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쟤 요즘 왜 저래?
“…그래, 알았다.”
사정을 듣고 난 후, 백건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서로에게만 유리하게 편집된) 진술을 취합해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이런 과정이 있었다.
둘만 남게 되고, 백건우가 주대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비게 되자. 백건영은 이매의 실력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진 것이다.
-어이, 여자.
-이름 알려 줬잖아. 이매라고 불러.
-…어떻게 부르든 내 맘이지. 그보다!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따라와 봐.
-할 얘기?
이매가 오두막을 쳐다봤다.
마음만 먹으면 안에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죄다 훔쳐 들을 수 있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칠칠맞지 못하니까.
아무튼 안에선 대장인 백건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고 이렇게 둘이서 몰래 다른 데로 가도 되는 것인지?
이매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형님한텐 말하지 않아도 돼?
-이게……!
그 말을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인 백건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따라와! 너 하나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왜 저런담…….
백건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거운 발소리를 올리며 수풀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이매가 고개를 저으면서도 털레털레 백건영의 뒤를 따랐다.
-어디까지 가려고?
백건우를 따라 산에 몇 번 오른 적 있는 백건영이지만, 형님의 뒤를 따르기만 했기 때문에 산길을 보는 눈은 그다지 기를 기회가 없었다.
이매가 말리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조난이라도 당할 뻔했지만. 슬슬 적당하다 싶어 걸음을 멈춘 백건영이었다.
-형님께선 네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듯한데. 좋아. 그거 하나는 나도 인정해 주마.
경비를 보던 놈들을 손쉽게 제압한 것도 그렇고. 제법 두껍게 묶은 포승줄을 풀어 주려 했더니 갑자기 혼자 뚜둑 끊어버린 것도 그렇고.
타고난 마력 하나는 어마어마한 여자라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건영은 조금도 주눅드는 기색 없이 양손으로 봉을 쥐고 무릎을 굽혔다.
-하지만 이 바닥에선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지.
각성자 사이의 전투력을 가늠할 때, 마력의 수치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강한 마력을 쥐고 있어도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많았다.
백건영은 그 반대. 특출나게 강한 마력을 각성하지는 못했지만, 제 무기인 봉을 다루는 기술과 싸움 중에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잔머리. 그리고 눈썰미로 상대의 버릇과 생각을 간파하는 능력으로 살아남았다.
-실전 경험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백건영의 신형이 순식간에 이매를 향해 달려들었다.
적은 마력을 신체 구조와 운동 원리에 맞춰 사용하는 것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 재빠른 몸놀림을 선보이는 것이 백건영의 특기였다.
눈 깜빡할 사이에 거리를 좁히고 번개처럼 봉을 뻗는 백건영.
그런 백건영을 한가하게 바라보는 이매는, 마치 반응을 못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실전 경험?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건 내가 너보다 많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아.
그 후론 일방적인 폭행이 펼쳐졌다.
* * *
“괜찮냐?”
“…이 정도 가지고 뭘.”
일방적으로 당하긴 했지만 이매도 손대중을 모르는 여자가 아니었다.
백건영은 온몸이 이곳저곳 안 쑤시는 곳이 없었지만, 제 발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여자한테 두들겨 맞고 나자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자존심은 그렇다 쳐도, 아무튼 이매의 실력은 진짜였다.
“진짜 어디 산골에서 훈련만 했나…….”
백건영이 얻어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백건우는 아직 동생에게 주대현과의 대화 내용을 전달하지 않았다. 이매가 말하는 정신 나간 소리가 진짜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가볍게 퍼뜨릴 이야기가 아니었다.
덕분에 백건영은 이매를 산골에 숨겨진 마을에서 몰래 혹독한 수련이라도 거치고 나온 것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방심했나?”
백건우가 물었다.
피가 이어진 친동생인 데다가 형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 따르기는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부대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백건우를 비롯한 다른 조직원들의 신임과 인정을 받기 위한 실력. 백건영은 그걸 갖추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일방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쥐어 터진 건, 상대가 백건우라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형님. 이런 말 하기 거시기 하지만, 난 상대가 여자나 노인일 때도 절대 손속을 두지 않아요.”
“…그래.”
그렇다면 사력을 다한 백건영을 쥐 잡듯이 쥐어 패고 나서 지친 기색 하나 없다는 말이었다.
