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거짓된 존재
“할 수 있어.”
도율이 호언장담했다.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정작 본인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흰돌이는 차원 이동을 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너, 원래는 그림 속에서 튀어나왔잖아.”
「…….」
도율의 말에 흰돌이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이 녀석은 애초에 그림이 그려진 족자였다. 돌돌 말려 보관된 산수화를 경매에서 사 온 것이 그 계기였다.
그 그림 속에 있던 커다란 백호. 그게 흰돌이였다.
개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생김새를 하고 있는 것도 모두 녀석이 이쪽 세상 출신이 아니기 때문.
「그랬죠?」
흰돌이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흰돌이를 보며 도율은 대조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짜 개 대가리가 됐나.’
아무튼.
“그때 나도 그림 속으로 끌고 간 건 기억나냐?”
「하하… 그땐 제가 주제를 몰랐습니다, 대협.」
흰돌이가 앞발 두 개를 싹싹 비볐다.
이제와서 옛날 잘못을 캐내려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도율에게는 아무련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건 본인도 그렇고,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그렇고.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의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원리는 똑같으니, 너도 할 수 있어.”
그 말에 흰돌이가 자신을 내려다봤다.
「나한테 그런 힘이……?」
지금까지 밥이나 축내고, 별다른 활약을 한 적이 없어 살찐 강아지 신세였다. 팔자 좋은 걸로 치자면 남 부러울 일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 속엔 호랑이의 기백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맡겨만 주십쇼, 대협!」
흰돌이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그러자 도율이 정색을 하고 주둥이를 붙잡았다.
“이웃한테 민폐야.”
「…….」
도율이 흰돌이를 데리고 동네 뒷산으로 이동했다.
산길에서 벗어나 사람이 잘 오지 않는 나무 사이의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대협?」
“너 산 타던 곳, 기억나지?”
「아…….」
도율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유, 두 번째.
망량이 있는 곳은 흰돌이도 데리고 간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녀석은 정상에 있는 저택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몇 번인가 오르락내리락했었다.
살이 좀 불어나기도 했고, 도율을 태우기도 해서 그런지 흰돌이는 그때 축 늘어져 숨을 헐떡였다.
‘중요한 건 호흡.’
호흡은 자연에 존재하는 기를 받아들이고 정제하는 과정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훈련이 필요한 일이지만, 영물을 자처하는 놈이라면 말 그대로 숨 쉬듯이 가능한 일.
거기서 그렇게 많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으니, 어느 정도 그곳의 기운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과연 못 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지, 흰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모처럼 흰돌이가 집중했다.
‘게다가…….’
도율 또한 느끼고 있었다.
은신처에서 기거하던 시절의 망량은 인상이 지나치게 흐릿했다.
초대를 받아야만 갈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망량과 대화를 나누고 빠져나오고 나면, 거기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선명하다.’
망량이 가지고 있던 특유의 장막이 옅어져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원인은 도율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망량은 몸을 숨기기 위해 은신처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곳에 머무르고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백수아를 데려가기 위해 직접 행차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망량은 그토록 뛰어나던 엄폐 효과를 어느 정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흰돌이도 충분히 그 장소를 찾아 이동할 수 있다.
모두 계산된 일이었다.
* * *
「이게 진짜 되네…….」
흰돌이가 스스로 한 일에 놀라 중얼거렸다.
도율과 흰돌이는 지금 망량이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수면 위로 뛰어드는 듯한 감각과 함께 큰 일렁임이 느껴진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이곳이었다.
위치는 마음대로 고르진 못했지만, 높게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을 보니 익숙한 정경이었다.
‘계단의 중간인가.’
망량의 집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위로도, 아래로도 뻗어 있었다.
입구도 아니고, 목적지도 아닌 애매한 장소였지만. 아마 흰돌이가 가장 동화가 잘된 장소가 이곳일 테니, 이유는 납득할 수 있었다.
흰돌이가 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 그래서 또 태워 드립니까, 대협?」
“아니. 충분해.”
여기까지 데려와준 것만으로도 흰돌이는 제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쉬고 있어라.”
망량에게는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럼 좀만 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흰돌이가 계단 옆 풀숲에 풀썩 나자빠졌다.
아무래도 기력을 많이 소모한 듯했다. 이 상태로 커다란 몸뚱이로 변해 도율을 태우고 산을 오르는 건 혹독한 처사였다.
도율이 홀로 계단을 올랐다.
그 발걸음은 느긋한 편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모르진 않겠지.’
망량이 모르게 몰래 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운이 흐려졌다 하더라도 이곳은 망량의 공간. 침입자를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오르던 와중, 익숙한 까마귀가 날개짓을 하며 내려와 마중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도율 님. 연락도 없이.”
부드러운 음색이었지만 말에 가시가 있었다.
“연락할 방법을 몰라서 말이지.”
그동안은 망량만이 도율에게 일방적으로 연락할 수 있었다.
“망량은 위에 있겠지?”
“…올라가시죠.”
도율이 까마귀와 함께 긴 계단을 올랐다.
* * *
“어서와.”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망량은 예전과 같이 도율을 맞이해 주었다.
“늘 같이 오던 친구는 오늘은 안 보이네?”
