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8
28화 당신이 필요한 이유
“이런 미친!”
던전 균열 너머로 백우섭과 이도율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공략대 리더 김대길의 외침이었다. 그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위험하게 균열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말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돌입! 당장 돌입해!”
김대길이 팔을 휘두르고 외쳤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멤버들이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그들의 리더를 바라봤다. 명령을 내린 리더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 본인이 직접 뛰었다.
하지만 탱커 포지션인 데다가 무거운 장비를 잔뜩 들고 있어 갑자기 속도를 내는 건 쉽지 않았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그가 발걸음 소리를 울렸다.
다른 이들도 반신반의하며 일단 따랐지만, 리더인 김대길보다 앞서 뛰는 이는 없었다. 그야 탱커도 없는 던전에 혼자 진입했다가 고립되면 자살 행위니까. 본래 던전 균열은 모두가 거의 동시에 입장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갑자기 왜……?”
“어라, 그러고 보니 백우섭은 어딨습니까?”
“쪽팔려서 튀었나? 파티장님, 이거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친구가 성격은 개차반이어도 막상 쌈은 또 잘하잖아.”
“설명할 시간……!”
김대길이 뭐라 말하려는 사이에 누군가가 팔을 뻗어 균열을 가리켰다.
“어? 닫힌다!”
그의 말대로 균열은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을 기다리며 흩뿌리던 귀기 서린 붉은 기운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균열을 통한 던전 입장이 불가능해진다.
그때 무리를 앞서나가 돌출되는 사람이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그 뒤를 이어 나부꼈다.
“클레어 씨!”
클레어가 던전으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균열이 입을 닫았다.
입장 인원 확정.
이제 바깥에서 입장할 방법은 없다. 남은 거라곤 바깥에서 안에 있는 인원들이 던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거나 실패해 몰살당하는 것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제길!”
김대길이 균열 위로 주먹을 내리쳤다.
* * *
“씨발… 씨바알…….”
던전에 들어온 백우섭은 같이 들어온 나는 안중에도 없이 혼자 욕을 지껄이며 서성였다.
“왜 그렇게 죽상이야?”
“뭐? 이 미친 새끼가…….”
백우섭은 질문을 하는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돌아봤다.
“지금 죽은 목숨이 되게 생겼는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하. 각성자도 아닌 놈이 던전에 대해 뭘 알겠냐…….”
백우섭의 말대로 던전에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저번에 게이트에 들어갔을 땐 시야가 탁 트인 언덕이었다. 게다가 주위에 몬스터들이 바글바글했다. 언덕 위에 지은 천수각의 최상층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으니 확실했다.
이번에 들어온 던전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원래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 건물 지하 감옥이라도 들어온 듯한 분위기였다. 벽면은 바위가 아니라 벽돌로 되어 있었다. 어딘가 인공적으로 지은 건축물 내부라는 뜻.
길은 넓었고 천장도 쉽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지만, 지하 특유의 퀘퀘한 습기가 느껴져 불쾌했다. 너무 난리를 피웠다간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분위기만 봐서는 그저 조용한 지하 감옥이었다. 당장 몬스터가 몰려올 낌새도 없고.
하지만 중요한 건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거다. 우리가 던전을 들어올 때 넘어온 균열은 일방 통행 전용인지 이곳에선 보이지 않았다. 클리어할 때까지 돌아갈 수 없다고 했던가?
“하, 어쩌다 이런 새끼한테 발목이 잡혀서…….”
백우섭이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째려봤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균열 근처로 날 끌고 간 건 백우섭이었다. 그것도 어설픈 연기까지 해 가며.
헌터들도 파티를 짜서 공략하러 오는 곳에, 백우섭은 나를 걷어차 집어넣으려 한 것이다. 심지어 다른 헌터도 없이 혼자. 영락없이 죽이려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후, 시발. 무기도 없고. 일단 급한 대로 몬스터에서 나오는 거라도…….”
백우섭이 혼자 중얼거리며 계획을 짜고 있었다.
“우섭아.”
“뭐?”
내가 이름을 부르자 백우섭은 이 새끼가 미쳤나 하는 얼굴로 돌아봤다.
