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81
에밀리나는 제가 알아야 하는 일인 건가 싶어 록벨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키르젠이 직접 하는 일인지라 제가 묻기엔 조금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기간도 많이 넘겼으니 가벼운 상황 정도는 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에밀리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록벨이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의 유일한 친족이자 친숙부 되시는 분과 관련된 일입니다.”
유일한 친족?
에밀리나는 잠시 당황했다.
일전에 키르젠에게 들은 말과는 조금 달랐다.
공작은 키르와 무슨 관계냐고 물었을 때 유일한 혈육이라고 답해 주었다.
그래서 에밀리나는 자연스럽게 키르와 키르젠이 사촌지간이라고 연관 지었다.
하지만 록벨의 말을 들어 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럼 키르가 항렬이 더 높다는 건가?’
키르는 저보다 4살이 어렸다.
그리고 키르젠의 나이도…… 어?
‘그러고 보니 둘이 동갑이잖아?’
어쨌든 나이대가 같다 보니 항렬이 다를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다.
가계 족보 꼬이는 일이야 세상에 흔한 일이니 대수롭지 않긴 했다.
하지만 록벨의 말투는 묘하게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지칭하는 느낌이라 에밀리나는 찜찜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건 한번 물어보긴 해야 할 거 같은데.’
자신도 이제 공작가의 일원이니 가계도 정도는 외워 두어야 나중에 곤란을 겪지 않을 것 같았다.
에밀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이 문제를 넘기려고 했는데, 록벨의 다음 말이 귀를 의심하게 했다.
“그리고 제노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진 주인님의 후견인이기도 했고요. 이건 제 사담입니다만, 주인님은 오랫동안 그분 때문에 힘들어하셨습니다.”
록벨은 그렇게 말하며 과거의 어느 때를 회상하는 것처럼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에밀리나는 혼란스러웠다.
‘키르가 후견인이 될 수 있나? 이제 막 성인이 된 걸로 아는데.’
후견인을 세웠으면 세웠지, 나이상 키르가 후견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가 맞지 않았고, 나이가 될 수 없었다.
후견인이라는 건 보통 미성년자 뒤를 봐주는 성인이 하는 거였으니까.
귀족으로 따지면 어린 후계자를 돌봐 줄 어른을 지정해 그가 작위를 이어받을 때까지 옆에서 보호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악용하면 상당히 고달픈 관계로 변질되기도 했다.
후견인이?
아니. 어린 후계자 쪽이.
확률적으로 후계자가 가져야 할 모든 권리를 후견인이 대리라는 명목으로 전부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후계자가 성인이 되기 전까진 법적 권리가 후견인 쪽에 있으니 대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후견인과 피후견인 관계는 조금만 흔들려도 악연의 고리에 묶이기 딱 좋았다.
그리고 록벨은 키르젠도 그런 관계에 묶여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일러 주고 있었다.
그 악연의 고리로 인해 상당히 고달픈 생활을 했다고 제게 알려 준 것이었다.
에밀리나는 그제야 록벨의 말을 이해하고서 풀리지 않은 의문을 풀었다.
그러니까 키르는 완전히 논외로, 공작에게는 따로 후견인이자 친숙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작이 후견인 때문에 고생을 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최악이라고 할 만큼 좋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키르젠은 숙부를 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수도에서의 볼일이 숙부 때문이라면 그를 정리할 목적으로 떠났다는 소리였으니까.
애초에, 제게 숨기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상정조차 하질 않고서 말을 안 꺼낸 것이었다.
에밀리나는 그제야 퍼즐을 맞춘 기분으로 록벨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분이 수도 저택을 관리하고 있는지라 주인님께서 이번에 정리차 올라가신 거였습니다. 한데 쉽지 않은 모양이군요. 귀택이 이리 늦어지신 걸 보면…….”
록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뒷말을 중얼거렸다.
에밀리나는 그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걱정하지 말아요. 공작님은 전쟁도 승리로 이끈 영웅이잖아요. 분명 잘 정리하고 돌아오실 거예요.”
“이 노구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도 많이 외로우실 텐데, 제가 괜한 말을 꺼낸 게 아닌지 걱정이군요.”
“괜한 말은요. 공작님이 그렇게 밖에서 힘써 주시고 계시는데 제가 아무것도 몰랐던 게 미안할 뿐이죠. 앞으로도 많이 알려 줬으면 해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공작님을 도와야죠. 그리고…….”
에밀리나가 한 차례 숨을 고르고서 말을 이었다.
“외로움은 괜찮아요. 공작님이 일부러 절 내버려 두신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거잖아요. 종종 라젤라 백작 부인과 수다 떨면서 달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라젤라 백작 부인과 마음이 맞으신 모양입니다.”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집사님 덕분에 좋은 친우를 사귀게 됐어요. 인사가 늦었지만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마님께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입니다.”
록벨은 겸손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에밀리나는 이러다 칭찬 릴레이로 말을 주고받을 것 같아 처음의 주제를 잠시 끄집어냈다.
수도 일의 자세한 경위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밀이라면 록벨이 곤란하지 않을까 염려돼 확인차 묻고 싶었다.
물론 그는 키르젠의 신임을 받는 집사기에 본인 선에서 적당히 정보를 거르고 일러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단순히 말 한마디. 문장 하나. 그것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추릴 수 있기에 이래도 괜찮은 건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에밀리나는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제게 수도의 일을 알려 주셨는데, 공작님이 허락한 정보일까요?”
