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95
제195화
47. 팡파르 (2)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한재이는 자신이 생각해도 이유를 찾기 힘든지 입술만 우물거렸다. 그러면서도 슬슬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인 듯했다. 뭐, 퍽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이긴 하다만.
“저한테 통할 방법은 아니죠,”
“쳇, 인정 없기는.”
“한재이 헌터께 그런 말을 듣다니 세상 참 모를 일입니다?”
평소 내게 날을 세우던 그의 행동을 꼬집은 말이었다. 최소한의 양심 때문인지, 제 약점을 잡혔단 생각 때문인지 한재이는 그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말하지 않겠다면 알아서 확인하면 그만. 이미 켜져 있는 탐색자의 눈에 보다 강하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최권영의 스킬도 나를 보조하니 한재이가 든 무기는 물론, 그의 마나로드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건, 흥미로운데.”
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으니. 여태껏 한재이가 해 온 새빨간 거짓말을 폭로하는 마나의 흐름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재이는 저격수가 아니었다. 그는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중화기를 사용했을 때 가장 재능을 빛낼 수 있는 헌터였다. 한 점에 힘을 집중하여 쏜다는 점은 저격수와 비슷했으나, 그가 타고난 본성은 그보다 거칠었다.
‘본인도 아는 것 같은데 왜……?’
강력한 원거리 딜러는 어디에서나 환영받았다. 전천후로 활약하긴 어려웠지만, 레이드에서는 그 단점을 덮을 만큼 빛이 났으니까.
아, 설마. 한 박자 늦게 한재이의 대외적 이미지, 그러니까 그의 셀링 포인트가 떠올랐다. 중화기는 확실히 친근감 있는 이미지에 방해가 되긴 하지. 갭 차이가 있다며 팬이 붙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방송에서 특기 삼아 시연하기도 어렵고.
“뭐예요, 그 다 안다는 듯한 표정. 불쾌하니까 그만둬 주시겠어요?”
“다는 아니지만, 대강은 알겠네요.”
“그러니까 뭘요! 가호 씨가 뭘 알기에 그러냐고요!”
“이미지 메이킹이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한재이는 차마 반론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이렇게 정곡을 찔릴 줄은 몰랐겠지. 그동안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왔으니 말이다.
“대단하긴 하네요. 맞지 않는 무기를 쓰고도 그 정도 실력이셨으니.”
독하다면 독한 사람이었다. 여태껏 필드에서 위험한 순간이 없었을 리 없는데.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죽음을 불사하고 이 무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아득바득 생존하기 바빴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이었다.
뭐,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지만. 필드 안에서 괜한 트러블을 만들어서 좋을 게 뭐 있어. 멋대로 남을 재단하는 게 좋은 버릇도 아니고.
‘기껏 잡은 약점을 써먹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생각해 둔 말을 꺼내려던 그때, 한재이가 돌연히 머스킷을 집어넣고 중화기를 어깨에 얹었다.
“슛, 액션.”
어차피 들켰으니 내숭 떨게 없다는 걸까. 나를 등진 한재이가 시동어를 외우며 방아쇠를 당겼다. 콰광! 벽을 기어오르던 마수들이 한 방에 정리되었다.
“그래요. 나 거짓말 좀 했어요.”
폭발로 인해 일어난 바람이 한재이의 머리를 헝클였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배경처럼 깐 한재이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까 보였던 당혹은 모두 사라진 듯, 날 노려보는 눈동자에는 흔들림 한 점 없었다.
왜인지 그 모습이 회장에서 꽃처럼 치장한 차림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원래 그렇게 타고난 애처럼, 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이 내 것인 것처럼 연기 좀 했죠. 그게 뭐 나빠요? 다 먹고 살자고, 살아남자고 한 짓인데.”
“누가 뭐 나쁘다고 했습니까?”
“예?”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한재이가 다시금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내가 엄청난 비난이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괜히 혼자 찔려선.
“오히려 잘됐습니다. 유용하게 잘 써먹을 수 있겠네요.”
“가호 씨, 그게 뭔 소리…….”
손을 들어 한재이의 말을 끊은 뒤, 검지로 무대 위 외따롭게 서 있는 클라라를 가리켰다.
“저 친구 상대하는데 한재이 헌터 그 능력이 필요하다고요.”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한재이는 한참을 눈만 깜박였다. 그러더니 냅다 멱살을 잡는 게 아닌가. 기관총처럼 쏘아붙이는 말을 듣자 하니, 아직도 헛소리냐며 날 비난하는 소리가 태반이었다.
적당히 들어 주는 척하다가 그의 손목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 놓치게 된 한재이가 황망히 날 바라봤다.
“어떻게 C급이…….”
“혁명의 시간이요. 한재이 헌터도 제겐 ‘강자’ 아니겠습니까.”
정신이 없긴 하나 보네. 저 꼼꼼한 사람이 이런 걸 잊어버리고.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한재이가 신경질적으로 무기를 내려놓았다.
내게 기억을 보여 준 것이 무리가 된 것일까. 무용수는 우리가 막 입장했을 때와 달리 손을 얌전히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심상찮은 오라가 일렁이긴 했으나, 당장 뭔가를 할 것 같진 않았다. 좋아, 잠깐 정돈 괜찮겠네.
