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집에 가자
“우선…….”
중요한 건 여기서 망량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었다.
망량이 이곳에 남은 건 스스로를 미끼 삼아 도율을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어울려 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사람들을 습격하는 건 망량이 아니라 그가 이끄는 요괴 군단.
막아야 하는 건 그놈들이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 사람들을 지킨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 그것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수단인 흰돌이를 통해서 다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 간단히 보내 주진 않겠지만…….’
망량은 이미 도율이 흰돌이를 통해 이곳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끌어들이기 위해 오는 걸 허락했다면, 빠져나가는 것 또한 막을 방법이 있다 예상해도 무방했다.
도율이 망량의 저택을 뒤로하고 빠르게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흰돌이와 합류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것부터 물어보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는데.
“없군.”
흰돌이가 있었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망량은 모든 요괴들이 인간계를 습격하기 위해 출진했다고 말했지만, 그 말 또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혼자서 움직였을 리는 없고.’
흰돌이는 매번 여기서 얌전히 도율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괜히 돌아다녔다가 엇갈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렇다는 건 누군가 흰돌이를 강제로 옮겼다는 뜻이었다.
도율과 대화를 나누던 망량이 그랬을 리는 없으니, 분명히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경위야 어찌 되었건.
“없으면 찾아야지.”
도율이 기를 펼쳤다.
* * *
「얌마! 씨! 이거 놓으라니까!」
“…….”
「안 놔? 안 놔? 확 씨!」
흰돌이가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흰돌이는 현재 거대한 까마귀의 발톱에 뒷덜미를 잡혀 공중을 날고 있었다.
도율을 데려다주고 작아진 상태로 계단에 드러누워 쉬고 있는데, 웬 검은 형체가 하늘을 가리더니 순식간에 훽 낚아채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작아진 상태라곤 하지만 강아지 하나를 한 손에 쥘 정도로 커다란 까마귀였다.
평소에 보던 까마귀와는 크기가 다르지만, 그게 망량의 수하인 ‘서오’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흰돌이가 하도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던 차에, 서오가 서늘하게 한마디 물었다.
“정녕 놓길 바랍니까?”
「당……!」
흰돌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풍경이 점처럼 보였다. 제법 크게 자란 나무도 이쑤시개만 하고, 거대한 바위산이 자갈 따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과연 무사할 수 있을지. 흰돌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지금은 됐어…….」
왠지 서오의 발톱이 한층 느슨해진 것 같아, 흰돌이가 단단히 붙잡았다.
그렇게 서오가 한참을 날아 도착한 곳은 어느 동굴이었다. 절벽 한가운데에 부자연스럽게 자리한 동굴은 걸어서 도착하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 안에서 서오가 익숙한 인물에게 보고를 올렸다.
“데려왔습니다.”
“수고했어.”
검은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 뒷짐을 쥔 채 뒤돌아 서 있는 남자. 흰돌이도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망량……?」
그러자 서오가 노려봤다.
“예를 갖춰라!”
「내가 왜…….」
납득은 되지 않았지만 흰돌이는 서오의 눈빛에 쫄아 말을 높였다.
「어, 예. 그, 망량 님? 왜 부르셨습니까? 할 말이 있으시면 저기, 우리 대협이랑 먼저 얘기하시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했다.
분명히 도율이 망량과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라는데, 정작 그 망량이 도율도 없이 이런 곳에 혼자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누군가 찾아오기 힘든 곳.
누가 봐도 은신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런 곳에 도율의 편인 자신을 데려왔다니. 위험 부담이 있는 행동이었다. 자신이 도율에게 이 위치를 알리는 걸 원치는 않을 텐데.
‘당장 그럴 수단도 없다만…….’
문제는 그런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상대도 그걸 꿰뚫어 보고 데려온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망량이 뒤를 돌아 흰돌이와 눈을 맞췄다.
망량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흰돌이는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자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듯했지만 속내가 깨끗하지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해서.”
「저, 중요한 이야기라면 역시 대협이 있어야…….」
“이건 너에 대한 이야기야. 그러니 다른 사람은 상관없어.”
「…….」
얼핏 보면 흰돌이를 주체적인 존재로 인정해 주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속뜻은 도율을 이곳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돌려 말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무언가 상황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 그건 깨달았지만…….
‘…까놓고, 내가 어떻게 뭘 해볼 깜냥은 아니네.’
거대하게 변할 수 있는 까마귀 서오 하나만 해도 흰돌이가 제대로 상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하늘로 날아오르기만 해도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주인인 망량 또한 자신이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해한 인간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말 그런 놈이 요괴들의 수장일 리가.
도율도 없고. 여기선 얌전히 말을 듣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어, 예. 그거 몹시 흥미로운 말씀이네요…….」
흰돌이가 마른 웃음을 뱉으며 기도했다.
‘빨리 와 주십쇼, 대협…….’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위 맞추기엔 자신이 있었다.
* * *
“자, 다 됐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노인의 곁에는 벼루와 먹, 그리고 커다란 종이가 한 장 있었다. 그 종이 위에는 그림이 한 점 그려져 있었다.
휘어있는 줄기와 가지를 가진 소나무. 그 소나무가 뿌리를 뻗은 거대한 바위. 그 위에 발을 짚은 채 어슬렁거리고 있는 한 마리 호랑이의 그림이었다.
색을 표현할 만한 것이 먹과 누런 종이뿐이라, 그 호랑이는 달리 색이 없었다.
“자. 이 그림을 집 안에 걸어 두면 만사형통, 가내평화, 백년해로할 거다.”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고.”