“지금 네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야.”
백우섭은 잠시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굳어 있었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내 시선만 봐도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을 테니까.
시간을 들여 머릿속에서 의미를 곱씹은 후 백우섭이 험악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이 새끼가 진짜. 머리가 맛이 갔나?”
“우섭아,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백우섭이 어디 한번 지껄여 보라는 듯이 노려봤다.
“너, 나한테 한 대 맞았잖아. 근데 왜 정신을 못 차리는 거냐?”
“하.”
쪽팔렸던 기억을 되짚어 주자 백우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달아올랐다. 녀석은 허리에 손을 얹고 기가 찬다는 듯이 웃음을 내뱉고 순간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땐 내가 마력을 두르기 전이었고, 이 새꺄!”
헌터도 마력을 두르지 않으면 그렇게 폭발적으로 강하지는 않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저번에 손봐 준 납치범에게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헌터로서 활약하는 것과 각성자 사이의 활약에는 괴리가 존재한다고. 헌터라고 해서 하루 온 종일 긴장된 상태로 경계를 하진 않을 테니, 놈들은 이런 빈틈을 노리는 걸 전문으로 삼아 활동하는 거였나.
어쩌면 저쪽 세계와도 비슷한 일면이었다. 강자끼리의 비무라고 하면 듣기 좋지만, 그렇게 정정당당한 대결만이 존재하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뒤통수를 치고 독을 타고 자는 틈을 노리는 걸 조심하는 게 오래 살아남는 비결이었다.
그래.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구나.
턱.
나는 녀석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럼 이건?”
“어……?”
백우섭의 주먹에는 충분할 정도의 마력이 실려 있었다. 전력은 아닐지라도 일반인 취급하는 인간을 상대로는 충분한 위력을 담았으리라.
그러나 그 주먹은 지금 내 손바닥 하나에 가볍게 막혔다.
그 사실에 백우섭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공포가 서렸다. 이해할 수 없겠지. 마력 하나 두르지 않은 인간이 자신의 공격을 막았으니.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마음은 차분했다.
내 목숨을 노리는 자에게 분노하는 건 질린 지 오래다.
“이, 이럴 리가…….”
“백우섭.”
손가락을 세웠다.
“너희 길드에서 몰래 사람 쓰는 놈이 누구냐?”
내가 백우섭의 몸에 손가락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허공에서 붉은 균열이 나타나며 누군가 나타났다.
* * *
급하게 뛰어든 클레어는 관성에 저항하기 위해 발을 끌었다.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어둑한 지하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흙먼지가 걷히고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건 광채를 두른 클레어였다. 예의 그 희고 푸른 갑옷과 빛나는 검을 착용한 채로.
균열의 입장 시간은 아슬아슬했다. 누군가 더 도와주러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해 봤지만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는 잠시 서서 기다리더니 더는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인원은 이게 끝이군요.”
도율이 무언가 하려던 일을 멈추고 클레어를 바라봤다.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고했다.
“그러니 여기는 우리 둘이서 공략해야 합니다.”
평소보다 한층 진지한 클레어의 선언.
그 말에 반응한 건 백우섭이었다.
“헛소리 마! A급 던전을 우리 둘이서 어떻게……!”
“당신한테 한 말 아닙니다.”
물론 A급 던전을 백우섭과 둘이 클리어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현재 그는 장비도 없는 상태.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되는 짐짝에 가까운 처지였다.
클레어는 백우섭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다시 도율을 바라봤다.
그녀가 말하는 둘이라는 건 도율을 향해 하는 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보이는 것 이상의 잠재력을 숨기고 있었다. 그 가능성에 걸어 보는 게 차라리 나았다.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클레어가 목걸이 아티팩트를 조작했다. 도율과 나누는 대화의 소리와 모습이 백우섭에게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이제 와서 숨긴다고 해도 이미 늦은 것 같아 보였지만.
“던전은 게이트 때와 사정이 달라요. 등급이 같다고 해서 난이도가 비슷할 거라 생각하면 안 돼요. 던전 쪽이 훨씬 위험하니까요. 내가 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어요.”
