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62
하지만 에밀리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처음부터 생각해 둔 목적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뿐.
“솔직히 전 이 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공작님도 상황이 불가피하니 그런 선택을 내린 것 같은데…… 진심이 아니라면 이 결혼을 무르고 싶어요.”
에밀리나는 맥트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의문이 자꾸 맴돌았다.
디트리오 공작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이득 따윈 아무것도 없는, 이 불공평한 결혼에.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아버지를 설득해 혼인하게 만든 것인지.
단순히 키르 때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비약적인 사고였다.
키르와 깊은 관계라고 할지언정 본인도 아닌 타인인 키르젠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건 오지랖이나 다름없었다.
말이 좋아 불가피한 선택이지, 그냥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가깝지 않은가.
그런 의미를 담아 묻긴 했는데, 딱딱하게 굳은 음성이 돌아왔다.
“왜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린 어제 처음 만났으니까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다른 속내가 있다면 모를까…… 에밀리나가 뒷말을 삼키며 키르젠을 보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전 꽤 오랫동안 영애를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한때를 회상하는 것처럼, 키르젠이 느릿하게 말을 뱉었다.
에밀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키르한테 제 이야길 들으신 건가요?”
키르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셈이죠.”
“그런가요…… 하지만 저로서는 당황스럽네요. 전 결국 공작님을 어제 처음 뵈었고,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몰라요.”
에밀리나의 나직한 목소리에 키르젠이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어떤 감정을 숨기는 것처럼 눈꺼풀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밀리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를 도와주시려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런 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그의 존재나 성격 같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키르젠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밀리나는 그 기세를 받아 다시 한번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니 이 결혼을 물러 주셨으면 해요. 공작님이라면 충분히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잖아요. 아버지를 도와주시면서 진 빚은 제가 어떻게든 갚도록 할게요.”
키르젠은 잠시 말없이 에밀리나를 응시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금안이 어딘지 모르게 괴로워 보였다.
그가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저와 부부가 되는 것이 그렇게 싫으십니까?”
“그, 싫은 건 아닌데…….”
에밀리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싫다기보단 그를 믿을 수 없어 멀리하고 싶었으니까.
키르젠이 언제 잘해 주었냐는 듯 돌변할지도 모를 일이고,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에 촛불 같은 제 존재는 한없이 흔들릴 터였다.
그러다 꺼져 버리면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하지만 상처받은 얼굴을 한 남자한테 대놓고 진심을 말하자니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키르젠은 이 상황을 못 견디겠다는 듯 버림받은 것처럼 굴고 있었으니까.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공작님은 많은 걸 가지신 분이죠. 그만큼 저보다 더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어요. 전 소문도 좋지 않고, 공작님의 앞날에 방해만 될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애만큼 제 옆자리에 어울리는 분은 없어요. 소문은…… 제가 어떻게든 없애 보이겠습니다.”
키르젠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에밀리나를 되레 설득했다.
에밀리나는 정말이지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키르젠은 물러나기는커녕 결혼에 대한 확고한 의지마저 내비쳤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저와의 혼인을 고집하는 건가요? 단순히 키르 때문이라고 하기엔 행동이 지나치잖아요.”
“약속했으니까요. 당신과 평생 함께하기로.”
“……키르가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이에요?”
에밀리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키르젠이 진중한 얼굴로 수긍했다.
“예.”
하, 에밀리나는 기가 막혀 실소를 흘렸다.
“공작님. 이건 공작님의 인생이 걸린 일이에요. 그걸 지킬 만큼 어린아이 말 한마디에 이 결혼을 할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충분히 넘칠 만큼 있습니다.”
키르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답했다.
그 태도가 너무나 확고하여 에밀리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키르젠이 이어서 말했다.
“상황이 갑작스러운 만큼 제가 못 미덥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진심으로 영애를 원하고 있어요. 당신이 아니면 안 될 정도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니…….”
키르젠이 한차례 숨을 고르고서 말을 이었다.
“저를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열망에 찬 금빛 안이 애원하듯 시선을 보냈다.
