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306
제306화
71. 당신에게 가호를 (3)
“이제야 만났네요.”
은근슬쩍 발목을 감으려 드는 회로를 밟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만나자마자 대상자니, 심사니, 거기에 칭호까지. 날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벌써 단단히 기대 중이신 것 같은데.
‘어디 그렇게 될지 지켜보라고.’
메고 있던 검을 뽑아 휘둘렀다. 단검이나 좀 다룰 줄 아는 터라 영 서투른 동작이었는데. L급답게 만월은 가뿐히 ‘환영’이라는 문구를 베어 냈다.
[만상을 비추는 허무, 우주수(宇宙樹)가 당신을 ■■■니다.]심기를 거스르던 단어가 사라지자,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녀석이 또 다른 모니터로 옮겨 가기 전, 냉큼 검 끝으로 거목을 겨누었다.
“피차 먹히지도 않을 겉치레는 이쯤 합시다. 전 당신과 다르게, 합리적인 포식자라.”
세계탑을 축복하기로 한 이래, 내가 자신을 보였던 것은 전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가장 큰 아군을 바투 쥐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에 경애를”
– 뛰어난 장인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검.
– 진리는 조화를 노래하니. 사용자의 의지를 비치어 피어난다.
– 용법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손아귀를 빠듯하게 채우던 자루가 점점 줄어들었다. 이윽고 늘씬한 장검은 모습을 감추고, 백금색 휘광을 두른 화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전혀 다른 외양이 되었지만, 기묘하게도 여전히 열쇠를 닮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녀석이 내 의도를 알아차리기 전에 손을 써야 해.’
망설일 틈은 없었다. 나는 화살의 형체가 온전해짐과 동시에 그것을 시위에 걸었다. 하지만 미처 손을 놓기도 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눈을 몇 번 감았다 떴지만, 눈앞에 불현듯 나타난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보았다. 계속. 나는. 씨앗. 당신의.]“……제 가능성을 봤다고요?”
[긍정.]태연하게 대꾸했으나, 실은 꽤 놀랐다. 이렇게 직접 소통이 가능할 줄이야. 아이템이라는 분류가 무색하게 생명체 같은 존재였다.
‘하긴. 바다정령 같은 경우도 있었으니까.’
자신의 제작자를 수족 삼은 녀석이니, 이 정도 소통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시스템 창의 문장들이 톡톡 지워지고, 입력 중인 문서 창처럼 커서가 깜박였다. 이유 없이 불안이 치밀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 같아 시위를 당기던 손에서 힘을 풀고 귀추를 주목했다.
이윽고 적힌 말은.
[도래. 멸망. 세계. 너의.]냉정한 선고와 함께 아무것도 비추지 않던 텔레비전들이 돌연 가동되기 시작했다.
산발적으로 켜지는 화면 속에서 나타난 것은 수라장이 된 지구의 모습. 세계 곳곳에서 마수가 쏟아지고, 피가 흐르며, 경계가 허물어지니….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들었던 것보다 심각한데. 고작 몇 시간……. 아, 이런.’
뒤늦게 잊고 있었던 정보가 떠올랐다. 이곳, 무저갱의 분류는 히든 필드. 특수 필드처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깥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가늠하려니 순간 어질해졌다.
동요한 내게 완전히 쐐기를 박으려는 것인지, 또 하나의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메인퀘스트, 월영(?)– 잔여 시간 : 00:11:49
– 클리어 조건 : ???
– 페널티 : 분기점, ‘저무는 밤’ 발생]
“뭐? 11분?”
가파르게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허세라면 좋겠지만, 모니터 뒤로 보이는 지구는 노스텔지어에서 본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정말 끝이 코앞인 거야.’
이래서야 실패 후를 기약할 수도 없었다. 지금 내가 쥔 이 화살이 진정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니 절로 심박이 빨라졌다.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 영원히. 나와…….]그로도 모자라 우주수는 텍스트로 가득 찬 메시지를 끝없이 띄워 나를 가뒀다. 그렇지 않아도 압박감을 느끼는 상황인데. 결코 혼자 남지 않으리라는 강박 같은 집착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메스꺼워.’
최악이었다. 가차 없이 진행되는 카운트다운, 멸망이라는 말도 안 되는 페널티, 귓가를 울리는 사람들의 절규, 그리고 전에 없이 압도적인 적. 무엇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다.
아니, 이 모든 것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악몽 같았다. 세계탑 안에서 다른 이들의 세계에 개입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에 숨통이 조여들었다.
‘그래도 해야만 해.’
세계든 뭐든 내팽개치고 관리자가 되기를 자처한다면 나 하나의 목숨쯤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말을 바라서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은, 이겨 내야만 했다.
