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58
제158화
37. 여명 (2)
“한낱 등불 따위가 성가시게 하는군요.”
제 생각보다 불빛들이 끈질기니 구미는 검은 안개들을 모두 제 안으로 흡수했다. 그럼에도 유등과 구미의 대치가 길어지며, 상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 틈을 타 일행들은 호숫가에 집결했다. 이게 마지막 휴식이란 걸 느낀 듯 모두가 가라앉은 낯으로 정비에 전념했다. 나와 윤수호를 제외하고.
‘나야,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지만 쟤는 왜?’
뭐, 묻지 않아도 이유는 뻔했지만. 발에 뿌리라도 박은 듯 우두커니 서 있는 녀석의 코앞에다가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다.
“먼저 가.”
“넌?”
“나도 뭐 하나만 하고 갈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설득될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자. 방해만 하지 말라고 덧붙이려는데 새파란 고래가 나와 윤수호 사이에 끼어들었다.
– 큐!
웬일로 얌전히 들어가 있더라니. 갑자기 튀어나온 해랑이 애교 있게 내 뺨에 제 얼굴을 문댔다. 그러곤 폴폴 흩날리는 빛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게 아닌가.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오물오물하는 입, 잔뜩 흥분해서 위아래로 흔들리는 꼬리, 간식을 앞에 둔 강아지처럼 반짝이는 눈까지. 하나 같이 퍽 귀여웠지만…….
“그래도 저건 안 돼.”
– 큐우우…….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고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줬다. 그러나 단단히 기분이 상했는지 해랑은 내 손길을 피했다. 뭐든 입에 집어넣고 보는 녀석이라지만, 평소보다 유난히 미련이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포만도 때문인가.’
염라의 살생부와 천도를 먹은 뒤 회복되었던 포만도가 어느새 제법 낮아졌다. 아까 본 기억으론 20% 남짓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던 그때, 불쑥 옆에서 건량을 쥔 손이 튀어나왔다.
“응?”
“이거라도 먹도록.”
작은 고래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둥둥 떠다니니 윤수호도 신경이 쓰였나 보다. 아닌 척해도 약자한테는 관대한 녀석이니까.
그러나 호의가 무색하게도 해랑은 건량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홱 도도하게 고개를 돌리는 건 덤이었다. 예의를 운운할 줄 알았건만, 윤수호는 의외의 말을 뱉었다.
“주인을 닮은 건가.”
“내가 뭐.”
“날 거절하는 솜씨가 아주 능숙한데.”
언젠 아무거나 주워 먹지 않게 단속하라더니.
평소처럼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불필요한 언쟁을 할 때가 아니지 않나.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윤수호는 그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시금 해랑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반려동물을 잘 먹이는 것도 주인의 책임이다.”
“뭐, 거기엔 나도 동의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먹이도 먹이 나름이지. 얜 꼭 이렇게 희한한 것만 먹으려고 한다니깐?”
“저게 뭐기에 그러지?”
윤수호가 턱짓으로 불빛을 가리켰다. 뒤이어 나를 내려다보는데 그 눈빛이 매우 불손했다.
“야, 그 눈 뭐야?”
“동료로서 정당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만.”
동료는 무슨. 천하의 천방지축 취급하고 있으면서.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멀쩡한 아군을 놀릴 순 없는 법 아닌가. S급 방어계인 윤수호가 협력하면 뭐가 됐든 일이 편해질 거고.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위쪽을 보았다가 혀를 찼다.
“유감. 타임 아웃이다.”
짧은 휴식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온갖 수단을 이용한 구미의 저항에 불빛이 하나둘 점점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호수를 감쌌다.
와중에 콩고물을 노리는 이가 있었으니.
“윤해랑!”
뭐 하나라도 먹을 게 있나 싶어서 돌진하려는 해랑을 간발의 차로 잡았다. 매끈한 몸체를 이용해 손아귀를 빠져나가려기에 얼른 경고했다.
“안 된다고 했잖아. 얘넨 우리 아군이라고.”
– 큐, 큐우…….
“다 끝나면 더 맛있는 걸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들어가 있어. 응?”
어디서 배웠는지 고래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정말 초읽기에 들어섰는데, 원……. 어린 게 배고파서 칭얼대는 걸 혼낼 수도 없고.
정말이지 얜 누굴 닮아서 이렇게 유별난 건지. 반복해 달래도 완고하던 해랑이 내 제안을 수긍한 것은 한 가지를 더 약속한 뒤였다.
“대신 좋은 구경을 시켜 줄 테니까.”
잠시 고민하듯 꼬리를 팔랑이던 해랑은 이내 손등의 문양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한숨을 놓았다.
해랑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 검은 털에 매달린 불빛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추락한 불빛들은 호수 위를 낮게 날았다. 물줄기를 타고 오는 본체, 그러니까 유등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는 거다.
‘저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기운을 회복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시간을 좀 벌어 주고 싶은데.
시선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여우가 눈웃음쳤다. 복사나무를 물어뜯을 때 보였던 광기는 일견 갈무리된 것처럼 보였지만, 피눈물이 맺힌 눈동자는 여전히 기이한 감정을 품은 채 빛났다.
저걸 딱 알맞을 정도로만 자극해서 관심을 끌어야 한단 말이지. 내가 그리 자신 있는 분야의 일은 아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말을 고르던 중, 구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분투하는 동안 소꿉장난은 재밌게 하셨습니까?”
