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보스는 죽었다
“좋아. 보스에게 소개시켜 주지.”
안드레이가 순순히 대답했다.
파벨이 내 온 값비싼 술을 한입에 털어 넘기는 것과 같이 시원한 대답이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그 행동은 모두 계산된 것이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을 데려온 건지 모르겠군.’
안드레이가 보고 있는 건 도율이었다.
지금 여기서 아무나 보스를 만나 뵐 수 있는 줄 아냐고 퇴짜를 놓으면 저 남자가 실력을 행사할 게 뻔했고.
그렇게 된다면 나름대로 한가닥 한다고 자부하는 자신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보스에게 이 모든 사실을 전해 조직적으로 대처하게 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몰래 연락할 틈은 없겠군…….’
도율은 안드레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관찰하고 있었다.
보스에게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손님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편이 가장 원만한 해결 방법이었다.
“시간 끌 것도 없으니, 곧바로 출발하지.”
“좋습니다.”
* * *
“그래? 잘됐네.”
옐레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을 찾으러 온 거라며? 일이 진행됐으니 아저씨한텐 잘된 일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백우진이 꺼림칙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안드레이와 접촉해 고르곤의 보스를 만나러 갈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이곳에서의 일은 무엇 하나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시장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모스크바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파벌은 니콜라이 파벌 외에도 많았다. 그렇다고 떠나기 전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도 정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다고 옐레나에게 어떻게 해 달라는 부탁을 들은 것도 아니었으니. 더 깊게 관여하기도 이상했다.
옐레나는 백우진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쪼아댔다.
“아저씨, 내가 쪼다처럼 굴지 말라 했지.”
옐레나가 주위를 둘러봤다.
“뭐……. 이곳 상황도 나쁘진 않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당장 옐레나의 상관인 파벨은 기뻐하고 있었다. 조직의 간부에게 얼굴 도장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가장 큰 파벌인 니콜라이 파벌을 날려 버린 것도 희소식이었다.
파벨은 머리가 돌아가는 작자이니.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선 오히려 더 진가를 발휘할 예정이었다.
“돌아가기 전에 밥이나 한 번 더 사 달라고.”
옐레나가 입맛을 다셨다.
호텔 방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거나 비싼 밥을 얻어먹는 걸 못하게 된 건 아쉽지만, 어차피 한 여름밤의 꿈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우진이 약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율과 안드레이에게 합류했다.
“당찬 애로군.”
“그 말대로입니다.”
도율은 러시아어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표정만 봐도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파벨은 주인 배웅하는 개라도 되는 것처럼 버선발로 뛰어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정확히는 안드레이를.
“들어가십시오!”
“…….”
시가를 뻑뻑 피우며 무게 잡는 모습으로 파벨을 처음 접했던 도율과 백우진은 어처구니가 사라지는 광경이었지만.
안드레이는 한두 번 보는 일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었다.
한 조직의 간부 정도 되면 아래에서 줄을 대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놈이 한둘이 아니었다.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강자였지만 조직에 몸을 담아 본 적 없이 모두에게 쫓기는 공적(公敵)이었던 도율이나, 어떤 조직의 높은 자리에 속해 있었지만 특수한 사정으로 누구도 줄을 대려 하지 않았던 백우진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건 안드레이였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애초에 그는 뱃살을 내밀고 거드름을 피우는 종류의 간부가 아니었다.
실제로 보스의 수족을 대신해 움직이는 자들인 만큼, 직접 운전하거나 현장에 나서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보스는 원래 모스크바에 기거합니까?”
“글쎄, 꼭 그런 건 아니야. 운이 좋았지.”
실제로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인 만큼 자주 있을 확률이 높았다.
지부장이 따로 있다는 걸 보면 이곳에서의 일을 모두 관리하는 건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사람도 사건도 모이는 곳이다 보니.
안드레이가 푸념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으면 나도 편하고 좋았겠지만. 우리 보스는 방랑벽이 심해서 말이야.”
안드레이가 덧붙였다.
‘…그랬던가?’
백우진이 의문을 가졌다.
확실히 고르곤의 보스와 만날 때 장소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방랑벽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외부의 인원을 대접하며 자신의 거처를 들키지 않으려는 철저함으로 무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방랑벽 같은 소리를 들으니, 뒤늦은 변명처럼 여겨졌다.
“시간은 괜찮은 겁니까?”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어도, 이미 잠에 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오기엔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백우진은 다음 날 약속을 잡는다 해도 괜찮았지만, 지금 당장 보자고 한 것은 안드레이였다.
안드레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도착하면 괜찮은 걸 알 거다.”
“……?”
그리 대답한 안드레이가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차는 계속해서 시내를 맴돌았다. 도시 외곽의 후미진 곳으로 빠지거나 하지 않고 보다 화려하고 찬란한 중심지를 향해 파고들었다.
밤이 무르익을수록 사치스러운 불빛을 뿜어 대는 구역.
어두운 불빛 속의 횃불에 이끌리는 벌레들처럼 검게 칠한 차량들이 계속해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탄 차량도 그 행진에 합류했다.
“여기다.”
안드레이가 백우진과 도율을 안내했다.
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건물은 벌써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장한 양복 차림의 두 사내가 안드레이를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드레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손짓 한 번으로 입구를 지키던 경비들을 치우고 안에 들어갔다.
“여기는…….”
안에 들어가자 바깥보다 어두운 조명이 그들을 비추었다.
새까맣게 차단된 공간 속에 붉은색 조명만이 뿌려져 있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발바닥에 닿는 지면으로부터 쿵쿵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깊이 들어갈수록 그것이 커다랗게 울리는 음악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클럽인가?”