한 아이가 그림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노인이 검에 물든 손끝으로 그 모습을 배웅했다.
어린아이가 들고 간 그림, 그 그림 속에 그려진 호랑이. 그게 흰돌이였다.
「어……. 이게 끝?」
그게 전부였다.
그림에 목숨을 바친 노인이 평생에 걸쳐 모든 기력을 쏟아부었다거나, 먹물이 모자라 그림을 완성하지 못해 피를 찍어 그려 냈다거나, 이 그림을 갖기 위해 온갖 사람들이 눈독 들이고 싸움을 벌여 저주가 담겼다거나.
그런 거창한 사연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나이 먹은 노인의, 자투리 시간을 모아 그려 낸 그림. 그것도 비슷한 게 몇 점이나 있는 그저 그런 그림 중 하나였다.
“이게 네 과거다.”
흰돌이는 백호였다. 그 그저 그런 그림 속에서는.
“이제 확실히 알았겠지. 네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지.”
까마귀 서오의 말이었다.
망량이 보여 준 흰돌이의 과거. 서오의 말대로, 흰돌이는 단순한 그림 속 존재에 불과했다. 사신수 백호가 아니라.
다른 이가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흰돌이는 왠지 모르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게 진짜 자신의 과거가 맞는다는 사실을.
그 대답은 자신의 안에 있었다.
‘그런가…….’
생각해 보면 사신수 중 하나라고 하기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산속을 뛰어다니는 거대한 호랑이일 수 있었던 건 그림에 그렇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을 건강하게 해 주는 재주가 있는 건 그 그림을 그렸던 자가 그런 염원을 담아 그렸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계단을 뛰어오르고 숨이 차서 드러눕는 것 외에는.
흰돌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한테 이런 걸 알려 준 이유가 뭡니까?」
“전에도 묻지 않았습니까. 진짜가 되고 싶지 않냐고.”
「진짜……?」
“그렇습니다, 진짜.”
까마귀 서오가 흰돌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림 속에 그려진 주제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자칭이 아닌 진짜 사신수 백호가 되는 겁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가능해.”
그 보증을 하는 건 망량이었다.
“마침 자리가 비어 있거든. 네가 좋다면 서방을 담당하는 사신수, 백호가 될 수 있는 거야.”
「…….」
“아니,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겠지.”
망량이 흰돌이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때? 사신수의 일원이 되어 나를 돕지 않겠어?”
망량은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흰돌이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이는 모습을 본 서오가 흰돌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윽박지르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흰돌이와의 예상과 달리, 서오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도 당신과 같았습니다.”
「뭐……?」
“스스로 말할 능력도 없이 애매한, 영물이라 부르기도 민망했던 저를 지금의 저로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망량 님이십니다.”
까마귀 서오가 동굴 밖으로 날아갔다.
흰돌이가 서오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절벽 근처를 날아오르던 서오가 몸집을 거대하게 키웠다. 흰돌이를 납치할 때의 그 크기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서오의 깃털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깃털이 아니라…….’
붉게 물든 서오의 몸은 깃털의 색이 변한 것이 아니라, 불꽃으로 화한 것이었다. 서오의 몸에서 불티가 휘날렸다. 그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지금의 저는 사신수 중 하나인 주작의 힘을 지녔습니다.”
자랑스레 모습을 뽐낸 서오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탐나지 않습니까? 이 힘.”
「…….」
흰돌이는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진정한 주인을 섬기십시오.”
확실히 놀랍기는 했다.
이 망량이라는 자가 자신에게 저런 힘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구미가 당겨도 이상할 건 없었다.
반면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도율이 저런 힘을 줄 수 있을까?
도율은 그 개인은 두말할 것 없는 강자였지만, 그 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아래에서 자신은 덩치 큰 똥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망량의 아래에서라면, 사신수 중 하나가 되어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저 재수 없는 까마귀처럼 몸이 불꽃 같은 걸로 변하는 것도 멋있을 것 같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저들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너는 그림이라는 좁은 세상 안에서나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가짜에 불과하다고. 진짜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다면 이쪽에 붙으라고.
지금 넌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대협이라면.’
도율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큰 힘을 가지고 있어도, 반대로 보잘것없어도.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집이나 가자고.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필요 없습니다.」
“뭐……?”
서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흰돌이를 노려봤다. 망량 역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흰돌이는 콧방귀를 뀌고 답했다.
「남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나는 나고. 남이 그렇게 준다는 거 덥석 받아먹는 똥개는 아닙니다.」
흰돌이가 목을 가리켰다. 그곳엔 목줄이 있었다. 클레어와 도율이 펫숍에서 사다 준 가죽 목줄이었다.
「이래 봬도 주인 있는 개라서.」
망량이 씁쓸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러나 서오의 반응은 달랐다.
흰돌이의 뒤통수에 열기가 점점 더해졌다. 당당하게 말하긴 했지만, 왠지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이……. 감히…….”
무어라 완성된 말을 잇지 못하며 점점 뜨거워져 가는 와중. 흰돌이는 망량의 뒤로 숨으며 저것 좀 어떻게 말려 주면 안 되냐고 부탁해 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시건방진 놈이!”
새의 형상을 한 거대한 불꽃이 동굴을 덮치려는 순간.
“말 잘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번개 같은 섬광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대협!」
흰돌이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리고 동굴 바깥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뜨거운 열기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오냐.”
거기엔 거대한 까마귀의 목덜미를 붙잡고 뛰어오른 도율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 가자.”
그 말이 이토록 반갑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