에밀리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구는 건데.
키르젠은 어딘지 모를 초조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제가 거부할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굴고 있었다.
그게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어서 확고한 생각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에밀리나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래도 싫다면요? 이 결혼을 강제로 유지하실 건가요?”
“…….”
“대답해 주세요.”
하지만 키르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한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에밀리나의 끈질긴 눈빛에 키르젠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긴 음영 속 후회를 감추며.
창을 타고 넘어온 햇살이 키르젠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귀족 간의 혼인은 왕의 최종 승인을 받습니다. 그걸 확정받은 이상 저라도 없던 일로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죠. 이 관계를 끝내려면 이혼 절차를 밟아야 할 겁니다.”
“…….”
“원하신다면 최대한 피해가 없도록 조치는 할 생각이지만…….”
키르젠이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추문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확실히. 키르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혼한 귀족 여성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을 테니까.
더구나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바로 이혼을 진행하게 된다면 소문은 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터였다.
이미 구설수가 가득한 만큼 온갖 꼬리표가 붙어 그녀를 괴롭힐지 몰랐다.
하지만 키르젠과 결혼을 이어 가도 그만큼 순탄치 못할 것이다.
주인공의 운명이란 굴곡진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에밀리나는 절벽을 눈앞에 두고 퇴로가 막힌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피곤하게 엮이는 건 마찬가지이므로.
‘미치겠네.’
왜 자꾸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한낱 엑스트라치곤 이상하리만치 사건 사고에 엮이고 있었다.
이쯤 되면 모른 척하고 싶어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이미 원작은 시작도 전에 틀어졌고, 자신은 주인공의 운명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는 것을.
그래. 원하지 않게도 인생이 꼬여 버린 것이다.
에밀리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복잡한 심경으로 잠시 말을 고르는데, 키르젠이 조용히 말을 던졌다.
“이혼을 원하십니까?”
“생각 중이에요.”
“부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당신이 그에게 약속한 ‘소원’이기도 하니까요.”
에밀리나의 애매한 답변에 키르젠이 표정을 감추고 말했다.
그녀는 의문이 들어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소원이라니요?”
“그와 어릴 적 소원을 두고 내기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저와 영애가 맺어지는 것에.”
에밀리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정확히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소원이라니. 설마 그때 북부 숲까지 경주를 한 걸 말하는 건가?
물론 키르와 함께한 얼마 안 된 추억인 만큼 기억은 하고 있지만, 솔직한 심정으론 어이가 없었다.
그걸 이제 와서 꺼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마음에 담았다가 사용했다는 것이 참…… 기가 막혔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반박이 튀어 나갔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어린애들 소꿉장난 같은 약속일 뿐이잖아요. 그런 건 이유나 변명이 되질 못 해요.”
“소꿉장난 같은 약속이라니…….”
키르젠이 충격을 받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영애가 그 시절에 한 약속은 전부, 장난에 불과했던 것입니까?”
이윽고 키르젠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에밀리나를 바라보았다.
절절한 그의 표정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짙은 우울을 담고 있었다.
또 한 번 이상하리만치 부채 의식을 안겨 주는 키르젠의 태도에 에밀리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피해 왔던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히 짚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키르와 무슨 사이인가요? 관계가 어떻길래 당사자도 아닌 공작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냐고요. 저로서는 정말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에밀리나의 물음에 키르젠이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회한이 담긴 미소로 답했다.
“……제게 남은 유일한 혈육입니다. 그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지요.”
“…….”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 예상해서 그런지 에밀리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두 사람의 외모부터가 너무 똑 닮았으니까.
친족 관계라고 생각하면 그간 느꼈던 불안이 맞아떨어지긴 했다.
하지만.
“그렇담 키르와 직접 만나 이야길 해 보겠어요. 공작님의 말대로라면 이 일의 모든 출발점은 그 애이잖아요.”
당사자도 없이 공작의 말만 듣고 섣부른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정말 키르가 원한 일이라면, 결국 한 번은 대면해야 할 일이긴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