안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무아지경으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술잔이 아니라 술병을 들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안드레이는 그들을 무심하게 지나쳐 위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곳으로 갈수록 사람이 적어졌다. 얼핏 보니 이곳은 보다 돈을 많이 지불해야 잡을 수 있는 자리인 듯했다.
그곳을 지나자 두꺼운 문으로 막혀 있는 방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앞을 지키는 자들이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안드레이 님, 저들은……?”
“손님이다.”
남자들은 안드레이의 뒤에 선 도율과 백우진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육중한 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간 후 문을 닫자 바깥에서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커다란 방 안에 길게 늘어진 소파의 가장 깊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다리를 꼬고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허벅지와 옆구리가 훤히 드러나는 가벼운 차림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그 여자는 술독에 빠진 듯한 풀린 눈동자로 방에 들어온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안드레이냐.”
똑바로 앉아 있는 것도 아니라, 반쯤 소파에서 흘러내려 누워 있었다.
그녀가 꼬부라진 혓바닥으로 킬킬거리며 손가락으로 도율과 백우진을 가리켰다.
“이야. 두 놈이나 데려왔군. 난 저쪽 안경잡이가 더 취향이다. 샌님들은 망가뜨리는 맛이 있거든.”
그 꼴을 본 안드레이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리틀 보스. 이분들은 손님입니다.”
“누가 리틀 보스야!”
쨍그랑!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날렸다. 벽에 부딪친 술병이 깨져 비산하고, 벽에 짙은 자국을 남겼다.
‘이곳 놈들은 수틀리면 술병 깨 먹는 게 약속이라도 되나.’
도율이 질려 하며 벽을 힐끔거렸다.
어쨌거나 당사자들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안드레이는 한마디도 지지 않으며 위압적으로 목소리를 눌러 담았다.
“그따위로 철부지 아가씨처럼 굴면 언제까지고 리틀 보스일 겁니다.”
“…….”
“고쳐 앉으십시오, 술기운도 얼른 날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들은 손님입니다. 리틀 보스의 손님.”
“…알았다고.”
여자가 마력을 돌려 취기를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그 정도가 가능한 각성자라면, 적어도 어수룩한 수준은 아니란 뜻이었다.
술기운이 달아나자 생판 초면인 손님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걸 깨달았는지, 여자가 다소 얌전하게 헛기침을 뱉었다.
“그래.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맞겠지. 알고 찾아왔겠지만, 내가 고르곤의 보스인 카르멘이다.”
카르멘이 다리를 꼬고 손가락 사이에 술잔을 끼워 내밀었다.
몇 번 연습한 건지 폼이 제법 자연스러웠다. 앞서 보인 추태가 아니었다면 어려 보이는 나이치고도 제법 완숙한 느낌이 난다고 박수를 쳐 줄 만도 했다.
그런 그녀의 소개를 들은 도율이 백우진에게 물었다.
“…고르곤의 보스는 여자였습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보스는 아니었습니다.”
백우진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기억하는 고르곤의 보스는 중후한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었다.
특수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역용술(易容術)을 펼칠 수 있다는 이야기나, 모습이나 인상을 감추거나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아티팩트에 대한 지식은 알고 있었지만.
카르멘이라 소개한 여자는 어딜 봐도 어수룩해 보였다.
백우진이 이전 보았던 노련하고 완숙한 태도를 보이던 남자의 알맹이에 이런 여자가 들어 있었단 사실은 어떻게 봐도 믿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반대로 그 아저씨가 이런 깜찍한 아가씨 행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 끔찍하군.’
백우진이 드물게도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뻔한 이야기였다.
“리틀 보스, 라는 건 소가주라는 뜻 아닙니까?”
“소가주?”
“아니, 아닙니다.”
도율이 말을 철회했다.
어쨌거나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백우진도 도율이 하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틀 보스란 건, 분명 정식 보스란 건 아니란 뜻입니다. 아까도 그것 때문에 화를 낸 겁니다.”
카르멘은 취해 있긴 했지만 리틀 보스라는 말에 역정을 내며 술병을 던졌다. 그게 그녀의 역린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드레이.”
백우진의 부름에 돌아본 안드레이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부르지?”
“몰라서 묻습니까?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잖습니까.”
“뭐, 그렇지.”
그가 깔끔하게 인정했다.
보스에게 안내를 하겠다면서 이런 여자애에게 데려온 것부터가 설명이 필요했다.
“일단 앉지.”
안드레이가 소파에 깊숙이 몸을 집어넣으며 앉았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술을 따는 모습을 카르멘이 퉁명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보스 앞에서 하는 것 치고는 다소 예의범절이 부족한 모습이었지만, 자기 입으로 그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백우진이 마주 앉자 안드레이가 그의 자리에 술을 따랐다.
“우릴 속인 겁니까?”
“속였다니, 그렇지 않아. 이분은 정말 내가 모시는 보스다.”
“…….”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태도가 조금 안하무인하긴 해도 남을 속이기 위해 누군가를 거짓으로 섬긴다는 말을 할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카르멘도 저래 보여도 안드레이를 제법 믿는 듯한 눈빛이었고.
백우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미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고르곤의 ‘보스’와 일면식이 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갔죠?”
“보스는…….”
안드레이가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찬 술이 조명을 받아 하얀 반사광을 띄우고 있었다.
그가 술을 입에 털어넣으며 답했다.
“죽었다.”
씁쓸한 것은 말인지 술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