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가라, 오빠몬
“나 참, 말 좀 똑바로 하게.”
긴 설명을 듣고 나서야 센터장 최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나이 먹고 초등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길드를 잃은 충격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보면 그런 건 아니었다.
백우진의 이야기는 자신이 아닌, 집에서 신세 지고 있다는 어린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저번에 들었던 그 아이인가.’
백우진이 어떤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얘기는, 일전 이도율으로부터 들은 내용이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에 대해 알고 싶다기에 탐정에게 맡겨 둔 지 오래였는데.
‘설마 직접 와서 얘기할 줄은…….’
보기보다 과감한 선택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의지할 데가 없었거나.
최강현이 짐짓 심드렁하게 물었다.
“초등학교 입학이야 당연히 때 되면 다 하겠지. 그런데 나한테 부탁하러 왔다는 건…….”
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최강현이 그렇게 찔러 보았지만, 백우진은 흔들림이 없었다.
최강현의 말대로. 백우진이 부탁하러 온 아이는 스스로 백수아라는 이름을 댔지만. 행정상으로 그런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들에게 밝혀서 좋을 게 없는 일로 보였지만.
그걸 숨길 거였으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라는 듯. 백우진은 여유로운 태도를 내비쳤다.
“알 만한 분 아니십니까.”
“끄응…….”
맞는 말이었다.
불필요하게 간을 볼 필요는 없었다. 최강현이 머쓱하게 물었다.
“그래, 피차 알고 있다 하니 툭 터놓고 물어보지. 거, 자네 친척도 아닌 아이를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인가? 초등학교는 또 뭐고?”
그러자 백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덧붙였다.
“새 보호자를 구하려 해도 신분이 없으니 어디 신청도 못 했습니다. 그 부분도 신경 써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자기가 꺼낸 말이었으니 무르기도 뭐했다. 최강현이 당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괜히 물어봐서 할 일만 늘렸구만.”
“그리고 학교는.”
백우진이 질린다는 듯이 표정을 찌푸렸다.
“어디 다른 데라도 보내 놔야 조금이라도 덜 볼 거 아닙니까.”
그렇다.
백수아는 내심 학교에 가서 또래 친구들을 사귀거나 수업이라는 걸 들어 보고 싶어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꼬마애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은 건 백우진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합법적으로 다른 곳에 애를 맡겨 놓을 수 있다면야 그걸로도 족했다.
그런 백우진의 대답에 최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도 참…….”
인정머리 없는 친구였다.
* * *
“저기, 클레어 씨. 아직입니까?”
똑똑.
방문에 대고 노크했다.
“자, 잠시만요.”
방문 너머에선 아까부터 같은 대답이 들려올 뿐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였다.
그럴 만도 한 게, 벌써 시간이 꽤 지났기 때문이다. 내가 기다리는 건 괜찮다 쳐도, 약속한 시간에 맞게 도착하려면 진작 출발했어야 했으니.
내가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밟는다 쳐도 빠듯해질 수 있었다.
“이젠 진짜 시간 없는데요. 무슨 일입니까? 내가 도울 거라도 없어요?”
그러자 잠깐 침묵이 있더니 클레어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조금만 도와주세요.”
이상한 일이긴 했다.
클레어는 원래 외출 준비에 시간을 이렇게 오래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원래 오래 걸린다는 걸 감안한다면 더더욱.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건…….’
클레어가 입고 있는 건 커다랗고 품이 넓은 치마와 저고리였다. 눈이 빼앗길 정도로 화려한 색에, 복잡해 보이는 꽃 무늬가 과하지 않게 그려져 있었다.
“웬 한복이에요?”
“설날이잖아요.”
클레어의 말대로, 오늘이 설이었다. 올해는 조금 이른 날짜에 설이 찾아왔다.
연초에 없었던 아버지도 설에 맞춰 귀국했으니. 평소라면 클레어의 집에서 집합하는 도은이였지만 이번엔 아버지와 도은이가 있는 본가에 우리가 찾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명절을 핑계로 가족들 얼굴을 보는 건 좋지만, 따지고 보면 타인일 클레어에겐 귀찮은 일일 테니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클레어는 당연히 자기도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난 정말 괜찮았지만. 본인이 어떻게 해서도 꼭 가고 싶다는데 어쩌겠나.