“주인님께서 딱히 함구령을 내리신 건 아니니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알만한 분들은 다 알고 계시고요.”
“다행이네요. 괜히 제 고집에 물어본 거 같아 걱정이 되어 물었어요.”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사생활만 아니라면 마님의 질문에 무엇이든 답변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언제든 궁금한 것이 생기면 말씀해 주십시오. 공작님께선 마님에게 따로 감출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록벨의 말에 에밀리나는 허허로이 웃었다.
그건 제가 부담스러웠다.
괜히 너무 깊은 정보를 들었다가 공작가에 묶일 수 있으니까.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고.’
그냥 공작가 안팎으로 돌아가는 정세나 분위기. 딱 그 정도면 충분했다.
겉핥기 정도로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에밀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 짓궂은 미소를 그렸다.
“음, 질문이라…… 집사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갑자기 궁금증이 드네요. 집사님의 사생활을 여쭙는 건 실례일까요?”
“말씀은 드릴 수 있지만,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비밀인가 봐요.”
“어떻게 보면 그런 셈이지요.”
호호호.
하하하.
후후후.
허허허.
두 사람은 가식 아닌 가식 같은 웃음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자연스럽게 넘겼다.
에밀리나도 그 이상 파고들 생각은 없어 따로 묻지는 않았다.
그저 말해 주면 좋고, 말 안 해 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딱 그 정도의 호기심으로 던져 본 말인지라 미련은 없었다.
록벨이 웃음으로 퍼진 푸근한 미소를 유지하며 에밀리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한데, 마님. 이 노구도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곤란하지 않은 선에서라면 얼마든지요.”
“물론입니다. 그저, 아직 주인님의 호칭이 조금 어색하신 듯싶어서요.”
곤란하지 않은 선에서 질문한다면서요. 에밀리나는 조금 식은땀이 나는 기분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아, 하하. 그, 음…… 그러게요. 공작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입에 붙었던지라 쉽게…… 부를 수가 없네요.”
“처음은 원래 다 그런 법이지요.”
그래. 처음은 원래 다 그런 법이지.
근데 공작님을 공작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남들 앞에서 남편이라 호칭을 붙여 주시면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사소한 대화에서도 정이 쌓이는 법이니까요.”
사실 알고는 있다.
키르젠 본인한테는 딱히 부를 호칭이 없어 공작님이라고 불러도, 남들과 이야기할 때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 저도 모르게 공작님이란 호칭부터 입에 올리고 있었다.
남편이라는 호칭이 이상하게 낯간지러워 머뭇거리고 있으면, 자동으로 정정되어 나가는 것이다.
고작 호칭일 뿐인데, 고작 단어 하나일 뿐인데. 왜인지 이 단어를 입에 머금고 있으면 혀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입에 붙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은 기분이라 자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록벨이 이리 말을 꺼냈다는 것은…….
“사실, 저는 괜찮습니다만. 하녀 중 누군가가 주워들은 모양입니다. 쥐덫을 열심히 쳐야 할 텐데, 아직은 시기상조인지라…… 마리에게 들으셨을는지요?”
들었다마다. 정말 부지런한 족속들이다.
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일 가지고도 말을 옮기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음, 아니다. 쓸데없진 않으려나…….’
공작 부인이 밖에서 부군을 부를 때 꼬박꼬박 남처럼 부르고 있으니. 내외하냐고 소문 만들어 내기엔 좋긴 하겠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은 부부라도 집사람을 가리킬 때는 작위가 아닌 배우자의 의미가 담긴 호칭을 불렀으니까.
‘하…… 진짜 이 결혼 잘못해도 한참 잘못했어.’
사실 에밀리나의 입장에선 그런 소문이 나도 ‘그래서요?’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키르젠은 아닐 것이다.
공작가의 사람들도 아닐 터였다.
부부의 평판이라는 건 한 사람만 잘못해도 꼬리표처럼 따라붙었으니까.
돌아다닐 때마다 OO부인한테는 이런 소문이 있대. OO남편한테는 이런 말이 있대. 라는 식으로 하나가 붙으면 하나가 딸려 오는 식이었다.
1+1 같은 개념처럼 말이다.
평판 관리에 있어선 더럽게 가성비 안 맞는 일이니 결혼을 거부하는 사람도 은근 있었다.
그래서 에밀리나는 이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한 가지 생각이 꼭 들었다.
‘왜 이런 힘든 결혼을 하자고 해서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는다든가, 가문에 보탬이 된다든가. 혹은 남편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충분히 이상적인 혼인을 할 수 있었음에도 키르젠은 가시밭길이나 다름없는 저와의 결혼 생활을 택했다.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여주가 나타나도 뭔가 변하는 게 있긴 하는 건가 싶었다.
‘음…… 그래도 이건 자신하지 말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키르젠이 선택한 이 결혼에 이점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가 자꾸 손해만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었다.
에밀리나는 잠시 이 결혼의 원인을 떠올려 봤지만.
‘대화가 안 돼, 대화가.’
답은 금방 도출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튼, 에밀리나는 이 결혼 생활에 적극적이진 않더라도 민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굳이 먹지 않아도 될 욕까지 먹으며 지내고 싶진 않았다.
그저 호칭 하나 익숙해지면 모두가 편해지는 길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