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어떻게 할까요?
“기회를 드리도록 하지요.”
까마귀 서오의 말투는 어느새 정중한 존댓말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다고 흰돌이의 상해 버린 마음까지 되돌려주진 못했다. 흰돌이가 한층 까칠한 태도와 퉁명스러운 말투로 되물었다.
「기회는 뭔 놈의 기회?」
“진짜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서오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열망이 반짝거렸다.
“가짜가 아닌 진짜. 그림으로 그려 놓은 가짜 호랑이가 아니라, 진짜 서방을 수호하는 사신수 백호가 되는 겁니다. 바라지 않습니까? 꿈꾸던 모습 그대로가 되는 것.”
「…….」
흰돌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그런 게 가능하다고?」
“물론, 아무리 저라고 해도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만. 제가 모시는 주인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요.”
「주인이라면…….」
흰돌이가 기억을 더듬었다.
이 까마귀가 모시는 주인이란 작자는 도율을 태우며 산꼭대기까지 도착했을 때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다.
소매가 넓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른, 도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젊은 얼굴을 하고 그 꼬락서니를 하는데도 제법 어울리는 편이었다. 달관한 듯한 표정이 그 맛을 살리는 듯했다.
“백귀의 주인, 망량 님 말이십니다.”
이름까지는 몰랐던지라, 서오의 부연이 거들었다.
“망량 님이라면 가능합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당신을 신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 정도는.”
「그 양반이 무슨 이조판서쯤 되는 양반이냐고…….」
그게 말이 되냐.
언제는 가짜니 뭐니 하다가, 이제는 누구누구 님의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럼 그거야말로 진짜라고 할 수 있나?
“어떻습니까?”
「어떻냐고 물어봐도…….」
흰돌이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그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자기가 백호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넌 가짜라는 소리를 들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직후에 진짜가 되고 싶냐고 물어봐도 별로 와닿지 않았다.
흰돌이가 느끼는 혼란을 알아챘는지 서오가 한 수 접어 주었다.
“좋습니다.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대답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럼 이만.
하는 인사를 남기고, 까마귀는 쌩하고 돌아가 버렸다. 무언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건지 급히 자취를 감추듯이.
잠시 후, 계단을 타고 도율이 내려왔다.
“돌아가자.”
「어, 음…….」
흰돌이가 말을 우물거렸다.
아까까지 있었던 까마귀와 했던 대화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게 좋을지, 아니면 가만히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좋을지.
딱히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도율도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예, 뭐. 그럽시다.」
결국 둘 사이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 * *
“뭐가 이렇게 소란이느냐?”
주대현이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 누구도 커다란 발소리를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이곳은, 불과 몇 분 전부터 커다란 소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자빠질 것처럼 급한 몸놀림으로 주대현에게 튀어 왔다.
집행부 소속의 남자였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렸다.
“어, 어르신. 그게…….”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놈이 찾아왔습니다.”
“놈?”
주대현이 재차 묻자 남자가 침입자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이도율, 그자 말입니다.”
쾅!
이름을 말하기가 무섭게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도율이었다. 오면서 온갖 소란이 있었는지 옷가지가 조금 지저분해져 있었다.
하지만 별것도 아니라는 듯 털어 내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주대현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주대현이 한숨을 쉬더니 집행부에게 고했다.
“나가 봐라.”
“하지만……!”
“어서.”
어차피 여기에 있어 봤자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없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집행부가 어르신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과 실력 행사로 도율의 발걸음을 붙잡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금까진 도율이 얌전히 말을 잘 들어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막상 본인이 말을 듣지 않고 들이닥치려 한다면 집행부야 몇 명이 있든 그의 앞길을 막을 순 없었다.
집행부가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주대현이 혀를 끌끌 차며 핀잔을 줬다.
“손님의 예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놈이군. 누가 그렇게 흙발로 마구 들이닥쳐도 된다고 했나?”
도율도 곱지 않게 맞받아쳤다.
“얼굴 보기가 영 힘들어서 말이지.”
지금까진 주대현이 일방적으로 필요할 때 도율을 불러내곤 했지만. 반대로 도율이 필요할 때 주대현을 부를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남은 건 결국 이렇게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난 바쁘다. 네놈 대신 전 세계 각성자들을 두루 살펴보느라.”