그래서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준비를 하고 나오겠다던 클레어가 방에서 나오질 않았던 것이었다.
왜인가 했더니. 한복을 입고 있었나.
“좀 복잡해서…….”
클레어가 쑥스럽게 중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옷은 걸치기만 했고 몸에 고정된 게 하나도 없었다. 옷에 달린 고름들도 묶인 게 하나도 없었고.
“대신 묶어 주시겠어요?”
“…제가요?”
“그럼 달리 누가 있다는 건데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도은이가 있었으면 불러다가 좀 하라고 짬 때렸을 텐데, 도은이는 지금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우릴 기다리고 있을 테고.
“나도 하는 법 모르는데…….”
“자요. 이거 보고 하면 돼요.”
클레어가 핸드폰 화면을 보여 줬다. 인터넷에서 고름 묶는 법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게 있으면서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본인이 직접 하면 되잖아요.”
“제가 하면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요.”
손재주가 없는 건 어쩔 수 없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시간은 촉박한 상황이었고.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 이제 와서 다 벗고 평소 입던 옷이나 입으라 하는 것도 야박했으니.
클레어의 앞에 마주섰다.
벌어진 저고리 아래로 반투명한 속저고리가 비쳐 보였다. 우선은 이걸 모으는 것부터였다.
앞섶을 모으자 클레어가 반응했다.
“조금 답답한데요…….”
“…아, 예.”
손에 힘을 조금 풀었다. 품이 느슨해지자 클레어가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초보자가 이런 본격적인 의상을 산 거냐고. 요즘은 겉모습만 그럴싸하고 입기는 편한 개량 한복도 있을 텐데. 그건 고름도 이미 묶여 있는 상태로 고정되어서 나올 거고.
하지만 외국인인 클레어에게 그런 사정까지 모두 고려하며 사야 했다고 꾸짖는 것도 너무 배려심이 없는 말인가.
아니. 한국말은 엄청 잘하는 데다가 소주 깔 때 병도 돌리는 여자가 이런 건 모른다는 게…….
‘묶자.’
어차피 고름이다. 천 두 개를 묶는 거다. 눈앞에 있는 게 사람이냐 신발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클레어가 건네준 사이트에는 고름을 묶는 방법이 자세히 안내되어 있었다. 그림과 함께 곁들어진 설명을 읽으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도록.
‘양손에 잡고…….’
긴 고름과 짧은 고름. 자세히 보니 두 고름은 길이가 달랐다. 시키는 대로 둘을 교차시키고 한쪽을 둥글게 말아서…….
“어라.”
매듭이 풀렸다.
왜 이러는 거야.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 봤다. 분명히 나는 시키는 대로 잘하고 있었는데, 내가 고작 이런 거 하나 못 묶을 사람은 아니고.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하는 거라 실수를 했나 싶었지만. 이 정도 반복된 거라면 단순한 실수는 아니었다.
어딘가 문제가 있다.
‘옷이 불량인가?’
저고리와 고름을 자세히 들춰 봤다.
옷에는 크게 이상이 없었다. 튿어진 부분도 없고. 구멍도 없고. 저고리 생김새도 자료에 쓰여 있는 모양 그대로였고.
“저기…….”
“네?”
“…너무 가깝지 않은가요.”
클레어의 지적에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실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똑바로 섰다. 이건 고름이 잘 안 묶여서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다.
다시 한번 자료를 따라 제대로 따라했다.
이쪽 고름을 위로, 저쪽 고름을 아래로. 둥글게 큰 구멍을 만들고 나머지 한쪽을 넣으면…….
“…됐네?”
모양이 조금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매여 있었다.
거 참 이상하구만. 분명히 처음에 했을 때도 똑같이 했는데 몇 번을 해도 똑바로 안 되더니. 어쩌면 어딘가 꼬여 있거나 뒤집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다소 고생스럽긴 했어도 해 놓고 보니 예쁘구만.
어설픈 모양도 다소 다듬고 나니 그럴싸한 모양새가 갖춰졌다. 이 정도면 가까이서 보지만 않으면 프로가 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다. 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데에서 보면.
“자. 다 됐…….”
뿌듯하게 클레어를 바라보니, 클레어는 수치스러운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왜요?”
