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0
20화 너흴 도와주러 온 사람
“누나아!”
한나은은 칭얼대는 동생이 싫었다.
그녀에게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초등학생 동생이 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로 바쁘셨기 때문에 어린 동생을 돌보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동생이 귀엽기만 한 존재라는 생각을 버린 건 벌써 옛날의 일이었다. 아직 어른이 아닌 그녀에게 보다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일은 버거웠다. 동생이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느껴졌다.
방과 후에, 주말에 친구들과 놀고 싶어도 거절의 말을 꺼내야만 할 뿐.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도 ‘나은이는 애 엄마 같아.’라고 비웃으며 멀어졌다.
지겨웠다.
학교가 끝나면 놀이방에서 기다리는 동생을 데리러 가는 것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장을 보는 것도, 동생이 몰래 가져온 군것질거리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으라고 혼내는 것도.
‘나라고 좋아서…….’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동생 태호가 졸랐다.
“누나! 같이 레고 맞춰 줘!”
“알아서 좀 해!”
팍! 와르르…….
그녀가 손을 쳐 내자 동생이 들고 오던 레고 상자가 떨어졌다. 상자 속에 든 레고 조각들이 바닥 위로 쏟아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누나……?”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같이 주워 줘야 하는데.
생각과는 달리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알았어.”
태호는 혼자 거실 위에 어질러진 레고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때부터였다. 태호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고 혼자 부모님이 사 주신 핸드폰으로 브이튜브를 보며 시간을 때우는 일이 잦아진 건.
오늘은 모처럼 휴일에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졸졸 따라왔을 태호는, 벤치 위에 뛰어올라 앉더니 자긴 혼자 있어도 되니까 누나와 엄마 둘이 쇼핑을 하라고 권했다.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겠니?”
엄마의 물음에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에게 나은이 밀어붙였다.
“됐어. 어차피 휴대폰도 있으니까 나중에 전화하면 되잖아. 그치?”
“응.”
“그럼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여기에만 있어야 한다?”
나은은 엄마의 팔짱을 끼고 걸음을 이끌었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둘이 보내는 시간은 아주 즐거웠다. 신경 써서 돌봐야 할 동생도 없고, 듬뿍 사랑받는 느낌. 부모님이 계실 때에도 동생이 있으면 언제나 어린 동생이 먼저였으니까.
동생이 없기 때문에 만끽할 수 있는 이 기분.
동생이 없기 때문에…….
즐겁게 웃던 나은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니?”
“엄마, 나…….”
그리고 말했다.
“태호 데려올게.”
엄마는 나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놀라지 않고 들어주었다.
“그러렴.”
이런 데서 혼자 있어 봤자 하나도 재미없다. 핸드폰이나 보고 있을 거라면 집구석에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한태호!”
멀리서 이름을 부르자 동생이 대답했다.
“쇼핑 끝났어?”
“아직.”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릴래.”
“…그냥 같이 가자. 너 이런 것도 못 기다리면 나중에 여자친구 사귈 때 큰일 난다.”
나은의 말에 태호는 짚이는 일이 있는지 그 말이 맞는다며 납득했다. 초등학생이 알긴 뭘 아는 걸까. 요즘 애들은 조숙하다더니, 브이튜브에서 연애도 다 가르쳐 주나?
“가자.”
나은이 손을 내밀었다. 태호가 내민 손을 잡으려는 순간, 핸드폰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 * *
“한태호, 너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누나는……?”
“…누나 싸움 잘하잖아. 알지? 별명 조폭 마누라. 괜찮아.”
나은은 동생을 남자 화장실 제일 안쪽 칸에 두고 문을 닫았다.
하필 숨어도 이딴 곳에 숨을 수밖에 없다니. 하지만 급박한 상황이라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나은도 1층 로비에 모이라는 방송을 듣긴 했다. 처음엔 그녀도 동생을 데리고 비상구를 통해 1층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은과 태호가 있던 곳은 백화점 내에서도 제법 높은 층수였다. 그래서인지 몬스터를 목격했다는 외침과 함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며 무질서하게 쏟아져 내려왔다.
