 갈무리한 구미로부터 종전보다 불길한 기운이 물씬 풍겼다.
마지막 석등을 만진 순간, 아홉 개의 꼬리가 나만을 노리고 쇄도했다.
신주와 차태양이 뛰어들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윤수호가 나섰다. 방벽을 소환하는 스킬들이 모두 쿨타임인지, 그는 제 키보다 큰 방패를 꺼내 들었다. 우산처럼 위를 가로막은 방패가 우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음, 지켜 주는 건 고마운데.’
나보다 한참 큰 윤수호의 몸이며 방패 때문에 시야가 죄 가로막혔다. 확인할 게 있는데 말이지. 비키란 뜻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으나, 윤수호는 엉뚱한 경고만 날렸다.
“무모한 짓은 하지 말라 했을 텐데.”
“전적이 있어서 안 믿겠지만, 이번엔 아니야.”
“……?”
“나 말고 위에. 저 위 좀 봐봐.”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윤수호는 떨떠름한 얼굴이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들었다. 뭐, 이 녀석도 궁금했을 거다. 진작 방패에 닿았어야 할 충격이 감감무소식이니까.
방패에 가려졌던 하늘이 천천히 드러났다.
“윤가호, 저건 대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생각 없이 적 근처에서 어슬렁댔겠어.”
툭 던지듯이 대꾸했지만, 나 역시도 윤수호처럼 위쪽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밤하늘을 제 것인 양 차지한 짐승의 꼬리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결코 우리에게 닿지는 못했으니. 어느새 나타난 불빛들이 들러붙어 그를 방해하고 있는 탓이었다.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들은 끈질겼다. 구미는 몇 번인가 빛들을 떨쳐 내려 했지만, 결국 꼬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반응은 좀 의왼데.’
제 공격이 예상치 못한 것들에 의해 막혔는데도 구미는 언짢거나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저 차분하게 제가 본 것을 파악했을 따름이다.
“오호라, 이걸 들고 오실 줄이야.”
빛의 정체를 아는데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모든 요괴가 기피한다는 유등이었으나, 구미에게는 다른 이야기인 듯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그에게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위협적인 꼬리들, 심지어는 재앙과 고통, 거짓을 불러오는 세 개의 눈까지 있었다. 방금은 그중 겨우 하나를 사용했을 뿐 아닌가.
실로 포식자다운 자세. 천적을 만났음에도 구미의 전신에서는 연약한 빛 따위는 언제든 꺼 버릴 수 있다는 오만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자신이 있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준비해둔 덫은 지금부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