“할 줄 알면서 일부러 그랬죠?”
무슨 말인가 했더니. 작업 도중에 벌어졌던 약간의 트러블을 얘기하는 거였다.
나도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럴 리가요.”
“…….”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난 떳떳했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소릴 들을지 몰랐으니. 나는 빤히 쳐다보는 클레어의 등을 떠밀었다.
“자, 출발합시다. 이미 늦었어요.”
“또 이거……!”
당연하지만.
클레어가 힘으로 저항할 순 없었다.
* * *
“와! 언니, 오늘 진짜 이쁘다!”
“고마워.”
현관문을 열고 우릴 맞이한 건 도은이였다.
도은이는 얼굴을 보자마자 한복을 차려 입은 클레어를 향해 연신 감탄을 쏟아 냈다.
“물론 평소에 가짜로 이쁘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오늘은 진짜 완전 여신. 아~ 안 되겠다. 못 참겠다. 이따가 나가자. 내가 좋은 데 데려가 줄게, 아가씨. 이런 건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 놔야 돼. 아니, 근데 다른 사람은 보여 주면 안 돼. 나만 봐야지.”
도은이가 히히덕거렸다. 클레어도 이젠 익숙하다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클레어 말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말을 걸었다.
“나도 왔는데.”
“어쩌라고.”
오든 말든. 마치 클레어의 운전기사쯤 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누가 보면 남인 줄 알겠네.
클레어는 도은이의 극진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했는데. 나는 혼자 터덜터덜 걸어서 들어갔다.
오늘 다른 점은 집에 아버지도 있었다는 점이다. 평소엔 외국에 계시느라 볼 일이 없었지만, 오늘은 아버지 역시 현관 근처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왔구나.”
“아… 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는 아직 긴장되는 상대인지. 클레어가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 인사를 건넸다.
“나야 잘 지냈지. 오늘은 참 곱구나. 보기 좋다.”
“…감사합니다.”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훈훈한 장면이었다. 클레어가 입을 가리며 다소곳하게 웃고, 아버지 역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저도 왔습니다, 아버지.”
“왔냐.”
그걸로 끝이었다.
“…이상하다. 이 집 아들은 나 아닌가?”
“글쎄, 10년이나 집을 나가서 아들이 있었는지도 까먹은 거 아닐까 싶네.”
옆에서 도은이가 빈정거렸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그에 반해 우리 언니는 몇 년 전부터 명절 때마다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이 정도면 거의 입양딸이지? 일단 확실한 건, 오빠보다 나은 듯?”
“내가 잘못했다.”
그런 거였나.
어쩐지 클레어는 자기가 가는 것도 당연하다는 듯이 굴더니.
‘내가 무슨 착각을…….’
대단히 낯부끄러워지는 착각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남들 앞에서 부부 행세를 하고 있다지만. 어차피 도은이도 아버지도 사정을 알고 있는 내부인이니 굳이 가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거다. 나도 어릴 때 명절 때마다 친척 집 전전했던 게 그렇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소릴 했던 내 입을 꼬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래? 죽여 달란 얼굴을 다 하고.”
“…아니야.”
그러자 도은이가 소리 죽여 물었다.
“그래서, 새색시를 집에 들인 기분이 어때?”
“놀리지 마라.”
진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
내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 어떻게 알고 그런 농담을 다 건네는 건지.
하지만 도은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 놀리는 거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진짜로. 저번에 언니한테 장난삼아 한 번 말한 적 있었거든. 우리 집에 시집 오려면 한복 입고 와야 한다, 하고.”
“…….”
“못 들었나 보네?”
도은이는 무책임하게 말을 돌렸다.
“뭐, 단순한 기분 전환일 수도 있고. 나도 모르겠다~”
“…….”
도은이가 뒤통수에 손을 대고 딴청을 피웠다. 저러는 걸 보니 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방금 얘기가 지어 낸 걸 수도 있고.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도은이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언니한테 칭찬했어?”
“뭐?”
“곱게 차려 입었잖아. 제일 먼저 본 사람 아니야? 이런 씨. 그런 영광을 누려 놓고 한마디도 안 했다고? 미친 거 아니야?”
“그건…….”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가라, 오빠몬!”
“…지금?”
그러자 도은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여기서.”
식은땀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