“한재이 헌터의 그 거짓말,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믿기 힘드시다면 계약 아이템을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대가로 원하는 건?”
“이럴 때는 잘 맞아서 좋네요. 대가는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가타부타 잔말 없이 절 따라 주세요. 설명도 요구하지 마시고요.”
“허, 그쪽한테 목숨을 맡겨라?”
과대 해석하지 말라며 그를 진정시켰다. 이쯤이면 지원 인력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가 생각보다 여기서 길게 버텼거든. 그 어떤 파티보다도.
한재이 역시도 이를 깨달았는지, 날 보는 시선이 누그러들었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도 고위 헌터가 발에 채는 황야에서 치이긴 했을 터라 느끼는 바가 남다른 듯했다.
“마지영 헌터와 서영운 헌터, 그리고 부길드장 님에 지화 님까지 직접 오신다더군요. 그만하면 믿을 만한 원군 아닙니까?”
“그래서요?”
“뭘 해도 손해 볼 일 없다고요. 이곳이 공략되기만 하면, 그 어떤 실패도 없던 일이 되니까.”
물론, 이건 그냥 설득하기 위한 말. 나는 이곳을 내 손으로, 아니 우리의 손으로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거야말로 오해일을 물 먹이는 일이니까.’
복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최권영을 매장하기 위해 온갖 수를 썼는데 고작 C급인 나 때문에 전부 실패했다고 생각해 보라. 나였더라도 천불이 날 것이다. 그 뒤로도 폭탄이 줄줄 떨어질 테니 볼 만한 낯짝이 되리라.
그러니 나는 꼭 해내야만 했다.
“만약 저희 둘이 공략에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파란이 일겠죠. 확률은 높지 않지만, 리스크도 적고요. 어떻습니까?”
“……선택권이 있긴 하고요?”
“없진 않죠.”
“이딴 기울어진 배에 사람을 태우다니. ……나한테 무슨 일 생겼다간 평생 쫓아다니면서, 아니 죽어서도 쫓아다니면서 저주할 거예요!”
매몰차게 말하면서도 한재이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기꺼이 그를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자, 이걸로 예고편은 끝. 본방 시작이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건 아닐 테고. 저걸 어떻게 쓰러뜨리자는 건데요?”
“아뇨.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저 보스는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되도록 다른 마수들도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이 필드의 올바른 공략법이에요.”
방금 맺은 협약은 잊은 듯 한재이가 눈꼬리를 삐죽 올리며 내게 따졌다.
“누가 봐도 여기 레이드형 필드잖아요. 무슨 다른 공략법이 있다는 건데요? 어?”
“예,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죠.”
보스를 중심으로 구축된 필드가 레이드형 필드라면, 분명 이곳도 그러하리라. 그렇다면 보스를 처치해야만 공략이 끝난다. 모두가, 그렇게 말해 왔다.
하지만 나는 히든 퀘스트를 통해 보았다. 입으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탑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보지 못한 선택지들을.
‘그게 필드에 적용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내심 품고 있던 작은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스의 기억을 엿보며 확신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다른 답이 있다고.
“이 필드 전체가 하나의 퀘스트이자 세계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보스는, 필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계속 힌트를 줬다. 적의를 가지지 말 것, 평범치 않았던 마수들의 행보, 파트너를 찾는 클라라의 이야기…….
‘결정적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 들려주던 그 가사.’
자세히 풀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애초에 그러지 않아도 되게끔 약속을 했고. 오라가 가시며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보스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극장 어딘가에 저 녀석의 본체가 있습니다. 그 오르골을 찾는 게 최우선이에요.”
“단서는, 단서는 있고요?”
“이 근처에 있긴 할 겁니다. 공연 소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들렸으니까.”
얄팍하기 짝이 없는 실마리였다. 아까 뒤져볼 수 있는 곳은 한바탕 다 엎은 뒤라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별수 없죠. 전부 부숩시다.”
“……?”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해 봤습니다만, 아무래도 공연장 어딘가에 비밀 공간이 있는 것 같아요. 아까 저희가 본 그 초상화처럼요.”
클라라는 끝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괴담을 쫓아 그를 찾는 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즉, 오르골이 매우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는 뜻이다.
‘아이만이 알고 있는 비밀 공간이 있었던 거야.’
극장주였던 부모님이 알려 준 거겠지. 건물이 급하게 매각되며 그 사실이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육안으로는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니, 남은 수는 하나.
“벽이든, 바닥이든, 하다못해 천장이든. 죄 허물다 보면 언젠가 나오겠죠. 그런 거 하기에 딱 좋은 무기까지. 완벽하네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그 어느 때보다도.”
나나 한재이나 각성자이니 건물 잔해에 깔린다고 죽지 않는다. 그건 여기 있는 마수들도 마찬가지고. 보스가 극장을 각별히 생각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봤겠으나 그런 것도 아닌 듯했고.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한재이 헌터 취향대로 복잡할 게 없으니, 좋지 않습니까?”
명쾌한 대사에 한재이가 뒷목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