헐겁게 쥐었던 화살을 고쳐 쥐고, 시위를 당겼다.
“이게 제 대답입니다.”
[?]강대한 힘을 가진 놈들이 으레 그러하듯, 우주수는 내가 감히 자신을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간 내 여정을 모두 지켜봤을 텐데도 말이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놈에게 나는 친절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다.
“당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저는 당신을 축복할 겁니다. 그게, 제작자로서의 제 근원이니까요.”
회로를 잇고 덧대는 작업은 필요 없었다. 변화한 건 외양만이 아니니까.
만월은 화살의 형태로 바뀌며 나의 의지를 투영해 제 안의 회로들까지 모두 비틀었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접혀 있던 회로가 활짝 펼쳐졌다. 마치 한 쌍의 날개처럼 보일 정도로 풍성하고 아름다운 회로였다.
‘예상 이상으로 완벽한데.’
비단 겉모습만을 두고 한 평이 아니었다. 내 고유회로를 몇 겹이나 덧대어 만든 물건이라서일까. 갑작스러운 변형이었는데도 이음매 하나 어긋난 곳이 없었다.
서툴다 하여도 제작자이니만큼 알 수 있었다. 이 회로야말로 내 인생 최대의 역작이 되리라는 것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숨이 가빴는데. 완벽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성취감만으로 긴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참 얄팍하다며 스스로를 나무라면서도 웃음이 났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입꼬리를 올린 채, 나는 화살 끝으로 거대한 나무를 겨누었다. 심사하겠다던 게 정말이었는지 녀석은 피하지 않고,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만상을 비추는 허무, 우주수’에 적용할 효과를 선택하세요.– 선천 : 영겁의(?)
– 후천 : 만월(L)
※ 장인 윤가호의 고유회로, ‘갈피’의 효과로 선택지가 고정됩니다.]
오, 이건 생각지 못한 도움인데. 만월에 내재한 ‘갈피’가 최적의 선택지를 추려 준 모양이었다. 언제나 길을 밝혀 주던 인챈트다운 면모였다. 끼워 맞추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흠잡을 곳 없던 회로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사양할 것 없겠지.”
※ 주의! 성공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아이템인 이상 제작자의 스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녀석의 사지나 다를 바 없는 회로는 우리에게 있어 수단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생전 띄우지도 않던 이런 경고로 날 막아 세우려나 본데.
“이런 데 넘어가기엔 제가 곱게 크지 않아서.”
이곳에 오기까지 나는 바늘구멍 같은 확률을 수도 없이 넘었다. 눈에 보이는 숫자보다 얼마나 성심을 다했는지, 얼마나 완성도를 높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흔들리지 않고 화살을 떠나보냈다.
황금빛 날개를 거느린 화살이 우주수에게로 쇄도했다. 전설을 품은 회로가 앞길을 가로막는 회로들을 꿰뚫고 직진하니. 사방으로 터지는 빛 가루들을 맞으며 시동어를 외웠다.
“인챈트.”
같은 순간, 화살촉이 우주수의 기둥에 명중했다. 찬연한 빛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내 앞에 떠오른 것은…….
[인챈트 ‘영겁의 만월(?)’에 실패했습니다.] [‘만상을 비추는 허무, 우주수’와 ‘만월(L)’이 파괴됩니다.] [‘만상을 비추는 허무, 우주수’가 페널티를 무시합니다. 파괴가 취소됩니다.]뭐? 이 순간에 실패?
‘누가 봐도 제대로 성공할 순간이었잖아.’
아니, 그걸 떠나서 실패할 회로가 아니었다. 변형되었다고 해도 기반은 변하지 않는다. 만월이 ‘전설’이라는 등급을 받을 수 있게 한 본질은 그대로란 말이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범인은 상승을 거듭했음에도 여전히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손재주인데.
‘이런 빌어먹을 재능 같으니라고.’
결전의 순간까지 발목을 잡는 놈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다가 겨우 삼켰다. 운명이 보기에도 이런 내가 가여웠던 것인지 여지를 남겨 주기는 했거든.
[페널티 대상, ‘만월(L)’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파괴가 취소됩니다.]페널티를 회피하기 위해서인지 검의 형태로 돌아온 만월이 내게로 날아왔다. 검 자루를 낚아채자마자 다시금 인챈트를 시도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같은 결과가 반복될 뿐일 테니까.
“손재주 때문이 아닐 수도 있잖아.”
물론 처음 특성을 얻은 이래로 손재주 스탯이 여러 번 문제를 일으킨 것은 맞다.
하지만 그건 과정에서 생긴 사고이지 않나. 획이 틀어지거나, 설계가 어그러지지 않았으니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