“부대장 자리도 내려올 때가 됐나…….”
백건영이 고개를 처박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까지는 형제 둘이서 다 해 먹는다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 죽어라 노력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처럼, 이렇게 유용한 녀석이 들어오고 나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직을 위해서라면 더 잘된 일이니 섭섭해하지 말고 시원하게 물러서는 게 멋진 선택이다.
그러나 백건우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제대로 된 조직을 이루기도 전부터 나랑 함께했던 게 너다.”
“그야 뭐, 형제니까…….”
“그만큼 우리 조직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너지.”
“형님…….”
백건우가 이매를 바라보았다.
할 게 없는지 돌멩이나 차고 있는 이매는, 아마 조직 내에서의 지위나 명성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길 것이다.
스스로 말한 대로 그녀가 요괴라고 한다면, 인간 사이에서의 부와 명예는 불필요한 부산물일 테니까.
“실력이 좋다 하더라도 오래 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중요한 자리를 턱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무엇보다, 우리 애들이 믿고 따르는 것도 너니까.”
“형님……!”
조직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조직원들 사이의 관계와 신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백건우는 단순한 형제의 정을 떠나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였으나, 백건영은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눈물이 글썽했다.
“제 한 몸, 우리 패거리를 위해 불사르겠습니다!”
백건영이 기운차게 소리쳤다.
백건우의 얘기를 듣고 나니 이매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 여자, 수상하긴 해도 실력은 확실합니다. 너무 믿지는 않더라도,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뽑아 먹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백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건우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고, 이매도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이매가 봉을 빼앗아 백건우의 팔다리 소매를 모아 묶어 버리기 전에, 그녀는 백건영의 봉질을 한 차례 지적한 적이 있었다.
-쉽게 넘어가지 마.
넘어가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발놀림 빠르고. 시야 넓고. 다 좋은데, 마음이 이미 넘어가 있어. 기회를 잡았다고 공격할 마음 만만이야. 그렇게 뻔하게 굴어서야 상대가 대응하기만 쉽지.
이매가 시범을 보였다.
그녀의 발은 가벼웠다. 손도 재빨랐다. 그 끝을 타고 움직이는 봉은 더더욱 빨랐다.
그보다 까다로운 건, 그다음의 선택을 미처 예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공격할 건가? 제자리에서? 더 들어와서? 아니면 한발 물러서나?
이매는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비겁하게 해, 비겁하게. 상대의 수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계속 미뤄. 너 정도로 잽싼 놈이라면 충분히 된다.
상대가 무얼 할지 결정하지 않았으니, 이쪽이 먼저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상대는 보다 유리한 선택지를 가져간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시간을 날리는 일이었다.
그 까다로운 이지선다 앞에 선 백건영이 신기한 감각에 의아해하는 순간, 이매가 봉을 쑥 내밀어 팔다리를 묶어 버린 것이었다.
-이건 수업료야.
키득거리며 웃고는 다리를 걸어 백건영이 바닥을 구르며 흙먼지를 들이켜는 모습을 보며 배를 잡았다.
형님에게도 말 못 할 부끄러운 기억을 감추고, 백건영이 헛기침했다.
“아무튼. 애들 가르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던전이나 게이트 막을 때에도 잘 거들 것 같고…….”
조직을 이끄는 두 명의 리더.
그 둘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사실상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이매.”
백건우가 이매에게 다가갔다. 백건영은 아직 거리감이 느껴지는지 함께 오지 않았다.
“왜?”
이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매도 백건우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고 있진 않았다. 이대로 조직에 합류할 수 있을지, 아니면 정중히 떠나 달라고 할지. 그 대답이 갈릴 순간이란 걸 알고 있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까진 당장에 알 길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매는 여유로웠다. 사실 꼭 이들과 함께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어쩌다 눈에 띄었고, 며칠 하는 짓을 관찰하니 힘을 믿고 눈에 거슬리는 짓을 일삼는 잡배들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아니어도 인간은 많았다. 뭐 하면 바다를 건너 다른 놈들을 키워 봐도 재밌겠지.
그래도 이왕이면…….
“우릴 위해 힘을 보태 주겠나?”
백건우가 손을 내밀었다.
그걸 본 이매가 씩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당근이지!”
이자들의 동료가 되어 보고 싶었다.
* * *
“발표합시다!”
“응?”