결국 어떤 아저씨가 동생을 밀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고, 헤어진 동생을 찾느라 시간을 소모한 사이 어느 몬스터가 내려가는 길을 막고 말았다.
‘다, 다른 길은?’
이 정도 넓이의 백화점이라면 비상구도 한 개가 아니다. 엘리베이터도 몇 개나 있는 만큼 계단도 여러 개가 있을 터.
너무 멀리까지 가 보진 못하겠지만, 나은은 근처에 다른 길을 찾아봤다.
어렵사리 찾아낸 다른 비상구는 문이 잠겨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자 찰칵 소리와 함께 손이 막혔다. 그 옆엔 ‘STAFF ONLY’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개같은 백화점…….’
무려 A급 게이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게 뻔했다. 이곳에서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방송에서 들었던 S급 헌터의 보호를 받으러 1층으로 합류해야만 했다.
‘그것만 치우면 돼. 그것만…….’
나은은 장애인 화장실 칸의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엔 청소 도구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다란 대걸레를 쥐었다.
막대를 부술 것처럼 꽉 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는 것으로 떨림을 숨기려 했다.
“태호야, 가자.”
“응…….”
무기를 확보한 나은이 동생을 데리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비상구 계단을 막고 있는 건 고작해야 한 마리 고블린에 불과했다. 초록색 피부에 작은 키를 가진 왜소한 몬스터. 몬스터 중에서도 최약체라 불리는 종족 중 하나였다.
‘고블린은 일반인도 침착하게 대응하면 이길 수 있댔어. 나는 무기도 있으니까…….’
고블린의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을 떠올리면 가슴이 섬짓해지지만, 그녀는 갖고 있는 대걸레의 길이를 믿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은은 혹여 발소리가 날 세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은 비상구 앞을 가로막고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노란 눈동자가 따분하다는 듯 좌우로 굴렀다. 녀석은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나은과 같은 인간을.
“누나가 신호하면 뛰어. 알겠지?”
“아, 알겠어.”
나은은 벽 뒤에 숨어 그 장면을 힐끗 보고 숨을 한가득 들이쉬었다. 이제부터 숨을 마음껏 쉬지 못하리라 본능적으로 예상했다. 폐에 잔뜩 산소를 집어넣고, 나은이 발꿈치를 굳게 디뎠다.
“죽엇!”
퍼억!
“케엑!”
나은의 대걸레가 고블린에게 적중했다. 비교적 가벼운 체구의 고블린이 달려오는 속도와 풀 스윙의 힘이 더해진 일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챙그랑 하고 고블린의 품에 있던 단검이 떨어졌다. 녀석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장비였다.
기습을 하지 않았으면 단검을 쥔 고블린을 상대해야 했던 건가? 나은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단검을 멀리 차 버렸다.
“뛰어!”
나은이 동생과 함께 비상구를 향해 달렸다. 고블린은 아직 쓰러져 있었다. 비상구 앞을 지키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됐다!’
그리고 비상구 문을 열자, 그곳엔 커다란 덩치의 뒷모습이 서 있었다.
“…….”
순간적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덩치 큰 헌터이길 바랐다.
하지만 초록색 피부와 조악한 나무 몽둥이 같은 무기. 그리고 문명인스럽지 않은 옷차림으로 인해 뒷모습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었다.
“케륵.”
몬스터가 뒤돌아보자 더욱 확실해졌다. 고블린 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힘이 센 특수 개체. 소위 말하는 ‘네임드’였다.
네임드 고블린이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나은은 순간적으로 동생을 밀어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몽둥이가 느리게만 보였다. 그 장면을 도저히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어,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깔끔하게 즉사했나? 그런데도 왜 의식이 있지? 사후 세계라는 게 실존했던 건가?