“그게 왜 내 대신이야.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면서.”
“…그래서. 아무튼 용건이 뭐냐?”
주대현의 물음에 도율이 잽싸게 화제를 꺼냈다.
“뭐 좀 알고 있나 해서.”
“뭘 말이냐?”
“이매라는 여자에 대해서.”
그러자 못마땅해 보이던 주대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주대현은 대현 그룹의 회장이었다. 그리고 대현 그룹이 가지는 영향력과 정보 수집력은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았다.
도율이 러시아로 가 백우진과 함께 고르곤이란 조직을 들쑤시고 다녔단 이야기를 전해 듣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디서 뭘 하고 싸돌아다니나 했더니. 그런 걸 알아보고 있었나.”
“알고 있는 거지?”
주대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율에겐 답하지 않았다.
“네가 알 필요가 있나?”
날카롭던 그의 눈빛도 어느새 억눌려 있었다.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에 무거운 돌이라도 올려 놓은 듯이 굳게 잠겨 있었다.
“다 지난 일이다. 네게는 어릴 때……. 어쩌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일지도 모르지.”
주대현은 그렇게 이야기를 묻어 두려 했다.
그러나 도율이 붙잡고 늘어졌다.
“지금도 상관이 있다면?”
“뭐?”
“단순히 옛날얘기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냐. 그 이매라는 여자가 지금도 상관이 있는 거면 어쩔 건데?”
잠시 침묵하며 도율을 노려보면 주대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여자는…….”
“이미 한참 전에 죽었다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주대현을 위해 도율이 사실을 전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영혼은 아직도 지금 어떤 어린애의 몸에 잠들어 있다는데.”
그 사실은 주대현으로서도 금시초문인지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마력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고 다루게 된 인간들이지만.
영혼이라고 부르는, 예전부터 있으리라 믿어 왔던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을 가지는 이들이 얼마 없었다. 그에 대해 확언하고 다룰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주대현이었고, 몇 없는 다른 이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망량.”
“…….”
그 말을 듣고도 주대현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
“솔직히 물어보지.”
도율은 주대현에게 물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자는 많지 않았다. 도율이 아는 자들 중에선 주대현이 유일했다.
“죽은 여자의 영혼을 다른 어린애의 몸에 심다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너 정도 외엔 없는 거 아닌가?”
그러자 주대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도율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주대현은 태연하게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가. 그 여자의 영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다고…….”
이 늙은 영감이 너구리처럼 태연을 가장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처음 듣는 소식이라 안타까워하는 건지.
도율로서는 구분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때 주대현이 오랜 추억에 잠겨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입을 열었다.
“전부 얘기해 주지.”
“전부?”
“그래, 네놈도 제법 엮인 듯하니.”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 * *
“그러니까-.”
여자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했던 말을 또 꺼내려니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다. 말이 되지 못한 음성이 목에 걸려 짐승 같은 낮은 울음소리가 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주변에 있던 약골들이 거품을 물었다.
‘아차.’
위협하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포박되어 있는 몸을 곧게 세우고 앉은 여자, 이매가 다시금 목청을 가다듬었다.
“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러나 그 말을 쉽게 믿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딜 봐도 수상하잖아! 얘 때문에 애들도 쓰러졌다고!”
그렇게 소리치는 건 젊은 백건영이었다.
그 말대로, 그녀의 심문을 지켜보기 위해 참석해 있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녀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을 부축하고 밖으로 옮기느라 회의실 내부가 다소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매는 다리를 유연하게 구부려 발가락으로 귓가를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수준 떨어지는 애들은 내보내라니까.”
“누가 수준이 떨어져! 우리의 정예 십이지가 물로 보이냐!”
“센스 처참하네, 진짜…….”
시대적으로, 그다지 뒤처지는 이름은 아니었다.
80년대. 아직은 게이트와 던전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던전 공략은 고사하고,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죽어나는 사람이 잦았다.
각성자라 불리는 이들도 귀한 시대여서, 당장에 각성만 했어도 주요 인물이었다. 마력 없이 장창으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니.