질문과 거의 동시에 구미의 꼬리 하나가 여우로 변하며 떨어져 나왔다. 여우는 곧바로 재주를 넘어 인간의 형상으로 둔갑했다. 그가 궁에서 ‘아라진’ 행세를 할 때 쓰던 사내의 탈이었다.
사내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섬에 착지했다. 나와 사내의 사이에 끼어들려는 윤수호를 말없이 물렸다. 하는 양을 보건대 아직은 괜찮다.
“대답할 가치가 없군요.”
“이런. 매정하셔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귀처럼 집어삼키던 나비가 제 옆을 스쳐 날아갔지만, 사내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절 여러 차례 물 먹인 나보단 흥미롭지 않다는 거겠지. 우리에겐 잘된 일이었다.
‘그나저나 저건 또 뭐야?’
이제 보니 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사내의 뺨에는 균열 같은 붉은색 얼룩이 새겨져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구미가 제 뺨을 손바닥으로 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곱상한 얼굴과 퍽 잘 어울리는 자세였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요.”
자세한 설명은 모두 생략된 말이었으나, 쉽게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극의 힘을 품은 복사나무를 삼킨 대가란 거겠지.
‘탐색자의 눈’을 좀 더 강하게 발동해 녀석의 마력을 읽었다. 다행히 본체가 아닌 꼬리인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구미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나.’
흐름을 보아하니 마나로드에 손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초 마다 마나로드의 곳곳이 무너지고, 수복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닌 힘도, 입은 손상도 강대한 탓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입가를 비집고 올라오려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기껏 찾은 균형을 이렇게 금방 깨다니.’
유등이 아니라, 놈의 자충수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아군이었다. 올가미에 목을 들이댄 줄도 모르는 구미가 특유의 건조한 말투로 떠들어 댔다.
“저깟 불빛으로 절 구속하려 들다니. 당신치고는 안일한 수단이로군요.”
“절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릴 하시는지.”
“운명으로 엮인 사이에 모를 게 더 있겠습니까.”
“허, 갖다 붙이긴.”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구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제게 이렇게 대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는 둥, 철 지난 드라마 주인공 같은 멘트를 하며 다가왔다.
“물러나.”
팔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워졌을 때, 윤수호가 나를 제 뒤에 숨겼다. 구미와 이 이상 가까워질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고목처럼 서 있던 윤수호는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이래서 주제를 모르는 인간이란.”
“……윤수호!”
앞을 가리고 있던 윤수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지며 구미와 눈이 마주쳤다. 거짓을 불러오는 푸른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 영리한 요괴가 윤수호를 상대로 가장 유효한 패를 꺼내 든 것이다.
해주를 돕는 가리개가 있음에도 윤수호는 이상하리만큼 환영을 떨쳐 내지 못했다. S급인 녀석이 스탯이 모자라 이럴 리는 없고. 그러고 보니 서천에서도 자력으로 탈출하지 못했지.
그렇다면 십중팔구…….
“근래에 본 것 중 가장 지독한 기억이더군요.”
“…….”
“원하신다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구미는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 짐짓 자비롭게 굴었다. 남의 기억을 몰래 훔치고, 들쑤신 주제에 말이다.
그 모습이 내 심기를 완전히 나락으로 처박았다.
“필요 없어.”
완전히 힘이 빠진 윤수호를 억지로 일으켜 부축했다.
“들어야 할 얘기가 있다면 이 녀석 입으로 직접 들을 테니까.”
“후후,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속삭임과 함께 사내의 손에서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이 돋아났다. 그는 붉은 눈의 기운을 담은 듯, 적색이 일렁이는 발톱을 인정사정없이 휘둘렀다.
노리는 것은 윤수호. 아니, 나의 악수(惡手)였다.
얼결에 윤수호를 데리고 한 걸음 물러나, 첫 공격을 피했으나 다음 공격이 잇달아 날아왔다.
몸으로 저 공격을 막아 낼지, 아니면 윤수호를 버리고 도망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을 강요받은 순간. 또 하나의 선택지가 나를 구하러 왔다.
“고맙구나, 정말로.”
날개라도 달린 듯, 순식간에 호수를 가로질러 온 호랑이가 우릴 덮친 부정을 물어뜯었다. 사로뫼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었다. 그의 몸체를 뒤덮고 있던 부정의 가루가 모두 사라진 데다가 몸체에 새겨진 얼룩을 타고 주홍빛 불꽃이 타올랐다. 닳고, 이가 나갔던 손톱과 송곳니도 거짓말처럼 회복되어 있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게 사로뫼의 본래 모습…….’
마흔아홉 영물을 다스리는 산군다운 위엄이었다. 인과 관계를 추론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호수로부터 일어난 기운이 그에게 흘러 들어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석등을 이용해, 산맥의 힘을 이곳에 집중시킨 게 사로뫼에게도 영향을 미친 듯했다. 생각지 못한 나비 효과였다.
“오래된 약조까지 불러올 줄이야. 참으로 애썼구나.”
사로뫼가 온을 지켜 온 걸 알기라도 한 것일까. 호수 위를 떠다니던 불빛들이 어느새 사로뫼에게로 다가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불빛들을 자애로운 눈으로 훑은 산군이 내 머리 위에 발을 얹었다. 동시에 나를 감싸고 화르륵 커다란 불꽃이 피어났다. 신기하게도 그 불은 뜨겁지도, 통증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누적된 피로와 상처를 깨끗이 씻어 내려 주었다.
그와 잠시간 연결된 그 순간. 나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이 영물, 마지막 불씨를 태우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