그녀는 이 던전 공략이 쉽지 않으리란 걸 예고했다.
원래는 포지션별로 적합한 사람을 채워 차근차근 진행하는 게 공략이다. 그에 비해 이 상황은 상당한 이상 사태였다.
“원래는 기본적인 전략이나 작전에 대해서도 설명하면 좋겠지만……. 그건 포지션이 제대로 갖춰진 상황에서 유효한 것들이니, 임기응변으로 잘 해결할 수밖에 없어요. 질문 있나요?”
그러자 도율이 물었다.
“왜 왔어요?”
“그게 지금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할 말인가요?”
“잘못하면 죽는다면서요.”
“그럼 당신 혼자 죽게 내버려 둬요?”
“정 안되겠다 싶으면 어쩔 수 없죠.”
자기 얘기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도율의 태도에 클레어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그럼 입장 바꿔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으면 당신은 안 구하러 왔을 거예요?”
“그야… 왔겠죠.”
“거봐요.”
클레어가 만족스럽게 턱을 치켜들고 웃었다. 이 남자에게 말로 한 방 먹여 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증명하듯 도율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저랑 클레어 씨는 입장이 다르죠. 저한테 있어서 클레어 씨는 도은이의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다니, 뭐가요?”
“도은이를 치료하기 위해 클레어 씨가 나를 필요로 할 이유는 없지 않냐고요.”
“그, 그건…….”
도은이 병에 걸리고, 치료를 위해 S급 마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을 때 도율은 없었다. 다시 말해 마석을 구하기 위해 이도율이라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다.
도율이 갑자기 나타났을 땐 당황했다. 걸리적거리는 부산물로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계속 사라져 있어 줬으면 속이 편했을 텐데. 얼떨결에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됐다.
도율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렇지는…….”
“틀렸어요?”
하지만 그런 도율이 도움이 되지 않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가 없던 시절의 생활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율이 반드시 필요한 거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단순히 이전으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전 그대로.
그래도 되는 걸까?
아직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열이 받았다. 목숨 걸고 도와주러 왔더니 왜 이런 말이나 들어야 하지? 또 이 인간이 일 벌린 것 때문에 자신만 전전긍긍해야 하나?
클레어가 고개를 확 들었다.
“그럼 내가 꼭 필요한 인간만 구하러 오는, 그런 사람이란 뜻인가요? 나한테 필요 없는 사람이면 죽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고?”
“무모하게 굴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모?! 여태까지 무모하게 군 인간이 누군데!”
클레어가 도율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맨날 사람 가슴 졸이게 해 놓고서 자기만 뻔뻔하게 빠져나가는 게 취미죠? 아주 잘나셨네요.”
“저기…….”
“혹시 뭐, 이번에도 다 방법이 있었던 거예요? 아, 그러시겠죠. 잘나신 이도율 씨께서 다 생각이 있으셔서 여유롭게 행동한 건데, 또 나만 호들갑 떨었죠?”
“아니…….”
“이럴 거면 그냥 혼자서 다 해요! 남의 엉덩이 뒤에 숨어서 힘 숨기지 말고, 혼자 던전 돌고 마석도 구하고 다 알아서 하라고요!”
클레어가 도율의 가슴을 계속 찌르며 몰아붙였다. 도율은 양손을 펼치고 몸을 뒤로 내뺐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따라붙었다. 결국 벽에 등이 닿는 순간까지 왔다.
“…아.”
한차례 말을 쏟아낸 클레어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남한테 이토록 정신없이 쏘아붙인 건 생전 처음이었다.
게다가 도율을 벽으로 밀어 넣고 잡아먹을 듯이 달라붙은 상태였다. 숨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 어느 한쪽이 갑주를 입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옷 위로 서로의 피부를 맞대고 있었을 법도 했다.
갖가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클레어는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나가려면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고 했죠?”
“…그래요.”
도율이 목을 주물렀다.
“알겠습니다. 그럼 보여 주죠.”
“뭐를요.”
클레어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도율은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듯이 던전의 통로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필요한 이유.”
그의 시선 끝에 길게 이어진 어둠이 늘어졌다.