나은이 느낀 건 바람이었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
조심스레 눈을 뜨니 자신은 천장이 코앞에 닿을 정도로 높이 떠 있었다. 바람은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을 나부끼느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자신의 등과 허벅지를 떠받치고 허공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높이 뛰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부드럽게 착지했다. 두어 번 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충격을 모두 줄이고, 나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이프.”
가면 너머의 남자는, 표정은 보이진 않지만, 어쩐지 웃고 있을 것 같다.
나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사람을 찾기 위해 백화점 전체를 낱낱이 뒤질 필요 따윈 없었다.
기감. 내공을 얕고 넓게 퍼뜨리면 건물 내에 있는 생명체를 파악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1층 로비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 외에, 게이트에서 나온 몬스터들의 기까지 모두.
그중 가장 큰 건 상공에 자리했다는 게이트의 기였다. 생명체와는 다르지만, 그것은 막대한 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
나는 눈을 좁히고 그런 게이트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저기서 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거지?
던전과 게이트에서 방출되는 기.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우선은 그것보다 급선무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커다란 기운을 지우고 작은 반응에 집중하니, 확실히 건물 위쪽에 사람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근처엔 몬스터도 함께였다.
한시가 급한 상황.
비상구 문을 닫고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나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지금 필요한 건 경공술. 몸을 가볍게 하여 빠르게 움직이는 무공이다.
허공답보虛空踏步.
허공에 발을 딛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몇 개의 층을 뛰어넘자 금방 같은 층에 도착했다. 직후 재빨리 몸을 날려 네임드 고블린에게 공격받기 직전의 여자애를 안고 튀었다.
허공답보를 통해 공중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다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세이프.”
네임드 고블린이 내리친 바닥은 금이 가 있었지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 그대로 몸을 날린 덕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가볍게 들어 올린 여자애에게 물었다.
“설 수 있겠어?”
“네? 네…….”
이런 일을 겪으면 다리 힘이 풀릴 만도 한데, 여자애는 대견하게도 스스로 일어섰다. 터프하네.
널브러진 고블린과 근처의 마대 자루를 보니 저 고블린을 날려 버린 것도 이 애로 보였다.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누나!”
작은 꼬마가 도도도 달려왔다. 이쪽은 구면이었다. 둘이 남매였나.
“혹시 헌터… 인가요?”
“비슷해.”
나는 큰 쪽과 작은 쪽 모두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흴 도와주러 온 사람.”
그때 누나 쪽이 눈을 크게 뜨고 내게 외쳤다.
“아, 아저씨. 뒤에! 뒤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성이 난 네임드 고블린이 다가와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력 하나 느껴지지 않는 손쉬운 사냥감을 코앞에 두고 놓쳤으니 약이 좀 오를 만도 했다.
인간은 강한 몬스터를 사냥해 양질의 마석과 부산물을 얻고자 하지만, 몬스터들에게 이득이란 개념은 없다. 그저 살육을 원할 뿐. 보다 쉬운 사냥감이 놈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강하든 말든 상관없다. 죽일 수 있으면 죽이고, 죽일 수 없으면 죽임을 당할 뿐. 생물로서 무언가 결여된 사고방식이지만 그게 놈들의 작동 원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앞의 상대를 알아볼 생각이 없는 족속이라 해도.
“정도가 있지.”
나는 여우 가면을 살짝 내리고 눈을 드러냈다.
눈이 뒤집혀 달려오는 네임드 고블린. 개체명을 부르는 것조차 아까운 조악한 피조물. 놈이 일으키는 부정한 기파氣波의 무질서함은, 보는 내 기분을 다 망칠 정도였다.
이 더러운 짐승이 뿜어낼 피를, 아이들의 앞에서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꺼져.”
─쿠웅.
내가 뿜어낸 기파의 위력에 녀석은 몸을 굳히고 그대로 멈췄다. 몸을 무너뜨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정지.
“우와…….”
영문을 모를 일에 아이들이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몬스터와 싸우는 장면은 봤어도, 이렇게 멈춰 세우는 건 흔하지 않을 테니까.
가면을 다시 쓰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가 볼까.”
안전한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