백건영이 소리쳤다.
이매가 합류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만큼 어느 날 돌연히 훌쩍 떠날지도 모른다고 각오를 해 두고 있었는데, 그 생각이 잊힐 정도로 오랜 기간 함께 지내고 있었다.
이매의 합류와 활약으로 백건우를 필두로 따르던 조직은 패거리라 부르기가 무색하도록 커졌다.
지역의 게이트를 여유롭게 막아 내고 이름난 던전을 공략하러 다니는 모습에 전국 각지에서 지원자가 찾아올 정도였다.
“이제는 한곕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해도 될 사이즈가 아니에요.”
“흠…….”
백건우는 그런 그들의 상징이자 카리스마로써 움직였지만. 실제로 사람이나 물자를 관리하는 일에는 서툴렀다. 그럴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그런 부분은 동생인 백건영이 도맡아서 해결해 주고 있었다.
“우리도 제대로 구색을 갖출 때가 됐습니다. 언제까지고 작은 구멍가게가 아니다, 이 말입죠.”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반가운 질문이라는 듯 백건영이 손가락을 튕기고 답했다.
“외국에서는 이런 조직을 길드라고 한답니다. 우리도 세우는 겁니다, 길드를.”
“길드라.”
그렇다고 백건우도 완전히 깡통인 건 아니었다. 그 역시 외국에서의 정세에 대해 들은 게 있다 보니, 길드라는 단어도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다만 그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어울릴지 가려 낼 시간이 모자란 것뿐.
하지만 동생인 백건영이 이모저모 따져 본 후에 내린 결론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래, 좋아.”
백건우 역시 제대로 체계를 잡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고 있을 테니, 길드 이름 좀 생각해 봐요.”
“길드 이름? 내가? 네가 정하지.”
그러자 백건영이 역정을 냈다.
“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진짜. 이런 건 원래 대장이 딱 정해 줘야 한다고요!”
“그런가?”
“그래!”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무튼. 기깔 나는 걸로 하나 지어봐요.”
그렇게 백건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사이. 문이 쾅 열리며 누군가 들이닥쳤다.
“야! 훈련 가자!”
이매였다.
그녀가 방에 있는 백건영을 보더니 한쪽 눈썹을 들었다.
계속해서 던전 공략을 다니는 백건우와 이매와 달리,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관리직으로 전향하려는 건지 백건영과 자주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백건우는 시간이 부족한 것에 불과했지만. 이매는 앉혀 놓고 가르쳐도 답이 없는 부류에 속했다.
“간만이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짐승 냄새 나는 여자는 이해 못 하는 고차원적인 얘기.”
“앙? 이게 한동안 안 맞더니 정신 못 차리지? 외국물 좀 먹었다 이거냐?”
이매가 백건영의 머리를 팔뚝에 끼우고 조였다.
“이, 이거 놔!”
인간 세상의 경제와 과학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뿐, 이매도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제법 많이 속세에 물들었다.
포대 자루 같은 천을 걸치고 맨발로 거닐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가위로 다듬어 정리한 머리와 활동하기 편한 짧은 옷. 그리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런 이매의 몸에서는 흙과 짐승의 냄새가 아니라 뭇 여인들과 같은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샴푸인지 향수인지 모를 꽃과 같은 냄새.
“…놓으라니까!”
백건영이 퍽하고 이매를 밀쳐 냈다.
그런다고 밀려날 이매가 아니었지만, 몸을 빼내는 건 가능했다.
“난 바쁜 몸이라고. 너와 다르게.”
백건영이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고 방을 나섰다.
그 뒤를 쳐다보던 이매가 엄지로 백건영을 가리키며 백건우에게 물었다.
“쟤 요즘 왜 저래?”
“글쎄. 원래 그랬잖나.”
백건우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매는 인상을 찌푸린 채 소파 위에 풀썩 앉아 등받이 위로 팔을 펼쳤다.
“아냐. 좀 이상해. 나만 보면 피하는 것 같고. 옛날 같지가 않아.”
“음, 그건…….”
백건우가 무어라 말을 할지 고르는 사이 이매가 홀로 결론을 내렸다.
“이게 그 사춘기라는 건가? 하아. 섭섭하다, 섭섭해.”
“…….”
아무리 그래도 이 나이에 사춘기가 오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이매에겐 상식 교육이 더 필요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