“그리고. 이런 건 대장 의견이 중요한 거 아니야?”
이매의 눈빛은 똑바로, 회의의 상석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과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조악한 패거리를 이끌고 어떻게든 게이트를 수습하고, 없는 여유를 끌어모아 던전을 공략하고 다니는 남자.
백건우였다.
“이 미친년 말은 들을 것도 없습니다, 형님!”
“누가 미친년이야!”
백건영과 이매가 투닥거렸다. 팔이 묶인 이매는 다리만 휘둘러 백건영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 봉잡이 백건영을… 고작 발만으로 밀어내?!”
“푸핫! 봉잡이란다, 봉잡이.”
이매가 배를 웅크리고 낄낄거렸다.
“내가 보기엔 넌 봉이 아니라 뽕이나 따는 게 어울려.”
“이게!!”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백건우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다툼을 멈추고 백건우의 말에 집중했다.
“네 말은, 네 이름은 이매고. 같은 인간이 아니라 요괴라는 종족인 데다가. 우리가 몬스터를 처치하는 걸 도와주러 왔단 거냐?”
“기억력 좋네.”
칭찬이 아니라 비아냥이었다.
건방진 태도에 백건영이 다시 한번 눈을 흘겼지만, 형님이 말하는 것을 자르지 않기 위해 입을 닫았다.
“몇 가지 물어보지.”
“좋으실 대로.”
“첫째. 네가 요괴라면, 증거는? 꼬리나 동물 귀라도 달려 있나?”
“보면 몰라? 없잖아. 아니면 엉덩이라도 까 줄까?”
이매가 몸을 뒤틀었다.
그러지 않아도 신기하게 생기긴 했다. 주홍색 머리칼의 위로 검고 하얀 줄무늬가 불규칙하게 그어져 있었다. 그게 꼭 호랑이의 거죽같이 보였다.
“필요 없다. 그럼 다른 요괴들은 모두 어디에 있고 너 혼자만 왔지?”
“숨었어.”
“너 하나만 빼고 말인가?”
그러자 이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뭐, 사소한 의견 차이가 있었거든. 그건 이쪽 가정사니까 너무 캐묻지 않았으면 해.”
“…그러지.”
“좋아! 대범한 남자는 좋아한다구. 아무튼 이 몸은 너희 나약한 인간들을 도와주기 위해 직접 행차하신 거라고.”
이매가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이 누님 말만 잘 듣고 따라오면 너희를 지존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 말이야.”
백건우에게 가까이 다가온 백건영이 귓속말했다.
“미친년이 아닐까요?”
“…….”
가장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각성자 중에서 제대로 마력을 받아들여 활약할 수 있게 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새로운 힘에 취해 정신에 손상을 입는 사람도 많았다.
개중에는 이렇게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고 지껄이거나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드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자들은 모두 강했다.’
너무나도 강한 마력을, 인간의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그런 기행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정신이 조금 이상한 각성자라면 강할 가능성이 컸다.
문제가 있다면 정신이 이상한 놈들은 마음대로 컨트롤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조직을 이뤄 작전을 수행한다는 행위가 불가능해졌다.
‘다만…….’
이 여자는 미쳐도 곱게 미친 것 같았다.
자기가 요괴라느니, 누님이라고 부르라느니, 훈련을 시켜 주겠다느니 하는 자신만만한 헛소리를 내뱉기는 해도.
어쨌든 몬스터를 타도하자는 목적은 일치하는 걸로 보이니.
“어떻게 할까요?”
아주 못 써먹을 여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으레 그렇듯, 시간이 지나 마력이 강해지고 나면 정신이 점점 더 망가질 수도 있었다.
지금은 점잖은 스승님 행세를 하려고 하지만, 언젠가 요괴의 피가 들끓는답시고 사람을 산채로 씹어먹을지도 모른다.
조직을 이끄는 백건우로서는 조직원들의 안전까지 헤아려야 했다.
‘계륵.’
놓치기엔 아쉽고, 곁에 두기엔 두렵다.
눈을 감고 고뇌에 잠겨 있던 백건우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어르신께 데려가 보자.”
“어르신이라면…….”
백건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능구렁이 영감탱이 말입니까?”
굉장히 싫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