“그 녀석은 쉬고 있다.”
“그래?”
여느 때와 같이 까마귀 서오가 찻상을 내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망량이 물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긴.”
도율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분명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지.”
백수아와 망량의 누이인 이매. 그 둘 사이에 엮인 이야기를 알아내는 것.
망량의 누이는 몇 년 전에 실종됐다고 들었다. 그리고 백수아는 아직 어렸다. 두 사람 사이에 접점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망량이 줬던 고둥이 반응했던 것도 그렇고, 직접 데려가기까지 할 정도였으니. 어떻게든 관계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아이는 뭐냐?”
백우진도 도율도, 그 아이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실종됐다던 네 누나랑은 무슨 관계인 거지?”
하지만 망량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누님은 죽지 않았어.”
망량의 그 말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누님의 영혼이 윤회의 굴레에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이지. 죽고 나면 육신을 빠져나온 영혼이 다음 생을 위한 여정을 떠나거든.”
“그런가.”
몇십 년이나 사라졌다면 죽었다 생각하고 포기할 만도 한데, 그러지 않고 계속 찾았던 건 그런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님의 영혼은, 누님의 몸에 들어 있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는 건…….”
그 답은 도율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아이의 몸속에 있었지.”
망량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이매의 영혼은 백수아의 몸에 잠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어린 아이의 몸에 다른 누군가의, 그것도 요괴의 영혼이 들어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도율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저 애가 사실은… 네 누나라는 건가?”
도율과 백우진이 알고 있는 백수아는, 사실 겉보기에만 어려 보이는 이매라는 뜻인 건지 물었다.
그러나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달라.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들어 있으니. 둘 중 한 쪽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거지.”
도율이 물었다.
“그게 가능한 건가?”
주하린과 주예린의 경우가 생각났다. 두 사람은 가만히 두면 둘 다 목숨을 잃을 처지였다.
그런데 이 경우는 그 반대. 두 개의 영혼이 한 사람의 몸 안에 들어 있다면서 멀쩡히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건가?
그러자 망량이 이를 갈았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
“…….”
고도로 복잡한 일.
어떠한 우연에 의해서 벌어진 기적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행한 교묘한 작업이라는 의미였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텐데.
* * *
「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풀숲에 드러누워 있던 흰돌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곳은 정기가 맑은 곳이어서 그런지 가만히 누워 숨만 쉬고 있어도 몸이 금방 회복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원래 흰돌이가 지내던 곳과 비슷한 장소였다. 그러니 회복이 빠른 것도 당연한 일.
그런 흰돌이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반갑습니다.”
「……?」
소리없이 우아하게 날개짓하며 내려앉은 건 검은 까마귀였다.
「뭐야, 까마귀 아가씨잖아.」
망량이 사역마로 부리는 검은 까마귀, 서오였다.
도율은 까마귀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하등 관심이 없었지만, 흰돌이는 눈여겨 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같은 짐승 동지니까.
서오는 흰돌이의 말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서오라고 부르십시오.”
「그래, 그래.」
흰돌이가 자신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몸은 백호 님이시다.」
그 말에 서오가 조소를 머금고 답했다.
“백호 말입니까…….”
그러나 흰돌이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그나저나 네가 어쩐 일이냐?」
두 짐승은 서로 처음 보는 사이가 아니었다. 도율을 등에 태우는 흰돌이와 망량의 말을 전달하는 서오. 둘은 마주친 적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간단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던 사이인데,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단 둘이.
「말해 두겠는데. 난 이종간 교배에는 관심 없다.」
“…….”
서오가 짜증 가득한 눈으로 흰돌이를 노려봤다.
「…조크야, 조크. 아이스 브레이킹. 몰라?」
“천하기 짝이 없는 짐승이로군요.”
서오는 이제 경멸을 숨기지도 않았다. 흰돌이가 멋쩍게 뒷통수를 긁적였다.
「같은 짐승끼리 너무하네, 정말.」
흰돌이가 그렇게 말하자 서오는 한층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같은 짐승?”
서늘한 음색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누가 당신과 같은 짐승이란 겁니까?”
「그야 너랑 나……. 둘 다 짐승 동지잖아.」
흰돌이는 나름대로 뿌듯하게 말했다.
백호인 이 몸이 친히 몸을 굽혀 같은 짐승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같이 주인 모시는 처지에 그런 건 따지지 말자고. 위 아 더 월드.
그러나 서오는 조금도 기분이 풀어지지 않았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무지한 축생아.”
「야. 아무리 나라도 화낸다?」
“아직도 자신이 영물이라 생각하느냐?”
서오가 존댓말을 벗어던지고 물었다.
「으응?」
서오의 물음에 흰돌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뜬금없는 질문으로만 느껴졌다.
「그야 당연하지……. 난 백호라고. 사신수가 영물이 아니면 뭔데……?」
서오가 높은 곳에서 흰돌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넌 그림에서 튀어나온 가짜에 불과하지 않으냐.”
「뭐……?」
가짜니 뭐니 하는 얘기는 모르겠지만.
흰돌이가 그림에서 나온 존재라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흰돌이가 진심으로 당황해 물었다.
“주제를 알아라, 거짓된 존재야.”
서오는 그제야 마음에 드는지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